#184.
장승일 실장이 회의 전에 콜린스의 매출에 대해서 브리핑을 했기 때문이다. 특히 누적 판매 대수가 무려 6만 대를 돌파하면서 2,400억이 넘는 매출이 나왔다는 것에 입을 다물지 못했다.
이 자리에 참석한 오영근 사장은 표정 관리를 한다고 정신이 없었다.
최용욱 회장은 마치 친한 친구처럼 친근하게 오영근 사장을 대했다.
[오 사장, 올해 오디오 사업부 매출만 작년과 비교해서 150% 가까이 늘었다고 했지?]
[콜린스 매출 때문입니다. 콜린스 안에 들어가는 스피커 매출이 급격하게 늘어나면서 오디오 사업부 매출에도 큰 영향을 줬습니다.]
[그렇지. 콜린스.]
최용욱 회장은 신바람이 났다. 쑥쑥 증가하는 콜린스의 매출이 KM 전자 전체 매출을 다 끌어올렸다. 경영 성과가 이렇게 통쾌하기는 또 처음이다.
하지만 최용욱 회장이 KM 계열사 사장을 바라보는 눈초리는 전혀 달랐다. 그는 책상을 주먹으로 쾅 내리치면서 무서운 시선으로 그들을 한 번 쳐다보았다.
[아직도 정신 못 차렸지? 아니, 어떻게 KM 전자와 거래를 끊을 수가 있어? 그것 때문에 너희 계열사의 손실이 얼마인지 알아? 너희 당장 그 자리에서 쫓겨나고 싶어?]
최문경 부회장은 달아올라 있는 최용욱 회장의 눈치를 봤다. 장승일 실장의 브리핑 때문에 최용욱 회장이 단단히 열받아 있는 것을 보자 휴식 시간을 제안했다.
장승일 실장도 흥분한 최용욱 회장을 보고는 슬그머니 동조하고 말았다.
‘20분이라도 쉬면 흥분이 가라앉겠지.’
***
노익장을 과시하는 최용욱 회장의 태도는 한창 젊은 시절 못지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요즘 KM 전자 행보에 관심을 기울이는 이들이 하나같이 최용욱 회장의 경영 수완에 감탄했다.
최훈열 전무를 끌어내리고, 최민혁 실장을 KM 전자에 꽂은 것 때문이다.
이 일의 배후도 이전과는 달리 요즘은 최용욱 회장이라는 이야기가 파다하게 나왔다.
실제로 최용욱 회장은 최민혁에게 증여를 통해서 KM 전자 지분을 다 넘겼다. 최민혁을 오너로 만들어서 책임경영을 시킨 셈이다.
그래서 지금은 그가 최민혁의 배후에서 KM 전자 경영의 정상화를 이룩했다고 보는 사람도 많았다.
이런 분위기로 사태가 흘러간 것은 최민혁이 암묵적으로 KM 전자를 내버려두는 것을 뛰어넘어서 최용욱 회장을 밀어주었기 때문이다.
최용욱 회장이 나름 자신을 도와준다는 것을 알자 한 조치였다.
다만 오늘 KM 계열사의 사장단 회의는 지난번과 비교해도 그 열기가 너무 뜨거웠다.
오영근 사장은 부담을 느끼자 최민혁에게 전화를 걸어서 사장단 분위기를 설명해 주었다.
[···솔직히 우리 KM 전자는 이미 계열 분리가 된 마당인데, 회장님 지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나왔어. 그런데 회장님이 너무 우리 KM 전자를 띄우는 상황이라서 골치가 아파.]
최민혁은 최근 오성 전자의 행보 때문에 최용욱 회장이 단단히 열받았다는 것을 눈치챘다.
‘내막을 잘 몰라도 돌아가는 분위기만 보면 첫째 큰아버지가 딴짓한다는 것 정도는 눈치챘을 거야. 그러면 열받지.’
최문경 부회장의 행동은 적과 동침이나 마찬가지다.
더욱이 KM 전자가 막 경영 정상화되는 상황에서 뒤통수를 치는 상황이다.
최용욱 회장이 분노하는 게 당연했다.
최민혁은 예상을 벗어난 전개에 혀를 내둘렀다.
[그냥 편하게 하세요. 오 사장님이 늘 하고 싶은 대로 말하고, 할아버지에게 적당히 말도 잘하고 그러세요. 계열 분리가 되었다고 해도 KM 전자가 KM 그룹 소속이라는 것은 바뀌지 않은 사실입니다.]
오영근 사장도 잠깐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잘 알겠네. 그런데 최 실장 자네도 KM 전자가 아니라 KM 그룹 전체 경영 승계를 노리는 건가?]
[아, 그거 말입니까?]
사실 최민혁은 KM 그룹에 관심이 없었다. 최문경 부회장을 밟아버리는 것이 최종 목적이니까. 그런 면에서 본다면 최문경 부회장 영향력을 줄일 수 있는 그룹 후계자 자리도 나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하죠.]
KM 그룹 후계자 자리를 무슨 장난삼아서 하는 말에 오영근 사장도 혀를 찼다.
[무슨 대답이 그래?]
[후계자 지위 노리는 것 맞습니다. 정말 간절히 원하고 있습니다. 그런 점을 고려해서 사장님이 나서 주면 좋을 듯합니다.]
[···알겠네.]
***
오영근 사장도 솔직히 최민혁의 의도를 잘 몰랐지만, 이번 사장단 회의에서 갑자기 바뀐 최용욱 회장 행동에 적극 대응했다.
아부도 좀 하고, 최용욱 회장 편도 들어주었다.
놀라운 것은 최용욱 회장이 마치 오영근 사장이 자신의 최측근인 양 대우한다는 점이다.
KM 계열사와 KM 전자의 거래에 제동을 걸어서 최용욱 회장의 따가운 눈총을 받은 최문경 부회장은 오영근 사장의 행동에 이를 악물었다.
그는 다시 시작된 사장단 회의에서 주도권을 잡기 위해 나섰다.
[회장님, KM 전자와 다른 계열사 거래량이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단순히······.]
오영근 사장 때문에 입가에 미소한 최용욱 회장은 마치 광견처럼 최문경 부회장을 씹어댔다.
[부회장은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해? 넌 정말 부회장이 맞기는 한 거야? KM 그룹 전체 경영을 책임진 놈이 어떻게 그따위로 말할 수가 있어?]
[아, 아니, 제 말은 우리 KM 산업만 해도 KM 전자와 직접 관련이······.]
[닥쳐!!!]
쩌렁쩌렁한 소리.
최용욱 회장이 사장단 회의에서 전혀 보이지 않던 모습이었다.
생소한 아버지 태도에 가슴이 철렁한 최문경 부회장은 입술을 깨문 채 최용욱 회장의 눈치만 봤다.
다행히 계열사 사장의 시선을 의식해서 최용욱 회장도 심하게 최문경 부회장을 질책하지 않았다. 대신 한쪽에서 흐뭇하게 웃고 있는 최동영 상무를 쳐다보았다.
[그리고 도대체 건설은 뭐 하는 거야? 불성실한 감리로 경고를 받았다니.]
부산에 신축한 중형 아파트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다. 관련 건축사 사무소에서 KM 건설에 로비했는데, 이 과정에서 현장 조사를 제대로 하지 않은 것 때문에 경고를 받은 것이었다.
그나마 업무 정지를 받지 않은 것만으로 다행이었다.
실상 건설업계에 관행처럼 이루어지는 일이라서 심각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최용욱 회장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KM 전자의 콜린스를 봐. 어디 불량 한 개라도 나오나. 고객이 뭐라고 하는지 알아? 이제까지 문제가 된 제품 단 하나도 본 적이 없어. 심지어 사소한 이슈만 제기해도 당장 제품을 교체해 줘! 이런 것을 보면서도 느끼는 것이 없어?]
[······.]
최동영 상무는 노골적인 아버지의 행동에 그저 고개만 조아렸다.
하지만 최용욱 회장은 여기서 끝내지 않았다. 그는 옆에 서 있는 장승일 실장에게서 서류를 받아서 쭉 살피더니 차갑게 말했다.
[호찌민 고속도로 건설을 우원 건설과 컨소시엄으로 들어간다는 사업은 제대로 확인한 거야?]
KM 건설 사장은 마른침을 꿀꺽 삼킨 채 이번 일을 전담하는 최동영 상무를 쳐다보았다. 자신이 나서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았다.
최동영 상무가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비록 우원 건설 상태가 좋지 않지만 지난달에 한부 그룹에서 인수했습니다. 한부 그룹 지원을 받아서 고속 도로, 대형 수력 발전소 프로젝트를 무난하게 진행 중입니다.]
[지금 한부 그룹을 믿고, 우원 건설에 대해서는 제대로 확인하지 않았다는 소리야?]
[한부 그룹이 비록 말이 많기는 하지만 그래도 대기업입니다. 따라서······.]
[그걸 어떻게 장담해? 넌 한부 그룹의 재정 상태를 제대로 확인하고 그런 소리를 하는 거야?]
[하, 하지만 한부 그룹이 위험해지는 것은 상상할 수가 없······.]
[아니, 이번 컨소시엄은 그냥 없던 걸로 해. 정 하고 싶으면 우원 건설과 한부 그룹에 관한 추가 조사를 진행해서 내 허락을 받아!]
[······?]
눈치 빠른 최동영 상무는 굳이 최용욱 회장에게 반발하지 않았다.
그는 뒤늦게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옆에서 보고 있던 장승일 기획조정실 실장이 슬그머니 도와주었다.
[해외 차입금 프로젝트가 중단되기는 했지만, 최민혁 실장님의 반대도 있고 해서 내부적으로 많은 조사를 진행했습니다. 그중에 롤 모델로 꼽은 업체가 한부 그룹인데, 지금 사정이 아주 안 좋습니다. 제가 조사한 관련 서류를 보낼 테니, 그걸 참조해 주십시오.]
[아, 알겠습니다.]
또 최민혁 이야기가 나오자 최동영 상무는 자존심이 상해서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멍청한 최문경 부회장처럼 나대지는 않았다.
최용욱 회장은 그나마 최동영 상무를 질책하지 않았다.
이어진 것은 KM 전자의 경영 성과에 대한 격찬이었다.
오영근 사장은 그저 왕의 충신이라도 된 것처럼 최용욱 회장에게 고개만 숙인 채 맞춤형 대답을 적나라하게 늘어놓았다.
고개를 숙인 KM 그룹 계열사 사장은 차마 얼굴을 들지 못했다.
실상 콜린스 초대박은 신화나 마찬가지다. 10대 대기업을 비롯한 그 어떤 기업도 이런 대박을 터트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최문경 부회장이 보다 못해서 나섰다.
[회장님, 이번 오성 전자의 위성 사업 관련 대응 때문에 KM 전자 손실도 만만치······.]
오영근 사장이 이미 최민혁의 진심을 들었기에 적극 나섰다.
[그 일은 이일태 이사가 책임진 일입니다. 최민혁 실장이 뒤늦게 확인하면서 미처 간과한 문제입니다.]
[···그렇습니까?]
막상 이일태 이사 이야기가 나오자 최문경 부회장은 입을 다물고 말았다.
이야기를 더 해봐야 이일태 이사에게 불똥이 튈 것이 분명했다.
최용욱 회장은 최민혁에게 책임을 묻는 최문경 부회장을 무서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문경아, 더 날 실망하게 하지 마.]
[아, 알겠습니다.]
섬뜩한 아버지 눈빛에 꼬리를 만 최문경 부회장은 차마 얼굴을 들지 못했다.
최용욱 회장은 그제야 KM 계열사 사장을 일일이 보면서 소리쳤다.
[여기 아직도 KM 전자와 우리 KM 그룹이 분리되었다고 생각하는 놈들은 없겠지? 그러면 지난주에 KM 계열사 주가가 20% 가까이 상승한 이유는 뭐라고 생각해? 그게 다 콜린스 매출 때문이잖아! 너희들도 마찬가지야. 정 억울하면 KM 전자 가서 살려 달라고 해. 만약 제대로 된 성과가 없다면, 다음은 없을 테니까!]
[···네.]
최문경 부회장은 한쪽에서 시선을 피하는 오영근 사장과 장승일 실장을 째려봤다.
오늘 사장단 회의에 앞선 브리핑에서 KM 전자의 매출 변화와 KM 그룹 계열사 간의 관계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기 때문이다.
KM 전자가 비록 계열 분리가 되기는 했지만, KM 그룹과 전혀 무관한 것은 아니었다.
매출 역시 대부분 끊어졌지만 최근 와서는 조금씩 관련을 다시 맺고 있었다.
정확히는 다른 회사와 비교해서 별반 다르지 않았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KM 계열사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오영근 사장이 사장단 회의에 참석한 이유다.
그리고 최용욱 회장 처지에서 손자인 최민혁을 분리해서 생각할 리가 없었다.
더욱이 건강을 회복한 최용욱 회장은 그 어느 때보다 노익장을 과시했다.
[다음 사장단 회의에서 명확한 결과를 내놓지 못한 놈은 그 자리를 지킬 생각 마. 알아서 자리에서 물러나든지 하란 말이야. 아니면 KM 전자를 찾아가서 도움을 부탁해!]
[···네.]
침울했던 사장단 회의는 그 어느 때보다 살벌하게 끝이 났다.
KM 전자와 비교가 된 KM 계열사 사장은 다들 얼굴을 들지 못했다. 그들도 처음에는 KM 전자를 시기하고, 질투도 했다. 하지만 이제는 다들 두 손 두 발을 다 들었다.
최문경 부회장 역시 평소와는 달리 자신을 공격하는 아버지의 태도에 고개를 갸웃했다.
‘설마 오성 전자가 위성 사업 쪽에 손을 댄 일이 나 때문에 일어났다고 생각하는 건가? 하, 환장하겠네.’
***
최문경 부회장은 사장단 회의를 나오는 중에 특히 자기 측근에 있는 이들이 다가오자 피곤해서 일단 시선을 피했다.
“부회장님, 잠깐 이야기를 했으면 합니다.”
“오늘은 제가 좀 피곤합니다.”
“오늘 보셨지 않습니까. 회장님이 지금 난리인데, 뭔가 대응을 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대응하기는 뭘 대응합니까. 아직 회장님이 과반수의 지분을 가진 것을 알지 않습니까?”
“하, 하지만 이미 부회장님이 경영 승계를 받는 것으로 알고······.”
“나중에 이야기합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