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183화 (183/1,021)

#183.

다들 영문을 몰라서 고개를 갸웃했다.

오성 전자가 한 짓이 이일태 이사를 노린 것인지, 아니면 최민혁 실장이 뒤에서 오성 전자를 선동질한 것인지 말이다.

‘설마 아니겠지?’

그런데 오성 전자의 행동을 보면 KM 전자에 대한 보복 성격이 강했다. 오혜정 비서와 이창명 이사의 일을 다들 알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이일태 이사 때문에 열받은 최 실장님이 아마 위성 사업을 원점에서 재검토하는 것 같아. 아직 조성돈 팀장님조차······.”

“좋은 아침.”

다행히 조성돈 팀장이 평소처럼 나타났다. 그는 모여 있는 팀원에게 가볍게 눈인사를 하면서 지나가려고 하다가 뒤늦게 박상기 차장에게서 정성근 대리의 이야기를 들었다.

“허훈 과장? 아, 그 친구.”

“위성 사업 쪽에는 최 실장님도 관심이 없지 않았습니까?”

“이제까지는 그랬죠.”

조성돈 팀장은 당연히 최민혁의 일을 많이 알고 있었다. 워낙에 민감한 일이라서 아직 기획 팀에도 제대로 알리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저 이일태 이사만을 죽이려고 작업하는 줄 알았다.

그런데 현재까지 진행된 일의 결과는 그것과는 또 달랐다.

스케일이 너무 커졌다.

‘이젠 이일태 이사만의 문제가 아니야.’

입이 무거운 조성돈 팀장은 최민혁 실장의 행보에 대해서 쉽게 입을 열지 않았다.

박상기 차장은 정성근 대리 통해서 이일태 이사의 사정을 눈치를 챘다.

“결국 위성 사업부가 걱정하는 것은 디지털 위성방송 수신기에 대한 공동표준규격 때문이니까. 오성 전자가 이걸 빌미로 우리를 공격하는 겁니까?”

“저도 업체끼리 말이 나와서 그렇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뿐입니다. 특히 오성 전자가 깽판을 치면서 LC 전자가 발끈한 것으로 압니다.”

오성 전자가 별도로 수신기를 개발한 것은 이미 언론을 통해 여러 번 나왔던 이야기다. 문제는 이 일이 어느 정도 사실이라는 점이다.

오성 전자의 이런 행동은 ETRI 내의 회의에서도 말이 계속 나왔다.

상습적으로 약속을 어긴 오성 전자에 대한 협력업체의 불만은 하늘을 찔렀다.

“단지 그뿐입니까?”

조성돈 팀장은 턱을 쓰다듬으면서 눈살을 찌푸렸다.

조용한 침묵.

아침부터 모인 기획 팀 직원은 뒤늦게 정성근 대리에게서 이야기를 듣고 나서는 조성돈 팀장의 입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그들 역시 이일태 이사와 최민혁 대리 사이에서 일어난 갈등을 알고는 있었다.

박상기 차장이 다른 기획 팀을 대표해서 나섰다.

“저기 조 팀장님.”

골치 아픈 일이라서 조성돈 팀장도 슬쩍 주제를 피해 갔다.

“아, 제가 추후 따로 이야기할 겁니다. 아직 명확한 상황이 없어서요. 다만 위성 사업부 쪽에 대해서는 가능하면 입을 다물어 주세요. 허훈 과장 같은 친구가 달라붙어도 모른다고 말하기만 하면 됩니다.”

“···알겠습니다.”

***

최민혁은 ETRI 내부의 움직임을 확인하면서 묵묵히 기다렸다. 비록 그가 위성 방송 시스템에 대한 정답을 줬다고 해도 확인은 필요하기 때문이다.

다만 자신의 제안서를 검토한 오현종 팀장이나 김승구 박사는 긍정적인 답을 보내 왔다.

‘이제 기다리기만 하면 되겠군.’

여유가 생기자 기획 팀을 비롯한 다른 팀을 확인하러 나섰다.

그런데 기획 팀 입구에서 초조한 표정을 짓고 있는 허훈 과장을 발견했다.

“거기서 뭐 합니까?”

“······!”

허훈 과장은 누군가 싶어서 얼굴을 확인하고서야 최민혁이라는 것을 알자 마치 경기한 강아지처럼 화들짝 놀랐다.

최민혁은 몰래 커닝하다가 들킨 수험생 같은 허훈 과장의 행동에 혀를 찼다.

“아니, 도대체 무슨 잘못을 했기에 그런 반응을 보이는 겁니까?”

“아, 아닙니다. 너무 갑작스러워서 놀랐을 뿐입니다. 전 이만······.”

“잠깐. 허훈 과장 맞죠?”

“네? 마, 맞습니다.”

허훈 과장은 최민혁이 자기 이름을 알고 있자 화들짝 놀랐다.

기획실이나 영업 팀이라면 이름을 알 수도 있다.

그런데 자신은 위성사업부, 즉 이일태 이사 쪽에 속해 있었다.

최민혁이 자기 이름을 안다는 것은 평범한 일이 아니었다.

최민혁은 의미심장한 눈으로, 당황한 허훈 과장을 이리저리 살폈다.

그런데 때마침 끼어든 이가 있었다. 허훈 과장이 계속 귀찮게 전화해서 불러낸 정성근 대리였다.

“실장님이 최근 ETRI 쪽 담당자를 만난 것 때문입니다.”

최민혁은 피식 웃으면서 턱짓으로 정성근 대리에게 계속 말해보란 신호를 줬다. 허훈 과장은 창백한 얼굴을 한 채 정성근 대리에게 입을 열지 말라고 계속 경고했다.

하지만 정성근 대리는 전혀 그 의미를 모르는 사람처럼 허훈 과장이 궁금해하는 것을 털어놓았다.

최민혁은 그제야 고개를 끄덕였다.

“아, 생각해 보니 오성 전자의 행보가 위성사업부에 문제가 되겠군요. 그런데 이일태 이사는 왜 이사회에서 아무런 보고를 안 한 겁니까?”

“그, 그게······.”

당황한 허훈 과장은 계속 말을 더듬었다. 이번 경우는 긁어서 제대로 부스럼을 낸 경우다. 최민혁도 굳이 이번 일을 이사회에 알려 분란을 일으킬 생각은 없었으니까.

“이렇게 중요한 일을 고작 밑에 사람 통해서 처리하려고 한 사실이 놀랍군요. 허훈 과장은 이만 가봐요.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저, 저기 실장님, 제가 정 대리를 만난 것은 그런 일 때문이 아닙니다.”

“그러면 무엇 때문입니까?”

“그, 그게······.”

식은땀마저 흘린 허훈 과장은 몇 번이나 변명하다가 결국 고개를 숙인 채 돌아서고 말았다. 그는 그런 중에도 순둥이처럼 눈만 껌뻑거리는 정성근 대리의 얼굴을 보면서 이를 악물었다.

‘저 새끼 때문에 돌겠네.’

***

갑작스럽게 열린 이사회에서 문형섭 부사장은 불만부터 토로했다.

“굳이 콜린스 매출이 급격히 늘어나고 있다는 것으로 이사회를 열 필요가 있나?”

최민혁은 어깨를 으쓱한 채 긴장으로 굳어 있는 이일태 이사를 쳐다보았다.

“그래도 돌아가는 상황은 보고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국내 출시는 완판으로 결과가 나쁘지 않았고, 현재까지 추가로 유럽에 공급한 1만 대까지 합치면 대략 6만 대 정도 팔려 나갔습니다.”

이런저런 말이 나왔음에도 콜린스의 국내 정식 판매가 시작되면서 콜린스 매출은 서서히 늘어가기 시작했다.

무려 2,400억이 넘는 매출액이었다.

하지만 최민혁이 내놓은 자료를 보면 현금 흐름이 양호하다는 점이다.

KM 전자는 판매 자체를 각 나라의 직영점을 통해서 넘겼는데, 대다수는 KM 전자에 일방적으로 유리했던 것이었다.

그러니 단순 매출 2,400억이라도 여러 가지 이익 측면에서 보면 기존 TV 판매와는 질적인 차이가 아주 컸다.

오영근 사장조차 콜린스 영업 이익을 비롯한 다양한 자료를 확인하면서 혀를 내둘렀다. 한국 제조업 순이익률과 비교해 보면 무려 수십 배 이상이었다.

‘절대로 손해는 안 보고 파는구나.’

문형섭 부사장은 이미 언론을 통해서 다 아는 사실이라서 툴툴거렸다.

“최 실장, 이미 다 아는 사실이잖아. 새삼 이사회 통해서 이런 보고는 할 필요는 없어.”

“그렇습니까? 하지만 이전 회의에서 이일태 이사가 한 주장도 일리가 있어서 나름 거기에 맞춘 겁니다. 그리고 이번에는 이일태 이사의 이야기도 들어보고 싶습니다.”

“네?”

“이번에 오성 전자에서 공동 표준으로 내놓은 디코드 말입니다. 그거 ETRI의 박재호 실장이 손을 들어준 것으로 알아요. LC 전자나 대운 전자 역시 타협을 했습니다. 문제는 이들 제안서가 우리 위성 사업부 쪽에서 진행하는 결과와 맞지 않은 것으로 압니다!”

정확히는 ETRI 측에서 오성 전자와 몰래 손을 맞추어서 일부 표준 내용을 바꾸었다. 이 작업 자체도 오성 전자가 몰래 진행하던 일이다.

그들은 ETRI 내의 친오성 라인 연구원과 손을 잡고 몰래 이 일을 진행하다가 뒤통수를 친 것이었다.

LC 전자나 대운 전자와 같은 대기업은 수정할 부분이 많지 않았다.

하지만 KM 전자를 비롯한 몇몇 중견 기업은 이야기가 달랐다. 그들은 기존에 하던 작업에서 20~30% 이상 바꾸어야 했다.

최민혁은 김승구 팀장을 통해서 관련 자료를 받았는데, 그걸 이사회에서 폭로했다.

“이대로라면 지금까지 했던 작업을 다 엎고 다 새로 해야 할 판입니다. 위성 사업부에서 한 모든 일이 다 도루묵이 된 겁니다. 이일태 이사님은 도대체 지금까지 뭘 하고 있었던 겁니까?”

“그, 그럴 리가 없습니다. 지금 ETRI 측과 다시 협의하고······.”

하지만 자료를 본 오영근 사장이나 문형섭 부사장은 눈살을 찌푸렸다. ETRI의 김승구 팀장이 보내온 자료는 생각보다는 더 심각했다.

위성 사업부에 진행한 프로젝트를 완전히 배제하는 것이었으니까.

이건 최민혁 이야기와는 전혀 다른 문제였다.

“이 이사, 이, 이게 사실인가?”

“아, 아닙니다. 그럴 리가 있습니까. 설마 오성 전자가 우리 KM 전자를 죽이려고 이런 짓을 했겠습니까. 이거 언론에 나면 오성 전자도 타격이 큽니다!”

최민혁은 다시 빈정거렸다.

“그거야 위성 방송 효율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하면 어떻게 할 겁니까. 그리고 그 손해를 본 중견 기업 말인데, 이미 다른 오성 계열사 통해서 손실을 보상받은 것으로 압니다만?”

“마, 맙소사.”

이일태 이사는 그제야 다른 협력업체에서 자기 전화를 피했던 이유를 떠올렸다. 그 역시 대안을 찾기 위해서 이번 위성 사업에 낀 다른 중견 업체에 연락을 취해 봤는데, 그 자신을 피한 것을 떠올렸다.

최민혁은 힐끗 이사회의 분위기를 살폈다. 이전과는 달리 오영근 사장의 표정도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이번 일은 그냥 쉽게 넘어갈 수가 없었다.

최민혁은 히죽 웃으면서 이일태 이사를 더 공격하지 않았다.

***

이일태 이사는 이사회가 끝나자 이석우 부장을 불러 이 문제를 협의했다. 하지만 대안을 쉽게 찾을 수가 없었다.

이번 위성 사업과 관련된 협력업체는 하나같이 연락을 피했다.

심지어 권재홍 그룹 비서실장도 아예 전화를 받지 않았다.

허훈 과장은 자기가 입을 잘못 놀린 것 때문에 사태가 심각해졌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 사실을 말할 수는 없었다.

위성 사업부 분위기는 날이 갈수록 흉흉해질 수밖에 없었다.

TV 사업부를 비롯한 KM 전자의 모든 사업부는 콜린스 때문에 정신이 없는데, 정작 위성 사업부는 회사에 큰 손실을 입혔기 때문이다.

뒤늦게야 이 사태에 최민혁 실장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정확한 내막까지는 아는 이들은 없었다.

결국 위성 사업부의 존폐 이야기도 서서히 나오기 시작했다.

공포에 질린 이일태 이사는 벼랑 끝에 섰다는 것을 깨닫자 결국 KM 그룹 본사의 최문경 부회장을 직접 찾아갔다.

최문경 부회장은 이런 KM 전자 내부의 움직임을 알지는 못했다. 정확히는 최용욱 회장이 다시 경영 일선에 나서면서 그럴 수가 없었다. 특히 사장단 회의에 빼놓지 않고 나타났던 것이다.

[이번 도시바와 반도체 패키징 기술 협상을 통해서 추가로 로열티를 지급하지 않고도 큰 이익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서 앞으로 3년간 600억 이상을 절감할 수 있습니다.]

사장단 회의를 발표하는 최문경 부회장은 다른 사장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최근 KM 전자에 몰려드는 벌레들의 뒷정리를 하다가 KM 그룹 경영성과에 불만을 품어서 사장단 회의에 참석한 최용욱 회장 표정이 그다지 좋지가 않았다.

KM 정공 사장은 식은땀을 흘리면서 다음 순서로 나섰다.

[자체 금형 기술 덕분에 카메라 렌즈와 후드 품질을 향상시킬 수 있었고, 니콘을 비롯한 일본 업체에 거꾸로 수출을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카메라 부품 시장을 장악한 것이 일본 업체라는 점을 고려하면 이익보다는 상징적인 의미가 강했다.

최용욱 회장은 여기에 딴죽을 걸었다.

[이봐, 김 사장. 일본에 수출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이 없잖아. KM 정공 매출은 작년과 비교하면 오히려 줄었어!]

[그건 일본 업체의 카메라 매출이 격감하면서 일어난 일입니다.]

[아니, 그러면 일본 업체가 망하면 KM 정공은 망해야 한다는 소리잖아. 사전에 다른 대안을 찾아야 할 것 아냐! KM 전자를 봐. 디지털 TV로 바뀐다고 말을 하지만 콜린스 통해서 대혁신을 이룩했잖아. 너는 이제까지 뭘 한 거야?]

[······.]

KM 정공 사장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얼굴을 들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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