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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민혁이 위성 방송 사업을 가지고 사전 정지 작업을 하는 동안에도 KM 전자 내부는 콜린스 때문에 정신없는 시간을 보냈다.
그나마 좋은 일이라면 오성 전자와 같은 대기업의 압박이 없다는 점이다.
설사 외부 방해가 없다고 해도 국내 영업 팀은 국내 콜린스 정식 출시 때문에 주말도 반납한 채 죽어라고 일했다.
김경환 차장은 요즘 국내 대리점에서 걸려오는 전화 때문에 미칠 지경이었다.
바로 국내 대리점의 변화로 일어난 대리점 시장의 적극적인 변화다.
최근 가전제품 대리점 매장이 점점 대형화되면서 취급 품목 자체가 대형 TV, 대형 냉장고를 중심으로 한 제품이 전시된다.
이들 대리점은 결국 LC 전자를 비롯한 가전 3사와 손을 잡고 특정 아이템을 전문적으로 취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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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대리점의 행동은 가전 3사의 전략과도 잘 맞아 들어갔다.
LC 전자만 해도 매장 면적이 60평 이상인 대리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혜택을 부여했고, 공격적인 프로모션 때문에 중견 업체는 큰 타격을 받았다.
서울 강남구에 소재한 미래 대리점을 운영하는 강주옥 사장은 이런 변화를 이용해서 KM 전자 본사 영업실까지 찾아와 김경환 차장을 괴롭혔다.
“김 차장님, 정말 실망입니다. 이제까지 우리 미래 대리점이 KM 전자 제품을 중점적으로 밀어준 것을 잊은 겁니까?”
영업 팀 이승환 대리가 커피를 조심스럽게 놓고서 김경환 차장 옆에 앉아서 눈치를 봤다. 그 역시 강주옥 사장에게 휘둘린 일을 떠올렸다.
드센 강주옥 사장을 상대하기 싫어서 영업 팀 내에서도 폭탄 돌리기까지 했다.
피부색이 검어서 마치 흑인 같은 김경환 차장은 식은땀을 흘렸다. KM 전자 대리점 관리는 그에게도 매우 중요했다.
매출도 매출이지만 대리점의 위치 때문에 광고 효과도 만만치 않았다.
전자 제품 신모델이 나오면 실제로 소비자에게 직접 사용해서 구매를 독촉하는 것뿐만 아니라 입소문까지 기대할 수 있었다.
이 영업망은 실소유주를 통해 참조하는 귀중한 정보라 영업 팀에서도 무시하지 못했다.
“강 사장님은 이미 LC 전자 가전제품을 지난달에 대량으로 납품받은 것으로 압니다. 당장 현금 여력이 있습니까?”
살짝 눈살을 찌푸린 강주옥 사장은 평소보다 목소리를 더 높였다.
“김 차장님은 정말 이상한 말을 하십니다. 아니, 우리가 LC 전자 제품을 받고 안 받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현금 박치기하겠다는데, 왜 아직 콜린스 계약을 하지 않는 겁니까?”
김경환 차장은 가끔 미친놈처럼 발끈하는 강주옥 사장을 몇 년 동안 경험해 봤기 때문에, 그의 표정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이미 말씀드렸지 않습니까.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물량 때문에 국내로 돌릴 여력이 안 됩니다.”
이승환 대리가 슬쩍 김경환 차장에게 메모 내용을 보여주었다.
[국내 물량 준비가 끝났습니다!]
움찔 몸을 떤 김경환 차장은 표정 관리를 하면서 강주옥 사장을 쳐다보았다.
“으음, 강남구뿐만 아니라 서초동, 부산시, 경기도 일산을 비롯한 전국 대리점 물량도 같이 고민하고 있습니다. 조금만 더 기다려 주십시오.”
감이 빠른 강주옥 사장은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하하, 제가 조금 전에 한 말은 사과드리겠습니다. 요즘 손님들이 워낙에 콜린스를 찾다 보니, 제가 지나쳤습니다.”
끓는 온탕과 냉탕 모습을 교대로 보여준 강주옥 사장의 모습에 김경환 차장은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더러워도 참았다.
성질 더럽기로 유명한 강주옥 사장이 이 정도면 양호했다.
“제가 다시 사과드리겠습니다. 하지만 이번 콜린스를 계기로 해서 우리 대리점에 LC 전자 물품을 밀어내고, 콜린스를 더 늘리는 것도 귀사 영업 팀의 좋은 영업 대안입니다.”
“…그런 걱정은 안 해줘도 됩니다.”
“자자, 제가 이번에 크게 KM 전자를 위해서 한턱 쏘겠습니다. 500대만 먼저 선공급을 해주세요. 대금은 어음이 아니라 현금으로 바로 지급하겠습니다.”
역시 돈 많은 강주옥 사장다운 행동이었다.
500대면, 무려 현금으로 20억으로 결코 적은 금액은 아니었다.
실적도 실적이지만 가장 중요한 점은 이 계약을 이용해서 다른 대리점 영업도 더 쉽게 공략할 수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계약 조건에 대해서 강 사장님이 이의를 제기했지 않습니까? 계약 변경은 우리 영업 팀이 아니라 기획 팀이…….”
“됐습니다. 지난 미팅에서는 제가 지나쳤습니다. 이 기회에 사과드리겠습니다. 까짓것 저희가 이번에 손해를 좀 보겠습니다.”
지금 대리점 계약서는 대리점에 불리하게 되어 있는 조항이 많았다. 특히 TV 관련해서는 다른 가전 3사 제품에도 영향을 준다.
TV에 한해서만큼은 전문적으로 콜린스를 취급해야 했다.
일테면 대리점 영업이나 마케팅에 일정 투자를 해야 한다는 점이다.
대운 전자만 해도 대리점과 일괄 계약을 맺고 간판 통일 작업을 비롯한 여러 가지 테마에 대해서 다양한 지원을 해주었다.
그런데 KM 전자 영업 팀은 대리점이 다 알아서 하란 식으로 계약서를 만든 것이었다.
이런 일방적인 계약은 콜린스 재고 물량이 바닥을 보이자 어쩔 수 없이 내놓은 제약이었다.
‘최 실장님이 이런 지시를 할 때만 해도 미쳤다고 생각했는데…….’
특히 오성 전자가 숨김없이 그대로 방해하게 되면 타격이 클 수도 있다. 대리점이 KM 전자를 단합해서 훼방 놓을 수도 있었으니까.
그런데 오성 전자를 비롯한 그 어떤 대기업도 콜린스에 대해서 끼어든 이는 없었다.
‘위성 방송 사업 때문일까?’
회사 내에 카더라 입소문을 통해서 최민혁과 이일태 이사의 갈등에 대해서 들었다. KM 전자만이 아니라 ETRI를 통해서도 이런저런 말이 돌기 시작했던 것이다.
오늘따라 유독 고개를 숙인 강주옥 사장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강주옥 사장은 마치 다른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자세를 낮추었다.
“KM 전자는 콜린스 공급만 하세요. 나머지는 제가 알아서 할 테니까. 돈, 영업, 고객 대응은 전부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이 양반이 미쳤나?’
“…알겠습니다.”
“오, 그러면 물량은 언제 공급하실 겁니까?”
“이틀 안으로 바로 쏘겠습니다.”
“돈은 오늘 중으로 바로 송금하겠습니다.”
“아, 네.”
김경환 차장은 영업 계약을 진행하면서도 혀를 차고 말았다.
‘정말 우리 회사가 많이 바뀌기는 바뀌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