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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그래도 KM 전자 기획실의 압박에 피곤했던 박재호 실장은 이창명 이사 무리의 방문에 한가득 미소를 지었다.
이번 위성 방송 프로젝트와 관련해서 오성 전자에서 지원한 연구비가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환영합니다.”
하지만 최민혁에게 단단히 열받은 이창명 이사는 평소와는 좀 달랐다. 그는 단도직입적으로 KM 전자의 배제를 걸고넘어졌다.
“이번 사업에 KM 전자를 빼는 것은 어려운 일도 아닙니다. 제가 대운 전자를 빼달라는 것도 아니고, 고작 KM 전자입니다.”
“그게…….”
예상을 벗어난 박재호 실장 반응에 이창명 이사는 굳은 얼굴로 말했다.
“박 실장님, 이 일은 오성 전자 차원에서 부탁하는 일입니다.”
“무, 무슨 말인지 압니다. 그런데 KM 전자와는 이미 계약이 되어 있습니다. 단순히 보상금 문제 차원이 아닙니다.”
이제까지 자신이 마음먹은 일은 순탄하게 해결한 이창명 이사는 최민혁만 관련되면 제대로 안 풀리는 상황에 화가 났다.
“이상하군요. 아니, 위약금 주고 깔끔하게 끝내는데, 뭐가 더 문제가 됩니까?”
ETRI가 송한성 교수 연구 팀 실적을 빌린 것을 이창명 이사에게 말할 수가 없었다. 이걸 이창명 이사가 알면 오히려 이걸 빌미로 자신을 압박할 테니까.
‘빌어먹을 새끼.’
크게 당황한 박재호 실장은 식은땀을 흘렸다. 지금 와서 KM 전자를 프로젝트에서 빼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차라리 오성 전자를 빼는 것이 더 현실적이었다.
하지만 내막을 잘 모르는 이창명 이사도 바보는 아니었다.
“혹시라도 위약금 때문이라면 모든 금액을 전부 다 부담하겠습니다. 그러니 위성 사업에서 KM 전자는 무조건 다 빼세요.”
“이, 일단 시간을 좀 주십시오.”
“허.”
불행히도 위약금 문제가 아니었다.
오현종 팀장이 제대로 언급은 하지 않았지만 KM 전자가 내막을 잘 모른다고 하기는 어려웠다.
송한성 교수 연구 팀 내에 얼마든지 진실을 폭로할 사람은 많았다.
‘거기에 이동호 교수 연구 팀 자료까지 다 엮여 있는데, 만약 KM 전자의 지시를 받은 이동호 교수가 지적재산권으로 고발이라도 한다면…….’
그러면 지금까지 한 모든 연구를 접어야 했다.
정부 보조금 3,000억을 포함해서 대기업 자금까지 포함하면 무려 4,000억이 넘는 프로젝트를 중단시켜야 한다.
설사 박재호 실장이 ETRI 원장이라고 해도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이창명 이사는 오히려 의아한 눈으로 박재호 실장을 힐끗 쳐다보았다. 물론 그 역시 자신의 제안이 무리수라는 것을 안다. 하지만 결과만 좋다면 그렇게 나쁜 계획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기획 팀도 그렇고 다른 임원 중에 KM 전자를 고깝게 보는 이들도 많아. 문제가 되지 않는다면 KM 전자를 압박해도 괜찮아.’
좀 지나쳤다고 생각해서인지 슬쩍 목소리를 낮추었다.
“지금 모바일 관련 공통 연구 지원금만 해도 100억이 넘습니다. 제가 그렇게 어려운 부탁을 하는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그 많은 기업 중에 KM 전자 하나 빼는 게 그렇게 어렵습니까?”
“그 많은 기업 중에 제법 지원을 많이 한 기업이 KM 전자입니다. 그러니 이사님 요구를 받는 것은 어렵습니다만 대신에 제 나름 손을 써보겠습니다.”
“하지만 구체적인 결과가 나오지 않으면 그냥 두지 않을 겁니다.”
“…네.”
박재호 실장도 나름 기분이 나빴지만, 이창영 이사 배후에 누가 있는지는 잘 알았다. 바로 오성 전자의 안건민 회장이 있으니까.
‘설마 안건민 회장이 KM 전자를 흔들기 위해서 작업을 시작한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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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성방송 시험 방송에는 단순히 위성 시스템만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수신기, 중계기, 송신기를 포함해서 잡다한 일이 많다.
다양한 수신기 개발과 관련해서는 밑에 중견 기업이 참여한다.
즉 정부 지원금으로 공공의 이익을 원한다는 그림으로 진행되는 사업이다.
그런데 이 많은 부분 중에 오성 전자가 차지하는 포지션이 생각보다 컸다.
어떻게 보면 오성 전자 나름 ETRI 후원자나 마찬가지다.
아마 다른 프로젝트라면 이창영 이사의 일방적인 제안을 들어줬을 것이다.
그런데 위성 사업은 이야기가 좀 달랐다.
KM 전자의 포지션뿐만 아니라 이들의 원천기술도 많이 관련되어 있었다.
박재호 실장도 뒤늦게 오현종 팀장이 내놓은 자료를 보고서야 알았다. 조용히 버티기 해서 넘어갈 상황이 아니었다.
‘만약 이창영 이사 지시에 따르면 KM 전자가 그냥 가만히 있을까?’
최근 KM 전자의 행보를 보면 절대로 그냥 있지 않을 것이다.
특히 최훈열 추문 결과를 보면 단호하게 나올 것이 분명했다.
결국 박재호 실장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권태성 실장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서 이창영 이사의 갑작스러운 방문에 의문을 제기했다.
답변은 기대한 것과는 많이 달랐다.
[그 안건은 이창영 이사가 직접 진행하는 일로 저희는 모르겠습니다.]
모른다니. 아니, 이게 말이나 되는 소리인가.
[네?]
조금 뜬금없는 답변이라서 몇 번이나 다시 물어보았지만 같은 대답만 나왔다.
[이창명 이사가 오성 전자의 다른 임원과는 다른 위치에 있다는 것 정도는 아실 겁니다. 저라고 해서 이창명 이사 일에 명분이 없으면 관여하기 쉽지 않습니다.]
[아니, 오성 전자 기획실장님이 그런 말씀을 하시면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압니다. 당연합니다. 그런데 박 실장님도 대기업 생리를 아시지 않습니까. 저같이 지분이 없는 임원은 파리 목숨입니다. 몸을 사릴 수밖에 없습니다.]
오성 전자의 로열패밀리와는 달리 권태성 실장은 실력으로 지금 이 자리에 올랐다. 따라서 윗선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었다.
[이창명 이사 파워가 그렇게 셉니까?]
[으음, 예를 들면 군대 예를 들어보죠. 보통 최고선임은 제일 밑에 이병이나 일병을 건드리지 않습니다. 중간에 상병이 이들을 관리가 됩니다. 이창명 이사가 바로 그런 경우입니다. 그는 일반 임직원을 관리하는 자로 봐야 합니다.]
[…설마 실장님이 그런 이야기를 할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전 오성 가문 직계, 아니, 하다못해 방계도 아니니까요. 이게 사소한 것 같아도 오성 그룹 내에서는 칼같이 지켜집니다.]
박재호 실장도 이미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지만 명색이 오성 전자 기획실장 권태성에게서 이런 이야기를 들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그래서 이 일을 간단히 넘길 수가 없었다.
[하나만 더 물어봅시다. 만약 이 일이 잘못되면 결국 권태성 실장님은 책임질 리가 없을 거고, 이창명 이사 역시 오성 가족이기에 문책을 피해 가겠습니다. 그러면 그 책임은 누가 집니까. 설마 우리 ETRI에게 덤터기 씌울 겁니까?]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권태성 실장도 미처 간과한 문제라서 몸을 흠칫 떨고 말았다.
위기감을 느낀 박재호 실장을 버럭 소리쳤다.
[이봐요, 권 실장님. 아니,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겁니까?]
[…한번 알아보고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자, 잠깐만, 권 실장님, 이봐요, 권 실장…….]
그리고 끊어진 전화.
‘하, 뭐 이런 개 같은 경우가 다 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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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태성 실장도 박재호 실장에게 뜬금없는 전화를 받고 나서는 임권수 부장과 황광수 차장을 따로 호출해서 상의했다.
“도대체 ETRI에서 무슨 일이 있는 겁니까?”
ETRI 내부의 문제를 당연히 알 리가 없는 임권수 부장은 권태성 실장의 눈치만 봤다.
“알아보고는 있는데, 현재까지는 파악하지 못했습니다.”
“임 부장,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겁니까?”
“죄송합니다.”
결국 황광수 차장을 쳐다보았다.
그나마 황광수 차장도 ETRI에 대해서 아는 것은 없었다.
“저도 지금 알아보고 있습니다. 아무래도 ETRI 내부에 뭔가 다른 문제가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우리가 알면 안 되는 뭐 그런 겁니까?”
“네.”
“그거 이상하네요. 이런 일 이미 몇 번이나 겪은 것 같은데…….”
“지난 KM 전자와 관련된 일과 유사하기는 하지만 아직 최민혁 실장이 직접 관여한 일은 아니라서 확신할 수는 없습니다.”
“…….”
가능하면 최민혁 실장과 엮이는 일을 다 피했는데, 유탄을 맞은 것 같아서 권태성 실장은 이상야릇한 표정을 짓고 말았다.
“만약 이번 일이 잘못되면 우리 기획 팀도 책임질 것 같습니까?”
“…아마도 그렇지 않을까요?”
일종의 연대책임이다.
명색이 오성 전자의 두뇌인 기획실이 손을 놓고 있다가 문제가 터지면 유탄을 맞을 수밖에 없다.
“하, 이창명 이사가 문제인데…….”
오성 전자에 대한 탐욕이 상상을 초월한 이창명 이사가 권태성 실장의 말을 들을 리가 없었다.
“휴우, 좋아요. 일단 두 사람이 이번 일을 몰래 한번 알아보세요. 최소한 무슨 일이 터질지는 미리 확인해 두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세 사람은 이 일도 분명히 최민혁 실장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느끼자 머리가 핑 돌았다.
‘지긋지긋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