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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국호 부장은 결국 허겁지겁 이창명 이사를 찾아갔다.
“아무래도 일이 단단히 꼬인 것 같습니다.”
“무슨 소리야? 설마 최민혁 그 새끼가 한 짓이 아니란 소리야?”
“알아보니, 검찰에 손을 쓴 것은 최민혁 실장이 아니라 한국 여성회입니다. 그들이 노린 것은 롯대 그룹이었습니다.”
“가만. 그러면 나는 설마 롯대 그룹 때문에 엮였다는 소리야?”
“…네. 정치 공작입니다. 이미 롯대 그룹 측에서는 뒤에 따로 만나서 타협을 본 것으로 압니다. 조 부사장은 검찰 소환조차 되지 않았습니다. 이미 퇴사한 걸로 조치했고, 피의자와 이미 합의를 본 것으로 압니다.”
결국 남은 것은 이창명 이사였다.
문제는 이게 별다른 타협을 하기 힘들었다.
특히 오성 전자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가 결합되자 상황이 더 심각해졌다.
“아니, 그러면 언론은 또 뭐냐?”
“그게 롯대 그룹만 작업이 들어가는 일이었고, 애초에 오성 그룹은 그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기자들도 그 내막을…….”
언론사 역시 지시를 받기는 했지만, 구체적인 내용은 아니었다. 그냥 둘러대듯이 말을 한 것이다. 그래야 문제가 되어도 오리발을 내밀 수 있으니까.
“이 상황을 몰랐다고? 내가 같이 엮여서 그냥 기사로 나간 거라고? 아니, 씨발, 그걸 말이나 된다고 생각하는 거야?”
“…네.”
“하.”
이창명 이사는 이제까지 오혜정 비서를 그저 한 몇 개월 즐기는 노리개로 생각해서 이번 일을 가볍게 생각해왔다.
그런데 최민혁 그 새끼에게 당한 일 때문에 진지하게 생각했다.
‘분명히 최 실장 그 새끼가 개입한 것이 맞아. 한국 여성회가 고소·고발을 할 때 절묘하게 같이 KM 전자가 고발한 것이 그 증거야!’
그는 분노를 참을 수가 없어서 최민혁에게 보복 계획 중의 하나를 떠올렸다.
“야, 안 부장, 당장 ETRI 쪽과 약속을 잡아!”
“아, 알겠습니다.”
안국호 부장은 정확히 누구와 약속을 잡으라는 지시를 받지 않았지만, 굳이 묻지는 않았다. 흥분한 이창명 이사에게 건수를 줬다가는 그 자리에서 박살 난다는 것을 몸으로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는 결국 ETRI 위성 사업부 오현종 팀장에게 전화를 계속 걸어서 약속을 잡았다.
위성 사업 하드웨어 쪽을 담당한 오현종 팀장은 영문을 몰라서 계속 질문을 했지만, 안국호 부장이 전화를 끊어버리자 당황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이야?’
* * *
ETRI 위성 사업 프로젝트를 담당한 박재호 실장은 최근 여기저기서 계속 나오는 말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말았다.
바로 위성 채널의 대기업 배정 문제 때문이다. 이 일에는 대기업 로비를 받은 정보통신부와 공보처가 다른 소리를 하고 있어 중재하기가 쉽지 않았다.
‘빌어먹을 공무원 새끼들.’
도대체 돈을 얼마나 처먹었는지 자기 배후에 있는 대기업을 서로 밀려고 막 우겼다.
위성 채널 숫자는 정해져 있는데, 먹고자 달라붙는 대기업이 너무 많았다.
[173]오성 그룹, HY 그룹, LC 그룹을 비롯한 한국 대기업은 죄다 이 일에 매달렸다.
문제는 지금 진행하는 위성 개발 프로젝트가 제대로 진척이 되지 않았다.
최근 와서 MPEG 표준화 위원회에서 이동호 박사 연구 팀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변화가 생겼기 때문이다.
독일과 미국은 일본이 싫어서 이동호 박사를 전적으로 밀어주었다.
프랑스 역시 두 나라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이들 세 개 국가가 이동호 교수의 작업을 밀어주면서 많은 변화가 있었다.
힘이 없는 ETRI는 어쩔 수 없이 이 흐름을 따라갈 수밖에 없었다.
이동호 교수 연구 팀과 관련이 깊은 송한성 교수 연구 팀에 연구 용역을 준 것도 한 방법이다.
그 후로 프로젝트 진행은 불협화음이 나기는 했지만, 그럭저럭 잘 굴러갔다.
그런데 예상치 못한 문제가 생겼다.
KM 전자 조성돈 팀장이 임기석 부장 연구 팀의 자료를 명분 삼아 위성 산업과 관련해 계속 딴죽을 건 것이다.
더욱이 뒤늦게 송한성 교수 연구팀의 과제에 대한 권리도 위임받아서 그것까지 압박 수단으로 사용한 것이었다.
[자꾸 그렇게 소극적으로 나오면 소송할 수밖에 없습니다!]
ETRI 내부도 발칵 뒤집혔다.
KM 전자가 고소까지 하겠다고 한 상황에서 만약을 대비해야 했다.
그런데 막상 내막을 파보니, 예상치 못한 문제가 우르르 나왔다.
그중에는 지금 당장 도저히 그냥 넘어갈 수 없는 것도 있었다.
“송한성 교수 팀을 통해서 진행한 자료를 빌렸다고?”
위성 사업 하드웨어를 책임진 오현종 박사가 박재호 실장의 눈치를 봤다.
“그게 심각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어차피 대학 연구 팀에 연구 용역을 준 겁니다. 그리고 그걸…….”
“오 박사, 우리끼리 뻔히 아는 일이잖아. 속이고 말고가 어디 있어?”
“알다시피 위성 시스템 관련해서 송한성 교수가 국내 최고 전문가라는 것을 잘 아실 겁니다. 그래서 일정을 당기기 위해서 연구 용역을 줬는데…….”
“그러면 용역을 통해서 받은 연구 결과를 가지고 작업했다는 소리인 것 같은데, 어차피 우리가 이미 비용을 지급했으니, 우리가 그 자료를 이용해도 상관이 없잖아.”
“그게… 또 그렇지 않습니다.”
연구 용역 결과 중에 쓸데없는 자료는 상관이 없었다. 하지만 그 자료 중에는 그렇지 않은 중요한 부분도 있었다.
이 부분은 송한성 교수도 계약서상에 분명하게 명시를 했고, 주의하라고 경고했다.
자기 연구소가 지적 재산권을 가진 것이라고 명시를 한 것이었다.
[이동호 교수 연구 팀 과제와 관련이 있어서 이걸 활용하려면 다시 추가 계약을 하셔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임의로 사용하면 문제가 될 겁니다!]
그런데 ETRI 내부에 계속 사공이 많아서 이리저리 겉도는 상황이다 보니 이 일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오현종 팀장은 송한성 교수 성과물을 그대로 가져와서 기존 프로젝트에 끼워서 짜깁기했다.
그 중에는 이동호 교수 연구 팀에서 진행한 관련 자료도 있었다.
오현종 팀장은 차마 자기 혼자 책임을 질 수가 없어서 턱짓으로 김승구 팀장을 가리켰다.
“…저는 처음 듣는 이야기입니다만.”
김승구 팀장은 그저 입가에 부처 웃음만 지으면서 슬쩍 시선을 피했다.
“아니, 김 박사님이 모른다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입니까?”
“전 오 박사님이 송한성 교수와 잘 해결한 것으로 알았습니다!”
혼자 다 변명하게 생긴 오현종 팀장이 눈알을 크게 떴다.
“야, 오 박사!”
“네? 넵!”
“너 죽을래?”
학자라기보다는 이제 정치인에 가까워서인지 감정 표현이 풍부한 박재호 실장은 인상을 험악하게 지어서 오현종 팀장을 협박했다.
울상을 한 오현종 팀장은 그제야 이 일이 밝혀진다면 문제가 생길 거라 털어놓았다.
“…KM 전자 측에서 모르면 상관이 없고?”
“네.”
하지만 박재호 실장은 그제야 최근 시끄러운 한 가지 일 때문에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뒤늦게 이동호 교수 연구 팀이 KM 전자와 긴밀한 관련이 있고, 이일태 이사가 ETRI에서 쥐새끼처럼 날뛴다는 보고를 기억했다.
“당장은 문제가 없고?”
“최근 KM 전자 기획 팀의 조성돈 팀장이 계속 연락하면서 조사를 진행 중인 것으로 압니다.”
“KM 전자 기획 팀이 왜 직접 터치를 하는데?”
“위성 사업 쪽에 유독 관심을 보이고 있어서 미칠 지경입니다. 제가 이일태 이사 채널 통해서 알리겠다고 하는데, 믿지를 않습니다.”
“그 치들은 도대체 왜 그러는데?”
“그게…….”
“이일태 이사 그 작자 때문이야?”
“저도 아는 지인 통해서 알아보니, 이일태 이사가 최민혁 실장을 정면에서 들이박았다고 합니다. 그 과정에서 최민혁 실장이 위성 사업을 알아보겠다고 나섰는데, 위성 시스템부터 검토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이 문제도 터져 나왔습니다.”
실로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사실 이번 프로젝트만 적당히 끝내고 나서 덮어버리면 나머지 일은 크게 문제가 되지 않았다.
어차피 ETRI는 이 위성 방송 시스템을 상업적으로 이용할 생각 자체가 없었다. 아니, 절대로 그렇게 할 수가 없었다.
그냥 성과만 내면 된다.
박재호 실장도 골치가 아파서 이번 연구의 핵심 실세 세 사람을 갈구는 선에서 끝냈다.
‘버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