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조용히 서재를 떠나는 최민혁의 모습을 본 최용욱 회장도 한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 그는 채윤집 집사가 안으로 들어오자 겨우 입을 열었다.
“KM 전자 내부에서 따로 뭔가를 한다고 했는데, 파악은 했나?”
“워낙에 보안이 철저해서 뭘 하는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그 일은 그만두게.”
“하지만…….”
그는 뒤늦게 자식의 경호원이었던 한 사람을 떠올렸다. 유독 강렬한 인상을 받아서 아직 그의 얼굴을 잊지 않았다.
“김명준 과장 그 친구는 보통 사람이 아냐. 아무리 파도 그 친구의 시선을 피하기는 어려울 거야. 괜히 시간 낭비하지 마. 민혁이 녀석도 내가 알아야 할 일이라면 말했을 테니까.”
“하지만 KM 전자도 KM 그룹에 큰 영향을 줍니다. 그런 점을 고려한다면 최소한 회장님은 알고 계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콜린스로 인한 KM 그룹의 반사이익을 떠올린 최용욱 회장도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좋은 기회였는데, 아들이 다 말아먹었다.
사실 최민혁을 만난 자리에서 부탁할까 하다가 포기했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강제로 협력 관계를 진행하게 하라고 하기에는 너무 많이 늦었다.
“…꼭 그렇게 보기도 힘들어. 그리고 KM 전자를 조사하는 건 그냥 두게. 오성 전자에서 스카우트한 그 친구 파일이나 다시 가져와.”
장남이 방문한 의미를 뒤늦게 깨달은 최용욱 회장은 허탈하게 웃고 말았다. 설마 그놈이 그런 짓을 할지는 몰랐다.
하지만 그는 최문경 부회장을 탓하지 않았다. 차라리 호구처럼 당하는 것보다는 훨씬 나으니까.
차분하게 채윤집 집사가 내민 인사 서류를 꼼꼼하게 살폈다.
최병연 부장, 한철수 차장, 이현탁 과장, 오상현 과장, 조창호 차장의 이력이 세세하게 잘 나와 있었다.
인사 파일을 살피던 최용욱 회장도 화려한 그들의 프로필에 혀를 내둘렀다. 오성 전자 안건민 회장이 왜 최민혁 혼사를 이야기하면서 이들에 관한 이야기를 꺼냈는지 뒤늦게 깨달았다.
‘아주 초일류 인재만 죄다 빼 왔구나.’
막내딸 혼사야 그럴 수가 있다. 그런데 전경련 모임에서 뜬금없이 꺼낸 오성 전자 인재 스카우트 이야기는 달랐다.
그 역시 권태성 실장이 그룹 본사를 찾아왔다는 이야기를 장승일 그룹 기획실장에게 들었지만, 이들이 이 정도 인재인지는 몰랐다.
손자 최민혁의 행보는 그의 예상과는 달라도 너무 달랐다.
‘또 이들로 뭔가를 꾸미나 보구나. 안 회장이 그래서 경고를 한 건가. 하지만 민혁이 녀석도 바보가 아닌데, 오성 전자 기술을 빼돌릴 리는 없을 거고.’
그래도 자신 역시 오성 전자에서 KM 그룹 직원을 빼돌린 점을 지적했다.
다행히 그 의도가 먹히기는 먹혔다.
과거와는 달리 콜린스 때문이다.
KM 전자 주가 폭등을 떠나서 콜린스 실적 확대는 오성 전자 유럽 전략에도 큰 영향을 줬다. 실제로 대형 TV 매출이 출렁였다.
유럽 소비자는 콜린스 정식 판매를 기다린 채 오성 전자를 비롯한 한국 가전 3사 제품을 피한 것이었다.
놀라운 것은 소니를 비롯한 일본 제품 역시 다르지 않았다. 아니, 이들의 매출 격감은 한국 대기업과 비교하면 더 높았다.
‘아직 정식 판매도 안 했는데 그 모양이니, 아주 난리가 났어.’
늘 주변에서 국내 기업이라고 조롱만 받아 왔던 일이 한이 되었다.
탄탄한 KM 그룹의 행보가 마치 겁쟁이 기업이라고 낙인찍힌 것이었다.
더 웃기는 것은 대기업의 지원을 받은 언론조차 주기적으로 KM 그룹을 씹었다.
그 일을 참지 못한 최용욱 회장이 선택한 방법이 대규모 차입이었다. 덩치를 키워서 제대로 한번 엿 먹이고 싶었다.
지금 상황은 그가 원했던 것이었다.
매의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던 안건민 회장의 눈빛은 이제 경계의 시선으로 바뀌었다.
짜릿했다.
최근 자신을 쳐다보는 시선은 아랫사람을 보는 것처럼 무시하던 것과는 전혀 달랐다.
오성 전자 안건민 회장이 그 정도였으니, 다른 대기업은 더 말할 것도 없다.
특히 세계 경영으로 프랑스 거점 계획을 진행하던 대운 그룹은 오히려 더 심각했다. 그들의 프랑스 전략이 뿌리째 흔들리고 있기 때문이다.
최용욱 회장은 새삼 최민혁의 보고서에 나와 있는 움직임을 다시 하나씩 확인해 보았다. 최민혁의 과거 행보는 하나같이 유기적으로 다 결합하여 있었다.
그 심계는 생각할수록 놀랍기만 했다. 자신도 이렇게 할 수는 없었다. 그의 머리는 복잡했다.
아직까지 최문경 부회장이나 최동영 상무에게 KM 그룹 지분을 전부 다 넘기지 않았다. 그렇다고 아들이 아닌 손자 최민혁에게 그룹을 전부 다 넘길 수도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러고 넘기기에는 최민혁 능력에 대한 탐욕을 쉽게 떨치지 못했다.
‘이거야 원. 첫째 녀석이 정신이 나갈 만하구나.’
* * *
최용욱 회장은 결국 채윤집 집사를 통해서 권재홍 그룹 비서실장에게 최민혁의 경영 독재에 대한 우려를 표시했다.
그리고 이런 사실은 이일태 이사에게도 마지막으로 전해졌다.
이일태 이사는 최용욱 회장의 지지를 얻자 쾌재를 불렀다.
그 역시 설마 최용욱 회장조차 최민혁에게 반대할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못했다.
최민혁은 물론 이런 움직임을 김명준 과장을 통해서 세세히 들었다. 굳이 세세하게 이일태 이사 움직임을 파악하지 않아도 평소와는 다른 그의 행보를 보면 알 수가 있는 사실이었다.
‘이번에 이빨을 드러내겠네.’
이제까지 이일태 이사를 내버려 둔 것은 회사 조직 안정이 다급했기 때문이다. 거기에 아직도 남아 있는 불만 세력도 문제였던 것이었다.
그는 미끼를 문 물고기의 반응을 예상하면서 즉시 이사회를 소집해 유럽에서 한 실적을 보고했다.
독일, 프랑스를 중심으로 해서 그동안 있었던 가시적인 결과였다.
이전만 해도 최민혁의 눈도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던 이일태 이사는 최민혁을 직시한 채 냉큼 손을 들어서 한 가지를 걸고넘어졌다.
[이미 유럽에서 선주문을 낸 물량만 해도 7만 대나 되는데, 왜 그 물량을 거절한 겁니까?]
최민혁은 덤덤한 얼굴로 말했다.
[거절한 게 아니라 보류한 겁니다.]
[그게 그거 아닙니까.]
그는 상대 반응이 재미있어서 비웃듯이 말했다.
[그쪽에서 요구한 것은 일방적인 제안이었습니다. 불량품 교환에 관련된 비용 일부를 저희가 다 내야 하니까. 거기에 여러 가지 물류 문제부터 시작해서 수십 가지가 넘는 일방적인 제안이었습니다.]
만약 이 제안대로 한다면 콜린스 공급 가격을 대폭 낮추어서 마치 보험처럼 손실을 일부 떠안아야 했다.
그야말로 KM 전자로 호구로 본 불공정 계약이었다.
그런데 대운 전자를 비롯한 다른 가전 3사에서는 이미 다 과거에 했던 계약이다. 유럽 시장에서 한국 브랜드가 차지하는 가치가 낮았다.
그럼에도 그들이 굳이 계약을 한 것은 그만큼 유럽 시장이 크고, 이를 통해서 이익을 얻는다면 손실은 보지 않을 거라 생각해서였다.
하지만 최민혁은 그 제안을 굳이 다른 대기업처럼 받을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적절한 이익을 보고 파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봤기 때문이다.
이일태 이사의 생각은 달랐다.
[이미 콜린스에 대한 인기는 그 어느 때보다 좋습니다. 그런데 그 기회를 지금 놓쳐 버린 상황입니다. 벌써 7만 대, 무려 2,800억 매출을 그냥 날려 버렸습니다. 이게 회사에 큰 손실이 아니고, 뭐겠습니까?]
최민혁은 열변을 토하는 이일태 이사의 모습을 힐끗 쳐다보았다.
사실 틀린 이야기는 아니다. 알면서도 굳이 무리하지 않는 이유는 너무 많아서 일일이 다 예를 들 수도 없었다.
콜린스는 최민혁 인생 1회차에서도 없는 물건이라서 정확한 판매 예상을 할 수도 없다.
자칫하면 유통 과정에서 누적되는 손실이 쌓이고 쌓여서 이익을 깎아 먹는다.
그야말로 남 좋은 일을 시키는 일이다.
매출보다는 수익성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 최민혁은 이일태 이사의 행동에 혀를 찼다.
‘아니, 저 멍청이가 정말 모를 수도 있겠어.’
탐욕에 눈이 어둡다 보니, 똥오줌을 못 가리는 것이다.
오영근 사장이나 문형섭 부사장은 눈만 끔뻑이고 있었고, 원종상 전무는 말없이 듣기만 했다.
최민혁은 넌지시 떡밥을 던졌다.
[만약 불량이 7%만 나도 200억 가까이 토해내고, 다른 제품으로 교체해야 합니다. 거기에 유통망과 관련된 비용도 포함합니다. 심지어 생산카파도 그것을 따르지 않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순이익은 감소할 수밖에 없는 거래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아니, 그걸 알았다면 영업 팀과 협의해서 사전에 충분한 부품 수급을 했어야죠. 이제 와서 그런 말씀을 하시면 어떻게 합니까?]
[영업 팀과 협의해서 만든 물량이고, 그것을 검토한 것은 이사회였습니다. 물론 그 물량도 많다고 딴지를 건 사람 중에 하나가 이일태 이사님이었습니다만?]
[설사 그렇다고 해도 최민혁 실장님이 책임진 일 아닙니까. 확신이 있었으니, 그때는 공격적으로 나서야 했습니다. 그랬다면 제가 반대할 이유가 없지 않습니까?]
[아, 그래요?]
‘이 물건을 도대체 어떻게 하지?’
최민혁이 게슴츠레한 눈으로 쳐다보자 이일태 이사는 뜻밖에도 이를 피하지 않았다. 그는 이번에 최문경 부회장이나 최용욱 회장의 지원을 얻었다고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이번 상황을 잘만 활용하면 최민혁 실장의 기세를 꺾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최민혁은 다른 직원을 생각해서라도 아무런 이유 없이 직원을 자르지 않는 점을 고려했다.
이일태 이사는 이미 선을 넘었다고 생각하자 최훈열 전무 사태 이후에 핍박당했던 분노를 이번 이사회에서 터트렸다.
[새로운 프로젝트 팀도 문제입니다. 아니, 같은 직원이 들어가지도 못하게 막아 놓았는데, 그게 가당키나 한 일입니까?]
눈 하나 깜짝하지 않던 최민혁은 곰처럼 무덤덤하기만 했다.
[최민수 사원 일을 말하는 건가요?]
[꼭 그 일만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른 임직원도 불만이 많습니다. 도대체 그 층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거야말로 최 실장님의 독단 아닙니까. 이사회를 얼마나 우습게 보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는 슬쩍 최민혁에게 무시당했다고 생각한 오영근 사장에게 도움을 청했다.
오영근 사장이 실제로 나섰는데, 오히려 최민혁을 변호했다.
[그 연구 팀은 보안 때문에 그렇게 하기로 했네.]
[서, 설마 사장님도 알고 계셨다는 말입니까?]
대답은 뜻밖에도 조용히 있던 문형섭 부사장이 나섰다.
[이일태 이사, 보자보자 하니, 말을 막 하네. 아니, 자네 위성 사업부 쪽 일은 제대로 외부에 알리지도 않으면서 왜 새로운 사업 팀 가지고 시비를 걸어?]
두 사람도 최민혁 실장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다고 생각했던 이일태 이사는 크게 당황했다. 그는 혹시나 해서 원종대 전무 얼굴을 쳐다보았는데, 그는 아예 시선을 외면했다.
[…아니, 제 말은 그런 뜻이 아니지 않습니까. 문 부사장님은 지금 최 실장이 독단적으로 진행하는 일이 말이 된다고…….]
문형섭 부사장은 애초부터 이일태 이사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그는 누구에게나 솔직한 성품답게 노골적으로 나갔다.
[어, 말이 돼. 사업하다 보면 보안이 중요할 수도 있잖아. 막말로 이일태 자네가 내부 정보를 빼돌려서 오성 전자에 팔아넘길 줄 누가 알겠어?]
[부사장님, 말 지금 너무 함부로 하는 것 아닙니까?]
[아니, 자네도 그러고도 남아. 내가 오너였다면 자네는 벌써 자르고 시작했을 거야. 우리 최 실장은 마음이 좋아서 자네를 내버려 둔 거야.]
분노한 이일태 이사는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서 문형섭 부사장을 째려봤다.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십니까?!]
[그런 자네는 뭔가? 지금 부사장 앞에서 하극상이라도 하고 싶은 건가. 아, 일단 사업부 이야기부터 한번 들어보자고.]
둘이 치고받고 싸우자 이사회는 시장바닥처럼 시끄러웠다.
황당한 것은 오영근 사장이 나서서 문형섭 부사장을 백업했다는 것이다.
원종상 전무는 슬쩍 물러난 채 아예 끼어들지 않았다.
이일태 이사는 예상과는 전혀 다른 이사회 분위기에 식은땀을 흘렸다. 그는 최소한 오영근 사장은 자신의 손을 들어주지는 못할망정 반대하지는 않을 것이라 예상했던 것이다.
‘아니, 이게 뭐야?’
최민혁은 불구경하듯 팔짱을 낀 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그 역시 두 사람이 자신을 옹호한 것이 신기해서 눈을 끔뻑했다.
솔직히 유럽 행보 중에 독단적인 행동을 한 것은 사실이니까.
다행히 이들 갈등은 곧 가라앉았다.
최민혁도 이일태 이사 반응을 보기 위해서라도 유럽 관련 안건을 계속 보고했다.
그런데 이일태 이사는 냉큼 문제가 되는 것을 하나씩 골라냈다.
[독일 사무소와 프랑스 법인 때문에 두 나라는 상관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탈리아는 상황이 좀 다르지 않습니까. 도대체 왜 그곳에서 장기 체류를 한 것입니까?]
이탈리아 장기 체류를 말하려면 시즈벨 협상도 이야기해야 한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이루어진 MP3 특허도 포함한다.
최민혁도 그 부분에 대해서는 오영근 사장에게도 제대로 언급하지 않았다.
‘완전 바보는 아니군. 그런데 그 머리로 위성 사업에만 집중했으면 좋을 텐데, 꼭 남을 헐뜯는 데다 사용하니 문제야.’
웃기게도 오영근 사장이 다시 나섰다.
[이봐, 이일태 이사, 최 실장도 이탈리아 시장을 확인해보려면 이곳저곳을 다녀야 했을 거야. 그런 일은 최 실장 권한으로 할 수가 있는 거고.]
[하지만 언론에 난 기사만 봐도 최 실장은 그곳에서 관광이나 즐겼습니다. 진정으로 이탈리아 시장 조사를 할 목적이었다면 그런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나 보군. 모든 일이 서두른다고 해서 될 문제가 아닐세. 우린 회사는 아직 유럽 각국의 시장에 대해서도 몰라. 그렇다면 직접 사람과 부딪치면서 일을 하는 것이 오히려 더 옳아!]
[하!]
최문경 부회장과 최용욱 회장의 지시에 정신이 빠져서 미처 주변 사람을 간과한 이일태 이사는 오영근 사장이 완전히 최민혁 편을 든다는 것을 깨닫자 이사회 분위기를 살폈다.
그런데 문형섭 부사장은 암묵적으로 고개만 끄덕였고, 원종상 전무는 아예 최민혁 실장이 내놓은 자료를 보기에 여념이 없었다.
‘젠장!’
성급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최소한 원종상 전무라도 사전에 입을 맞추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한 것이 실책이었다.
문형섭 부사장은 비웃듯이 말했다.
[이일태 이사가 최 실장이 이탈리아를 관광했다고 부러워하는가 보네. 그건 아니지 않는가. 자네는 과거 김현우 상무 따라서 유럽에 가서 일은 내버려 둔 채 섹스 관광이나 하다가 걸렸지 않아?]
실제로 김현우 상무가 있을 때 이일태 이사는 회사 돈으로 관광을 즐겼다. 그러다가 프랑스 경찰에 걸린 적도 있었다.
유럽 여자에 대한 욕망 때문에 일어난 일이었고, 이 사건은 당시 프랑스 지역 신문에도 대문짝만 하게 나왔다.
[그건…….]
[이 이사, 그만 좀 해. 도대체 쓸데없이 질문이 왜 그렇게 많아? 내 막내아들도 자네보다는 좋은 의견을 많이 내겠어.]
[부사장님, 정말 너무합니다!]
[자네 일이나 똑바로 하고 그런 소리를 해.]
[아니, 위성 사업이 부진한 것은 제가 못해서 그런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무궁화 위성 발사부터 시작해서 다른 회사와 엮인 것이 너무도 많습니다. 그것 때문에 제대로 일이 진행 안 되는 것뿐입니다!]
[내 생각은 달라.]
[오디오 사업부와는 전혀 다르단 말입니다. 문 부사장님이 직접 해보시면 절대로 그렇게 일방적으로 말하지 못할 겁니다!]
또 지방 방송.
자신이 주인공이 되지 못한 상황에도 최민혁은 애초에 자신이 뒤에서 부추긴 일이라서 화가 나지 않았다. 그저 무대 위에 올라온 광대가 무슨 짓을 하나 지켜볼 뿐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사람이 바뀌지 않다는 것을 이번에 절감했다.
그런데 말이다.
이일태 이사가 죽어라고 자기변명을 늘어놓는 위성 사업과 무궁화 위성에 대한 이야기에 문득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가만, 위성이라면 디지털 방송이 되어야 할 텐데. 아, 그렇지 이번에 MPEG-2를 적용한다고 했지. 가만 그러면 그 내부 시스템은 어떻게 되는 거지?’
한 가지 의혹 때문에 자연스럽게 이일태 이사가 올린 보고서를 살폈다.
‘그렇지. 무궁화 위성 통한 디지털 방송은 세계 두 번째구나. 어, 그랬던가? 그런데 위성 기술 가진 애들도 아직 디지털 표준에 따라서 작업한 것은 아닐 거고, 결국 이번 기회를 이용해서 MPEG 표준 싸움에 끼려는 걸까?’
그리고 록히드 마틴이 왜 무궁화 위성 발사에 끼어든 것인지도 금방 깨달았다.
록히드 마틴 입장에서는 굳이 자기가 힘들게 이 위성 방송을 할 필요가 없었다.
벌써 3,000억을 쏟아부은 ETRI와 한국 정부가 알아서 판을 다 깔아주니까.
일단 무궁화 위성 발사 후에 위성 시스템 작업이 끝나면 그걸 꿀꺽하면 된다.
가장 중요한 핵심 기술은 록히드 마틴이 미국 다이렉TV 통해서 협상해도 된다. 아니면 자신이 직접 개발하거나 외주를 줘도 된다.
실제로 록히드 마틴은 이번 사업을 통해서 재미를 짭짤하게 보면서도 디지털 위성 시스템 초안을 날로 구경했다.
정작 ETRI는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록히드 마틴을 비롯한 미국 업체에서 제대로 된 정보도 없지 못해서 프로젝트를 진행할 수가 없었다.
그들이 준 정보라고 해봐야 인터페이스 일부만 해당이 될 뿐, 정작 핵심 기술은 아예 접근도 하지 못하게 한 것이었다.
그러니 위성 방송 디코더 관련해서 피 터지는 경쟁을 벌이는 KM 전자는 다른 타 기업에 견제받고, 위로는 미국계 기업에서 호구 취급당한 것이었다.
[165]이일태 이사도 나름의 생존을 위해서 절박하게 움직이기는 했지만 다 소모성 일에 가까웠다.
‘다른 회사는 몰라도 HY 전자, LC 전자, 대운 전자, 심지어 오성 전자마저 이 꼴이라니.’
하지만 그들도 한편으로 어쩔 수가 없었다. MPEG 표준화 관련해서 권력을 다 쥐고 있는 이들은 소니를 비롯한 일본 대기업, 미국 대기업, 아니면 유럽 기업이 다 쥐고 있으니까.
최민혁이 번민에 빠져 있는 동안에도 한창 최민혁을 공격하다가 거꾸로 궁지에 걸린 이일태 이사는 원종상 전무를 원망스러운 눈으로 쳐다보았다.
비록 너무 갑자기 열린 이사회 때문에 서로 이야기를 하지 않았을 뿐이지, 지난 최훈열 사건 때문에 불만이 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정작 이 자리에서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아니, 원종상 전무는 이일태 이사 쪽에 외면한 지 오래였다.
오영근 사장도 이일태 이사의 말을 무시하시는 했지만, 최용욱 회장에게 들은 이야기도 있고 해서 이사회를 여기서 종결했다.
[최 실장 유럽 출장에 대한 보고는 이 정도로 끝내세.]
이일태 이사는 발끈했지만, 최민혁 이사의 차가운 눈빛에 한 걸음 물러나고 말았다.
“…….”
최민혁은 뒤늦게 피식 웃으면서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역시 이일태 이사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고민을 많이 했는데, 드디어 괜찮은 방법을 찾았기 때문이었다.
‘저 바보를 다른 임직원 생각해서 대놓고 자를 수는 없지만, 자발적으로 그만두는 것까지 내가 어떻게 할 수는 없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