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최용욱 회장은 오영근 사장을 따로 호출해서 우선 회사 분위기부터 들었다.
오영근 사장은 최근 임직원이 최민혁에게 박수를 쳐주었던 일을 직접 거론하면서, 회사 내 지지도에 대해 말해주었다.
“솔직히 말해서 꼭 오너가 아니라고 해도 이제는 최민혁 실장이 눈에 거슬리는 임직원은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런가?”
“아무래도 유럽에서 보인 최민혁 실장의 행보가 있으니까요. 이사회에서는 서로 물고 뜯고 싸우기 바쁠 때 최 실장는 홀로 답을 찾았습니다. 그 대안을 유럽에서 훌륭하게 연출도 했습니다. 저조차 도저히 그럴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자네도 민혁이 그 녀석에 푹 빠졌군.”
KM 전자가 마치 최민혁 종교처럼 변해가는 것을 느낀 오영근 사장도 순순히 인정했다.
“대단한 것은 사실입니다.”
“하긴.”
최용욱 회장도 최민혁의 능력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젊은 최민혁이 자만심에 빠져서 독재하는 것을 내버려 둘 수는 없었다.
“다 좋아. 그런데 이럴 때일수록 이사회가 민혁이 옆에서 조언자 역할을 해줘야 해. 이사회는 제대로 하는 것 맞나? 아무리 민혁이 그 녀석이 대단하다고 해도 옆에서 견제해 주는 사람이 있어야 하지 않겠나?”
“글쎄요.”
오영근 사장은 최민혁의 행동이 선을 넘었다는 것을 알아도 그것을 부정하지 않았다. 그 역시 이일태 이사를 믿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심지어 원종상 전무 역시 다르지 않았다. 꾸준하게 DVD 등으로 매출을 유지하고는 있지만, 과거 최훈열 전무 쪽에 줄을 섰기 때문이다.
그런데 원종상 전무는 중도에 가까운 성향도 있어서 선을 긋기가 모호했다.
MP3 플레이어 프로젝트만 해도 그렇다.
뭘 알아야 조언을 해주지 않겠나.
그렇다고 최용욱 회장에게 덥석 그 사실을 말할 수도 없었다.
자료를 거둬가는 최민혁의 모습을 보면 자신은 그에게 그만큼 신뢰를 받는다는 것을 느꼈다.
만약 이 자리에서 최용욱 회장에게 그 사실을 말한다면 믿음을 잃을 수도 있다.
문제는 젊은 시절을 같이한 최용욱 회장에게 거짓말하기도 난감했다.
오영근 사장은 결국 아무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최용욱 회장이 어떤 사람인데, 오영근 사장 태도가 변했다는 것을 모르겠는가.
‘허, 아니, 이 친구가 왜 이래?’
만약 다른 놈에게 붙었다면 분노했을 테지만 손자인 최민혁의 편을 든다는 것을 보고 화를 내기도 어려웠다.
그래도 기분이 나빴다.
“이봐, 오 사장, 자네 자신도 민혁이 그놈에게 압박을 받는다면서 그게 좋아?”
“…잘 모르겠습니다.”
오영근 사장은 얼마 전에 최민혁이 보여준 MP3 프로젝트를 떠올렸다. 너무 대충 봐서 아직도 그 내용을 잘 이해를 못 했다.
그런데 지금까지 곰곰이 따져본 바로는 나빠 보이는 아이템은 아니었다.
문제는 그걸 어떤 식으로 구현하는가에 대한 것이다.
불행히도 전혀 없는 물건에 대해서는 그가 아무리 경험이 많다고 해도 선뜻 정의할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최민혁에 대한 평가를 할 수가 없었다.
그게 과연 독재인지.
‘아니면 정말 보안 때문인지 판단할 수가 없어. 그 냉정한 문형섭 부사장조차 이제는 최민혁에 대해서 고개를 갸웃할 정도니까.’
생각에 폭 잠긴 오영근 사장은 최용욱 회장 앞에 두고도 사색에 빠져서 그의 이야기를 계속 무시했다.
최용욱 회장은 어이가 없어서 버럭 소리를 내질렀다.
“이봐, 오 사장!”
“아? 죄, 죄송합니다.”
“도대체 뭘 그렇게 생각해? 내가 지금 어려운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잖아. 이사회가 뭔가. 시행착오를 줄이기 위해서 머리를 맞대는 것 아닌가. 그런데 민혁이 그놈이 아예 작정하고 이사회까지 무시한다면서? 그건 아니잖아!”
‘이일태 이사가 입을 나불거렸나 보구나.’
오영근 사장은 왜 최민혁이 자신에게도 일정한 거리를 둔 것인지 최용욱 회장 모습을 통해서 깨닫자 입을 더 열 수가 없었다.
그리고 최민혁이 왜 굳이 이일태 이사나 최민수를 가까운 거리에 둔 것인지도 깨닫고는 그의 심계에 혀를 내둘렀다.
“원론적으로 맞는 이야기입니다만…….”
최용욱 회장이 손바닥으로 책상을 강하게 후려쳤다.
“오 사장,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내가 언제 민혁이 그놈과 싸우라고 했어? 옆에서 딴 길로 새지 않도록 도와줘야 하지 않나, 그 말인 거야!”
“아, 네. 알겠습니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허, 아니, 사람 말이 그렇게 어려워?”
“죄송합니다.”
씁쓸한 표정을 한 채 고개를 숙이는 오영근 사장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눈치가 없지는 않아서 이 일에 최문경 부회장이 있다는 것 정도는 깨달은 것이었다.
‘회장님도 최 실장이 걱정되나 보군. 하지만 누가 누굴 걱정하는지. KM 그룹 걱정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네.’
* * *
최민혁도 뒤늦게 오영근 사장을 통해 회사 경영을 마음대로 하는 부분에 대해서 최용욱 회장이 나섰다는 것을 들었다.
“아무래도 회장님이 자네를 많이 걱정하는 것 같아.”
“그렇습니까? 설마 사장님도 그렇게 생각하시는 겁니까?”
하지만 이미 최용욱 회장을 통해서 자신을 돌아본 오영근 사장은 손을 좌우로 흔들었다.
“그건 아냐. 솔직히 나도 전혀 모르는 분야인데, 자네를 탓할 수는 없지.”
최민혁은 그제야 밝게 웃었다.
“그건 사장님만 해당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른 사람은 오히려 사장님보다 더 보수적이거나 부정적으로 나올 겁니다. 그런 시장은 없으니까.”
오영근 사장도 노골적인 최민혁의 칭찬에 안도하고 말았다.
“그런가?”
최민혁은 보통 경영자와는 전혀 다른 오영근 사장의 모습에 만족했다.
“지금 와서 하는 이야기지만 콜린스도 따지고 보면, MP3 개발을 위한 사전 정지 작업이었습니다. 그게 없었다면 기반 기술을 쉽게 얻지 못했을 겁니다.”
이번에는 오영근 사장 눈이 동그랗게 변했다. 그로서는 상상도 못한 이야기였다. 설마 초대박인 콜린스가 고작 이 MP3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데 필요했다니.
“제 말보다는 결과를 두고 보면 알게 될 겁니다. 왜 제가 그런 행동을 해야 한지도 자연스럽게 알게 될 겁니다.”
그제야 최민혁의 다른 꿍꿍이를 깨달았기에 두 손을 들고 말았다.
“…알겠네. 하지만 보는 눈이 많아. 최용욱 회장님을 자네도 아직은 무시할 수는 없지 않은가?”
“압니다. 제 하나뿐인 할아버지라는 것을 떠나서 제게 기회를 주신 분입니다. 그분의 뜻을 일방적으로 거절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 내가 괜히 걱정했나 보군.”
겉으로 보면 너무 독선적인 최민혁의 행보가 자칫 최용욱 회장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을 걱정했던 오영근 사장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최민혁은 물론 이 일의 배후에 최문경 부회장이 있다는 것 정도는 금방 눈치챘다.
‘김기범이나 최민수 형 때문일까? 아니면 이일태 이사 때문일까?’
물론 그 역시 독단적으로 의사결정을 하거나 MP3 관련해서는 외부에 정보를 알리지 않은 점에 대해서는 인정했다.
사실 이사회에 제대로 된 보고도 없이 일을 진행하다가 만약 결과가 나쁘다면 회사에서 쫓겨날 수도 있는 일이었다.
최용욱 회장이 우려한 부분이 바로 이것이다.
사실 당연한 질책이었다.
최민혁 그 자신이 미래를 모른다면 말이다.
미래를 아는 최민혁의 입장에서 이런 문제를 마냥 무시할 수는 없었다. 아니, 실제로 조창호 차장 같은 실력자가 없다면 심각하게 고민해야 했다.
‘MP3 플레이어 개발이 간단한 문제가 아니니까.’
재수 없는 경우에 6개월, 최악의 상황에 1년 정도 프로젝트 일정이 늘어질 수도 있다. 아니, 몇 년을 앞서간 제품이라서 그 이상도 각오해야 했다.
그런데 그 문제가 가볍게 해결되자 이제는 또 상황이 달라졌다.
‘김현탁이나 김기범은 준비운동이었으니까. 이제부터 서서히 한번 흔들어봐야겠어. 잘만 하면 벌레가 알아서 꼬일 테니까. 하나씩 하나씩 철저하게 조져야지.’
* * *
최민혁은 최용욱 회장을 다시 찾았다. 인생 1회차 때 최용욱 회장과는 전혀 다른 모습에 혀를 내둘렀다.
“진짜 건강해지셨군요.”
붉은 혈색으로 가득한 최용욱 회장은 최민혁을 다른 눈으로 바라봤다.
“다 네 덕분이다. 회사 경영을 지켜보는 수준에서 끝내도 되니까.”
거기에 외부에서 바라보는 시선이 바뀐 것도 컸다.
최용욱 회장 역시 장남이나 셋째에 대해 외부에서 따가운 평가가 있음을 잘 알았다. 최근 9년형 판결을 받은 최훈열 전무는 더 말할 것도 없다.
결국 검찰이나 최훈열 전무 둘 다 항소했지만 한심한 일이었다.
KM 그룹의 앞날에 대해서는 많은 이들이 비관적으로 바라봤고, 차입금에 대한 시선도 그 어느 때보다 나빴다.
지금 일어나는 KM 그룹의 변화를 잘 보았을 때, 만약 그대로 구조조정을 밀어붙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생각하니 한편으로 소름이 끼쳤다.
그런데 이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심지어 손자 최민혁에 대한 평가는 최문경 부회장을 뛰어넘었다.
하물며 그 나이가 고작 20살이었으니.
최민혁은 최용욱 회장의 건강 회복을 진심으로 축하해주었다.
“정말 잘되었습니다.”
“그래. 역시 네 녀석은 다르구나.”
최용욱 회장도 할 말은 많았지만, 굳이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최민혁의 태도에서 깨달았다. 자신감과 패기가 넘쳐나기는 하지만 오만한 모습은 결코 아니었다.
그런데도 첫째가 그렇게 느꼈다면 그건 의도했을 확률이 높았다.
지난 콜린스 때처럼 말이다.
최용욱 회장은 소름이 돋는 것을 느끼면서 동시에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허허허.”
뒤늦게야 최문경 부회장이 왜 미친놈처럼 설치는지 깨달았다. 최민혁이 그렇게 움직이도록 했을 확률이 높았다.
‘김기범은 결국 구속되고, 김현탁은 불구속되었다고 했지?’
비록 물밑 작업 때문에 가라앉은 마약 사건 수사는 여전히 진행 중이었다. 그냥 덮기에는 너무 많은 증거가 나왔다.
심지어 막대한 마약 물량이 나왔는데, 그걸 그냥 한 사람 탓으로만 돌릴 수는 없었다.
뒤늦게 떠올린 것은 바로 최민수.
둘째 최훈열과는 달리 순둥이 같은 기질이 있는 그 녀석도 최민혁이 의도한 바가 있었을 것이다.
사실 이런 모략을 걱정해서 첫째나 셋째에 맡기지 않았는데, 최민혁의 행동을 봐서는 두 사람보다 더한 것 같았다.
그렇다고 이제 와서 말하기도 좀 그랬다.
“민수 말이다. 민혁이 너랑 사이가 좋지 않다만 한 가족이다.”
“압니다.”
“훈열이 경우는 그렇다고 해도 너무 모질게는 하지 말아라.”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래.”
최용욱 회장은 자기 생각이 맞는다는 것을 느끼자 한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
최민혁 역시 말없이 최용욱 회장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역시 산전수전 공수전을 다 경험한 할아버지가 그렇게 녹록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 정도는 안다. 구질구질할 필요는 없었다.
“제가 더 말할 필요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렇구나.”
그룹 승계 구도와 관련된 싸움에 대해서는 관여하기를 포기한 최용욱 회장은 다른 화제를 꺼냈다.
“오 비서 일은 잘 처리했더구나.”
“네. 아무래도 오혜정 비서가 미모도 미모지만 재능이 있습니다.”
정확히는 최훈열 전무를 통해서 잔혹한 사회의 한 단면을 경험한 오혜정 비서는 미스코리아 대회에 나갔던 철모르는 여자가 아니었다.
그런 경험이 자연스럽게 오혜정 비서에게 영향을 줬다.
그러니 TV 광고를 촬영할 때도 굳이 연기할 필요가 없었다.
자신의 경험을 자연스럽게 드러내면 되니까.
실상 오혜정의 TV 광고가 대박을 친 것은 단순히 콜린스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미 오혜정에 대한 보고를 받은 최용욱 회장은 다른 눈으로 손자를 쳐다보았다. 혹시나 비서에게 관심이 있나 싶어서다.
두 사람의 교제가 내키지는 않지만 반대할 생각은 없었다.
‘반대한다고 이 녀석이 들을 것 같지도 않고.’
그래서 손자의 혼사 문제를 들었을 때 식은땀마저 흘려야 했다. 약혼을 제안한 대상 중에는 단순히 대기업을 넘어서서 정계 실력자도 있었다.
물론 한때 최민혁이 역대급 망나니 노릇을 한 적이 있었지만 그걸 흠으로 보는 이는 없었다. 오히려 그래서 최민혁을 높이 평가했다.
정좌한 최민혁의 태도는 결코 최용욱 회장 자신에게 숙이는 자세는 아니었다. 스스로 힘으로 KM 전자를 승계받았으니까 말이다.
최용욱 회장은 오혜정에 대한 최민혁의 태도가 궁금해서 계속 질문했다.
“…그런데 오 비서는 왜 아직도 비서 일을 계속하는지 모르겠구나.”
“본인이 스스로 선택한 겁니다.”
“연예인 대신에 비서 일을 선택했다고?”
“네. 최훈열 전무에 대한 일은 이미 다른 채널을 통해서 말해줬습니다.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고 하는 것을 봐서는 이미 모 기획사를 통해서 들은 눈치였습니다.”
“하긴, 그 일을 아는 사람이 한둘은 아니니까. 더욱이 TV 광고로 사람들에게 알려지면서 미스코리아 관련자 중에 입을 열 수도 있지. 아니면 스카우트하려고 의도적으로 그랬을 수도 있고. 쯧, 그놈의 욕심이란.”
최민혁도 굳이 문제가 없는 오혜정 비서의 사생활까지 자세하게 파악하지 않았지만, 그 역시 짐작하는 바가 있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비슷할 겁니다. 그건 오 비서가 선택할 일이라서 굳이 관여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래. 그러면 됐다. 그 정도 했으면, 본인 인생을 찾았을 테니까. 나머지는 스스로 결정할 문제겠지.”
최용욱 회장은 최민혁의 마음 씀씀이에 깊이 만족했다. 매사 은원을 확실하게 정리하는 모습은 장남이나 차남과는 전혀 달랐다.
최민혁은 이 자리에서 굳이 쓸데없는 시선을 받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너무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제 나이가 비록 어리지만 따로 생각해 둔 바가 있습니다. 다 계획하고 움직이는 겁니다.”
“그래, 알겠다.”
그는 최용욱 회장과 굳이 얼굴을 붉히기 싫어서 이 자리를 찾았지만, 그렇다고 이 일을 그냥 넘길 생각은 없었다.
“아, 그리고 한 가지 부탁이라면 첫째 큰아버지가 원하는 대로 제스처를 취해 주세요. 할아버지의 지지를 얻는다면 과연 부회장이나 이사회에서 어떤 반응을 보일지 그게 궁금합니다.”
“꼭 그렇게 해야 되겠느냐? 적당히 압력을 넣어서 처리하는 것도 좋지 않겠니?”
“제 문제를 떠나서 할아버지도 이제 눈치를 채셨을 텐데요? 설마 할아버지는 그런 일을 당하고도 기분이 좋습니까?”
“끙. 알았다. 하지만 난 그냥 적당한 수준에서 어필할 뿐이다.”
“그 정도면 충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