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입술을 살짝 깨문 오혜정 비서는 괜히 마음이 심란해서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이번에 TV 광고를 찍은 경험 덕분에 과거보다 더 성장한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최민혁의 시선을 끌지는 못했다.
최근 광고를 찍으면서 협력업체 실무자의 집요한 시선도 받았다.
그녀가 만난 그 어떤 남자도 자신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중에는 소위 말하는 재벌 3세도 있었는데, 달라지지 않았다.
심지어 요즘 한창 뜨고 있는 임병준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여자 문제로 소문이 무성하다고 하지만 중저음의 목소리는 여자의 시선을 끌었다.
특히 특유의 짙은 눈빛에 오혜정 비서도 마음이 살짝 흔들리고 말았다.
아마 최민혁을 알지 못했다면 그의 제안을 거절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녀는 결국 속상한 마음에 한선화를 찾아가서 함께 휴게실로 갔다.
“우리 실장님은 보통 남자와는 많이 다른 것 같아. 나 보기를 돌같이 하는 사람은 처음 봤어.”
한선화도 최민혁 실장이 오늘 출근한 것을 봤기에 호기심으로 나왔다가 피식 웃고 말았다.
“정말?”
“어, 언니가 말하는 남자와는 너무 달라서 이젠 피곤해.”
“또 차였구나.”
깔깔거리면서 한참 웃던 한선화도 새삼스러운 눈으로 오혜정 비서를 살폈다. 그녀는 괜한 샘에 놀리듯이 말했다.
“다른 여자가 있을 수 있지.”
“그럴 리가 없어. 내가 실장님 비서인데, 그걸 모르겠어? 연락하는 여자는 아무도 없어.”
“정말 다른 여자에게 전화 한 통 안 와?”
“응. 가만.”
게슴츠레한 눈으로 한선화 비서를 째려봤다.
“설마 언니도 최 실장님에게 관심 있어?”
“솔직히 없는 게 이상하잖아. 요즘 우리 실장님 인기가 얼마나 뜨거워.”
갑자기 우리 실장님이란 말에 오혜정 비서는 화를 내려다가 피식 웃고 말았다.
“마음대로 해.”
“어, 정말? 그러면 내가 돌진해도 괜찮아?”
“실장님이 내 물건도 아니잖아.”
‘요것 봐라.’
피식 웃은 한선화 비서는 갑자기 깔깔거리면서 오혜정 비서를 비웃었다.
“걱정하지 마. 난 연하는 관심 없으니까.”
“체.”
“가만. 너 정말 실장님에게 관심이 있구나.”
“하아.”
오혜정 비서는 한숨을 내쉬면서 시선을 돌리고 말았다. 처음에는 아니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최민혁에게 시선이 갔다.
이제까지 어떤 남자를 만나든 간에 받아 왔던 시선과는 차별화된 시선 때문이다.
최민혁이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은 결코 여자를 바라보는 눈빛이 아니었다.
그런데도 은근히 그녀를 챙겨주고, 보호해 주었다.
그런 관심과 애정.
그것은 그녀가 태어나서 처음 받아보는 것이었다.
하지만 덕분에 갈등도 많이 했다.
자신은 비서고, 상대는 재벌가이니까.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서자라는 신분이었다.
그때는 그래도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콜린스 이후에 모든 것이 바뀌었다.
마치 세상에 대격변이라도 일어난 것과 같은 변화가 일어났다.
최민혁은 뜬금없는 KM 전자 오너가 되었다. KM 전자 주가는 벌써 65,000원을 뚫은 채 계속 상승세를 이어갔다.
억만장자 최민혁.
이제는 감히 쳐다보기도 어려울 정도의 남자가 된 것이었다.
덕분에 1억 2천이라는 돈을 얻어서 작은 빌라로 이사도 했다. 가족은 다들 행복했다. 그렇다고 자기 마음이 편한 것은 아니었다.
한선화 비서도 문득 최민혁 실장의 변화를 떠올리면서 혀를 찼다. 과거에는 쳐다보지 못할 상대가 아니었지만, 지금은 아니다.
“세상일이 참 왜 이 모양인지 모르겠네.”
“언니도 나랑 실장님이랑 어렵다고 봐?”
“몇 달 전이라면 아니겠지만 지금은… 모르겠다. 생각해 보면, 우리 최 실장님이 대단하기는 대단해. 몇 달 사이에 도대체 이렇게 변할 수 있을까?”
“…….”
오혜정 비서도 새삼 KM 전자에 일어난 일을 떠올리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말았다.
‘사장님도 이제는 최 실장님 눈치를 볼 정도이니.’
* * *
차세대 패널에 관한 이야기가 어제오늘 나온 것은 아니다.
이미 콜린스 덕분에 재미를 단단히 본 KM 전자도 굳이 무시할 수는 없었다.
더욱이 최민혁이 LCD를 밀면서 이 문제는 그냥 가볍게 간과할 일이 아니게 되었다.
KM 전자는 내부적으로 앞으로 차세대 패널 문제를 어떻게 할지 결정하고, 필요하다면 차세대 TV 개발도 고민해야 했다.
콜린스로 지금 당장은 잘나가기는 하지만 미래를 준비해야 했기 때문이다.
오영근 사장 역시 기획 팀의 보고와 주변 지인을 통해서 차세대 패널에 대한 정보를 계속 얻었다. 그가 특히 신경을 쓴 것은 바로 통상부가 과학기술처, 업계, 학계 인력을 모두 모아서 29인치 LCD와, 55인치 PDP 개발에 착수한 소식을 들었다.
KM 전자 역시 이번 일을 마냥 무시할 수가 없었는데, 정작 책임자인 최민혁은 이탈리아에 꼭꼭 숨어서 오지 않았던 것이다.
이제 최민혁 실장이 돌아왔으니, 이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해야 했다.
문형섭 부사장 역시 새로운 패널에 들어가는 스피커 문제 때문에 이 일을 쉽게 생각하지 않았다.
“사장님,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최 실장이 왔으니, 일단 그 친구 이야기를 들어 보면서 결정하세.”
“차라리 지금 호출하는 게 어떻습니까?”
“밀린 일도 우선 확인하고 나면 먼저 찾아오겠지. 어느 정도 숨을 돌릴 여유는 줘야 하잖아.”
“참, 사장님도 답답합니다. 이번 통상부 패널 개발은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오성 전자나 LC 전자가 단단히 작정했습니다. 그들이 지금까지 퍼부은 돈만 해도 수백억은 족히 넘으니까요.”
이번 협력 사업은 단순히 두 회사만 끼어들 것은 아니었다. HY 전자를 비롯해 알 만한 대기업은 죄다 참여했다.
문형섭 부사장은 안색을 딱딱하게 굳힌 채 목소리를 낮추었다.
“이번에 대기업이 콜린스를 엿 먹이기 위해서라도 단단히 작정한 것 같습니다. 아예 작정하고 짰습니다. 이 일을 이용해서 노골적으로 압박을 가할 겁니다. 이 일은 절대로 만만하게 볼 상황이 아닙니다.”
“설마 그렇게까지 할까?”
“그게 아니었다면 딱 우리 회사만 찍어서 배제할 이유가 있습니까. 권태성 실장 인터뷰도 단순히 우리 KM 전자를 압박 넣는 것으로만 생각할 수 없습니다. 일본 대기업에서 이미 PDP 신제품을 내놓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최 실장은 이미 PDP의 한계가 명확해서 제약이 심하다고 하지 않았나?”
“물론 지금은 그렇죠. 하지만 계속 기술 혁신이 이루어지는데, 내년 중순만 넘어도 상황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오성 전자도 콜린스 이후에 PDP 관련 특허를 150% 가까이 쏟아내고 있습니다. 작정한 겁니다!”
오영근 사장도 그제야 이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했다. 그는 자리에 계속 있을 수가 없어서 벌떡 일어나 버렸다.
“최 실장을 만나 봐야겠어.”
“알겠습니다.”
문형섭 부사장은 오영근 사장 뒤를 따르면서도 혀를 찼다. 그 역시 1층에 있었던 KM 전자 임직원의 환영 쇼를 들었기 때문이다.
‘호출이 아니라 사장이 직접 가야 한다니. 확실히 최 실장이 오너가 아니라고 해도 영향력이 많이 커진 것 같아.’
* * *
최민혁도 민성일 과장이나 오혜정 비서의 변화를 보면서 기존에 있었던 일을 꼼꼼하게 살폈다. 그리고 이사회 보고를 위해서 유럽에서 진행한 일을 쭉 정리했다.
다만 민감한 특허 문제를 보자 고민에 빠졌다. 그냥 이사회에서 넘어가면 좋겠지만, 이일태 이사 경우에는 반드시 걸고넘어질 것이 분명했다.
최소한 설명을 해줘야 하는데, 굳이 MP3 특허에 대한 것을 알리고 싶지는 않았다. 시간이 지나면 안다고 해도 굳이 그 중대성을 말할 필요는 없으니까.
‘이사회 통해서 보고하는 것보다는 사장님에게 직접 보고하는 것이 좋을 것 같구나.’
굳이 시즈벨 계약에 대한 것을 이일태 이사가 안다고 해서 큰 문제가 될 것 같지는 않았다. 다만 문제를 만들 이유는 없었다. 콜린스에 미쳐 있는 최문경 부회장 귀에 들어가도록 내버려 둘 이유는 없었다.
‘최두진 사장도 문제야. 이상할 정도로 조용해서 오히려 더 불안하다니까.’
그런데 오영근 사장이 문형섭 부사장과 같이 실장실을 찾아왔다.
“최 실장, 유럽 여행은 잘 갔다 왔는가?”
“아, 사장님 덕분에 잘 끝냈습니다.”
최민혁은 밝은 얼굴로 두 사람을 환대했지만 두 사람의 굳은 안색을 보자 고개를 갸웃했다.
그는 이탈리아 관광을 즐긴 것 때문에 질책하려고 그런가 싶었는데, 알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
“PDP 말입니까?”
“그것 때문에 지금 난리가 났지 않은가. HY 전자나 대운 전자조차 난리가 났어. 콜린스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으로 이쪽을 선택했으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장담하지만 절대로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문형섭 부사장이 바로 끼어들었다.
“내가 최 실장, 자네를 무시하려는 것은 아냐. 하지만 통상부가 나서서 민관합동사업으로 무려 3,000억을 투자하네. 거기에 다른 대기업 투자는 빼고야. 조 단위 돈이 들어가는데, 그걸 가볍게 생각할 건가?”
“네. 절대로 안 됩니다. 수천억 아니라, 수십조를 퍼부어도 안 되는 것은 안 되는 겁니다.”
PDP가 반짝하기는 하지만 결국에 몰락의 길을 걸어간다. 이 사업에 막대한 투자를 했던 일본 대기업이 천문학적인 손실을 입었다.
오성 전자는 아슬아슬하게 잘 빠져나왔지만, 만약 인생 1회차에 비해서 투자를 더 늘린다면 일본 대기업 꼴 나지 않는다고 하기는 힘들다.
“허.”
그걸 모르는 문형섭 부사장은 도저히 최민혁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았고, 최민혁 반응에 혀를 내두른 채 쳐다보았다.
오영근 사장이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자네는 LCD가 차세대 시장을 장악한다고 했지만, 그 LCD조차 제대로 진행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네. 정작 PDP는 40인치 이상 대형 제품이 나오고 있어.”
최민혁은 유럽의 독단적인 자기 행보보다는 오히려 LCD나 PDP에 집착하는 두 사람을 보고서야 자기 계획이 제대로 먹혔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 회사가 이 정도이니, 다른 회사는 굳이 확인할 필요가 없지. 차라리 잘되었다. 오영근 사장이 저 정도라면, 권태성 실장의 의심도 줄어들 거야. 그건 그것대로 나쁘지 않아.’
결국 이 일에 대한 자세한 내막을 두 사람에게 밝힐 수는 없었다.
‘어차피 LCD는 물타기 용도로 검토 중이니.’
최민혁은 턱을 쓰다듬으면서 오혜정 비서가 내온 산삼차에 깜짝 놀란 두 사람에게 PDP에 관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3년 전에 후지쓰가 세계 최초로 PDP TV 개발 양산에 성공한 것은 아실 테고.”
당시만 해도 PDP TV는 LCD보다 응답 속도와 잔상이 없다는 점에서 주목을 받았다.
특히 검은색을 잘 표현한 점과 빛샘 현상이 없다는 점은 LCD보다 절대 우위였다.
하지만 근본적인 문제 중의 하나가 바로 소음과 번인 현상이다.
PDP는 구조적으로 전력 소모가 높아서 냉각팬을 사용해야 했는데, 이 소음이 만만치 않았다.
이보다 더 큰 문제점은 역시 번인이다.
해당 화면이 유령처럼 남아 있는 이 현상은 근본적으로 해결할 방법이 없었다.
자연스럽게 수명이 문제가 되었다.
PDP TV를 구매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이 소음과 수명 문제에 직면했고, 아는 지인을 통해서 이 문제를 계속 호소했다.
PC 동호회 활동이 활성화되면서 이 문제를 특히 주목을 받았다.
최민혁은 이 문제를 심각하게 다루었다.
“두 분은 이 바닥에서 경험이 많지 않습니까. 고객의 마음을 안다면 이 PDP TV 미래가 어떤지 누구보다 잘 아실 겁니다.”
그는 실제로 이런 문제에 대비해서 기획 팀이 지금까지 조사한 고객 반응 보고서를 내밀었다.
[쪽발이 새끼들, 진짜 내가 일제 쓰면 사람이 아니다.]
[아니, 번인 때문에 문제가 있다고 해도 안 바꿔주는 것은 또 뭐야? 정말 일본의 그 대단한 대기업 AS가 맞는 거야?]
[어휴, 오성 애들도 텄어. 아니, 베낄 것을 베껴야 할 것 아냐. 어떻게 번인 TV를 그대로 따르냐.]
오성 전자에서 작년에 출시한 PDP에 대한 고객 불만은 하늘을 찔렀다.
오성 전자는 교체라는 카드를 내걸었지만, 여전히 문제 자체를 없앨 수는 없었다.
욕설로 가득한 게시판을 보고서야 두 사람은 흠칫했다.
그들 역시 오성 전자를 비롯한 가전 3사의 PDP 광고와 마케팅에 혹했다. 그런데 막상 속을 들여다보면, 상황이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오성 전자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비용을 아끼지 않았지만 당장 구체적인 결과는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통상부가 갑자기 미친놈처럼 설치는 것을 본 터라 미련을 버리지 못했던 것이다.
“만약 PDP 문제점을 극복한다면 상황이 달라지지 않겠나?”
“절대로 극복 못 합니다. 만약 한계를 넘어선다면 그건 PDP가 아니라 다른 새로운 패널이 될 겁니다. 있다고 한다면 차라리 LCD 액정 문제를 극복하는 것이 더 확실합니다.”
“흠.”
두 사람은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콜린스 사태 이후에 KM 전자가 좋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이상하게 국내 다른 대기업에서 왕따를 당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