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141화 (141/1,021)

#141

회의실 한쪽에는 최민혁의 사진과 프로필이 장황하게 잘 나와 있었다. 태어난 시기부터 시작해서 이제까지 뭘 했는지에 대한 기록이다.

다행이라면 한국 쪽에 있는 정보원을 통해 필요한 자료를 다 얻었다는 것.

그래서 다들 골머리를 앓았다.

필요하다면 다시 MP3 특허권을 가져오면 된다고 쉽게 생각했다.

그런데 최민혁 실장의 이력은 생각한 것보다 더 화려했다.

특히 KM 전자에서 불필요하다는 조직을 단호하게 잘라낸 것에 주목했고, 선택과 집중을 통해서 콜린스 초대박을 터트린 것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두 사람의 갈등 때문에 이 일을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던 한 이사는 인상을 잔뜩 찌푸리고 말았다.

“으음, 전 엔스 하이데커 IFA 위원장이 멋모르는 애송이 하나 내세워서 오다 히로 부사장을 곤란하게 했다고 생각했는데, 이상하군요.”

“톰슨과 손잡고 쇼한 것을 보고 가소롭게 생각했는데, 전혀 아닙니다. 콜린스 영업을 진행하면서도 그 뒤로는 MP3 특허권을 사들였네요.”

시즈벨 이사회 임원은 심각한 눈으로 최민혁의 현재 동향을 확인하였다. 그들이 생각한 것과는 전혀 다른 결과였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해야 할까.

특허 로열티만으로 먹고사는 이들은 프랑스 언론이나 멋모르는 한국 조사원의 결과를 애초에 믿지 않았다.

그 이유 때문에 이제는 MP3 특허권을 쉽게 보지 않았다.

특히 비디오 특허를 통해서 이동호 교수를 밀어준 점을 더 집중적으로 조사했다.

듬직한 느낌의 가브리엘 아담스 대표이사가 다시 싸우려는 두 사람을 막았다.

“둘 다 그만하시죠. 지금 서로 싸울 때가 아니지 않습니까?”

분노한 제이미 니콜라스 이사도 뒤로 한 걸음 물러나고 말았다.

패트릭 호프만 이사는 씩 웃으면서 통쾌하게 눈으로 쳐다보았다. 이번에 제대로 엿 먹은 제이미 이사의 모습에 쾌감마저 느꼈다.

가브리엘 대표이사는 두 사람의 갈등에 눈살을 찌푸렸다.

“패트릭 이사, MP3 특허권은 우리 모두에게 중요한 일입니다!”

“지난주에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말씀한 것으로 압니다만?”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무덤덤한 가브리엘 대표이사의 말에 패트릭 이사도 인상을 찡그렸다. MP3 관련 특허에 대한 일은 제이미 이사가 다 진행했다. 그때만 해도 반응이 없었는데, 지금은 태도가 달라졌다.

“그러면 콜린스 신드롬을 일으킨 최민혁 실장 같은 기린아의 안목을 무시하는 겁니까?”

콜린스 신드롬이란 말에 패트릭 이사도 마냥 자기 고집을 부리지 않았다.

‘존난 근엄한 척하네.’

내심 한바탕할까 했지만 차가운 다른 이사진의 시선에 입을 다물었다.

가브리엘 대표이사는 담담한 얼굴로 말했다.

“이미 KM 전자에서 만나자는 요청이 들어왔습니다. 처음에는 뭐 하는 업체인지 몰라서 일정을 뒤로 미뤘는데, 아무래도 우리 쪽이 가진 MP3 특허 때문인 것 같습니다.”

그제야 이사회의 분위기가 달라졌다.

뒤늦게 제이미 이사가 나름 MP3 관련 특허를 사들였다는 것을 기억해 냈다. 당시만 해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일이었다.

지금도 사실 관련 자료를 보면서 다들 고개를 갸웃갸웃했다.

‘도대체 이게 무슨 돈이 된다고 그러는 걸까?’

심지어 패트릭 이사는 이 건을 빌미로 제이미 이사를 조롱했었다.

심통이 난 제이미 이사가 툴툴거렸다.

“뭘 그렇게 심각합니까. 인제 와서 의미가 없습니다. 그냥 최민혁 실장에게 우리 특허권을 넘기면 간단히 될 일입니다!”

별 표정이 없던 가브리엘 대표이사 목소리가 차갑게 바뀌었다.

“제이미 이사!”

“전 잘 모르겠네요.”

고개를 팩 돌린 제이미 이사는 더 간섭하고 싶지 않은 얼굴이었다.

‘이미 너무 늦었어.’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이 바로 톰슨 멀티미디어가 가진 특허다. 더 황당한 것은 KM 전자의 행보다. 최근 MP3 관련 특허를 한국이 아니라 유럽에 먼저 출원했다는 정보까지 어렵게 얻었다.

잘은 모르지만, 지금까지 최민혁 실장의 행보를 봐서는 자사가 가진 특허를 희석시킬 가능성이 크다.

굳이 그 정보까지 밝히지 않는 이유는 그 특허가 뭔지 물을 것이 뻔해서였다.

‘괜한 이야기를 하면 그게 뭐냐고 따질 거고, 왜 그 정보에 대해서 자세히 모르냐고 지랄하겠지. 저 돼지 새끼는 날 무능하다고 물고 늘어질 거고!’

그가 입을 다물자 회의는 그대로 진행되었다. 물론 안건은 시간이 갈수록 그 어느 때보다 심각하게 다루어졌다.

“MP3 특허권에 대해서는 다시 검토하기 바랍니다. 필요하다면 거꾸로 우리가 최민혁 실장에게 다시 특허를 매입할 방법도 강구하세요. 미팅 일정은 그 이후로 잡겠습니다. KM 전자 쪽에는 적당히 핑계를 대세요.”

“…알겠습니다.”

제이미 이사는 이미 칼하인츠 박사를 상대로 한 최민혁의 행보를 잘 알았다. 그토록 치밀하게 일을 진행한 이가 특허를 만에 하나라도 팔 리가 없었다.

‘골치야.’

회의가 끝이 났지만 다들 머릿속이 복잡하기만 했다. 그들도 최민혁 실장에게서 온 미팅 요청을 이제야 안 사람도 많았던 것이었다.

물론 그들도 아직 영문을 잘 몰랐다. 돌아가는 상황을 봐서 MP3 가치가 있다는 정도는 예측했지만, 그 미래 가치는 몰랐던 것이었다.

‘MP3 특허가 그렇게 중요한가?’

* * *

최민혁도 나름 시즈벨에 대해서는 조심했다. 하지만 그도 MP3 특허권 매입 후의 상황에 대해서는 많이 우려했다.

굳이 임기석 부장을 통해서 시즈벨이 미래에 사들이는 특허까지 미리 선점한 것도, 방어 특허까지 미리 준비한 것도 그 이유다.

아니나 다를까, 시즈벨에서 민감한 반응을 보이자 한숨을 내쉬었다.

‘안 좋네. 짜증나네. 몇 건 되지도 않는 특허 때문에 이렇게 고민해야 한다니.’

그런데 쉽게 생각할 수도 없다. 레인콤, 디지털웨이를 비롯한 중견 기업을 압박한 것이 바로 시즈벨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오성 전자나 LC 전자를 상대로 대당 0.7달러 로열티를 요구했다.

그러니 어떻게 해서라도 특허권을 강탈하거나 처리를 해둬야 했다.

최민혁은 만약을 위해서 톰슨 측과 협상안에도 특허권 매입 관련된 부분을 다 뺐고, 뉴스에는 아예 나오지 않도록 조치했다.

그럼에도 상대가 MP3 특허에 의심을 품은 이상 이제는 서두를 수가 없었다.

괜히 이쪽 카드를 먼저 보여줬다가는 오히려 역풍을 맞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이미 충분한 히든카드를 만들어 뒀다.

최민혁은 덕분에 이탈리아로 가서 느긋한 생활을 해야만 했다.

딱히 그럴 의도는 아니었지만 마치 여행객처럼 이탈리아 곳곳을 돌아다녔다.

베네치아 운하에서 수상버스인 바포레토도 즐겼다.

부드러운 햇살을 받으면서 운하를 돌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거기에 가끔 보이는 멋진 유럽 여자의 몸매를 감상하는 것도 좋았다.

인생 1회차에서는 살기 위해서 뛰어다닌 터라 유럽에 와서도 제대로 된 관광을 즐기지 못했던 것과는 사뭇 다른 경험이었다.

최민혁은 수상버스 뒤편에 반쯤 누운 채 오가는 관광객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여유가 지난 1회차의 아픔과 근심을 그래도 씻어주는 것만 같았다.

조성돈 팀장을 비롯한 나머지 이들은 천하태평인 최민혁의 모습에 이래도 괜찮을까 싶을 정도였다. 시즈벨 때문이 아니라 일이 없다면 당장 한국으로 돌아가서 할 일이 산적해 있기 때문이다.

“저기 실장님…….”

“너무 걱정하지 말고, 좀 즐기세요.”

시즈벨 상황을 예의주시한 조성돈 팀장은 그럴 수가 없었다.

“그쪽에도 미팅 일정을 연기한 것까지는 이해가 되는데, 뜻밖에 실장님에 관한 조사를 꽤 진행한 것으로 보입니다.”

한국 사정을 잘 모르는 시즈벨이 한국의 한 흥신소를 통해서 의뢰를 맡겼는데, 그 일이 우영민 과장 귀에 들어가면서 자연스럽게 조성돈 팀장도 안 것이었다.

“저요? 참 할 일이 더럽게 없나 봅니다.”

굳어 있는 조성돈 팀장과는 달리 선글라스를 쓴 채 이 뜻밖의 이탈리아 관광을 즐기던 배종대 과장이 슬며시 입을 열었다.

“실장님, 제가 듣기로 임기석 부장님 이야기로는 굳이 시즈벨 특허가 없어도 된다는 소리가 있던데,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요?”

“네, 있습니다.”

물론 지금 KM 전자는 MP3 관련 메인 특허를 다 매입했다.

그런데 다 그런 것도 아니다.

몇몇 특허는 문제의 소지가 다분했다.

몇몇 시즈벨이 가진 특허도 그런 것 중의 하나다.

최민혁이 굳이 방어 특허를 미리 준비한 것은 이런 문제를 희석하기 위함이었다.

‘시즈벨은 그 사실을 모르지.’

“아직 시즈벨도 지금 자신이 가지고 있는 특허가 어떤 가치가 있는지는 구체적으로 잘 모르고 있어요. MP3 플레이어 자체가 시장에 나오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배종대 과장도 느낀 바가 있었다.

“MP3 인더스트리 자체가 없기에 MP3가 시장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그들이 가진 특허가 그 시장에서 왜 필요한지도 알 수 없다는 말씀입니까?”

최민혁은 훌륭한 배종대 과장의 추리에 피식 웃었다.

“그렇죠.”

“으음.”

하지만 그도, 다른 두 사람도 MP3 인더스트리에 대해서는 뜬구름 잡기 같아서 선뜻 뭐라고 확신할 수는 없었다.

최민혁은 굳이 그 의문까지 풀어주지 않았다.

‘그래서 지금이 마지막 기회지. 1년만 지나도 시즈벨은 100억을 준다고 해도 안 팔 테니까.’

최민혁은 그런 이유 때문에 자신이 적극 나서서 시즈벨의 특허 가치를 올려줘서는 곤란했다. 너희 특허 없어도 우린 상관없다는 자세가 필요하다.

“만약 시즈벨이 저에 대해서 조사하고 있다면 지금 우리 모습도 지켜볼 겁니다. 그러면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요? 과연 우리가 자신들의 특허를 필요로 한다고 생각할까요? 아니면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라고 생각할까요?”

“…그렇습니까.”

조성돈 팀장을 비롯한 배종대 과장, 정성근 대리는 슬쩍 수상버스 주변을 돌아보았다. 혹시라도 미행이 있을까 염려한 것이다.

늘 최민혁의 근접 경호를 하던 김명준 과장이 턱짓으로 한 곳을 가리켰다.

그들이 탄 수상버스를 따라오는 흰색 요트.

그 위에 탄 두 사람이 손을 흔들면서 뒤를 따르고 있었다.

겉으로 봐서는 이탈리아 관광을 즐기는 모습이었다.

하지만 김명준 과장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며칠 전에 호텔부터 시작해서 계속 따라온 친구들입니다. 모두 총 6명인데, 교대로 바꿔가면서 미행하더군요.”

“……!”

다들 깜짝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설마 이탈리아에서 첩보 영화를 찍을 줄은 몰랐던 것이었다.

하지만 이미 일종의 흥신소 직원과 비슷하다는 것을 보고받은 최민혁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너무 신경 쓸 필요 없어요. 우리 행적을 조사하는 것뿐이니까. 지금은 인내가 답입니다. 아, 그리고 임기석 부장에게 알려서 공간 코딩 특허 출원을 빨리 서두르라고 재촉하세요.”

“……알겠습니다.”

최민혁은 이보다 뜨겁게 달아오르기 시작한 KM 전자 주가에 관심을 뒀다.

“우리 회사 주가는 좀 올랐어요?”

“장난 아닙니다.”

“그런가요?”

조성돈 팀장은 이미 박상기 차장에게서 보고받은 국내 주식 상황에 대해서 꼼꼼하게 보고하기 시작했다.

최민혁도 피식 웃으면서 KM 주가 변화를 묵묵히 듣기만 했다.

‘계획한 대로군.’

* * *

최민혁 일행의 행적은 시즈벨에도 그대로 전해졌다.

톰슨의 특허를 확보할 때 발 빠르게 움직였던 것과는 전혀 다른 최민혁 모습에 그들도 당황했다.

자신들이야 아쉬운 것이 없으니, 시간을 질질 끌면 오히려 최민혁 실장이 저자세를 취할 것이라는 예상과는 너무 달랐다.

패트릭 이사는 이 결과에 다른 이사진을 대놓고 조롱했다.

하지만 집요한 제이미 니콜라스 이사는 오히려 침묵했다.

앞뒤가 맞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시즈벨은 일단 계속 지켜보는 것으로 결론 내렸다.

그들이 대안으로 선택한 것은 KM 전자에 관한 조사였다.

KM 전자 주가는 당연히 그 항목에 들어갔다.

KM 전자의 주가는 IFA 전시회 한 달 전까지만 해도 1,500원까지 추락했다.

거래도 없고, 저가 개미 매수도 없었다.

아예 KM 전자는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다.

심지어 KM 전자 동호회 게시판에도 관련 정보가 없었다.

KM 전자 주주는 이제 다들 자포자기했다.

이미 팔 사람은 다 팔고 나간 터라 강제 장기 주식 투자를 하게 된 셈이다.

그들도 불만이 많았지만 지난 주주총회에서 최민혁 실장이 보여준 그 강력한 인상에 차마 항의조차 하지도 못했다.

불만을 토로하려면 다음 분기 실적이 나와야 하기 때문이다.

지난 주주총회에서 최민혁에게 대들었다가 망신만 당한 김홍수 사장 역시 이제는 아예 KM 전자 주가만큼은 보지도 않았다.

그나마 주식 정보를 확인하지 않으니, 이제 살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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