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
드리 부사장도 콜린스를 유통함으로써 회사 이미지가 좋아진다면 자금적인 부분에서도 숨통이 트일 것이라고 판단했다.
다만 그 역시 톰슨 멀티미디어 대한 자부심을 쉽게 떨치지 못했다.
“꼭 이 회사랑 손을 잡아야겠나?”
“네!”
다른 이사진은 멍하니 티에리 이사가 내놓은 계획안을 살필 뿐이었다. 그만큼 콜린스에 대한 평가가 대단했기 때문이다.
“후유, 알겠네. 어쩔 수 없지. 뭐라도 해봐야 외부 지원을 받을 수 있을 테니.”
지금도 사퇴 압박을 받고 있는 드리 부사장도 어쩔 수가 없었다. 손가락만 빨고 있으면 프랑스 정부에서도 강압적인 방법을 사용하리라는 것을 느꼈기 때문이다.
“나도 그렇지만 다른 임원도 KM 전자 프랑스 지사에 가서 직접 콜린스를 확인한 후에 최종 결론을 내는 것으로 하지. 대운 전자는 그룹 차원에서 관심이 많다고 했잖아. 대운 전자를 견제하는 오성 전자 쪽에도 알려. 만에 하나라도 KM 전자와 계약이 틀어지면 대운 전자와 오성 전자와의 협상에 유리하잖아.”
“알겠습니다.”
* * *
최민혁의 기조연설 이후에 KM 전자의 부스는 대박을 쳤다.
마치 유럽 가전업계 분위기를 KM 전자가 주도하는 것 같았다.
시대를 앞서간 콜린스의 인기는 시간이 갈수록 그 기세를 달리했다.
이 콜린스 때문에 오성 전자를 비롯한 다른 회사들의 IFA 전시회 결과는 그다지 좋지가 않았다.
TV 사업을 하고 있는 한국 대기업은 이 예상치 못한 결과에 큰 충격을 받았다.
오성 전자나 LC 전자 역시 위기감을 느꼈지만, 대운 전자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대운 전자의 주요 대상국 중의 하나인 독일.
이 시장에 KM 전자가 도전장을 던진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대운 전자 기획실의 해외 사업을 담당하던 민경기 부장은 충격은 둘째 치고, 전화로 고문에 가까운 압력을 받았다.
[민 부장, 당신 도대체 제정신이야? 콜린스에 대해서 사전에 몰랐다는 것이 말이 되는 소리야? 어떻게 언론을 통해서 콜린스가 진행되는 것을 알아야 해?]
단순한 압력이 아니었다.
아예 유럽 조직 자체에 대한 구조조정이 진행될 것이라는 협박을 들었다.
그는 해외사업 팀에서 진행하는 자잘한 일을 다 접었고, 그 인력을 전부 KM 전자의 행적을 감시하는 곳에 두었다.
그런데 정작 연락을 한 이는 톰슨 멀티미디어에 로비했던 대니 에니얼 이사였다.
[혹시 KM 전자라고 아십니까?]
한 번 된통 당한 터라 발 빠르게 대운 전자 기획실에 보고했다.
나름대로 온 힘을 다한 보고였다.
하지만 일방적인 보고만 들은 오재호 기획실장은 휴대폰이 펑 하고 터질 정도로 고함을 내질렀다.
[야, 민경기, 너 진짜 많이 컸다. 프랑스에 가 있으니, 날 우습게 아는 거야? 도대체 사태가 이 지경이 될 때까지 뭐 한 거야? 지금 우리 회사가 초점을 맞추는 곳이 프랑스라는 것을 알고도 그런 소리를 하는 거야? 너 당장 회사 집어치우고 싶어? 이 병신아, 정신 안 차릴래?]
회의실, 다른 임직원이 옆에서 다 듣는 자리에서 욕설을 들었다.
미친놈도 울고 갈 정도로 무지막지한 인격 살해였다.
한편으로 좀 억울했다.
아니, 대니 이사를 통해 정보를 얻어서 보고했지 않은가.
그럼에도 비난을 위한 비난만 받았다.
일테면 이런 안 좋은 보고를 들은 것만으로 오재호 기획실장은 분노가 폭발한 것이었다.
그제야 심각성을 깨달았다.
‘맞아, 회장님이 유럽 공략은 직접 관리하고 있는데…….’
대운 그룹의 세계 경영.
이를 위한 유럽의 현지 그룹 본부 후보지 중의 하나가 바로 프랑스였다.
대운 전자는 이미 기존 기업 경영과는 달리 해외 현지에서 이익을 얻어서 다시 현지에 재투자하는 방식을 결정했다.
그 나라에 단물만 빨아먹는 행태로는 글로벌기업으로의 성장에 한계를 느낀 것이다.
그 공격대가 바로 자동차와 전자다.
이 수단을 이용해서 노리는 나라 중에 프랑스와 독일이 있는데, 프랑스에는 특히 가전 공장과 전자 연구소가 자리 잡고 있다.
따라서 전략적인 동반 파트너가 무엇보다 필요했다.
그리고 대운 그룹의 전략 파트너 후보자 중에 하나가 바로 톰슨 멀티미디어였다.
대운 그룹은 이 작업을 위해서 내부적으로 2년이라는 장기 계획에 따라 하나씩 하나씩 사전 정지 작업을 진행했다.
톰슨 멀티미디어의 몰락은 대운 전자에게는 오히려 최고의 중요 뉴스였다.
그런데 KM 전자가 갑자기 튀어나와서 그 밥상에 숟가락을 올린 것이었다.
[제가 잘못 보고했습니다. 톰슨 멀티미디어가 KM 전자와 전략적인 제휴를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KM 전자는 콜린스 판로를 고민하고 있고, 그 대상으로 톰슨 멀티미디어와 협상 중입니다.]
하지만 위기감을 느낀 오재호 실장의 반응은 더 격해졌다.
[야이, 개새끼야, 아니 톰슨 멀티미디어 내부에 변화가 생기면, 우리 계획대로 풀려갈 것 같아. 그 새끼들이 또 딴소리할 것 아냐!]
[…….]
모를 리가 없는 현실.
싫든 좋든 KM 전자가 콜린스를 명분으로 협상을 진행하면 대운 전자에게는 그다지 좋은 일은 아니었다.
그리고 톰슨 멀티미디어는 자기 입장이 나아지면 기존 협상에 대한 변경을 요구할 것이 뻔했다.
제대로 된 협상이 될 리가 없었다.
답답한 민경기 부장은 어떻게 해서라도 오재호 실장을 설득하려고 노력했다.
[그건 아닙니다. 톰슨 사정이 그렇게 좋아질 리가 없습니다.]
[그걸 민경기 부장 당신이 어떻게 알아? 만약 그 사태가 일어나면 네가 책임질 거야? 아니, 뭐로 책임질 건데? 회사 손실을 어떻게 보상할래? 너희 집안 재산 다 팔아서 보상해 줄 거야? 문제가 생기면 네가 아니라 내가 책임져야 해. 말이 좀 되는 소리를 하자!]
[…죄, 죄송합니다.]
[닥치고, 인력 최대한 끌어모아서 당장 KM 전자 프랑스 지사로 가서 그 새끼들 뭐 하는지 확인해! 톰슨 이사회 새끼들이 엉뚱한 짓을 하면 가서 막으란 말이야!]
[…네.]
[병신아, 오성 전자의 권태성 실장이 KM 전자 프랑스 지사로 출국했어. 너 아직 분위기 파악 못 해? 아직도 정신 못 차리지?]
[바로 KM 전자 프랑스 지사로 출발하겠습니다!]
‘오성 전자라니, 젠장맞을.’
* * *
민경기 부장은 나름 절박한 마음으로 일단 인원을 추려서 KM 전자 프랑스 지사를 향했다.
그런데 KM 전자 프랑스 지사 1층 전시회장에 도착하자 한 사람을 발견했다.
‘진짜 오성 전자의 권태성 실장이잖아?’
그랬다.
오성 그룹 사장단 회의에서 압박을 받은 권태성 실장은 뒤늦게 자신이 로비한 톰슨 멀티미디어 관련자 이야기를 듣자 도저히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래서 결국 이곳 프랑스까지 단숨에 날아온 것이었다.
동행한 임권수 부장과 황광수 차장 역시 상황의 심각성을 알아서인지 안색이 좋지가 않았다.
권태성 실장은 KM 전자 프랑스 지사 1층에 전시된 콜린스를 비롯한 KM 전자 제품을 확인한 후에 최민혁에게 손을 내밀었다.
“이렇게 프랑스에서 다시 뵙게 되니 반갑습니다.”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외국에 나오니, 같은 한국 사람이 편합니다.”
입가에 떠오른 표정은 미소가 가득해서 마치 친구처럼 보였다. 하지만 눈빛만큼은 그 어느 때보다 더 차갑기만 했다.
최민혁 역시 겸손한 자세를 보였지만 딱히 비굴한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설마 프랑스에 벌써 지사를 설립할지는 상상도 못 했습니다.”
그는 어깨를 으쓱한 채 뒤에서 조용히 침묵하고 있는 조성돈 팀장을 가리켰다.
정확히는 콜린스 사내 발표 이후에 진행된 플랜에 따라서 이루어진 일이었다. KM 전자 프랑스 지사 설립에 대한 반대는 없었다.
“제가 한 게 뭐 있나요. 우리 조성돈 팀장님이 발 빠르게 움직인 거죠.”
조성돈 팀장은 그저 웃은 채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았다.
권태성 실장은 힐끗 조성돈 팀장을 일별한 후에 최민혁 실장에게 집중했다.
“그리고 실장님의 기조연설도 감명 깊게 봤습니다.”
“과찬입니다.”
“최 실장님의 식견에 크게 감명받았습니다. 그 덕분에 마침 프랑스에 올 일이 생기자 이렇게 최 시장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럴 리가.
IFA 전시회 중에 한국으로 불려갔다가 욕만 잔뜩 들었다.
심지어 오성 전자 본사에 가서 사장단에 두루두루 박살이 났다.
기회를 잡은 이들은 다들 권태성 실장을 죽이려고 작정한 것이었다.
그때 스트레스가 얼마나 심했으면 프랑스 내부 라인을 통해 정보를 듣기가 무섭게 프랑스로 다시 날아와서 최민혁 실장을 만나겠나.
최민혁은 굳이 그런 부분까지 알고 싶지는 않았다.
“계속 칭찬을 들으니, 낯이 뜨겁습니다.”
훈훈한 이야기에 민경기 부장은 설마 오성 전자와 KM 전자가 손을 잡았나 하는 걱정까지 했다. 하지만 그도 곧 권태성 실장의 분위기가 달라지자 귀를 쫑긋한 채 주의를 기울였다.
* * *
처음은 분위기가 좋았다.
서로 오가는 덕담은 상대에 대한 기대와 격려로 이어졌다.
하지만 어느 정도 분위기가 풀렸다고 판단한 권태성 실장은 태도를 바꾸었다.
“제가 장승일 실장을 통해서 들은 바로는 KM 그룹은 오성 임직원을 빼돌린 것에 대해서 모르더군요. 아, 외람된 이야기이지만 이번 오성 그룹 사장단 회의에서도 말이 나왔는데, 우리 직원을 빼돌린 것은 앞으로 계속 문제가 될 겁니다. 혹시 최 실장님은 이 일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합니까?”
최민혁은 피식 웃으면서 굳이 사실을 숨기지 않았다.
“저기 두 분도 원래는 우리 KM 전자 기조실 직원인 걸로 압니다. 그렇게 보면 오성 기획실에서 우리 그룹 직원을 빼돌려서 내부 정보를 빼간 것 아닙니까?”
“그거야 두 사람이 원해서 우리 회사로 온 것뿐입니다.”
“정말 그럴까요? 그렇다고 합시다. 그렇게 따지고 기존에 우리 회사 있다고 오성 전자로 이직해 간 직원은 문제가 있습니까. 설마 우리 쪽에서 그쪽으로 넘어가는 것은 문제가 안 되고, 그쪽에서 우리 쪽으로 넘어오면 안 된다고 하실 겁니까?”
“그런 말이 아닙니다.”
“제가 보기에는 오성 전자가 하면 로맨스고, KM 전자가 하면 불륜이라는 식이군요.”
“실장님이 아직 나이가 어려서 법을 잘 모르시는 것 같아요.”
“모른다라, 구체적으로 뭘 안다는 말입니까?”
“…….”
차가운 최민혁.
STB 사업부를 매각할 때 보였던 위축된 모습은 그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당시만 해도 오성 전자에 대한 거부감을 일부 보였는데, 지금은 그런 모습이 아예 없었다.
두 사람의 대화가 살벌해지자 동행한 이들 역시 숨조차 쉬지 않았다.
권태성 실장도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설마 우리 오성 전자랑 싸우자는 겁니까?”
이 정도면 최민혁도 굽힐 만하지만 그렇게 흘러가지 않았다.
“그러면 오성 전자는 우리 KM 전자가 만만해 보이나요?”
결국 너무 혈기가 넘치는 나이라고 생각해서인지 슬쩍 최용욱 회장을 걸고넘어졌다.
“하, 최 회장님이 만약 이 일을 안다면 절대로 그냥 넘어가지 않을 겁니다!”
최민혁은 냉소했다.
“이미 할아버지 지분은 다 매각하고 없습니다. 할아버지랑 KM 전자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어요. 그러니 뺨 맞은 어린아이가 부모에게 달려가서 징징 짜는 것처럼 행동하지 말고, 하고 싶은 대로 하세요.”
계속 상대가 강하게 나오자 권태성 실장도 일단 물러났다.
“하, 그런 의미가 아닙니다.”
“그러면 무슨 의미인지 모르겠네요.”
최민혁은 팔짱을 한 채 냉랭한 눈빛으로 권태성 실장과 동행을 쳐다보았다. 뒤에 동행한 이들은 아연한 얼굴을 한 채 최민혁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는 그다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미 기반은 다졌지. 굳이 오성 전자와 싸우지 않을 이유는 없지. 그게 차라리 TV 사업부를 더 높은 가격에 매각할 수단이 되니까. 그리고…….’
“콜린스 때문에 그쪽 오성 전자 대형 TV 사업부도 타격이 만만치 않을 텐데, 지금 그렇게 나온 여건이 되나 몰겠네요.”
권태성 실장은 한숨을 내쉬었다. 설마 최민혁이 자기 앞에서 이렇게 대놓고 공격적일 지는 몰랐다.
지난 STB 사업부를 매각할 때와는 최민혁의 태도가 아주 달랐다.
같은 사람인지조차 의심스러웠다.
‘그때는 발톱을 숨긴 걸까.’
아마 KM 전자에 몇 차례 당하지 않았다면 최민혁 실장을 협박까지 하겠지만 이미 쓴맛을 몇 번 경험한 후라 그럴 수가 없었다.
권태성 실장은 결국 좋은 말로 설득했다.
“…좋습니다. 뭐, 우리 회사에서 그쪽 직원을 빼간 것도 있으니, 지난 일은 그렇다고 하죠. 하지만 그 직원을 이용해서 우리 회사 내부 정보를 빼돌린 것으로 드러나면 그룹 차원에서 법적 제재가 가해질 겁니다.”
그 말에 최민혁은 노골적으로 오성 전자 기술을 싸잡아서 비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