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
프랑스인이라는 자부심이 강한 티에리 이사는 매각 소문 때문에야 비로소 한국이란 나라를 알았다.
오성 전자나 대운 전자에 대해서 알아본 것도 한 달이 채 되지 않았다.
처음에는 비웃었지만, 특히 대운 전자 담당자를 만나보고서야 생각을 바꾸었다.
대운 전자가 동유럽을 전진기지로 삼으면서 보인 행보 때문이다.
그들의 열정과 의지는 톰슨 멀티미디어에게도 나쁘지 않았다.
기반이 거의 없다시피 한 동유럽에도 그렇게 투자를 하는 상황이니, 프랑스 기업에 대한 인수 의지는 그만큼 높다고 봤다.
티에리 이사는 대운 전자의 제안을 깊이 고민한다고 밑에서 올라오는 보고안 중에 KM 전자에 대한 것을 그냥 넘겼다.
‘KM 전자 측에서 자사 제품을 우리 판매망 통해서 판매하고 싶다라……. 우리 회사가 이런 쓰레기 같은 놈들에게 이런 제안을 받다니.’
과거라면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그런데 상황이 상황이었다.
문제는 오성 전자 담당자의 제안이 생각보다는 이득이 별로 없다는 데 있었다.
결국 만약을 위해서 대운 전자의 경쟁 상대를 찾아야 하는 터라 쓰레기통에 집어 던진 KM 전자 보고서를 꺼내 살폈다.
‘아니지. 오성 전자나 대운 전자를 압박할 수단으로 KM 전자를 이용할 수도 있잖아.’
막상 기획 팀에서 조사한 내용은 무시할 정도는 아니었다.
한국 내수시장에서 대형 TV 시장만큼은 KM 전자가 장악했으니까.
‘어, 이게 진짜야? 오성 전자가 지배권을 다 장악한 것이 아니었어?’
결국 티에리 이사도 호기심을 느껴서 한국 시장을 살펴보다가 뒤늦게야 대형 TV만큼은 KM 전자가 오성 전자나 LC 전자보다 한 수 위라는 것을 알았다.
심지어 요즘 와서 부쩍 찝쩍거리는 대운 전자보다도 나았다.
티에리 이사는 결국 지금 톰슨 멀티미디어가 처해 있는 갑갑한 현실 때문에 KM 전자 미팅 요청을 받아들이고 말았다.
때문에 앙트 브라소 부장 팀은 발칵 뒤집혔다.
형식적으로 KM 전자를 보고서에 추가했는데, 티에리 이사가 관심을 뒀기 때문이다.
앙트 부장은 곧 정성근 대리에게 전화해서 약속을 잡았다.
티에리 이사는 톰슨 멀티미디어 내부 사정 때문에 이번 미팅에 직접 참석했다.
그런데 나타난 이는 뜻밖에도 자기 아들보다 더 어린 최민혁 실장이었다.
간단한 소개를 받기는 했지만, 영문을 몰라서 눈만 끔뻑였다.
사실 화가 나서 자리에서 일어나려다가 일단 억지로 참았다.
통역으로 나선 리지 브로체어 부장이 나서서 티에리 이사를 제법 장황하게 소개한 후에 간단히 말했다.
“이쪽은 KM 전자에서 나온 최민혁 실장님, 김부영 부장, 배종대 과장, 정성근 대리입니다.”
리지는 유창한 한국어를 사용해서 둘 사이를 중재했다. 야심이 많은 그녀답게 주도권을 쥐었다.
배종대 과장과 정성근 대리는 가자미눈을 한 채 리지를 계속 쳐다보았다. 둘 다 이런 상황이 신기하기만 했다.
막상 최민혁의 지시를 받아서 이 일을 진행했지만 이렇게 일이 급격하게 진전될지는 몰랐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KM 전자는 한국 내수시장을 주력으로 했고, 유럽을 비롯한 미국 시장에 끼지는 못했다.
하지만 대운 전자에 헐값으로 인수될 뻔한 이슈를 경험한 톰슨 멀티미디어의 미래를 잘 아는 최민혁은 그들이 나설 수밖에 없다는 것을 잘 알았다.
‘지금 한창 내부에서 갈등이 일어날 타이밍이지. 네 탓 내 탓 타령하면서 침몰하는 배처럼 말이야. 우리 회사만 해도 한국 판매망을 이용해서 마쓰시타 제품을 국내에 팔려고 했으니까.’
이 마쓰시다 안건은 기획 팀에서 진행하다가 보류가 되었을 뿐, 아직 드롭된 것이 아니었다.
KM 전자 제품만으로 매출을 늘리기 어렵게 되자 고육지책으로 진행하던 일이었다.
그는 독일 IFA 전시회를 통해서 보여준 콜린스에 대한 설명을 이어갔다.
“이게 저희 신제품인 콜린스입니다. 그리고 유럽 시장에 본격적인 진출을 하기 위한 제품이기도 합니다. 이왕이면 프랑스 가전업계를 주도하는 톰슨사와 손을 잡고 싶습니다.”
“……?”
티에리 이사는 갑자기 치고 들어오는 최민혁의 제안에 고개를 갸웃하다가 카탈로그를 확인했다.
그리고 눈을 동그랗게 뜨고 말았다.
혁신적인 디자인으로 무장한 콜린스는 그 자체만으로 매력적이었다.
그는 뒤늦게야 최민혁 실장 얼굴을 몇 번이나 쳐다보았다.
동양인은 구별이 잘 안 되어서 긴가민가했다.
“서, 설마 이번 IFA 기조연설을 했던 분입니까?”
최민혁은 씩 웃었다.
“맞습니다. 그 때문인지 요즘 제법 아는 사람이 많아졌습니다.”
“오.”
냉랭한 얼굴을 하고 있던 티에리 이사의 얼굴이 만개한 꽃처럼 변해갔다.
놀라는 것이 당연했다.
독일 IFA 전시회 KM 전자 부스에는 최민혁 실장의 기조연설 덕분에 첫날부터 미친 듯이 사람이 몰려들었다.
모이는 사람이 너무도 많아서 길게 줄이 늘어서기도 했다.
워낙에 폭발적인 반응 때문인지 KM 전자 부스 쪽으로 사람이 가지도 못했다.
덕분에 그 주변에 있던 LC 전자나 오성 전자는 때 아닌 이득을 취했지만 말이다.
하지만 이런 모습조차 독일 언론을 통해서 조명받았다.
그 기사는 토픽으로 프랑스 언론에도 알려졌다.
뒤늦게 그 사실을 안 리지를 비롯해 이 자리에 참석한 톰슨 임직원 역시 신기한 눈으로 최민혁을 쳐다보았다.
그들 역시 프랑스 언론을 통해서 최민혁의 사진을 봤다.
아무리 동양인이 마음에 안 들더라도 최민혁의 IFA 기조연설은 그만큼 놀라운 것이었다.
특히 콜린스에 대한 인기는 유럽 전역으로 퍼져가는 중이었다.
“…이게 그 콜린스였군요. 설마 이 제품을 만든 회사가 KM 전자인지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하루아침에 이루어진 일이 아닙니다. 대형 TV에서만큼은 한국 시장을 주도한 곳이 우리입니다. 그 경험과 노하우 정수가 이 콜린스이니까요.”
티에리 이사는 그제야 새로운 관점에서 콜린스를 자세하게 살폈다.
“대단합니다. 이 우아한 디자인은 지금 봐도 명작입니다.”
비록 티에리 이사가 삐딱한 시각으로 한국을 보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그 디자인을 편견으로 볼 정도는 아니었다.
최민혁은 디자인뿐만 아니라 현실적인 점도 슬쩍 말해주었다.
“이미 양산을 다 마쳤고, 선주문을 받고 있습니다. 곧 있으면 콜린스 공급을 시작할 겁니다. 특히 프랑스 쪽에는 톰슨 쪽과 같이 일하고 싶습니다.”
“으음.”
아마 작년이었다면 온갖 갑질을 다 부렸겠지만, 지금은 그럴 수가 없었다.
지푸라기도 잡아야 할 티에리 이사로서는 콜린스 제품을 마다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최민혁은 이미 미끼를 물었다고 생각하자 느긋했다.
“IFA 전시회를 통해서 제법 알려진 덕분에 독일이나 영국 유통업체랑 만났는데, 그들 반응도 나쁘지 않습니다.”
다만 AS와 같은 다양한 문제들을 협상하는 것 때문에 계속 말이 나온다는 것까지는 말하지 않았다.
콜린스 판매 도중에 여러 가지 비용 문제가 나오는데, 그것 가지고 서로 싸우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아직 유럽에서 별다른 인지도를 가지지 못한 점을 내세워서 주도권을 잡으려고 협상을 질질 끌고 있었다.
그런데 티에리 이사는 그들과는 또 달랐다. 콜린스 제품의 환상적인 디자인에 흠뻑 빠졌다.
티에리 이사는 결국 최민혁에게 질질 끌려갔다. 최민혁의 나이 따위는 이제 고려의 대상이 아니었다.
“…내부적으로 알아보고 바로 연락하겠습니다.”
“공급량과 비교하면 지금 선주문량이 많아져서 오래는 못 기다립니다. 프랑스 쪽은 오히려 물량을 대폭 줄여야 할 수도 있습니다.”
“…알겠습니다.”
일방적인 미팅.
제법 밀당이 지속되면서 협상은 격화되리라는 예상과는 달랐다.
“…….”
김부영 부장, 배종대 과장, 정성근 대리는 눈만 끔뻑거리면서 멍하니 최민혁의 행동을 지켜보기만 했다. 그들이 그동안 한 삽질과 번민이 이렇게 쉽게 해결될지는 상상도 못 했다.
‘아무리 IFA 기조연설이 대단했다고 하지만 설마 저렇게 쉽게 넘어가다니.’
* * *
톰슨 멀티미디어 협상 자리를 나서는 최민혁은 뒤를 따르는 세 사람을 힐끗 쳐다보았다.
“어때요?”
“아, 최고였습니다.”
“감상이 그게 다입니까?”
“그게…….”
영업 팀보다 영업을 더 잘하는 최민혁의 협상력에 김부영 부장은 말을 피했다.
배종대 과장은 역시 세상 쓴맛을 다 본 사람답게 최민혁의 협상력에 감탄했다.
“정말 대단하다는 말밖에는 안 나옵니다.”
“쯧, 제가 고작 그런 이야기를 들으려고 질문했겠습니까?”
정성근 대리가 눈치를 보다가 끼어들었다.
“아무래도 IFA 기조연설을 통해서 실장님 평판이 달라진 것 때문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리고 그런 모습은 우리 기획 팀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맞아요. 앞으로는 좀 더 자기 신념을 지니고 행동해야 할 겁니다. 그저 단순히 기획하는 수준으로는 곤란합니다.”
“…….”
세 사람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서 최민혁의 이야기를 듣기만 했다.
최민혁은 오히려 그 모습에 만족했다.
“이번 일은 시작일 뿐입니다. 앞으로도 우리 KM 전자는 다국적기업으로 거듭나면서 별의별 일을 다 경험하게 될 겁니다. 그때마다 지금 이 경험을 잊지 말기 바랍니다.”
“…알겠습니다.”
세 사람은 경이로운 눈으로 최민혁 뒷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도대체 저 나이에 어떻게 저런 행동을 할 수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프랑스에도 처음 온 것 같지 않던데, 도대체 언제 이곳에 온 것일까?’
* * *
유럽 국가의 가전 대기업 중에 콜린스를 무시하는 곳은 단 하나도 없었다.
특히 필립스 같은 기업은 아예 KM 전자를 따로 조사하고 있었다.
실상 톰슨 멀티미디어는 프랑스 가전기업 중에도 명성을 떨치는 기업으로 그 규모가 KM 전자와는 아예 비교조차 할 수가 없다.
아마 톰슨 멀티미디어도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필립스보다 더 적극 움직였을 것이다.
불행히도 지금 톰슨 멀티미디어 상황이 그렇지가 못했다.
적자에 허덕이는 지금의 톰슨은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아니었다.
티에리 이사가 가져온 KM 전자의 제안은 바로 그 이상의 매력이 있었다.
아시아인을 싫어하던 드리 부사장조차 별다른 반박을 하지 못했다.
“콜린스라……. KM 전자 이야기는 듣기는 했지만, 생각보다 더 대단하군.”
티에리 이사는 KM 전자의 구조조정에 대한 정보도 추가적으로 공개했다.
“KM 전자 상황이 우리 톰슨 멀티미디어와 거의 비슷했습니다. 그러나 최근 행보는 다릅니다. 돈이 안 되는 사업부는 다 정리하고, 불필요한 인력을 다 잘라냈습니다. 그리고 선택과 집중의 하나로 TV를 택했고, 지금의 콜린스를 출시했습니다.”
동질감은 호응을 부추기는 좋은 수단이었다.
그래도 규모가 마음에 들지 않다고 불만을 토하던 이사 몇 사람도 입을 다물고 말았다.
드리 부사장은 살짝 욕심을 부렸다.
“혹시 우리 톰슨 브랜드화해서 판매할 수는 없는 건가?”
최민혁 실장의 당당한 모습을 떠올린 티에리 이사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건 어려울 것 같습니다. 우리만이 아니라 다른 유럽 회사와도 협상하는 것 같았습니다. 특히 독일 쪽은 이미 확정된 것 같았습니다.”
“하긴 콜린스를 만든 회사이니.”
콜린스를 보고 충격을 받았던 드리 부사장도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오성 전자나 대운 전자 외에 이런 회사가 있었다니.”
“그 두 회사도 대형 TV만큼은 KM 전자에 한 수 아래입니다. 한국 대형 TV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것이 그 이유입니다.”
이야기하면 할수록 드리 부사장은 지금 상황이 혼란스럽기만 했다. 특히 KM 전자가 어떻게 콜린스 같은 명품을 개발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니, 그런 회사를 왜 난 처음 들어본 거야?”
이미 조사를 철저히 한 티에리 이사는 소리쳤다.
“세계시장에 제품을 판매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제품 품질 외에도 여러 가지가 필요합니다. 아마 그런 이유 때문에 KM 전자는 글로벌 시장을 노리지 못한 겁니다. 지금은 노하우를 상당히 쌓았기에 도전하는 겁니다. 그리고 유럽 파트너를 물색하고 있는 것이고요.”
“그게 우리다?”
“솔직히 우리 회사 사정으로서는 오히려 괜찮은 파트너입니다. 콜린스 모델이 대박을 친다면 회사 이미지도 나아질 것이고, 전체 매출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줄 겁니다.”
드리 부사장은 판매와 유통 수익 외에 톰슨 브랜드의 가치 제고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모를 리가 없었다.
“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