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131화 (131/1,021)

#131

파리시 톰슨 멀티미디어 본사 앞에는 수백 명이 간부가 몰려와서 시위를 벌였다. 그들은 내부적으로 진행되는 구조조정에 대해서 결사항전을 보였다.

오가는 프랑스인이나 관광객은 그저 불구경하듯이 쳐다보았다.

톰슨 멀티미디어 본사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KM 전자 프랑스 지사에서 그 모습을 내려다보던 최민혁은 혀를 찼다.

‘딱 20년 후의 한국 모습이구나.’

예상을 한참 비켜난 상황.

이곳에 KM 전자 프랑스 지사를 괜히 설립했나 싶었다.

콜린스 판매를 위해서 본격적으로 설립된 이곳 KM 전자 프랑스 지사는 독일 연락 사무소와는 성격이 좀 달랐다.

그는 MP3 개발을 본격적으로 진행할 때 필요하다면 이곳 프랑스 디자인 전문가를 고용할 생각마저 하고 있었다.

그런데 막상 이곳에 와서 느낀 소감은 프랑스 경제가 몰락하고 있다는 것.

최민혁은 그 모습이 딱 한국 경제의 몰락과 같다는 것을 새삼 깨달았다.

‘계획을 바꿀 필요가 있겠어.’

때마침 찾아온 배종대 과장, 정성근 대리, 김부영 부장. 세 사람은 지금까지 결과를 보고하면서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죄송합니다.”

“흠.”

최민혁은 실의에 가득한 세 사람을 보면서도 화를 내지 않았다.

“일단 톰슨 멀티미디어 윗선에 보고가 올라가기는 했죠?”

“네. 그런데 아예 KM 전자에 관심을 두지 않고 있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죠. 만약 저기 브라질의 한 중견기업이 찾아와서 협상하자고 하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그거야…….”

“그쪽 이야기를 과연 귀를 기울일까요? 콜린스 이전의 KM 전자였다면 배종대 과장님이 욕설을 하지 않는 것만으로 다행일 겁니다.”

“…….”

배종대 과장은 입을 다물었고, 정성근 대리도 푸념을 멈추었다.

두 사람도 태도를 바꿔 놓고서야 KM 전자가 어떤 대우를 받고 있는지 깨달았다.

물론 콜린스가 한창 주가를 띄우고 있지만 그건 콜린스일 뿐이다.

KM 전자에 관한 관심은 여전히 멀기만 했다.

“이게 우리 회사의 현 주소입니다.”

“그게…….”

여전히 아리송한 두 사람을 보면서 피식 웃었다.

“어때요?”

“네?”

“직접 경험해 보니, 세상 일이 쉽지가 않죠?”

“무슨 말씀이신지…….”

“세계시장에서 우리 KM 전자가 차지하는 상표 가치를 말하는 겁니다. 과거처럼 국내라는 타성에 젖어 있어서 느끼지 못한 것이죠. 직접 경험해 보니, 많이 다르지요?”

옆에서 조용히 듣기만 하던 김부영 영업 팀장은 할 말이 많았다. 자신의 영업권도 아닌 곳에 와서 제대로 결과가 나올 리가 없다는 것을 잘 알았던 것이었다.

“유럽 시장에는 OEM으로 몇 번 판매한 적이 있지만, 저희 KM 전자 제품으로 나간 적이 없습니다.”

“알아요. 이제는 그런 식으로 영업해서는 곤란하다는 것을 말하는 겁니다. 두 분도 기존의 타성대로 일하면 안 됩니다. 제품 하나를 기획하더라도 세계 최고라는 신념을 버리면 안 됩니다. 이번 일은 그런 면에서 배울 것이 많다고 생각하세요.”

“…네.”

그는 팔짱을 낀 채 프랑스 시가지를 내려다보면서 입을 열었다.

“제가 최구만 과장님을 높이 평가하는 것은 단순히 콜린스를 만들어서가 아닙니다. 그 가치를 끝까지 지키고, 포기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곧 제품 가치, 좀 더 포괄적으로 우리 KM 전자 가치입니다.”

최민혁은 뒷짐을 진 채 자기 말에 귀를 기울이는 세 사람을 힐끗 쳐다보았다.

“그런 가치를 위해서 여러분이 지금 이렇게 뛰고 있는 겁니다. 이 일이 쉽지가 않죠. 왜냐하면, 우리 KM 전자 브랜드 가치는 그만큼 낮으니까. 그런데 과거를 돌아보면, 이런 행위를 한 적은 없었죠. 늘 주먹구구식으로 움직였을 테니까요. 바로 이 점을 명심하기 바랍니다.”

“…네.”

세 사람은 복잡한 시선으로 최민혁을 쳐다보았다. 최민혁이 의도한 바를 깨달았다. 하지만 설마 저렇게 생각하는지는 상상도 못했다.

톰슨 멀티미디어의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아는 최민혁은 씩 웃었다.

“너무 그렇게 부정적인 필요는 없어요. 이 정도면 충분히 어필했으니까요. 나머지는 시간이 해결해 줄 겁니다. 톰슨 멀티미디어는 절대로 우리 제안을 거절하기 힘들 겁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시간이 필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콜린스에 관한 이야기가 계속 퍼져갈수록 KM 전자에 흥미를 느낄 거고, 자연스럽게 연락이 올 겁니다. 즉 최구만 과장처럼 콜린스 가치를 믿어보세요.”

“그러면 저희가 어떻게 해야 합니까?”

“아무것도 하지 마세요. 아, 프랑스에 왔으니, 관광이나 하시고요. 가족이나 동료에게 선물할 기념품 쇼핑이나 하세요.”

“네?”

셋 다 톰슨 멀티미디어와의 협상에 실패한 것 때문에 큰 질책을 받을지 알았는데, 설마 이런 지시를 받을지는 상상도 못했다.

최민혁은 깜짝 놀란 세 사람을 보면서 다시 한번 말했다.

“인내를 가지고 기다리세요.”

“…네.”

세 사람도 뒤늦게 콜린스에 대한 것을 떠올렸다. 이제 독일을 중심으로 소문이 퍼지고 있다. 사람들 인식에 영향을 줄 정도가 되려면 시간이 더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리고 뒤늦게야 제품 가치나 회사 브랜드 가치에 대해서 안일하게 생각했다는 것을 떠올렸다.

‘확실히 콜린스가 유럽인의 시선을 사로잡는다면 상황이 달라지겠지만, 정말 그렇게 될까?’

* * *

프랑스에서 가장 빼놓을 수가 없는 곳이 바로 에펠탑이다.

이곳은 프랑스인만이 아니라 전 세계인의 사랑을 받아왔다.

세 사람은 에펠탑 주변을 따라서 있는 카페와 상점을 돌아다니면서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정성근 대리가 특히 심했다.

“우리 이래도 괜찮을까요?”

하지만 단순한 배종대 과장은 이미 최민혁 실장이 허락한 일이라서 기념품이나 사진을 확인한다고 금세 부산을 떨었다.

그는 가족 선물뿐만 아니라 회사 동료 선물을 한가득 사들였다.

“야, 정 대리, 최 실장님이 말씀하신 거 몰라? 시키는 대로만 해.”

“전 잘 모르겠습니다.”

늘 일에 쉽게 집착하는 정성근 대리는 배종대 과장과는 달리 파리 최고의 쇼핑 명소인 샹젤리제 거리를 향해 가면서도 걱정만 했다.

김부영 영업 팀장이 정성근 대리의 어깨를 가볍게 토닥거렸다.

“지금 생각해 보면 최 실장님 생각이 맞는 것 같아. 너무 서둘렀어. 콜린스 소문이 구석구석까지 알려지려면 시간이 필요하니까.”

“전 그래도 잘 이해가 안 됩니다.”

아직은 의욕에 가득한 정성근 대리의 모습에 김부영 영업 팀장은 아빠 미소를 지었다.

“정성근 대리도 이제는 좀 대리답네. 늘 소문이 대단해서 괴물인지 알았으니까.”

“…저 괴물 아닙니다.”

쇼핑 박스가 너무 많아서 정신이 없는 배종대 과장이 껄껄 웃었다.

“야, 정 대리, 너 최 실장님에게 좀 인정받았다고 해서 우리도 우습게 보이지?”

“아닙니다.”

“인마, 짬밥이란 거 무시 못 한다.”

“하지만…….”

정성근 대리는 때마침 걸려온 전화를 받았다가 깜짝 놀랐다.

“아, 앙트 브라소 부장님, 네, 물론입니다. 회사 내부 문제 때문에 결정이 늦어진 것 알겠습니다. 시간은 언제라도 됩니다. 이번 주 금요일, 알겠습니다. 바로 찾아가겠습니다.”

두 사람은 정성근 대리의 통화만으로 내용을 짐작했다.

“역시 최 실장님 예측대로네.”

“정말 신기합니다.”

“넌 매사에 그게 문제야.”

“그러게 말입니다.”

정성근 대리도 머리를 긁적이면서 지금 상황을 돌이켜봤다. 새삼 최민혁의 조언이 어떤 의미를 가졌는지 깨달았다.

심지어 왜 굳이 IFA 전시회를 핑계로 자신과 배종대 과장을 이곳 유럽까지 데려왔는지도 알 것 같았다.

‘하지만 이 모든 일은 콜린스가 있었기에 가능했어. 만약 콜린스가 없었다면 아무것도 이루어지지 않았겠지.’

새삼 최민혁이 한 조언을 다시 한번 되새겼다. 그 충고는 정성근 대리의 생각의 폭을 크게 넓혀주고 있었던 것이다.

* * *

차세대 TV 트렌드 방향성에 물꼬를 튼 것은 일본 정부다.

작년 일본 우정성 행정국장 에가와 아키마사가 HDTV 송수신 방법을 아날로그에서 디지털로 바꾸겠다는 밝혔다.

과거 20년 동안 개발한 아날로그 HD TV 방식을 포기한 것이다.

일본 정부와 전자업계로서는 타격이 이만저만한 일이 아니다.

이런 결정을 할 수 없는 배경에는 디지털 우위 기술이 트렌드를 이루기 때문이다.

근본적으로 노이즈에 강한 디지털 기술은 다양한 컴퓨터와의 연동으로 말미암은 융합기술이 가능했다.

그런데 여전히 아날로그 방식을 고집하는 톰슨 디지털 미디어는 미래가 불투명할 수밖에 없었다.

티에리 브르통 영업이사는 돌아가는 상황이 답답하기만 했다.

“일본이 미국의 디지틀 방식 HDTV을 선택한 이상 변화가 불가피합니다. 언제까지 구닥다리 아날로그에 매달리는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드리 포달리 부사장 생각은 달랐다.

“아직은 디지털 관련해서 결과가 나온 것이 없잖아. 설마 일본 애들 말만 믿고 우리도 같이 그쪽으로 가자는 소리인가?”

“부사장님, 이미 독일도 당초 계획했던 아날로그 시스템을 포기했습니다.”

“독일 놈도 믿을 수가 없어. 거기에 미국 놈들의 디지털식 HD TV는 몇 년 후에 나와. 아직도 허우적대고 있다는 것은 다 아는 소리야!”

“미국 제니스는 이번 일에 사활을 걸고 다른 두 개 가전업체와 공동 개발 중입니다. 이번 승리를 통해서 얻을 로열티 이익이 어마어마한데, 그것을 포기하겠습니까?”

“정말 답답한 친구군. 아니, 결과가 있어야 뭘 믿지 않겠나. 그놈의 뻔한 수작에 놀아나는 자네가 불쌍해.”

“그건 제가 할 말입니다. 이번 디지털 HDTV 방식 결정으로 관련 마이크로 칩에 대한 수요는 폭발적으로 늘어날 겁니다. 뻔히 관련 업체에서 이 분야에 천문학적인 투자를 하는데도 모른 척한다는 말입니까?”

“지금 그런 고리타분한 이야기를 할 상황이 아니잖아. 당장에 적자가 계속 쌓여. 그놈의 일본 새끼들도 문제지만 그보다 한국 애들도 분위기가 만만치 않아!”

특히 탱크주의를 앞세운 대운 전자의 공세가 만만치 않았다.

유럽 전역에 공장을 설립하면서도 필요하다면 인수합병도 진행했다.

티에리 영업이사 역시 현실을 모르는 것은 아니다. 문제는 시장의 수요다. 깨끗한 화질을 원하는 고객층의 욕구는 만만치 않았다.

“팔리는 물건을 팔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늘어나는 적자를 메꿀 수가 없습니다!”

“걱정 마. 설마 우리 프랑스 정부가 우리 회사가 망하는 것을 눈 뜨고 볼 것 같아? 일단 노조에서 그냥 있지 않을 거야.”

프랑스 강성 노조의 악명은 유럽에서도 모르는 사람이 없다.

정치를 이용해서 어떻게 해서라도 버텨보겠다는 드리 부사장의 태도에 치를 떤 티에리 영업이사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설마 본사에 올라온 노조 뒤에 드리 부사장이 있는 것 아냐?’

그런데 다른 임원은 그저 눈치만 볼 뿐 여기에 대꾸도 하지 않았다.

그들 역시 프랑스 정부가 상당한 지분을 가진 것 때문에 톰슨 멀티미디어가 망할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내부 갈등 때문에 앙트 브라소 부장이 올린 KM 전자의 콜린스 관련 보고서는 아예 논의조차 되지 않았다.

‘쓰레기 같은 놈들.’

* * *

티에리 브르통 영업이사는 어떻게 해서라도 회사에 버티고 싶었다. 과거라면 솔직히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도 자기주장을 내세우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뻔히 회사 매출이 줄어드는 것을 실시간으로 보고 있는데, 그럴 수가 없었다.

회사가 정상화되려면 적어도 1조 5천억이 넘는 천문학적인 지원이 필요했다. 프랑스 은행이 이 막대한 자금을 대줄 리는 없었다.

‘차라리 매각이 답이야.’

그런데 매각도 신통치 않았다.

인수할 여력이 있는 회사는 대부분이 가전 분야를 줄이고 있었다.

일본과 한국 대기업의 공격 때문이다.

아이러니한 것은 일본의 소니조차 요즘 영화 산업에 빠져서 그쪽으로 투자를 대폭 늘리는 중이라는 것이었다.

결국 남은 곳은 단 하나. 한국이다.

‘세상에……. 어쩌다가 우리 회사가 이 꼴이 된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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