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
실제로 MP3 특허는 로열티 때문에 말이 많았다. 국내 MP3 업체는 자신의 이득을 위해서 당시 이 특허권을 가진 디지털캐스트를 다양한 방법으로 괴롭혔다.
황당한 것은 디지털캐스트가 제휴를 맺은 엠피맨닷컴은 시장에서 재미를 보지 못했다.
결국 다른 경쟁업체와 소송이 걸렸는데, 특허 관리를 초기에 잘못한 탓에 제대로 된 로열티도 받지 못했다.
지금 KM 전자는 디지털캐스트 상황과는 전혀 달랐다.
“그래서 MP3 원천 특허가 더 필요한 거죠. 그걸 다 쥐고 있다면, 오성 전자가 아니라 전 세계 모든 제조업체와 싸워도 해볼 만한 싸움이 되니까요. 특허권을 다 확보해야 한다는 전제가 붙지만 싫든 좋든 특허료를 내야 할 겁니다.”
“아.”
그만 놀란 것이 아니었다. 이번 프로젝트에 참여할 예정인 이들은 다들 MP3 기술 자료를 확인하면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단순히 MP3 플레이어가 돈이 되겠나 싶었지만, MP3 원천기술은 이야기가 달랐다.
물론 부정적인 이야기도 나왔다.
“지금은 휴대폰으로 MP3를 플레이할 수는 없잖아.”
칩 전문가로 오성 전자 내에서 다양한 경험을 한 조창호 차장은 시야가 달랐다. 그는 비록 오성 전자에서 삽질만 계속했지만, 이곳 KM 전자에 와서야 이 MP3 프로젝트가 성공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알았다.
“기술적인 한계 때문에 그렇죠. 그러니까 전용 칩까지 만들려고 하는 거죠. 만약 이 전용 칩이 단가 때문에 어렵다면 IP 형태로 만들어서 공급해도 되니까요. 그 대표적인 회사가 ARM이니까요. 실장님은 아마도 이런 그림까지 그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저 놀라울 뿐입니다.”
“……!”
뜬구름 잡듯이 MP3 프로젝트를 바라보던 최병연 팀장을 비롯한 모든 이들은 다들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이 특허가 그런 의미로 확대될지는 상상도 못 한 것이었다.
그들 역시 오성 전자 연구소에서 있으면서 쓴맛 단맛을 자주 봤기 때문에 이게 무슨 의미를 가지는지 어느 정도 알았다.
그리고 왜 최민혁이 조성돈 팀장을 통해서 이상한 지시를 내렸는지도 깨달았다.
‘기가 막히네.’
MP3 기술 자료에 큰 감명을 받은 최병연 팀장은 콜린스 때문에 약간 기죽어 있는 이들을 쳐다보았다.
“다들 들었겠지? MP3 프로젝트는 콜린스 못지않은 파급효과가 있어. 그러니까 지금처럼 실망하지 말고, 열심히 매달려. 대충 봐도 견적이 나오잖아.”
“네!”
이번에 최병연 팀장을 따라서 이직한 이들은 최근에 아무런 일도 없어서 다들 고민했다. 아무래도 일이 없으니, 불안했던 것이다.
하지만 MP3 관련 자료를 보고서야 그게 아니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최병연 팀장 역시 다르지 않았다. 그는 최민혁 실장의 기조연설을 달달 외울 정도로 반복해서 보았다. 그리고 그 속에 숨겨진 흉계를 하나하나 돌이켜보면서 혀를 내둘렀다.
‘진짜 놀랍네. 저 연설이 단순한 의미가 아니었구나. 나도 처음에는 기조 연설자로 좀 아니나 싶었지만 아니었어. 자격은 충분히 넘쳐. 아니, 어쩌면 시간이 많이 흐른 후에야 저 기조연설의 가치가 제대로 평가받겠어.’
오성 전자가 어떻게 대응을 할지 고민하던 그는 보안 문제에 대해 몇 번이나 팀원에게 강조했다.
‘이놈들이 집요하게 달라붙을 텐데, 그것도 걱정이네.’
* * *
MP3 프로젝트 팀은 발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직은 최민혁이 모든 자료를 넘기지 않았음에도, 그가 원하는 그림이 어떤 것인지 알아보고, 무엇을 해야 할지 조금씩 방향을 잡아간 것이다.
권태성 실장이 KM 전자 내부의 움직임을 알 수는 없었다.
그는 국내로 돌아오기 무섭게 오성 그룹 이사회로 불려 가서 비난을 들었다. KM 전자 사태가 오성 전자 이사회 본안에 올라온 것이었다.
무려 한 시간 내내 깨지고, 오성 그룹 사장단에게 불려 가서 또 욕을 먹었다. 단순히 그냥 욕이 아니라 경고까지 들었다.
그때야 비로소 권태성 실장도 상황의 심각성을 깨달았다.
‘하긴 TV 사업부가 가전의 한 축이니까.’
KM 전자의 일은 권태성 실장이 처리하는 일 중의 하나일 뿐인데, 자칫하면 그의 목을 날려 버릴 수 있는 심각한 상황으로 발전했다.
특히 문제가 된 것은 콜린스에 대해 제대로 조사도 못한 상황에서 뒤늦게 알게 되었다는 점이었다.
권태성 실장은 자기 사무실로 돌아와서도 한동안 입을 열지 않았다. 표정이 얼마나 심각한지 임권수 부장이나 황광수 차장은 그저 숨만 쉬었다.
‘젠장맞을.’
“…죄송합니다.”
“아, 됐어. 지난 일 가지고 이러쿵저러쿵해 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어. 그놈들이 그렇게 철저하게 숨기는데, 어쩔 수가 없잖아.”
“좀 더 적극 매달려야 했었는데, 김현우 수석 부장 때문에…….”
“그 돼지는 여전해?”
“네.”
약간의 어색한 침묵.
그런데 이제는 KM 전자와 관련된 일은 그냥 넘어갈 수가 없었다.
“아무래도 노조 쪽과 만나서 적극 움직이고 있습니다.”
정확히는 노조가 아니라 이름만 있는 노조 위원회와 만났다.
그중에는 회사에서 잘린 이들도 있었는데, 그들은 계속 시위를 하고 있었다.
김현우 수석 부장은 그들과 손을 잡고 분탕질을 치기 시작했다.
문제는 김현우 수석 부장이 과연 회사에서 잘릴 정도로 나쁜 일을 했느냐 하는 점이다.
소송 과정만 본다면 오성 전자라고 해도 그 일을 증명하기가 쉽지 않았다.
게다가 김현우 수석 부장이 최두진 사장의 도움을 얻어 변호 팀을 꾸린 이후, 상황이 오성 전자에게 유리한 것만은 아니었다.
언론에 계속 압력을 넣고는 있지만 김현우 수석 부장이 오성 전자 노조와 같이 여러 활동을 벌이면서 상황이 더 커지는 중이었다.
사장단 회의에서도 이 문제가 심각하다는 점을 인정해서 전략 기획실에서 나설 단계까지 왔다.
골이 띵한 권태성 실장은 굳이 기조연설 문제로 더 따지지는 않았다.
그저 푸념만 늘어놓았다.
IFA 위원회를 향한 몇 년간의 광범위한 로비.
그게 다 도루묵이 되었다.
“이사회도 그렇고, 전략기획실이 진짜 분노한 것은 우리가 차린 밥상을 최민혁 실장이 날름 다 먹었다는 거야. 내가 욕먹으면서도 아무런 변명을 할 수가 없었다니까.”
“…그래, 뭐 지금 와서 그 이야기하면 무슨 의미가 있겠어. 지금 최민혁 실장은 뭐 하고 있어?”
같이 불려 온 강석영 부장은 못마땅한 얼굴로 임권수 부장을 쳐다보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이전과는 달리 아예 전담 인력까지 붙여 놓아서 독일의 움직임을 확인했다.
“독일에 대규모 공장 부지를 설립하기 위해서 움직이는 것으로 압니다. 벌써 연락사무소를 만들었고, 올해 안에 법인 설립까지 끝마칠 것 같습니다.”
사장단 회의에 불려 가서 잘릴 수 있다는 소리까지 직접 들은 권태성 실장은 가슴 한구석이 서늘했다.
“…벌써?”
“아무래도 오더가 들어올 테니까요. 그 물량을 다 공급하려면 수출만으로 힘들겠죠. 다행히도 독일을 비롯한 유럽 판로가 없어서 당분간은 정식 시판하기 어려울 겁니다.”
“후유.”
골치가 아픈 권태성 실장은 한숨만 푹푹 내쉬었다. 이제 KM 전자 사태를 어떻게 해서라도 수습하지 않으면 자신 역시 타격이 불가피했다.
임권수 부장을 내세우기는 했지만, 이제는 임권수 부장을 날리는 것만으로 이 사태를 덮을 수가 없었다.
눈치를 보던 강석영 부장은 콜린스 시판 이후에 오성 전자 예상 판매 보고서를 내밀었다.
“콜린스가 유럽에서 본격 시판되면, 타격이 만만치 않을 겁니다.”
“그렇겠지.”
문제는 유럽이 그 시작이라는 점이다. 북미를 비롯한 동아시아 쪽으로 시장점유율이 올라가면 오성 전자는 큰 타격을 입을 것이다.
권태성 실장은 아쉬운 듯 혀를 찼다.
“만약 우리 회사가 콜린스를 판매하기 시작했다면 몇 배나 매출액이 늘어났을 텐데…….”
너무 답답해서 호흡 곤란이 오자 권태성 실장은 잠깐 일어나서 스트레칭까지 했다.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었다.
“…LC 전자나 대운 전자 반응은 어때?”
“거긴 저희보다 더 큰 충격을 받은 것 같습니다. 아직도 이사회가 계속된다고 하니까요. TV 사업부 쪽은 비상 회의까지 진행하고 있습니다.”
“하, 우리만 당한 것이 아니었어.”
“특히 대운 전자는 당장 유럽 TV 시장 공략을 전면 재조정해야 할 겁니다.”
“하긴. 그쪽은 안 그래도 적자가 심한데, 콜린스 때문에 더 심각하겠지. 이번 신제품에 큰 기대를 한 차에 제대로 박살이 나겠어.”
“당장 신설한 유럽 공장의 재고가 문제가 될 테니, 패닉에 빠져 있습니다.”
침을 튀면서 이런저런 다른 회사 사정을 늘어놓았는데, 역시 소니를 비롯한 다국적기업도 예외는 아니었다.
권태성 실장은 그제야 안도했다.
“필요한 인원을 더 늘릴 테니, KM 전자를 철저하게 조사해. 특히 최민혁 실장에게는 아예 전담 인력을 붙여!”
“알겠습니다.”
“이번 일은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이 아냐. 우선순위가 완전히 바뀌었어. 그러니 KM 전자를 처음부터 다시 파 봐!”
“네.”
회의에 참석한 이들의 안색이 좋지가 않았다. 그들 역시 콜린스 문제를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콜린스 대박은 이미 예상한 일. 예측한 것보다 시장에서 더 크게 성공하면 오성 전자 타격은 시간이 갈수록 커진다.
그건 다르게 보면 오성 전자의 매출에 변화가 생기는 것이고, 자칫하면 가전 사업부 내부 구조조정으로 진행될 수도 있었다.
말하자면 자기 밥줄이 달린 셈이다.
‘심각하네.’
* * *
최민혁도 기조연설 후에 독일에 있으면서 몇 차례 독일 언론이나 한국 독일 특파원을 만나서 인터뷰까지 해주었다.
그 과정에서 오성 전자의 움직임에 대한 것도 기자를 통해서 들었다. 아주 신이 난 기자가 침까지 튀겨가면서 오성 전자 내부 사정을 말해준 것이었다.
그리고 조성돈 팀장은 기획 팀을 이용해서 그 내용을 확인했다.
예상대로 오성 전자는 콜린스에 대한 인원을 증원했다.
물론 독일 조사 인원까지 늘린 것은 아니었다.
‘본격적으로 움직이려면 시간이 제법 필요하겠지. 그 시간이면 MP3 협상을 마무리할 수 있을 테니까.’
그리고 KM 전자 본사 소식을 보고받았다. 특히 최병연 팀이 주도적으로 움직인다는 소식에 피식 웃었다.
“좋네요.”
조성돈 팀장 역시 박상기 차장의 보고안을 다시 살폈다.
“최병연 팀장이 적극 나서면서 MP3 프로젝트도 빠르게 자리를 잡아가고 있습니다. 만족도 역시 높은 편입니다.”
“당분간은 지켜보기만 하세요. 일은 스스로 할 수 있어야 합니다. 괜히 일방적인 지시가 되어서는 곤란합니다.”
“알겠습니다.”
그는 특히 KM 그룹 본사의 내부 혼란에 대해서 신경을 썼다.
“그쪽에 아직 우리 사람이 꽤 있죠?”
“네.”
“그렇다면 잘 지켜보세요. 쓸데없이 나서서 일을 만들지는 말고요. 어차피 KM 그룹과 우리 KM 전자와 연결 고리는 많이 떨어졌으니까요.”
“그런데 KM 건설 측에서 자꾸 콜린스에 대한 정보를 묻는데, 어떻게 할까요?”
“KM 건설요?”
“아무래도 아파트나 고급 빌라 건설 쪽에 콜린스를 납품받고 싶어 하는 것 같습니다.”
“아니, 앞으로는 거래를 끊는다고 하지 않았나요?”
“아무래도 콜린스에 관한 관심이 커지면서 정식 판매를 묻는 사람이 많이 늘어났습니다. 심지어 대리점 사장이 영업 팀에 계속 전화를 할 정도니까요.”
“벌써요?”
“뉴스 홍보 효과가 꽤 큽니다.”
“나쁘지 않은 소식이군요. 하지만 원칙대로 합시다. 아, 그리고 아무래도 최민수 형을 평사원으로 입사시켜야 할 것 같은데, 한번 자리를 알아보세요.”
“…최민수라면 최훈열 전무 아들 말씀하는 겁니까?”
최민혁 역시 내키는 얼굴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할아버지의 요구를 거절하기는 난감했다.
“할아버지에게 증여받은 지분에 대한 일이라서 막상 거절하기는 곤란했습니다. 그러니 적당한 한직을 한번 알아봐요.”
“그건 어렵지 않습니다. 다만 지금 회사 사정이 어수선해서 걱정입니다.”
“뭘 걱정하는지 압니다. 민수 형 외가가 DL 그룹이라서 걱정하는 것 같은데, 달라질 것은 없어요. 그리고 잘만 하면 그걸 명분 삼을 수도 있고요.”
“무슨 말씀인지…….”
“어차피 DL 그룹은 다른 임직원을 건드리려 할 테니, 차라리 민수 형을 박아놓으면 그쪽을 통해서 정보를 얻으려고 할 겁니다. 그러면 우리 처지에서 관리하기가 더 좋아요.”
상상을 초월한 답변에 조성돈 팀장은 한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 설마 최민수를 프락치로 이용하려고 할지는 몰랐다.
최민혁은 이미 데이콤을 통해서 재미를 단단히 본 터라 DL 그룹에게 직격타를 줄 대안을 강구 중이었다. 그러던 차에 차라리 최민수가 옆에 있다면 이용하기 좋겠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애초에 최용욱 회장 제안을 받아준 것도 다 이 때문이었다.
“어차피 MP3 프로젝트 팀은 따로 보안을 분리해 놔서 KM 전자의 다른 조직이 알지도 못해요.”
“알겠습니다. 그러면 어떤 사업부를 생각하시는 겁니까?”
“어차피 디지털 위성방송 사업부 같은 경우에 한가하잖아요?”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