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126화 (126/1,021)

#126

뉴스에서는 IFA 전시회를 통해서 독일이 벌어들이는 수익에 대한 것도 나열되었다.

[무려 5조가 넘는 시장입니다. 심지어 이 전시회 과정에서 몰려오는 관광객으로 말미암은 이익은 그 가치를 환산하기도 어렵습니다.]

실제로 전시회 수익보다 해외에서 이 전시회를 보기 위해서 찾아온 사람이 사용하는 여행 경비가 더 천문학적이다.

주말에는 영업하지 않는 이들도 이 시기만큼은 영업했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밑밥.

그리고 기조연설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다.

[IFA 전시회 개막을 여는 기조연설은 IFA의 얼굴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아시아인으로서 기조연설자가 된 사례는 이제까지 없었습니다. 이전 IFA 전시회까지만 해도 말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놀랍게도 KM 전자의 최민혁 기획실장이 그 주인공입니다.]

화면이 바뀌면서 청바지와 티만 달랑 입은 최민혁이 나와서 연설하는 장면이 나왔다. 다소 어수선한 분위기에 출발한 기조연설은 시간이 갈수록 뜨거운 관심을 끌었다.

최문경 부회장은 김여정이 꼴 보기가 싫어서 국을 먹다가 그대로 뱉어내고 말았고, 최동영 상무 역시 밥을 먹다가 기침했다.

김여정 역시 상상을 초월한 전개에 입을 딱 벌렸고, 다른 사람 역시 마찬가지였다.

“……!”

KM 전자에 대한 간단한 소개. 그 과정에서 이들이 디지털 시대를 열기 위해서 어떤 원천기술을 만들어 가는가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다.

비디오 특허 부분이 특히 시선을 끌었다.

그리고 다음 화면을 장악한 것은 바로 콜린스였다.

우아한 자태를 뽐낸 콜린스가 기조 연설장 뒤쪽을 가득 채우자 박수갈채가 이어졌다.

[KM 전자에서 심혈을 기울인 콜린스는 현존하는 그 어떤 TV보다 더 얇고, 화질이 압도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하늘에서 갑자기 뚝 떨어진 혁신적인 제품입니다.]

뉴스를 과장한 광고.

그만큼 방송국 입장에서도 최민혁의 행보는 충격적이었다.

독일 특파원이 처음에 저 뉴스를 취재해 왔는데, 다들 믿지 않았을 정도였다.

그러니 콜린스 이야기를 빼놓을 수가 없었다.

아직 광고를 제대로 시작도 하지 않았는데, 공영방송에서 콜린스 홍보를 해주고 있었다.

“…아니, 민혁이 저놈이 왜 저기 나와?”

최용욱 회장은 콜린스에 대해서 이미 확인한 바 있었기에, 그보다는 기조 연설자로 나선 손자의 모습에 더 놀랐다.

채윤집 집사도 그제야 고개를 숙였다.

“회장님, 죄송합니다. IFA 조직 위원회에서 다급하게 결정하고 진행한 일이라서 저희도 뉴스를 통해서 알았습니다.”

“…민혁이 그놈이 사전에 말하지도 않았어?”

“네. 조금 전에 조성돈 팀장 통해서 확인한 바로는 정신이 없어서 미처 알릴 틈이 없었다고…….”

기조연설자에 대한 일을 풀어가던 조성돈 팀장 역시 일을 진행하기는 했지만 정말 이게 될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더욱이 그는 최민혁의 막무가내 행보를 백업한다고 정신이 없었다.

심지어 당사자인 최민혁도 마찬가지다. 그 역시 되면 좋고, 아니면 말고 식으로 일을 진행했으니, 그걸 누구에게 알릴 여유는 없었다.

최용욱 회장은 더 논할 여지가 없었다.

“허허허, 이거야 원.”

최용욱 회장도 좋은 것은 사실이나, 너무 생뚱맞은 상황에 웃기만 했다. 자신도 IFA 전시회 기조연설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데 손자 놈이 뜬금없이 저 자리를 차지한 것이었다.

패닉에 빠진 최문경 부회장을 비롯한 이들의 얼굴은 정말 볼 만했다.

전부 다 입을 딱 벌린 채 아직 정신을 수습하지 못하고 있었다.

최훈열 전무 때문에 최민혁에게 이를 갈고 있던 김여정은 어금니가 부러지도록 이를 뽀드득 갈고 있었다.

특히 최민수는 큰 충격을 받아서인지 반쯤 이성을 상실하고 말았다.

최용욱 회장도 자식들을 생각해서 차마 채윤집 집사에게 더 물을 수가 없었다.

원칙대로라면 최민혁을 가지고 자식들을 두들겨 패야 하겠지만 지금 그럴 수는 없었다. 아니, 난감해서 오히려 자식들 시선을 피했다. 아마 여기서 최민혁의 이야기를 더 꺼내면, 자식들이 자신에게 욕설까지 하고도 남을 분위기였다.

“밥이나 먹자.”

“…네.”

최문경 부회장이나 최동영 상무의 얼굴은 위기감을 느껴서인지 안색이 바위처럼 단단히 굳어 있었다.

‘빌어먹을.’

* * *

최용욱 회장은 식사를 끝내기가 무섭게 채윤집 집사에게 자초지종을 물었다.

채윤집 집사는 뜻밖에 많은 것을 알고 있었다.

“아마 오성 전자 덕을 상당히 봤을 겁니다. 원래 기조연설 관련해서 오성 전자가 IFA 조직 위원회에 로비를 많이 했으니까요.”

“하긴 안 회장도 가끔 IFA 전시회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었어. 솔직히 배가 아팠지. 계열사 사장이 잘하면 IFA 기조연설도 할 수 있을 정도로 회사가 많이 컸다고 늘 자랑했으니까.”

오성 전자 안건민 회장은 마치 지난 일에 대한 소소한 복수라도 하는 것처럼 최용욱 회장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늘어놓았다.

그중에는 저 IFA 전시회 기조연설자로 나갈 만큼 오성 전자가 유럽 시장에서 인지도를 가지고 있는 점을 피력했다.

IFA 전시회 기조연설 플랜은 안건민 회장이 나름 관심을 두고 밀어붙인 일이었다.

하지만 역시 아직은 소니의 역량에 오성 전자가 미치지 못했다.

오히려 오다 히로 부사장이 기조연설자로 결정 난 것이 그 이유였다.

“그런데 최근 와서 미국 정부의 일본 대기업에 대한 견제가 더 심해졌습니다. 아무래도 그런 부분도 관련이 있을 겁니다.”

“결국 안건민 회장이 우리 한국 기업에 대한 밑 작업을 열심히 깔아놓았는데, 민혁이가 그걸 덥석 먹었다는 이야기군.”

실상 이번 일도 오성 전자가 몇 년간 IFA 전시회에 로비를 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들이 꾸준하게 노력하면서 한국이라는 브랜드 인지도가 조금씩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그러니 오성 전자로서 얼마나 분통이 터지겠는가.

“네. 그것 때문인지 오성 전자 전략 기획실도 주말에 비상이 걸렸다고 합니다.”

“쯧.”

씩 웃는 최용욱 회장은 그 어느 때보다 통쾌하기만 했다.

“이제 TV 사업부도 한숨 놓았어.”

“그러게 말입니다. 이제는 거꾸로 다른 가전 3사가 긴장해야 할 것 같습니다. 콜린스 시판이 본격화되면 타격이 불가피할 겁니다.”

“그렇지. 맞아. 허, 상황을 이렇게 풀어가다니.”

그저 손자가 놀랍기만 했던 최용욱 회장은 뒤늦게 최민혁의 지난 행보를 떠올리면서 최민수를 자연스럽게 연상했다.

지금에 와서는 최민수의 입장이 과거 최민혁의 처지가 되었다.

기가 죽어 있는 최민수를 그냥 이대로 둘 수는 없어서 최민혁에게 직접 전화했다. 다행히 전화를 받았다.

[소식 들었다.]

[감사합니다.]

[그래도 좀 그렇더구나. 최소한 이 할아비에게 연락은 해줘야 할 일 아니었냐?]

[불과 얼마 전에 결정 나서 기조연설 준비한다고 정신이 없었습니다.]

[그래, 그럴 수도 있지. 결정이 늦어져서 오히려 회의 준비한다고 정신이 없었겠어.]

[아무래도 큰 행사의 기조연설이니까요.]

[그런 것치고는 옷이 참 편하더구나.]

[유럽인이 형식을 따지지 않으니까요.]

[하지만 내가 알기로 이전 기조연설자는 다 정장을 입고 있었다.]

[최근 와서 조금씩 바뀌는 추세였습니다.]

[쯧, 고집도 참. 암튼 이번 일은 정말 축하한다. 그런데 최민수 녀석이 집행유예로 석방된 소식은 알고 있느냐?]

[아, 결국 집행유예를 받았군요.]

[그래. 둘째 아기가 안 그래도 그 일 때문에 고민이 많은 것 같더구나. 당장은 그 일 때문에 복학하기도 그래서 회사에서 일했으면 한다고 해. 그런데 너도 알다시피 첫째나 셋째에 부탁하기는 그래. 그렇다고 다른 계열사 보내봐야 배우는 것도 없고, 차라리 KM 전자에서 일을 배웠으면 해.]

[민수 형을 KM 전자에 입사시키란 말입니까?]

[좀 번거롭기는 하지만 그래도 같은 가족 아니냐. 너라면 알아서 잘 돌봐줄 거라 생각한다.]

[글쎄요.]

최용욱 회장은 애매한 최민혁의 행동에 혀를 내두르면서 한마디 했다.

[내 지분을 공짜로 증여받았다. 이사 자리도 들어줘야 해. 그런데 고작 네 사촌 형에 대한 입사 부탁 정도는 들어줘야 하지 않겠느냐?]

‘하긴.’

최민혁도 막상 지분 증여받은 일을 간과할 수는 없었다. 오늘 KM 전자 주가는 가격 제한폭까지 올랐는데, 한동안 계속될 것이다. 과연 주가가 어디까지 오를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 엄청난 이익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오는 게 있으면 가는 게 있는 법. 주고받는 것은 명확히 해둘 필요가 있었다.

그것은 곧 최용욱 회장과의 약속 때문이 아니라 앞으로 많은 이들과 갈등할 때 중요한 신뢰 평가 척도가 되니까.

‘하긴 적은 더 가까이 두라고 했으니까.’

[하지만 이미 어느 정도 회사 자리가 잡혀가는 상황입니다. 민수 형을 그냥 아무 곳이나 넣을 수는 없습니다. 더욱이 민수 형 레벨은 누구보다 제가 압니다. 밑바닥부터 일을 배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 내가 그런 것까지는 뭐라고 할 수는 없지. 다만 주가조작 같은 일에 매달리지 않도록 해줬으면 한다.]

최민혁 그냥 돈 주고 최용욱 회장에게 지분 사들이는 것이 좋지 않을까 생각하다가도 1,000억이 넘는 산값을 떠올리자 입맛을 다셨다.

‘하긴 본격적으로 주가가 오르기 시작하니, 1,000억 정도가 아니겠지. 적어도 4,000~5,000억 가치는 족히 넘으니까. 아니, 차라리 잘되었어. 최민수 형을 디지털 위성방송 사업부에 보낸 후에 사업부를 날려 버리면 되니까.’

[알겠습니다. 대신에 이 부탁이 마지막입니다. 앞으로는 아무리 할아버지라고 해도 이런 일을 용납할 수는 없습니다.]

30%가 넘는 KM 전자 지분을 무상으로 받은 손자 녀석의 말에 최용욱 회장은 잠깐 아무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허허, 그놈 참 독하구나.’

[…알겠다. 그리고 이번 일 축하한다.]

[감사합니다.]

최민혁은 최용욱 회장 부탁을 수긍한 후에도 이 일에 대해서 잠깐 생각했다. 이미 인생 1회차와 많이 바뀐 흐름을 곰곰이 생각했다.

원래라면 최민수가 KM 전자에 들어와서 자신의 모든 것을 가로채야 한다. 심지어 기획실장까지 빠르게 승진한다. 물론 IMF 이후에 횡령 혐의로 회사에서 쫓겨난다.

‘하지만 근본적인 흐름은 바뀌지 않는구나. 첫째 큰아버지 행보도 달라지지 않을 것 같은데, 안심할 수는 없어.’

* * *

최문경 부회장은 날이 밝기가 무섭게 전략 기획실을 비롯한 그룹 관련 핵심 부서장을 다 불러 모아서 최민혁 사태를 확인했다.

그런데 다들 주말에서야 이 사실을 안 이들은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심지어 장승일 실장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다만 다른 사람보다는 오성 전자의 횡보 때문에 상황을 좀 더 짐작했다.

[잘은 모르지만, 미국 정부가 이번 소니 부사장 기조연설 발표에 대해서 바꾸라고 한 것으로 압니다. 권태성 실장은 그 점을 노려서 공략했는데도 실패했습니다. 아마 최민혁 실장님이 그런 점을 노려서 기조연설자로 나선 것이 아닌가 추측합니다.]

이미 다 끝난 일이라서 장승일 실장도 굳이 감추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는 오히려 이 사태를 이용해서 최민혁의 능력을 더 띄웠다.

[그렇다고 해도 이제 고작 20살에 불과한 최민혁 실장님이 IFA 전시회 기조 연설자로 나선 것은 큰 의미가 있습니다. 그만큼 IFA 조직 위원회도 최민혁 실장님의 비전과 능력을 인정한 것입니다.]

[야아, 장 실장!!!]

뭐 회의는 좋게 끝나지 않았다.

최문경 부회장은 길길이 날뛰면서 장승일 실장을 공격했으니까.

하지만 장승일 실장은 마치 미친개가 짓느냐는 듯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이런 변화는 KM 그룹에서만 일어나는 일은 아니었다.

월요일 아침에 출근한 박상기 차장 역시 회사 소식통인 박광민 사원의 이야기를 통해서 최민혁 실장의 소식을 뒤늦게 접했다.

“하.”

정말 황당한 일이었다.

독일로 출장을 간 조성돈 팀장의 대행인 박상기 차장이 이제야 출장 팀의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그는 조성돈 팀장에게 전화를 걸었는데, 전화를 받지 않았다.

잡담 시간으로 모인 자리에서 박광민 사원 입은 한시도 쉬지 않았다.

“휴게실에 가면 전부 최민혁 실장님 이야기로 난리입니다!”

실상 KM 전자 직원만이 아니라 한국 대기업 직원은 죄다 이 일로 난리가 났다.

박상기 차장도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도대체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겠어.”

다행히 배종대 과장과 친한 이정원 과장이 슬쩍 입을 열었다.

“저도 배 과장에게 전화로 확인했는데, 처음에는 그 일이 될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되면 좋고, 안 되면 안 되는 걸로 생각했다고 합니다.”

혀를 찬 박상기 차장이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그게 무슨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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