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5
[아마 이 자리에 제가 나온 것이 많이 이상할 겁니다. 저놈은 뭐길래 기조 연설자로 나왔는지 의문이 많이 들 겁니다. 혹시 IFA 위원장이 독단으로 결정한 것이 아닌가, 아니면 무슨 다른 비리가 있지 않나 하는 의문도 들 겁니다.]
시작부터 파격적이라서 그런지 기조 연설장은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최민혁은 그런 분위기에도 아랑곳하지 않은 채 단상 앞쪽으로 걸어가서 그 앞에 있는 VIP들을 쭉 한 번 돌아보았다.
한국 기업 관련자는 같은 자리에 모여 있어서 바로 발견했다.
‘오, 오성 전자도 있구나.’
놀람과 충격에 빠진 그들.
다급하게 자신에 대해서 알아본다고 정신이 없었다.
최민혁은 오히려 이 상황을 유쾌하게 받아들였다. 이 정도면 충분히 시선을 끌어모았다고 확신했다.
‘콜린스를 조사해 보면 가장 큰 기여자가 최병연 팀장이라는 것을 알게 되겠지. 정황만 보면 난 최병연 팀장에 묻혀 가는 것이니까.’
[자, 그렇다면 IFA 조직 위원회를 돈만 받는 파렴치한 이들로 만들 수는 없겠죠. 제가 왜 이 자리에 서게 되었는지 한번 이야기해 보겠습니다.]
다소 코믹한 이야기 덕분에 기조 연설장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TV 산업은 우리 세상을 그대로 보여줄 수 있다는 믿음에서 출발합니다. 흑백 TV에서 컬러 TV로 바뀌었고, 이제는 아날로그 TV에서 디지털 TV로 변화하고 있습니다.]
시작은 나쁘지 않았다.
이상하게 생각하던 이들도 일단 최민혁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최민혁은 청중의 시선을 끌자 그제야 한 템포를 높였다.
[아날로그 TV의 장점도 있지만, 단점도 많습니다. 특히 CRT 자체의 기술적인 한계 때문에 두께를 줄이기에는 한계가 많습니다.]
하지만 아날로그 TV는 디지털 TV보다는 더 자연적인 면이 있다. 거기에 LCD, PDP와 같은 디지털 TV는 여러 가지 기술적인 문제가 존재했다.
[변화입니다. 디지털 TV 시대로 접어드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것은 바꿀 수 없는 미래입니다. MPEG 위원회에서 하는 활동이 대표적입니다. 우리 KM 전자 역시 이 활동에 적극 참여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흥분했던 이들도 뒤늦게 이 사실을 알아보자 입을 다문 채 심각한 얼굴로 최민혁 실장의 강연을 경청하였다.
특히 볼프강에게 사실을 들은 MPEG 위원회 몇 사람은 굳은 얼굴이었다.
그들 역시 이제는 최민혁의 연설을 그냥 연설로만 받아들이지 않았다.
TV 사업과 관련된 유럽 기업인들은 이게 정말인지 확인하느라 어수선해졌다.
회의장 뒤쪽에는 KM 전자의 비디오 특허를 포함한 MPEG 관련 자료가 나왔다. 최근 KM 전자의 행보를 잘 보여주었다.
말이 아니라 기술의 혁신이 이루어지는 것을 증명한 것이었다.
[MPEG 위원회 활동이 그 증거입니다. 아날로그 세상은 서서히 변화하고 있습니다.]
이동호 교수의 도움을 받아서 얻은 자료가 그 근거였다.
연설을 듣는 이들은 다들 멍하니 그 광경을 쳐다보기만 했다.
그들 역시 디지털 시대가 열린다는 것만 알았지, 실제로 그 일이 어떻게 현실에서 진행되는지는 구체적으로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이미 저런 사실을 아는 사람도 있지만, 최민혁처럼 딱딱 짚어서 이게 세상에 어떤 변화를 줄 것이라고 말하는 이는 흔치 않았다.
예상 밖의 전개에도 최민혁은 만족했다. 어차피 해야 할 일이었으니까. 조금 빨리 뚜껑을 연다고 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비디오 특허 쪽은 애초에 시선을 끌 목적으로 만든 떡밥이었으니까.’
[하지만 시간이 많이 필요합니다. 적어도 10년은 말이죠. 그러면 그동안은 뭘 할까요? 디지털 TV가 없어서 손가락만 빨아야 할까요? 그건 아닐 겁니다.]
최민혁은 설명하는 중에도 단상 한쪽에서 다른 한쪽으로 움직이면서 청중의 시선을 자연스럽게 끌었다. 익살스러운 표정과 행동은 덤이다. 마치 유능한 정치인처럼 말이다. 개막식 회장 바로 앞에 앉은 이들은 그런 최민혁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다들 감탄했다.
장황한 설명은 없었는데, 이상하게 귀에 속속 들어왔다.
단순히 말로만 저런 설득력이 있을 수는 없었다.
하나하나 다 가까운 미래에 이루어지는 것이니까.
물론 MP3는 빠졌다.
아니, 짧게 설명하고 넘어갔다.
최민혁은 익살스러운 얼굴을 한 채 자기 머리를 톡톡 쳤다.
[그래서 전 생각했습니다. 아날로그 시대와 디지털 시대의 브리지 역할을 하는 제품 말이죠. 디지털 시대의 강점을 가진 아날로그 시대 제품이라면 통하지 않을까요?]
그가 옆으로 살짝 물러나자 양쪽에서 IFA 전시회 직원이 콜린스를 하나씩 가져와서 전시했다. 모두 열 대가 나란하게 배열된 것이었다.
[바로 이 콜린스는 디지털 시대의 욕구를 충분히 만족할 만한 품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 아날로그 향수도 남아 있습니다. 디지털보다 더 디지털다운 아날로그 제품입니다. 그래서 의미가 큽니다.]
[!!]
그제야 개막식 기조연설 분위기는 완전히 바뀌었다.
한쪽 벽면에는 콜린스의 사양과 설명이 나와 있었다.
화려하게 빛나는 콜린스는 기존의 그 어떤 TV와는 비교조차 하기 힘든 면을 가지고 있었다. 소니를 비롯한 다른 가전업체의 제품 역시 마찬가지다.
아니, 세계의 모든 가전 업체에서 꿈꾸는 바로 그 모델이었다.
최민혁은 바로 그 점을 호소했다.
[당분간은 이 콜린스가 여러분의 욕구를 충족시켜 줄 겁니다. 물론 그다음 욕구는 저도 잘 모릅니다. 그건 디지털 시대를 여는 이가 결정할 테니까요. 다만 그 미래가 LCD라고 전 확신합니다!]
박수갈채가 이어졌다.
처음 접한 콜린스의 놀라운 디자인에 다들 경악을 금치 못했다.
특히 쓰레기 같은 톰슨 멀티미디어 TV 제품을 경험한 프랑스인이 받은 충격은 상상 그 이상이었다.
그리고 최민혁이 이제까지 한 말도 뒤늦게야 이해했다.
콜린스가 디지털 시대로 가는 길을 열었으니, 이다음 제품은 그의 말처럼 새로운 제품이 될 것이 분명했다.
그것은 기존의 그 어떤 제품으로도 대체재가 될 수는 없었다.
그 길을 연 이는 최민혁 실장.
환호 소리가 이어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이제 그 누구도 오다 히로 부사장의 연설을 최민혁이 대신한 것에 불만을 토로하지 않았다.
그리고 IFA 조직 위원회가 왜 무리수를 뒀는지도 이해했다.
최민혁은 연설을 끝으로 입을 딱 벌리고 있는 권태성 실장을 발견했다.
‘쇼킹할 거야. 당분간은 다른 일은 다 접고, 콜린스에 대해서 파겠지. 아마 갖은 술수를 다 부릴 거야. 어떻게 해서라도 콜린스를 막아야 할 테니까.’
그리고 그건 최민혁에게 그다지 상관이 없는 일이었다.
“…….”
권태성 실장은 넋을 잃은 채 멍하니 최민혁이 단상에서 내려가는 모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는 아직도 콜린스에서 시선을 떼지 못한 채 휘청하고 말았다.
콜린스.
그럴 수도 있다.
문제는 그 신제품을 기조연설 자리에서 알았다는 것이 더 심각했다. 저걸 오성 그룹 전략 기획실에서 알면 어떤 조처를 할지 뻔했다.
‘크, 큰일 났다.’
* * *
최문경 부회장과 최동영 상무도 최민혁의 행보를 크게 걱정하면서 최용욱 회장의 행보를 유심히 지켜봤다.
최민혁을 두둔하던 최용욱 회장의 모습은 이미 과거에도 몇 번 봤지만, 이제는 그 일도 그냥 지켜만 볼 수는 없었다.
하물며 최근에 와서 최민혁의 일에 손 떼라는 말까지 들은 것도 간과할 수가 없었다.
가족 회식이라는 명분을 내세워서 주말에 최용욱 회장 저택을 찾았다.
그 자리에는 최훈열의 아내 김여정도 자리했다. 그녀는 집행유예로 풀려난 장남 최민수와 같이 이 자리에 나왔다. 최용욱 회장의 눈을 의식한 것이었다.
최민수는 기가 푹 죽은 채 얼굴을 들지 못했다.
저녁 식사 자리는 겉보기에는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최용욱 회장은 뜬금없이 찾아온 자식들이 영 못마땅했다.
“주말에 웬일이야? 너희 꽤 바쁜 걸로 아는데, 굳이 이렇게 시간 내서 찾아올 필요가 있냐?”
역시 최문경 부회장 아내 김이경이 해맑은 얼굴로 나섰다.
“아버님, 죄송해요. 주말에는 늘 가족끼리 모여서 식사도 하고 해야 했습니다. 저희가 너무 신경을 쓰지 못했습니다. 앞으로는 자주 찾아뵙겠습니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 마.”
“아닙니다. 지난 일에 대해서는 크게 반성하고 있습니다.”
다들 사전에 모의하고 왔는지 같이 머리를 조아렸다.
석연치 않은 그들의 태도에 최용욱 회장은 헛소리하지 말라는 듯 차가운 시선을 보냈다.
“됐다. 밥이나 먹자.”
최민혁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나서 아직도 머리가 아픈 김이경은 그저 최용욱 회장의 눈치만 봤다.
최훈열이 감옥에 간 바람에 독수공방하게 된 김여정이 슬쩍 아들 최민수의 옆구리를 툭 쳤다.
초범이라서 집행유예로 풀려난 것이 아니라 담당 검사와 판사에 압력을 넣은 덕분에 이 자리에 나타난 최민수는 마른침을 삼켰다.
“할아버지, 죄송합니다.”
최훈열까지 지금 1심 공판을 앞둔 상황이라서 최용욱 회장도 그 아들에게 냉정하게 처리할 수는 없었다.
“그래. 유치장에 가보니, 어떻더냐?”
“…많이 힘들었습니다.”
그는 냉랭한 시선으로 최민수를 쳐다보았다.
“넌 그런 경험을 하고서도 앞으로 주가조작을 할 생각이냐?”
“전 주가조작 하지 않았습니다.”
최민수는 이전에 있었던 일을 계속 변명했다.
김여정이 계속 옆에서 옆구리에 구멍을 낼 기세로 건드려도 최민수는 변하지 않았다.
“정말 억울합니다. 제가 주가를 조작했다면 이렇게까지 할아버지에게 하소연하지 않습니다.”
그 모습에 최용욱 회장은 눈살을 찌푸렸다.
보다 못한 김여정이 결국 나섰다.
“아버님, 죄송합니다.”
억울한 얼굴을 한 최민수의 모습에, 평소라면 분노했을 최용욱 회장은 이번엔 차마 그러지 못했다. 그가 따로 알아본 바로는 최민수 역시 희생양이었던 게 분명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아직도 그 내막을 최민수가 잘 모르고 있다는 점이다.
주가조작으로 감옥에 간 것에 분노한 것이 아니라 병신같이 김기범이란 놈에 놀아나고도 그 내막을 모르는 것이 더 화가 났다.
“한심한 놈.”
“…죄송합니다.”
고개를 푹 숙인 최민수 역시 잔뜩 긴장했다. 집행유예로 풀려나기 이전에 이미 아버지 최훈열이 지금 재판을 받고 있는 것을 알았다.
부자가 모두 한 시기에 유치장에 갔으니.
멍청한 남편과 아들 모습에 속이 타들어 간 김여정은 냉수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
최동영 상무는 형수나 조카의 행동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힐끗 최문경 부회장을 쳐다보았다.
최문경 부회장은 그렇게 날뛰던 김여정이 폭망한 모습에 웃음이 나오는 것을 억지로 참다가 따가운 최동영 시선을 받자 표정 관리에 들어갔다.
솔직히 통쾌했다.
DL 그룹을 등에 업은 채 자신이 마치 KM 그룹 안주인인 양 행세하는 김여정이 개박살이 났으니, 가슴 한구석이 뻥 하고 뚫린 기분을 느꼈다.
그는 최동영 상무가 눈치를 주는 것도 무시해 버렸다.
최동영 상무 아내 조희정은 이미 집안 꼴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아서인지 그저 조용히 식사만 했다.
최문경 부회장은 조희정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저게 진짜 여우야.’
최용욱 회장은 밥상머리에서 머리를 굴리는 아들들 모습에 머리가 아팠다.
아니나 다를까, 이 자리에 작심하고 나타난 김여정이 슬쩍 나섰다.
“아버님, 민수 때문에 그런데, 이제는 회사 일도 조금씩 배우는 것이 어떨까요?”
최용욱 회장은 어이가 없었지만, 그렇다고 최훈열 때문에 차마 냉정하게 나가지 않았다.
“대학은 어떻게 하고?”
“휴학 내면 됩니다. 그리고 회사 일을 좀 하다 보면, 이전과 같은 실수도 하지 않을 거예요.”
최용욱 회장도 잔소리할까 하다가 둘째 며느리 김여정의 집안을 떠올렸다. 최훈열 전무 1심 판결이 얼마 안 남았는데, 그 자신이 알기로 10년형 이상은 이미 확정이었다.
김여정은 슬쩍 최훈열 전무를 걸고넘어졌다.
“그이도 감옥에서 몇 년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니 민수라도 마음을 좀 잡도록 도와주세요. 민혁이 때도 아버님이 도와줬고, 덕분에 지금은 사회생활에 잘 적응하고 있습니다.”
최민혁의 성공 스토리에 최용욱 회장도 혀를 차면서 숟가락을 내려놓았다.
“끙.”
그런데 채윤집 집사가 흥분한 표정을 한 채 갑자기 들어와서 최용욱 회장에게 귓속말로 말했다.
최용욱 회장도 뜬금없었지만 채윤집 집사의 말을 무시할 수가 없어서 식당 한쪽에 놓인 TV를 켜보라고 바로 지시했다.
TV에는 마침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독일 IFA 전시회와 관련된 특별 방송이었다.
[아마 독일 IFA 전시회에 대해서는 많이 들어보셨을 겁니다. 이 전시회는 단순히 전시만이 목적이 아니라 독일 전시회 사업의 한 단면을 볼 수가 있습니다.]
패널 한 사람이 나와서 독일 히든 챔피언 분포와 전시장의 위치를 직접 설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