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122화 (122/1,021)

#122

이동호 교수도 이미 최민혁 실장에게 몇 번 당한 경험이 있어서 아무런 언급을 하지 않았다. 굳이 남의 집 사정을 알고 싶지도 않았다.

지금은 그 일이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우르르 몰려든 이들.

기존에 하던 연구를 다 아는 지인 교수에게 넘겼고, 한가한 이들이 같이 자리했다. 그들은 그나마 분위기를 알아서인지 조용했다.

대충 눈치껏 자료를 돌리면서 상황을 하나씩 파악하기 시작했다.

“와아, 씨발, 또 나왔다.”

“그러게 말입니다. 정말 이해할 수가 없어요. KM 전자 내부에 무슨 비밀 연구소라도 있는 거야? 툭하면 이런 게 나오네요.”

“나도 공감이다. 이 정도 자료면 자기들이 내부적으로 해도 될 텐데, 왜 우리 쪽에 맡긴 걸까?”

“시간이나 인력 문제겠죠. 이 연구를 처음부터 다하는 것은 KM 전자로는 무리죠. 거기에 후속 처리 문제도 있고요.”

“하긴.”

여기 참석한 이들은 대부분 비밀 계약서를 몇 장이나 쓰고 이 자리에 온 것이었다. 도대체 무엇 때문인가 싶어 자료를 살피던 이들은 탄식을 내뱉었다.

이 내용대로라면 이미 완벽하게 준비된 밥상 위에 숟가락만 올리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밥상이 정말 먹음직했다. 돈도 안 되는 수십 편의 논문을 작업하는 것보다 이 일이 더 월등하다는 것 정도는 다들 파악했다.

이동호 교수도 골치 아픈 KM 전자 내부 사정과 자기 밑에 연구진의 푸념을 들으면서 굳이 자세한 설명이 필요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핵심만 정리해서 간단하게 입을 열려고 하다가 임기석 부장을 쳐다보았다.

“최민혁 실장님은 안 옵니까?”

“지금 독일 출장 가 있습니다.”

그는 들고 있는 기술 자료를 앞뒤로 흔들면서 소리쳤다.

“최민혁 실장은 이게 어떤 가치가 있는지 알고 독일에 가 있는 겁니까?”

“…아마 그래서 더 그럴 겁니다.”

주변 사람들은 임기석 부장에게 말을 높이다가 화가 나자 버럭 소리쳤다.

“그게 무슨 소리야?”

이동호 교수의 성정을 잘 아는 임기석 부장은 움찔했다.

“최민혁 실장님은 이 일이 알려지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혹시 내부 알력 싸움 때문인가?”

“네. 사실 지금 회사에 출근하면 전부 신제품 콜린스 때문에 최민혁 실장 이야기만 합니다. 최근 언론에서도 냄새 맡고 계속 질척거리고 있고요. 홍보 팀은 연일 걸려오는 전화 때문에 진땀을 흘리고 있습니다. 저희 실장님이 하는 일에 이제 다들 관심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만약 최 실장님이 이 자리에 나타나면, 언론이 달려들 겁니다. 그러면 이 일도 외부에 알려질 거고, 그다음은 교수님이 더 잘 알 겁니다.”

“흠.”

문득 왜 자신이 하는 일에 언론이 관심을 두지 않는지 뒤늦게 깨달은 이동호 교수도 인상을 살짝 찌푸렸다. 계약 때문에 외부에 정보를 흘리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상했기 때문이다.

‘비디오 특허 때처럼 이것도 또 다른 꼼수란 말인가?’

“하지만 어차피 특허 출원이 된 마당에 사람들이 모를 수가 있을까?”

“나중에 알려지겠죠. 그래도 당분간은 괜한 이슈가 되어서 오성 전자 같은 늑대가 달라붙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이미 콜린스 때문에 KM 전자는 내부적으로 시끄러웠다. 당연히 KM 전자, 특히 최민혁 실장에 관한 관심은 커질 수밖에 없다.

그런 최민혁 실장이 IFA 전시회 핑계를 대고, 독일에 가 있으니.

정작 KM 전자 연구소에서 진행하는 일에는 다들 관심을 가지지 못했다.

그리고 그게 바로 최민혁이 원한 바였다.

“쯧. 죽일 놈의 자식들.”

이미 오성 전자에게 수차례 당해본 이동호 교수는 혀를 찼다.

“…….”

최병연 팀장을 그제야 상황을 눈치채고 눈동자만 도르르 굴렸다. 갑자기 안산 공장에서 끌려온 이유를 이제야 안 것이었다.

하지만 조창호 차장은 오성 전자에서 꽤 오랫동안 있었던 덕분에 금방 상황을 이해했다.

“이거 진짜 끝내줍니다.”

“그러게. 그런데 정말 문제가 없겠어?”

“아직은 미비하지만, 그것도 시간이 오래 걸릴 것 같지는 않습니다. 절 굳이 이 자리에 참석시킨 것도 시행착오를 줄이기 위함일 테니까요.”

“…그렇겠지.”

“그런데 정말 놀랍습니다. 저도 MP3 관련해서 듣기는 했지만 벌써 이 정도까지 기술적인 한계를 극복했는지 몰랐습니다.”

“그렇게 의미가 있을까?”

“네. 저야 칩만 설계하다 보니, 다른 사업부 쪽에 미팅을 자주 가서 압니다. 그쪽에서도 다들 이 분야에 관심을 기울이고는 있지만, 지금은 다들 맨땅에 삽질이라서 갈피를 못 잡고 있으니까요.”

다른 사람과는 달리 조창호 차장은 이쪽저쪽 다른 사업부와도 협업을 많이 했다. 특히 멀티미디어 쪽은 어떻게 돌아가는지 잘 안다. MP3 관련된 부분 역시 선행 연구의 한 분야였다.

문제는 전 세계적으로 MP3에 대해서 잘 모르고, 이게 구체적으로 어떤 방향으로 흘러가는지 알 방법이 없었다.

이런저런 연구를 많이 하지만 정작 핵심이 될 만한 결과는 없었다.

지금 이동호 교수가 내놓은 자료는 바로 그 시작점으로 나무랄 것이 없었다.

이러면 이야기가 많이 달라진다.

“흠.”

딱 이 정도면 충분했다.

이미 최민혁 실장을 만나본 이동호 교수는 지금까지 파악한 자료의 브리핑을 시작했다.

[자, 더 자세한 설명은 필요 없을 것 같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갑시다.]

회의실 분위기는 그 어느 때보다 뜨거웠다.

임기석 부장은 특히 최민혁에게 지시받은 일을 이동호 교수를 통해 파악할 수 있어서 기분이 좋았다. 그가 특히 흥미를 느낀 것은 바로 시즈벨 특허와 겹치는 부분이다.

‘잘만 하면 굳이 시즈벨 특허는 필요 없을 것 같아. 어쩌면 최 실장님은 이것을 노렸을지도 모르겠어. 아마 실장님도 좋아할 것 같아.’

정확히는 최민혁이 의도한 것이 맞다. 브라운호퍼 연구소의 MP3 원천 기술과는 별개로 시즈벨의 MP3 특허 역시 그 의미가 있다.

아직 시즈벨이 확보하지 못한 기술 자료 일부분은 그것을 메꾸고도 충분했던 것이었다.

이동호 교수의 설명을 들을수록 더 많은 의문이 떠오른 임기석 부장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말았다.

‘신기하기는 신기해. 최민혁 실장님은 도대체 이런 기술 자료를 어떻게 확보한 것일까?’

* * *

임기석 부장은 어느 정도 돌아가는 상황을 정리하고 난 후에 최민혁에게 보고했다.

최민혁은 자신이 의도한 대로 상황이 흘러가는 것에 만족했다.

예상대로 최병연 팀장이 주도해서 MP3 관련 개발은 출발 자체가 나쁘지 않았다.

가능하면 오성 전자가 이 기조연설과 콜린스에 미친개처럼 매달리기를 원했기에 엔스 IFA 위원장의 분위기를 느긋하게 지켜봤다.

브라운호퍼와 시즈벨의 MP3 특허권을 확보하기 전까지 오성 전자가 이 일을 알기를 원치 않았던 것이었다.

엔스 IFA 위원장도 최민혁의 이야기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문제는 크라크 경제 차관보가 다시 전화로 협박한 것 때문에 단순히 좋은 이미지로만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는 결국 위원회를 소집해서 다시 콜린스를 세세하게 살핀 후에 따로 모여서 의견을 나누었다.

그 자리에서 독일 정부와 미국 정부의 압력에 대한 것도 말해주었다.

“문제는 이게 단순히 그냥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닙니다. 만약 요구 조건을 들어주면, 그만큼 여러분이 이익을 얻을 겁니다.”

IFA 조직 위원회는 알게 모르게 이쪽저쪽과 다 연줄이 있었다. 그 기업은 미국 쪽과도 당연히 관련이 있다. 만약 여기서 미국 국무부 이야기를 무시하면 괴로워진다는 것 정도는 안다.

아니, 굳이 엔스 위원장이 말하지 않아도 이미 다들 다른 채널을 통해서 압박을 받고 있었다.

여기에 더 안 좋은 점이 있다면 바로 소니 이미지다.

“엔스 위원장님, 굳이 장황한 이야기를 할 필요는 없습니다. 솔직히 소니를 싫어하는 것은 마찬가지이니까요.”

유럽 가전 시장도 석권하고 있는 소니 전자를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런데도 적극 나서지 않는 것은 소니의 광범위한 로비 때문이다.

특히 프랑스의 경우, 소니가 영향력을 확대함에 따라 톰슨 멀티미디어가 휘청이기도 했다.

다른 이들이라고 해서 안심할 수 있는 단계는 아니었다.

더 큰 문제는 이게 다가 아니었다.

“그 콜린스 말입니다. 아마 전시회가 끝나고 나면 주목받을 것이 뻔하지 않습니까. 그 열기라면 소니 역시 타격이 불가피할 겁니다. 그런데 이번 기조연설을 소니 부사장인 오다 히로에게 맡겨도 괜찮을까요?”

IFA 전시회를 이끌어가는 기조연설. 단순히 그냥 제품 소개가 아니라 혁신적인 기술을 향한 로드맵이 있어야 했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소니와 콜린스 승부는 콜린스 압승이었다.

“…그렇죠.”

엔스 위원장은 고민했다. 그는 단순히 크라크 경제 차관보 압력만을 생각하지 않았다. 내색하지 않았을 뿐이지 콜린스를 처음 보고 나서 큰 충격을 받았다.

여기에 있는 IFA 조직 위원회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좋습니다. 만약 소니 측 기조연설 담당자를 바꾼다고 합시다. 그래서 KM 전자를 선정한다고 하면 그 당사자 나이가 문제입니다.”

“아니, 나이가 무슨 관계라고…….”

“대학교 1학년생입니다.”

“아.”

“말도 안 됩니다. KM 전자의 사장이나 부사장이 있을 것 아닙니까?”

그리고 KM 전자에게서 추가로 받은 자료 중에 콜린스와 비디오 특허 원천기술 이야기가 나왔다.

“제가 보고 깜짝 놀라서 직접 확인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전부 다 사실이었습니다.”

조용했다.

콜린스 특허도 놀라웠지만 정말 충격을 받은 것은 비디오 특허였다.

IFA 조직 위원회 일원 중에는 MPEG 위원회에 참여하고 있던 볼프강은 몇 번이나 비디오 특허를 검토하면서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저도 어제 다급하게 MPEG 위원회를 통해서 알아보았습니다. 이미 내부적으로 검토가 진행되고 있는데, 다른 기존 기술보다 압도적입니다.”

“놀랍군요.”

“네. 그 자료를 본 사람은 하나같이 다 놀라더군요. 콜린스 원천기술을 잘 보면 우습게 볼 일이 아닙니다. 최민혁 실장은 제2논문 저자권자로 나와 있습니다.”

최민혁은 그 밑에 달려 있었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KM 전자 오너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그 이상도 고려해야 한다.

소란스러운 분위기를 막기 위해서 엔스 위원장이 입을 열었다. 최민혁이 했던 이야기를 줄여서 대충 말해 주었다.

최민혁 실장은 비디오 관련 기술에 대해서도 전문적인 식견과 지식.

듣고 있던 조직 위원회원은 다들 감탄했다.

“…놀랍군요.”

“나이나 인종을 다 떠나서 그 친구가 보통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콜린스가 그냥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최민혁 실장의 안목에 따라서 만들어진 물건이니까요.”

IFA 조직 위원회는 한동안 이 문제를 심각하게 다루었다.

그런데 그들 역시 미국 정부의 압력에서 벗어나지는 못했고, 일본 정부를 특히 싫어했다. 소니는 견제의 대상이었다.

거기에 최민혁 실장은 독일 정부가 그토록 원하던 강소 기업 경영자의 이상적인 롤 모델이었다.

“좋습니다. 여기까지 하고, 저녁에 다시 만나서 최종 결정을 내립시다.”

* * *

조성돈 팀장도 IFA 조직 위원회에서 계속 전화가 오자 뭔가 좀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것을 깨달았다. 특히 최민혁 실장의 프로필에 대해서 몇 번이나 확인하자 최민혁의 지시에 따라서 바로 움직였다.

사업부 비상 연락망에서 황광수 차장의 번호를 찾아서 연락한 뒤 IFA 전시회관 앞쪽에 펼쳐져 있는 벤치 한구석에서 그와 만났다.

심란한 황광수 차장이 사과부터 먼저 했다.

“죄송합니다. 임 부장이 그런 사람은 아닌데, 요즘 기획 팀 내부에 이런저런 불협화음이 많아서 그런 것 같습니다.”

“아, 괜찮아요.”

어차피 황광수 차장은 이미 오성 전자로 이직한 사람이라서 조성돈 팀장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 일 때문이 아닙니다. 혹시 오성 전자도 이번 기조연설에 나서려고 했습니까?”

“네? 아, 기조연설 말입니까? 그게… 흠, 뭐 다 지난 일이니, 숨길 필요는 없겠죠. 제가 알기로 로비를 꽤 한 것으로 압니다.”

“오다 히로 소니 부사장에게 밀렸군요.”

“네. 뭐 독일 내에서도 일본 제품의 영향력은 막강하니까요. 아마 그런 점도 무시하지 못했을 겁니다. 거기에 아직은 우리 오성 전자도 소니에 비할 바는 아닙니다.”

조성돈 팀장 역시 모르지는 않았다. 그는 그래서 최민혁 실장이 한 말이 새삼 무슨 의미인지 깨달았다.

“그런데 제가 잘 몰라서 그런데, 조직 위원회 내부에서 여전히 오다 히로에서 대해서 말이 많은 것으로 압니다만.”

“…아, 그건 말이죠.”

황광수 차장은 눈치를 봤지만, 어차피 기조연설은 이미 발표자가 정해진 마당에 큰 의미가 없다고 판단했다.

“미국 정부가 압력을 행사해서 그럴 겁니다. 그들은 소니, 정확히는 일본 기업을 싫어하니까요. 일본 대기업이 미국 할리우드 영화사를 비롯한 미국 자산을 마구잡이로 사들이고 있죠. 심지어 러시아와 손잡고 새로운 동아시아 전략을 펴고 있으니, 미국 정부가 그냥 있을 리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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