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1
어지간히 남을 칭찬하지 않는 엔스 위원장의 반응은 놀라운 것이었다.
최민혁은 뜻밖에 자신의 제안이 먹혔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게 미래니까.’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콜린스는 꽤 의미가 있는 제품입니다. 단순히 가전제품으로서 의미가 아니라, 아날로그와 디지털 TV를 가로지르는 의미가 있으니까요.”
최민혁은 콜린스가 디지털 시대로 접어드는 브리짓 역할이라는 점을 피력했다. 이 설명은 묘하게 엔스 위원장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강력한 마약처럼.
“으음.”
아는 만큼 보인다고 할까.
엔스 위원장도 가끔 머릿속에 떠올린 세계 가전 시장의 기술 흐름을 느끼자 멍하니 최민혁을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약간의 미래에 푹 빠진 엔스 위원장 모습에 최민혁은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실 저도 기조연설에서 이런 이야기를 해보고 싶습니다. 아마 엔스 위원장님에게도 나쁜 제안은 아닐 겁니다. 콜린스 가치를 예상한다면 그다음 변화는 엔스 위원장님이 잘 알 테니까요.”
잠깐의 텀.
최민혁은 양손을 쫙 펼친 채 한마디 더 남겼다.
“아날로그 시대와 디지털 시대를 가로지르는 심벌이 바로 콜린스입니다. 콜린스의 인기는 바로 그런 점에 기인할 겁니다. 그 시대를 예언하는 IFA 기조연설. 꽤 매력적이지 않습니까? 아마 엔스 위원장님의 평가에도 큰 영향을 줄 겁니다. 그럼.”
엔스 위원장은 벌떡 일어나서 최민혁을 잡으려다가 결국 멈추고 말았다.
‘…가능성이 있어.’
아마 몇 달 전이었다면 최민혁의 이야기는 그저 가십에 불과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또 그게 아니었다.
미국 경제 차관보 크라크 쿠포의 주장은 그만큼 그에게도 큰 압력으로 다가왔다.
당장 지금 IFA 위원장 자리도 위험했던 것이다.
심지어 잠깐 이 자리에서 보여준 최민혁 실장의 연설은 단순히 말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었다.
콜린스가 그 증거였다.
“조직 위원회를 전부 호출해 봐.”
사무실을 나서던 최민혁은 엔스 위원장 목소리에 미소를 지었다.
‘나쁘지 않아.’
* * *
조성돈 팀장은 엔스 위원장 사무실을 떠나며 조금 전까지 최민혁이 했던 이야기를 곰곰이 떠올렸다. 설마 최민혁이 기조연설에 욕심낼 줄은 몰랐다.
그는 깊은 고심에 빠져서 렌터카에 보조석에 앉을 때까지도 입을 열지 않다가 백미러로 그의 표정을 살폈다.
“실장님, 아무리 그래도 엔스 위원장이 지금 이 시점에서 기조연설자를 바꾸기는 어렵지 않을까요?”
“뭐 전 되든 안 되든 상관이 없습니다.”
사실 기조연설자가 되면 좋았다. 콜린스 홍보에는 더할 나위가 없었다. 아마 모르기는 몰라도 유럽에서 콜린스에 관한 관심이 폭발할 것이다.
조성돈 팀장도 많은 의문이 있었지만 홍보 가치만을 생각했다.
“차라리 다른 조치도 취하는 것이 어떨까요?”
“다른 조치라…….”
“어차피 소니를 건드린 것 아닙니까. 굳이 그렇다면 남의 눈치를 볼 필요가 있을까요?”
“소니라…….”
최민혁도 공격적인 조성돈 팀장의 제안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소니란 말에 다시 집중했다. 소니라고 하니 당장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하긴 방법이 또 있네요. 그 비디오 특허 말인데요. KM 전자에 대해서 검토하게 되면 KM 전자 자료를 추가로 요청할 겁니다. 그러니 사전에 IFA 쪽에 우리 KM 전자 관련 서류를 보낼 때 같이 보내보세요. 아, 지금 당장 처리하는 게 좋겠네요.”
비디오 특허에 대해서 이미 보고를 받은 조성돈 팀장도 고개를 갸웃했다.
“비디오 특허가 의미가 있을까요?”
“큰 의미가 있어요. STB 사업부를 넘길 때 소니 측에서 민감하게 반응한 것을 떠올리면 될 겁니다. 걔들 내부적으로 그 연구를 하고 있을 테니까.”
“…그게 정말입니까?”
“네. 소니만이 아니라 미국을 비롯한 유럽 각국에서 엄청나게 매달릴 겁니다. 한국 특허청이야 그 의미를 잘 몰라서 조용한 거고, 다른 대기업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오성 전자도 아직은 삽질하는 시기이니까요. 그런데 아마 소니가 그 특허를 보면 난리가 날 겁니다.”
실상 소니 내부에서도 가짜 비디오 특허 때 한 번 난리가 크게 났었다. 뒤늦게 검토를 거친 끝에 상업적으로 큰 의미가 없다고 판단한 후에야 조용해졌다.
그러니 지금 소니는 한국 특허에 대해서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한 번 쓰레기 같은 특허에 된통 당하고 나서는 무시하기로 한 것이었다.
오성 전자는 이런 내막까지는 아직 잘 모르고 있었다.
최민혁도 뒤늦게야 비디오 특허 때문에 결국 소니와 부딪치리라는 것을 예상했다. 소니에게 감정이 없고, 아니고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천문학적인 판돈이 걸렸으니까.’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다른 진행 사안도 정리해서 이메일로 보내라고 하세요.”
“네.”
하지만 조성돈 팀장은 잠깐 머뭇거렸다. 차량 정체 때문에 차가 잠깐 멈추자 눈치껏 입을 열었다.
“외람된 말이지만 이런 일은 어떻게 아시는 겁니까? 제가 알기로 실장님은 외국에 단 한 번도 나간 적이 없다고 들었는데요.”
“해외 신문을 자주 봤습니다. 김명준 과장님이 그 자료를 꾸준히 준비했으니, 물어보세요.”
차를 몰던 김명준 과장은 몸을 움찔거렸다. 실상 뉴스위크지를 비롯해서 전 세계 언론 매체 자료를 가져다준 것은 사실이었다.
“…사실입니다.”
“르몽드지를 비롯한 해외 언론 기사에 보면 소니에 대한 유럽인의 반감이 잘 나옵니다. 거기에 따른 소니의 움직임도 있고요. 미국 역시 일본의 자본 폭격에 위기감을 느끼는 것도 나오고요. 그런 부분만 잘 이해하면 돌아가는 추세를 알죠.”
조성돈 팀장은 힐끗 김명준 과장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슬쩍 시선을 피하는 김명준 과장. 굳이 그 부분에 대해서는 말하고 싶지 않았다. 말해봐야 자신이 자료를 잘 챙겼다고 광고하는 꼴이 되는데, 그다지 의미가 없었던 것이었다.
“…정말 대단합니다.”
최민혁이 피식 웃었다.
“우리 김 과장님이 경호원이나 운전사 일을 하면서도 자기 계발을 꾸준히 하세요. 아마 차기 비서실장은 저분이 해도 무방하다고 생각합니다.”
“크흠.”
김명준 과장은 민망해서 차량 속도를 올리다가 결국 신호 위반으로 독일 경찰에 걸리고 말았다.
* * *
최민혁 지시를 받은 조성돈 팀장은 지금 기획 팀 대리 팀장을 맡은 박상기 차장에게 연락해서 IFA 위원회 관련 지시를 내렸다.
박상기 차장은 곧바로 임기석 부장에게 받은 비디오 특허 관련 자료와 콜린스 관련 원천기술을 정리해서 IFA 전시회 담당자에게 보냈다.
임기석 부장은 조성돈 팀장을 통해서 추가로 받은 최민혁 실장의 지시를 확인하고는 곧바로 안산 공장으로 향했다.
최병연 팀장은 콜린스 발표 이후에 꽤 깊은 감명을 받았고, 자발적으로 나서서 콜린스 양산 문제를 같이 들여다봤다.
그런데 안산 공장에 내려가 있던 그를 임기석 부장이 찾아왔다.
“갈 곳이 있습니다.”
“……?”
영문을 잘 몰랐지만, 최민혁의 지시라는 말에 그냥 나섰다.
여기에는 조창호 차장도 동행했다. 그는 오성 전자에서 차장으로 있다가 이직했으니, 부장이 되어야 한다고 투덜거렸다.
임기석 부장은 그저 입가에 미소만 지은 채 최민혁 실장이 독일에서 돌아오고 나서 조직 구조가 개편될 것이라고 말만 해주었다.
그 때문에 차량 안은 한동안 시끌벅적했다.
독일 IFA 전시회에서 콜린스 분위기를 묻는 이야기도 있었다.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가 가는 곳은 그 콜린스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습니다. 최병연 팀장님도 그 점을 알아주셨으면 합니다.”
이미 회사를 옮길 때부터 들은 이야기라서 최병연 팀장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그는 직급 문제도 굳이 말하지 않았다.
최민혁 실장에 대한 불만 따위는 없었다.
이제는 그냥 최민혁 실장 지시받은 대로만 살고 싶었다.
이보다는 자신이 갑자기 어디로 가는지 그게 더 궁금했다.
질문하기도 전에 도착한 곳은 한국대 입구였다.
차량이 도착한 곳은 바로 이동호 교수 연구실이 있는 건물.
그 앞에는 이미 나와서 기다리는 이가 있었다.
이동호 교수 밑에서 모든 일을 관리하는 김재웅 박사 4년 차였다. 그는 다른 연구실에서 빼 온 몇 사람을 연구실 안으로 들여보내고 있었다.
“아, 오셨군요. 오랜만에 뵙습니다.”
“김 박사님도 잘 지내셨죠?”
“저야 뭐 늘 그렇죠.”
숫기 없는 김재웅 박사는 수줍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는 이동호 교수의 손발이 되어서 지금까지 일해 온 터라 누구보다 지금 일을 잘 알았다.
게다가 최근 비디오 특허 관련된 논문을 정리하면서 그 기술의 가치를 알아봐서인지 다른 사람 눈치를 보기 시작했다.
“걱정하지 마세요. 이분들은 이번 프로젝트에 같이 합류할 분입니다. 저분은 최병연 팀장님인데, 아마 이번 프로젝트를 총괄하게 될 겁니다. 그리고 이분은 조창호 차장으로, 칩 설계 전문가입니다. 이번 프로젝트 구현에서 칩 설계 부분을 담당할 겁니다.”
“아, 네.”
김재웅 박사도 KM 전자의 대응이 이전과는 판이해진 것을 느꼈다. 그는 세 사람을 안내하면서도 힐끗힐끗 분위기를 살폈다.
* * *
기존의 비디오 특허와는 달리 최근 받은 비디오 특허는 격이 좀 달랐다.
다른 것을 다 떠나서 구현이 쉬웠다.
그건 기술 논문 구현에서도 드러났다.
이동호 교수조차 기술의 심각성을 파악하자 머릿속이 복잡했다.
‘나머지는 방송국 엔지니어와 TV 업체 통해서 직접 확인을 해야 해. 하지만…….’
지금까지 드러난 결과만 보면 충분히 상업적 가치가 높았다.
비록 시간이 좀 걸리겠지만 어렵지 않다고 봤다.
그것은 다시 말해서 자신이 검토하고 있는 비디오 특허의 영향력이 생각보다는 크다는 이야기다. 앞으로 컨소시엄을 통해서 외부에 알려야겠지만, 그 결과는 충분히 짐작할 수가 있었다.
이동호 교수로서는 마른침을 절로 삼킬 수밖에 없었다.
‘KM 전자에서 따로 자료를 요청한 것도 홍보 때문일 것 같은데, 그렇게 된다면…….’
자신의 명성이 드디어 조망을 받게 될 것이다.
그런데 추가로 받은 MP3 관련 기술 자료 역시 무시할 수는 없었다.
단적인 예로 비트율 감소와 관련된 마스킹 한곗값을 결정하는 부분이다.
‘낮은 차수의 다항식 계수를 결정하는 알고리즘은 비트율 감소와도 관련이 있어. 이것을 잘만 활용하면 아날로그 음성 신호를 디지털 신호로 바꿀 때 효율을 대폭 증가시킬 수도 있어.’
이건 단적인 예다.
추가적인 관련 기술 자료는 MP3의 문제점을 하나씩 하나씩 다 극복했다.
더 황당한 것은 이런 진보된 기술에 대응되는 구현 자료 역시 다 나와 있다는 것이었다.
차트나 아니면 블록 다이어그램을 통해서 충분히 구현할 수 있었다.
이동호 교수는 굳은 안색을 한 채 회의실에 들어갔는데, 그 안에는 이미 KM 전자 측에서 나온 이들이 관련 자료를 보고 있었다.
그 역시 이 바닥의 전문가이지만 와 있는 이들 역시 눈치는 빨랐다.
특히 최병연 팀장은 굳은 안색을 한 채 자료를 살피다가 조창호 차장에게 말했다.
“…이 정도면 쉽게 구현할 수 있지?”
“…물론입니다. 그런데 정말 놀랍네요. 아니, 이미 이 기술 자료에 대한 기술적인 검토가 다 끝난 것 같습니다.”
조창호 차장 역시 눈을 동그랗게 뜬 채 혀를 내둘렀다.
그가 오성 전자에서 가장 짜증 난 부분이 바로 이것이었다.
제대로 된 이론.
대충 될 거라는 애매한 자료를 받아서 구현했는데, 한 달만 지나도 그 자료는 다 바뀌어 버렸다.
했던 자료를 또 수정하고, 또 수정했다.
하지만 나중에 가서는 어 이게 아니구나 하고 덮은 적이 너무 많았다.
그런데 지금 자신이 보고 있는 오디오 관련 자료는 그와는 달랐다.
더 황당한 것은 그 자료가 이미 특허 출원까지 되어 있다는 점이다.
‘아니, 이게 도대체 이럴 수가 있나?’
너무 황당해서 이게 진짜인지 몇 번이나 보고 또 봤다. 하지만 자신의 전문적인 기술 관점에서 보면 현실성이 아주 높았다.
‘이게 된다. 이 정도면 가치가 엄청날 텐데…….’
이동호 교수는 묘한 표정을 한 채 물끄러미 두 사람을 쳐다보았다.
최병연 팀장을 둘러싸고 서로 오가는 이야기.
“임 부장님, 이게 대체 뭡니까?”
“최 실장님이 독일 가기 전에 지시한 일입니다. 아, 이동호 교수님에게 일을 맡긴 것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이 바닥에 워낙 경험이 많은 분이라서 일단 급한 대로 자료를 준비한 겁니다.”
“그 말씀은… 아직 이 MP3 프로젝트에 대해서는 모른다는 말입니까?”
“이미 사장님에게 보고는 올라갔죠. 하지만 그 자세한 내막은 모를 겁니다. 저도 이 자료를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