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
사실 톰슨 멀티미디어 내부 사정 따위는 알고 싶지 않았다.
MP3 특허 관련 부분만을 노렸으니까.
‘톰슨 쪽과 협상을 끝내고, 그들을 통해서 나머지 특허권리권자인 브라운호퍼와 협상은 어렵지 않아.’
그래서 문제였다.
톰슨 멀티미디어는 일반 사기업과는 달리 프랑스 정부가 지분을 일부 가진 공기업이다.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도 정상적인 방법으로 특허권을 얻기가 쉽지는 않았다.
배종대 과장이 머리를 긁적였다.
“민영화 문제 때문에 이 회사 노조 분위기가 장난 아닙니다. 그 때문인지 특허권 매각에도 예민하게 반응합니다.”
“그럴 겁니다. 안 그래도 수익성이 나쁜데, 그나마 있는 원천기술을 팔 리가 없을 테니까요. 상식이 있다면 그러지 않을 겁니다.”
그래도 더 포기할 수 없었다.
“방법이 없겠습니까?”
밑에 실무진과는 몇 번 만났지만 딱 거기까지.
“윗선의 반대가 워낙에 심해서 쉽지가 않습니다.”
“이사 명단과 내부 인적 자원에 관한 조사 현황도 어떻게 되었습니까?”
“여기 있습니다.”
이번에는 정성근 대리가 나서서 톰슨 멀티미디어 대표 이사와 임원에 대한 상세한 설명을 이어갔다. 프랑스 공기업답게 일반 회사와는 많이 달랐다.
반응도 느렸다.
쉽게 흥분하는 배종대 과장조차 치를 떨었다.
“한 번 만나서 협상하고 나면 그냥 함흥차사입니다. 뭘 그렇게 요구하는지 정말 말도 마십시오. 아주 짜증 나 죽겠습니다.”
“그럴 겁니다.”
“다만 우리 KM 전자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확인하는 것을 보면, 그들 역시 과거와는 달리 적자가 너무 심각해서 위기감을 느끼고 있는 듯합니다.”
최민혁은 묵묵히 듣고만 있었는데, 붉은 동그라미가 쳐진 이들 중에 티에리 브르통 영업 이사 프로필을 확인했다.
“티에리 이사는 왜 따로 검사한 겁니까?”
조용히 있던 정성근 대리의 눈빛이 반짝였다.
“실장님도 이미 짐작하셨겠지만, 프랑스 언론에서도 하루가 멀다고 톰슨 멀티미디어를 공격하고 있습니다. 그 덕분에 회사 임원은 스트레스를 많이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실제로 톰슨 멀티미디어 임원은 다들 눈치껏 생존하기 위해서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이혼 전력이 있는 티에리 브르통은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다. 그는 특히 지난 결혼에서 얻은 자식 때문에 고민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아들은 락 가수를 한다고 노력을 하는데, 아직 제대로 주목 한 번 못 받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속해 있는 프랑스 최고 기획사인 아트미디어와 계약을 할 수 있었던 것도 톰슨 멀티미디어 임원이기 때문입니다.”
최민혁은 마치 톰슨 멀티미디어 족보를 다 파헤칠 각오로 말하는 정성근 대리의 설명을 중간에 끊었다.
“이 티에리 이사 말인데, 혹시 재무적으로 어려움이 많은 건가?”
“친구를 통해서 투자했는데, 100억 가까이 날리면서 파산 수준입니다. 그래서 악착같이 회사에 붙어 있는 것입니다. 게다가 아들 엔지 때문에 고민이 많은 것으로 압니다.”
“그런가? 그런데 놀랍네. 그렇게 짧은 시간 안에 이렇게 많은 정보를 얻다니.”
정성근 대리는 어깨를 으쓱했다.
“제가 운 좋게 프랑스와 독일어를 제법 해서 어렵지 않았습니다.”
“정 대리는 재주도 참 많아.”
“감사합니다.”
배종대 과장 역시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다재다능한 정성근 대리를 쳐다보았다.
워낙에 자기주장을 잘 안 하는 편이라서 저런 재주가 있는지는 처음 알았던 것이다.
최민혁은 고민을 거듭했다. 재정적으로 문제가 많다는 것을 알았다. 어떻게 해서라도 회사에서 붙어 있으려고 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점을 이용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지.’
그는 결국 배종대 과장에게 계속 티에리 이사와 약속을 잡아보라고 말했다.
“정 안되면 콜린스에 관한 이야기도 해보세요. 지금 톰슨 멀티미디어는 수익성을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을 테니, 그 점을 이용하기 위해서입니다. 김부영 영업 팀장의 도움을 얻어도 좋습니다.”
“알겠습니다.”
“아, 그리고 분위기가 무르익었다고 생각하면 넌지시 양사의 콜린스 유럽 판매 협력을 내세워서 적당한 자리를 한번 마련해 보세요.”
“네.”
자신감이 가득한 두 사람이었다.
하지만 최민혁은 한편으로 묘한 표정을 지으며 두 사람을 지켜보았다.
‘해외 영업은 자료 조사와는 달리 쉽지 않다는 것을 모르겠지. 그건 김부영 영업 팀장이라고 해도 다르지 않을 텐데, 한번 지켜봐야지.’
하지만 그는 문득 KM 전자가 유럽 시장에 너무 알려지지 않았다는 점에 주목했다. 최민혁은 배종대 과장이나 정성근 대리를 도와줄 방법을 궁리했다.
결국 한쪽에서 IFA 전시회 준비를 감독하는 조성돈 팀장을 불렀다.
“아까 IFA 위원회도 콜린스 모델에 꽤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했죠?”
“네. 엔스 하이데커 위원장조차 직접 와서 저희 모델을 보고 갔습니다. 기존 소니 모델을 뛰어넘은 품질에 큰 감명을 받은 것 같았습니다.”
“엔스 위원장이라. 정말 뜻밖이네요.”
IFA 위원장이 잘 알려지지도 않은 KM 전자의 콜린스를 보고 간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하긴 콜린스의 가치를 안다면 그냥 조용히 있을 수는 없지.’
최민혁은 문득 ‘소니’란 말에 주목해서 혹시나 하는 심정으로 질문했다.
“혹시 이번 IFA 기조연설 당사자가 누군지 아십니까?”
“소니 부사장인 오다 히로라고 알고 있습니다.”
“그래요?”
‘지금 시기라면 미국 정부가 한창 일본을 압박할 시기지. 그 수단으로 일본 대기업에 대한 견제가 한층 심해질 테고, 독일 IFA 위원회 역시 서슬 퍼런 미국 압력을 피하기 어려울 거야. 그렇다면 기조연설을 소니 측에서 하기는 힘들었을 거야. 오성 전자를 비롯한 많은 회사가 있으니까.’
아무리 오다 히로가 소니 부사장이라고 해도 기조연설을 맡은 점은 더 신기했다.
‘그만큼 로비를 많이 했다는 뜻이겠지. IFA 조직 위원회 쪽 라인에 손을 썼을 거고. 신기한 점은 왜 오성 전자가 이런 시기를 놓쳤을까?’
최민혁으로서는 의아한 일이었지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었다.
‘사전에 이 일에 손을 쓸 수 있었다면 이번 기회를 이용했을 텐데, 지금은 이미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서 힘들 거야.’
하지만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
“으음, 혹시 엔스 위원장을 좀 만나고 싶은데, 알아봐 주시겠습니까?”
“…알겠습니다.”
“아, 그런데 임권수 부장 말인데요. 그쪽에도 넌지시 정보를 흘리세요.”
“네?”
조성돈 팀장도 영문을 몰라서 눈을 끔뻑거렸다. 보안을 유지할 거면 유지하든지, 아니, 여기서 왜 정보를 흘려서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려고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최민혁은 힐끗 주변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 배종대 과장과 정성근 대리는 지시받은 대로 움직였고, 다른 임직원은 IFA 전시회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저랑 조 팀장만 아는 사실이지만 제가 TV 사업부에 관심 없다는 거 아시죠?”
“…네.”
희대의 역작 콜린스.
그런 제품을 내놓은 마당에 TV 사업부에 관심이 없다니.
조성돈 팀장은 이제 최민혁의 의중을 종잡을 수가 없었다. 차단막을 덮어버린 콜린스를 힐끗 살피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도대체 얼마나 기술적으로 만족해야 만족하는 지 알 길이 없었다.
다만 뒤늦게 IFA 조직 위원장이 와서 경탄한 것을 듣고 나서 최민혁의 태도가 많이 바뀌었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최민혁은 꿍꿍이가 가득한 미소를 지었다.
“이상하게 생각할 것은 없습니다. 노이즈 마케팅이라고 아시죠? 소란이 클수록 일은 재미있게 흘러갑니다. 그게 KM 전자에는 이익입니다.”
“…알겠습니다.”
* * *
유럽 최대 가전 전시회인 IFA의 영향력은 생각보다는 컸다.
이 전시회에서 혁신적이고 새로운 콘셉트가 나오는 것은 당연하다.
따라서 이 IFA 전시회의 기조연설을 맡는 이는 대다수가 전 세계에 잘 알려진 인물이다.
오성 전자가 좋은 예이다.
일본으로 본다면 소니 역시 빼놓기 어렵다. 따라서 이번 IFA 전시회에 소니 부사장인 오다 히로가 기조연설을 맡는 것은 그다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다만 엔스 하이데커 위원장도 미국 국무부의 압박 때문에 고민했다.
‘빌어먹을 새끼들, 내가 자신들의 개라고 생각하는 건가?’
미국 국무부 경제 차관보 크라크 쿠포의 싹수없는 행동에 화가 났다. 이번 기조연설 대상자가 일본이 아니어도 좋으니, 다른 나라로 바꾸라는 이야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무시했다.
그런데 불과 지난주에 독일 정부 라인을 통해서 압력을 받은 터라 이제는 어떻게 해야 할지 판단할 수가 없었다.
독일 정부보다는 미국 국무부가 더 무서웠던 것이다.
더 심각한 점은 크라크 쿠포 경제 차관보 역시 그렇게 나쁜 놈은 아닌데, 위에서 얼마나 압력을 받는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하지만 인제 와서 어쩌라고.’
이제 곧 전시회가 시작되는데, 이제 와서 기조연설 당사자를 바꿀 시간도 없었다.
만약을 대비해서 기조연설을 할 수 있는 이들을 쭉 떠올려 보았지만, 막상 적임자가 없었다.
오성 전자 같은 경우에는 이번 전시회에 출시한 제품을 가지고 기조연설을 하기에는 아직도 품격이 많이 떨어졌다.
오죽하면 처음 들어보는 KM 전자라는 회사의 콜린스을 확인하러 갔겠나.
‘쇼킹하기는 했는데…….’
그때 비서가 KM 전자 기획실장이 왔다는 소리를 했다. 아마 평소라면 그냥 무시했을 테지만 지금은 이야기가 달랐다.
“들여보내게.”
그렇게 보게 된 최민혁 실장.
나이는 자기 아들보다 더 어렸지만, 독일어를 유창하게 했다.
“처음 뵙습니다. KM 전자 기획실장인 최민혁이라고 합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당당한 태도.
콜린스를 보지 않았다면 당장 쫓아버려야 할 대상이었다.
좀 더 살피고서야 한동안 그 나이에 놀라고, 그 모습에 감탄했으며, 심지어 유창한 독일어에 호감마저 느꼈다.
“반갑습니다. 콜린스 모델에 깊은 인상을 받아서 한 번쯤을 그쪽 회사 담당자를 보고 싶었습니다.”
엔스 하이데커는 슬쩍 따라온 조성돈 팀장을 쳐다보았다. 최민혁이 한국의 재벌 3세라는 것을 사전에 조사해서 알기에 혹시 그가 책임자가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최민혁은 그런 엔스 하이데커의 내심을 읽기라도 한 양 당당하게 나섰다.
“콜린스를 기획한 사람이 바로 저입니다. 디자인 특허 발명권자를 확인해 보면, 저라는 것이 나올 테니까요. 다만 내부 설계는 전문 엔지니어가 했습니다.”
“그렇습니까?”
엔스 위원장 비서에게 마실 것을 시켜놓고는 두 사람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이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 판단이 잘 서지 않았다.
다른 것을 다 떠나서 최민혁의 나이가 어려도 너무 어렸다.
거기에 KM 전자는 이번 IFA 전시회를 통해서 처음 안 회사였다.
저기 독일 시골 촌구석에 있는 중소기업 정도가 딱 그가 생각하는 KM 전자였다.
하지만 마치 그의 내심을 읽은 최민혁은 오히려 밝게 웃었다. 고민으로 가득한 엔스 위원장 얼굴을 보고서야 왜 굳이 KM 전자 부스에까지 내려와서 콜린스를 살폈는지 눈치챘다.
‘벌써 미국이 독일에도 압력을 넣은 것일까?’
솔직히 그도 미국과 일본 사이에 일어난 갈등 일부만을 알았을 뿐이지, 다양한 압력 수단이 무엇인지는 잘 몰랐다.
미묘한 사실은 뉴스에도 나오지 않으니까.
다만 미국이 일본 정부를 죽이기 위해서 일본 대기업에 대한 압력을 계속 넣고 있다는 것 정도는 알았다.
미국 정부가 IFA 전시회 기조연설 대상자가 소니 관련자가 된다면 소니의 명성이 더 올라가는 것을 두고 볼 리가 없었다.
‘사실 준비만 되었다면 기회지.’
최민혁은 전형적인 독일 관료 스타일인 엔스 위원장이 별다른 표정 변화를 보이지 않는 것을 보면서 이대로 둘 수는 없다는 생각에 먼저 입을 열었다.
“지금 시기는 가전제품이 변화를 거듭하는 시기라고 봅니다. 기존 아날로그 제품에서 디지털 제품으로 변모한다고 해야 할까요. 그래서 최근 TV 시장만 해도 새로운 차세대 모델 이야기가 계속 나오고 있습니다. 플라즈마나 LCD TV가 그 대표적입니다.”
약간의 썰.
아날로그 시기와 디지털 시기가 교차하는 이야기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당장 2~3년의 미래 예언이나 마찬가지다.
IFA 위원장인 엔스가 그 정도를 모를 정도는 아니었다. 아니, 그는 오히려 놀랐다. 이곳저곳에서 저와 비슷한 이야기를 듣기는 했지만, 최민혁 이야기는 더 구체적이었다.
특히 LCD가 다음 시대를 지배할 것처럼 구체적인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물론 LCD 기술적인 한계를 넘어서야 합니다. 저에게는 대안도 있습니다. 그래서 CRT TV도 지금부터 변화해야 살아남을 수가 있습니다. 더욱 얇고, 안정된 화질을 가진 제품이어야 생존할 수가 있습니다. 소니도 가능성이 높지만, 그들 역시 정체된 매출 때문에 고민할 겁니다. 오성 전자와 LC 전자와 같은 가전 기업은 더 말할 것도 없습니다.”
“…흥미롭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