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118화 (118/1,021)

#118

그러니 최민혁보다 먼저 독일에 와서 IFA 전시회를 준비 중인 조성돈 팀장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비록 한국 대형 TV 시장을 석권한 KM 전자 기획실 팀장이라도 해도 직접 유럽 전시회에 와본 소감은 달랐다.

“출품 업체만 총 34개국에서 930곳이라는 소리를 듣기는 했지만 대단하구나.”

단순히 해외 업체만이 아니라 국내 업체 중에는 이름만 대면 알만한 회사도 많았다.

오성 전자를 시작으로 해서 LC 전자, 대운 전자 그리고 다른 가전 회사를 비롯해 여러 중견 업체도 나와 있었다.

디지털 가전을 위한 다양한 컨버전스 기술도 보였다.

세계 최대 크기를 내세우는 대형 TV와 이것과 결합한 최첨단 제품 역시 경험할 수 있는 부스도 마련되어 있었다.

IFA 전시회 부스를 꾸미는 뜨거운 분위기는 독일 경제 성장의 한 축을 차지하는 전시 사업의 한 단면이다.

독일 경제의 중심인 미텔슈탄트. 바로 강소기업으로 불리는 히든 챔피언이다. 이들 중견 기업은 전시 사업을 통해서 특정 시장과 고객에 집중했다.

시장을 광범위하게 보는 것이 아니라 한 부분만을 깊이 판 것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곧 세계무대에서 통할 수 있는 경쟁력을 쌓았다.

다른 나라에서 온 기업은 그런 독일 히든 챔피언 모습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조성돈 팀장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그는 최민혁 지시를 받아서 이곳 독일에 먼저 와서 전시회 준비를 지켜보면서 많은 것을 얻었다.

“부럽네.”

그룹 내의 계열사 갈등 때문에 한국에서 아등바등하는 자신의 모습은 정저지와에 불과했다.

직접 와서 보고서야 확연히 깨달았다.

하지만 콜린스라는 혁신적인 제품을 떠올리자 마냥 소극적이지만도 않았다.

잠깐 살펴본 오성 전자를 비롯한 그 어떤 기업도 감히 콜린스에 대항할 모델은 보이지 않았다.

조성돈 팀장은 주변에 붙어 있는 다른 독일 업체의 부스를 힐끗거리며 살폈다.

이번 전시회 준비를 담당하는 이들 역시 다른 경쟁업체 부스를 살피면서 잔뜩 긴장했다.

다른 사람과는 달리 IFA 전시회를 알았던 최주호 마케팅 팀장도 콜린스 모델을 떠올리면서 기분 좋은 땀을 흘렸다. 지금 이 순간은 그 어떤 상대도 두렵지가 않았다.

조성돈 팀장도 피식 웃었다.

“준비는 잘되어 갑니까?”

“물론입니다. 굳이 저희가 나서지 않아도 이미 콜린스를 본 사람들 반응이 확실합니다. 김부영 영업팀장은 벌써 바이어를 만나고 있으니까요.”

“아, 그렇습니까?”

이런 전시회에 몇 번 참가했지만, IFA 전시회는 처음인 조성돈 팀장도 흥분을 쉽게 감추지 못했다.

시간이 흘러도 최주호 팀장은 아직도 상기된 표정을 쉽게 떨치지 못했다.

“이번 사업부 발표회 때는 정말 대단했습니다. 실장님이 그런 모습을 보일지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더욱이 사업부 발표 이전에 이미 이런 콜린스 데뷔 무대를 계획했었다니.”

독특한 최민혁의 기행.

입고 있는 옷만 해도 파격적이었고, 발표회는 더 놀라웠다.

하지만 콜린스가 나오자 최민혁을 비웃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KM 전자 임직원은 이제 최민혁을 단순히 재벌 3세가 아니라 아예 격이 다른 경영자로 보았다.

조성돈 팀장도 피식 웃고 말았다. 비밀리에 진행된 일이라서, 기획 팀을 제외하고는 아는 사람이 손으로 꼽을 정도다.

‘무리한 계획이었지.’

그래서인지 최주호 팀장은 불만이 좀 있었다.

“광고를 비롯한 마케팅 일정을 세우기가 너무 빡빡합니다. 사전에 미리 알았다면 좀 더 철저히 준비했을 텐데…….”

“최민혁 실장님이 지시한 대로만 하면 될 겁니다.”

“압니다. 지시에 따라야죠. 그런데 홍보팀 내에서도 오혜정 비서를 이번 콜린스 광고 모델로 내세우는 것에 말이 많습니다.”

조성돈 팀장도 살짝 인상을 찡그렸지만, 최민혁을 옹호했다.

“미스코리아 출신이라는 것은 아시지 않습니까. 딱히 문제가 될 것은 없습니다.”

“그래도 비서와 실장 관계이지 않습니까. 뭐 이상한 눈으로 보는 직원도 있으니까요. 아, 물론 심각한 것은 아닙니다. 워낙에 최 실장님의 평판이 높아져서 그럴 수 있다고 보니까요.”

이번 콜린스 발표로 등장한 최민혁의 압도적인 모습에 다들 삼처사첩을 거느린다고 해서 불만을 품는 이들은 없었다.

파산을 걱정하던 KM 전자 직원에게 최민혁은 살아 있는 군주였다.

이미 최민혁에게 오혜정 비서를 비롯한 몇몇 비서가 이번 광고를 통해서 회사에 기여하기를 바란다는 이야기를 들은 조성돈 팀장은 굳이 그런 내막까지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너무 걱정 안 해도 될 겁니다.”

“뭐, 까라면 까야죠. 다만 너무 비밀리에 진행되는 일이 많아서 문제예요."

“애초에 실장님은 보안을 더 중시했으니까요. 오성 전자를 비롯한 가전 3사도 문제지만 최문경 부회장의 압력도 무시할 수는 없었으니까요.”

“아, 그건 그렇죠. 하긴 그게 진짜 문제였죠.”

그 역시 최병연 팀장 사연을 뒤늦게 듣고 나서는 혀를 내둘렀던 것이다.

조성돈 팀장은 그런 점을 다시 지적했다.

“아마 외부 방해를 받았다면 지금 이렇게 전시회에 나오는 것도 쉽지 않았을 겁니다.”

“네.”

최주호 팀장도 최민혁이 왜 그렇게 철저하게 보안을 유지했는지 확연히 이해했다. 옆을 오가는 이번 행사 임직원 역시 딱히 불만을 느끼지 않았다.

이유는 콜린스가 그만큼 혁신적이었으니까.

작년 국내 전시회 악몽을 떠올린 최주호 팀장은 최민혁에 대한 부정적인 기억을 머릿속에서 완전히 지웠다.

‘이번 전시회는 기대할 만해.’

* * *

콜린스는 기존의 그 어떤 모델과는 차원이 다른 제품이었다. 이를 모른다면 이번 IFA 전시회에 참여한 KM 전자의 행보를 좋게 볼 리는 없었다.

오성 전자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KM 전자 동선을 확인하다가 뒤늦게 알고, 깜짝 놀란 임권수 부장이 KM 전자 부스에 있는 조성돈 팀장을 발견한 것이었다.

“설마 조성돈 팀장을 여기서 보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오랜만에 봅니다.”

이미 최민혁에게서 오성 전자 부스를 확인하는 김에 기획 팀도 살펴보란 지시를 받았던 조성돈 팀장은 혀를 내둘렀다.

‘오성 전자가 빠질 리가 없는 IFA 전시회에 KM 전자가 참여했으니, 만나는 게 당연하겠지.’

어이가 없는 얼굴로 악수를 청한 임권수 부장은 잠시 후 황광수 차장과 다른 몇 사람을 데리고 이곳에 다시 나타났다.

소니, 필립스와 같은 다른 부스를 살피려고 나왔다가 KM 전자 부스를 발견한 것이었다.

특히 황광수 차장은 눈인사하면서도 고개를 갸웃했다.

김현우 상무 때문에 KM 전자의 내부를 파악하는 일이 뒤로 밀린 터라 자세한 내막을 몰랐다가 이곳에 와서야 신제품이 완성되었다는 것을 확신했다.

다만 국내 전시회나 동아시아 쪽에만 집중하던 KM 전자가 독일 IFA 전시회에 얼굴을 내밀지는 몰랐던 것이다.

‘판로부터 시작해서 아무것도 없을 텐데, 어쩌려고 저러는 것일까?’

조성돈 팀장은 다른 사람과는 달리 임권수 부장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그와는 이전에 KM 본사 기획조정실 미팅이 있을 때 가끔 본 적이 있었다.

이미 전시회를 오가면서 오성 전자 부스를 봤지만, 혹시라도 이런 이를 만날까 걱정해서 아예 떨어져서 봤다. 괜히 아는 이는 피하고 싶었는데, 그중에 가장 거북한 인물을 만난 것이었다.

‘하필이면 이 인간일까?’

“이번에 오성 전자 기획 팀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덕분에 이번 IFA 전시회 출장을 온 거죠.”

“그렇습니까?”

괜히 말도 하기 싫은 조성돈 팀장은 찰거머리처럼 달라붙는 임권수 부장의 행동에 한숨을 내쉬었다. 특히 오성 전자 인원 32명을 빼돌린 사건을 떠올렸다.

‘아주 칼을 갈고 있겠군.’

임권수 부장도 비웃기는 했지만, KM 전자를 조사하다 말았기에 혹시나 싶어서 KM 전자 부스를 살폈다. 매의 눈으로 뒤꿈치까지 들어서 KM 전자 부스 안쪽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이번 전시회 콜린스 샘플은 차단막으로 덮여 있어서 알 수가 없었다.

“…KM 전자가 어렵다고 들었는데, 국내 전시회라면 이해가 되지만 이런 큰 전시회에 나올지는 몰랐습니다. 여기 참여해서 달라질 것이 뭔가 있나 모르겠습니다. 제품이 얼마나 대단한지 모르겠지만, 판로가 있기는 합니까? 솔직히 돈이 아깝다는 생각이 듭니다.”

소갈머리 없는 답변에 조성돈 팀장은 한숨을 내쉬었다.

“…최선을 다해야죠.”

하지만 KM 전자 때문에 힘든 상황에 빠진 임권수 팀장은 짜증을 냈다.

“그게 과연 최선을 다한다고 해서 될 문제이겠습니까. 들어가는 자본과 인력만 비교해도 미래가 불투명하다는 것은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니까요. 차라리 내수시장에만 집중하는 것이 정답이죠. 분수에 맞지 않는 욕망은 KM 전자의 파산을 부를 겁니다.”

이죽거리는 말투에 조성돈 팀장은 한숨을 내쉬면서 매몰차게 말했다.

“제 일정이 빡빡해서 그런데, 나중에 다시 이야기하면 안 되겠습니까?”

하지만 KM 전자 조사 때문에 권태성 실장에게 찍힌 임권수 부장은 그럴 수가 없었다.

“조 팀장님은 왜 이러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KM 전자가 망하면 당장 그 책임을 져야 할 사람 중에 한 분이지 않습니까. 저에게 잘 보여야 혹시라도 오성 전자 인사 팀에 좋은 얘기를 할 수도 있죠. 제가 부정적인 이야기를 하면 어쩌려고 그럽니까?”

그렇게 말하며 슬며시 부스 안으로 들어가려고 했다가 다른 KM 전자 직원에게 제지를 당했다. 그가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그 모습을 본 조성돈 팀장은 혀를 찼다.

“아마 그럴 일은 없을 겁니다. 그리고 부스 준비하는 일을 방해하지 마세요. 자꾸 이러면 IFA 측에 고발하겠습니다.”

결국 뒤로 물러난 임권수 부장.

“사람 일은 모르는 법이죠. 솔직히 당장 KM 전자가 망할지 누가 압니까?”

아예 보는 앞에서 KM 전자를 비웃는 임권수 부장이었다.

조성돈 팀장은 차마 반박할 수가 없어서 듣기만 했다.

그게 또 화가 나는지 임권수 부장은 계속해서 공격했다.

“KM 전자에 있을 때도 조 팀장님은 너무 답답해서 말이 많았으니까요. 오죽하면 장 실장님이 따로 조 팀장님을 관리하겠습니까?”

“글쎄요.”

조성돈 팀장도 장승일 실장이 자신을 지켜봤다는 말에 흠칫했다. 겉으로 봤을 때는 그런 모습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뭐 다른 이유가 있겠지.’

여전히 표정 변화가 없는 조성돈 팀장 모습에 임권수 부장은 발끈했다.

“됐습니다. 어차피 우리 오성 전자 신제품에 비하면 쓰레기 같은 KM 전자 제품은 안 봐도 상관이 없겠죠. 심심하면 한번 우리 부스로 와보세요. 제가 직접 최첨단 오성 제품을 소개해 드릴 테니까.”

자존심이 상한 임권수 부장은 10분 정도 더 귀찮게 조성돈 팀장에게 찝쩍거렸다. 그리고 KM 전자 부스 안으로 몇 번이나 들어가려고 했다가 인상을 쓰는 KM 전자 직원 때문에 뒤로 물러났다.

뒤에 있던 황광수 차장이 오히려 뒤에서 고개를 숙여서 사과했다.

“…….”

조성돈 팀장은 한마디 할까 하다가 독이 잔뜩 오른 임권수 부장을 보자 그냥 내버려 두었다.

‘하긴 저러다가 잘릴지도 모르지.’

* * *

조성돈 팀장은 굳이 다른 경쟁업체에 굳이 콜린스를 보여주지 않았다.

이미 KM 전자 임직원의 반응만 봐도 충분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상황이 살짝 변했다.

오전에 잠깐 이곳을 방문했던 독일 조직 위원회 한 사람이 십여 명을 데리고 우르르 몰려왔다.

제일 앞에 선 이는 이번 독일 IFA 조직 위원회 위원장 엔스 하이데커였다. 전형적인 독일인으로, 법을 잘 지키고, 융통성이 없는 사람이었다.

조성돈 팀장이 통역 직원과 같이 나서서 그에게 인사했다.

“무슨 일입니까?”

엔스 위원장이 슬쩍 자신을 간단히 소개한 후에 입을 열었다.

“이번 전시회 준비로 수고가 많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혹시 콜린스 모델을 좀 볼 수 있을까요?”

“…알겠습니다.”

의아한 일.

IFA 위원장이 아무리 다른 실무진의 보고를 받았다고 해도 이렇게 부스를 찾아온 것은 이례적인 일이었다.

아마 콜린스를 몰랐다면 조성돈 팀장도 귀찮게 이런저런 질문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혁신적인 콜린스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면 이야기는 다르다.

눈치 빠른 조성돈 팀장은 임권수 부장에게 했던 행동과는 달리 엔스 위원장에게 자잘할 질문 따위는 하지 않았다.

‘하긴 콜린스라면 충분히 이목을 끌 만하지.’

그들도 사람이다. 아마 듣보잡 KM 전자에 대해서는 알지도 못했을 것이다. 뒤늦게 실무진을 통해서 샘플을 확인했을 거고, 이제야 윗선에 보고가 올라갔을 것이다.

조성돈 팀장은 차폐막으로 가려진 콜린스 샘플을 보여주었다. 물론 부스 이벤트로 준비된 다른 모델도 같이 보여주었다.

“오, 맙소사!”

엔스 위원장은 입을 딱 벌린 채 우아한 콜린스 자태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동행한 이들 역시 큰 충격에 감탄사만 남발했다.

그럴 수밖에.

이들은 누구보다 히든 챔피언 기업의 성향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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