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6
“정부도 오성 전자의 독점을 허락하지 않을 겁니다. 여론이 너무 나쁘기 때문입니다.”
“글쎄.”
최용욱 회장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안건민 회장이 다른 대안을 마련할 것으로 생각했다. 실상 KM 전자에 대한 공격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차라리 KM 전자를 포기해야 하나.’
당장 최민혁 얼굴이 떠올라서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고 말았다.
자신이 아들에 이어서 손자에게도 너무 큰 짐을 떠맡긴 것이 아닌가 싶었다.
오히려 첫째나 셋째가 KM 전자의 경영권을 쥐고 있다면 그냥 차라리 매각하면 되니까.
최용욱 회장 마음을 읽은 채윤집 집사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쳐다보았다. 회사 일에 신경을 쓸수록 건강에 안 좋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때 마침 장승일 실장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최민혁이 약속한 물건을 가지고 지금 입구에 와 있다는 연락을 받은 장승일 실장이 최용욱 회장을 쳐다보았다.
“무슨 일인가?”
“최민혁 실장에게 따로 연락을 받았습니까?”
“아, 얼마 전에 통화했네.”
“지금 그 물건이 도착했다고 합니다.”
“그래?”
최용욱 회장은 오성 전자의 횡보 문제 때문에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당장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KM 전자였다.
만약 TV 사업부가 오성 전자에 밀려서 타격을 받는다면 상황이 심각했다.
최민혁이 아무리 능력이 있다고 해도 도움이 될 것 같지가 않았다.
“장 실장이 뭔가 보여줄 것이 있나 봅니다. 제가 지금 나가보겠습니다.”
저택 문밖으로 나간 채윤집 집사는 바깥이 소란스러운 것을 발견했다.
열린 저택 문 사이로 몇 사람이 커다란 짐을 나르고 있었다. 상장에 포장되어 있어서 겉으로 봐서는 내부에 뭐가 있는지 드러나지 않았다.
장승일 실장은 채윤집 집사를 보면서 정중하게 고개를 숙인 후에 다른 직원에게 짐을 회장님 서재로 가져가라고 지시했다.
채윤집 집사는 옆에 물러나서 그 광경을 보고는 혀를 내둘렀다.
“아니, 도대체 뭔가?”
이미 실장실에서 콜린스와 관련한 설명을 들은 장승일 실장이었지만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한마디로 끝내기에는 사연이 너무 복잡했다.
그 역시 당시 최병연 팀장의 내막을 중간에 보고받기는 했지만 정확한 사연까지는 솔직히 잘 몰랐다.
“신형 모델입니다.”
눈치가 빠른 채윤집 집사도 혀를 찼다.
“하반기에 출시한다는 그 모델인가 본데, 굳이 회장님에게 직접 가져올 필요가 있었나?”
“회장님이 직접 요청하신 거라서요. 아, 그리고 아마 보면 깜짝 놀랄 겁니다.”
최용욱 회장 건강을 걱정하는 채윤집 집사는 탄식하고 말았다.
“장 실장, 그 알 만한 친구가 왜 그러나. 지금 회장님 건강 상태를 몰라? 가능하면 충격받는 일을 자제해야 해!”
“으음, 좋은 충격이라면 좀 다르지 않겠습니까? 일단 들어가서 물건 보시고 이야기하시죠.”
“자네, 지금 날 놀리나?”
오히려 감정을 내세운 채윤집 집사의 행동에 장승일 실장도 그냥 저택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에 채윤집 집사는 뒤에서 잔소리하면서 따를 수밖에 없었다.
* * *
최용욱 회장 서재 중앙에는 장승일 실장이 가져온 상자가 놓여 있었다.
장승일 실장의 지시를 받은 이들은 그저 최용욱 회장의 눈치만 봤다.
최용욱 회장은 오성 전자의 문제와 앞으로 KM 전자 미래에 대한 우울한 전망 때문에 상자와 그들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굳어 있는 최용욱 회장의 안색이 얼마나 심각한지 안에 들어와 있는 이들은 다들 눈치만 보고 있었다.
장승일 실장은 정중하게 인사를 한 후에 입을 열었다.
“상자를 열어보게.”
최용욱 회장이 손을 저었다.
“이봐, 장 실장, 지금은 나 혼자 있고 싶어.”
“아마 회장님도 보셔야 할 겁니다.”
“허, 이 친구야, 내 머릿속이 복잡해서 그러니 지금은 가 보게.”
“오성 전자의 공격적인 움직임 때문이라면 더 이 물건을 보셔야 합니다. 아마 지금 하시는 고민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아도 될 겁니다.”
오연한 장승일 실장 태도에 최용욱 회장도 눈을 끔뻑거렸다.
늘 소극적이기만 하던 장승일 실장의 모습과는 너무 달랐다.
하지만 최용욱 회장만큼이나 장승일 실장 역시 KM 전자와 KM 그룹의 운명을 번민했다. 그 어떤 방법도 없어서 하루하루가 괴로웠다.
그 짐을 떨쳐 버렸으니, 평소와 같을 리가 없었다.
“…열어봐.”
박스 개봉은 쉽게 이루어졌다.
하지만 그 내부 물건만큼은 그렇지가 않았다.
“……!!”
은빛 광태로 번쩍이는 대형 TV는 소니의 최근 모델과 비교해도 몇 단계 위의 디자인으로, 도저히 비교 자체가 되지 않았다.
절묘한 디자인으로 전자빔을 교묘하게 감춘 점도 다른 TV와는 비교하기 힘들었다.
얇게 뻗은 몸매는 보는 시선을 즐겁게 했다.
경악한 최용욱 회장과 채윤집 집사의 표정을 무시한 장승일 실장은 아무런 설명도 없이 그냥 TV를 켰다.
콜린스 화질은 거실에 있는 다른 경쟁 회사 모델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다채로웠다.
가까이 다가가면 나타나는 불안정한 화면의 움직임 역시 거의 보이지 않았다.
마치 사진을 떠올리게 할 정도로 안정적인 화면은 환상 그 자체였다.
현존하는 대형 TV를 넘어서는 놀라운 작품에 최용욱 회장도 벌떡 일어나서 TV를 살폈다.
“…대, 대단하네. 이거 설마 소니의 차세대 모델인 건가?”
콜린스 모델은 중앙 하단에 있는 로고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래서 겉으로 봐서는 이게 어느 회사 제안인지 알 수가 없다.
있다고 한다면 뒷면에 중앙 상단에 있는 콜린스 로고일 뿐이다.
장승일 실장이 슬쩍 화면을 뒤로 돌려서 숨겨진 제조업체 라벨을 보여주었다.
-KM 전자?
“뭐? 이, 이게 설마 우리 회사에서 만든 제품이라고?”
“네. 최민혁 실장님이 준비 중이라고 했던 그 신제품입니다.”
입을 딱 벌린 최용욱 회장은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아니, 신모델 개발한다고 들은 지가 불과 얼마 되지도 않는데, 이런 모델을 만들었다고? 말이 안 되잖아!”
“으음, 그게 말입니다. 아마 최병연 팀장은 아실 테니, 거기서부터 시작하면…….”
장승일 실장은 그제야 기획실에 있었던 이야기를 토대로 해서 자세한 내막을 말해주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앞뒤가 완전히 맞는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의혹을 품고 있던 최용욱 회장도 그제야 탄식하고 말았다.
“…기존에 이미 TV 연구소에서 선행되어 오던 기술을 조합해서 3개월 만에 이 제품을 만들었다고? 장 실장, 그걸 지금 날 보고 믿으란 소리야?”
장승일 실장도 정면에서 면박을 당하자 어색하게 웃었다. 그 역시 몇 가지 이상한 점을 최민혁에게 질문해 봤지만, 답을 듣지 못했다.
“최 실장님이 그렇게만 알고 있으라고 해서 더 자세한 것은 모릅니다.”
그런데 최용욱 회장은 당시 KM 전자 내부에서 있었던 일을 자세히는 몰랐다. 아니, 최훈열 전무가 관련이 있어서 의도적으로 알려고 하지 않았다. 설사 그렇다고 해도 이 콜린스라는 결과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바로 디자인 때문이다.
다른 사람과는 달리 최용욱 회장만큼은 너무 이질적인 콜린스 디자인을 선뜻 받아들이지 못했던 것이다.
최용욱 회장은 참다못해서 최민혁 실장에게 전화를 걸려 했다.
그때 장승일 실장이 넌지시 말을 건넸다.
“이미 독일 출장 갔습니다.”
“끄응.”
최용욱 회장은 그제야 일어나서 콜린스 모델을 이리저리 뜯어보았다. 하지만 그는 시간이 흐를수록 감탄만 했다.
단순히 디자인 때문이 아니다.
바로 화질 때문이었다.
생생한 색채재현율을 떠나서 거의 노이즈 하나 없는 화면은 TV의 정석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게 과연 아날로그 TV인지도 의심스러울 정도로 놀라웠다.
“…진짜 잘 만들었네. 이걸 민혁이가 기획했다고? 하, 이거야 원.”
차라리 최민혁이 주식 투자를 통해 재산을 불린 것은 이해했다.
회사 구조조정도 그럴 수가 있다.
최훈열 전무나 김현우 상무를 회사에서 축출한 것도 그렇다고 하자.
하지만 콜린스 같은 모델을 이렇게 내놓은 것은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장승일 실장이 옆에 붙어서 분해된 내부 사진을 보여주었다.
“엔지니어가 TV 내부 부품을 일일이 다 만들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다 손을 썼습니다. 외주를 줬다고 해도 따로 관리를 해왔습니다. 그만큼 대단한 엔지니어였던 겁니다.”
기존 TV와는 차원이 다른 수준의 완성된 장인 정신이 녹아 있었다.
최용욱 회장은 멍하니 콜린스 내부 보고안을 살피면서 입을 다물지 못했다. 내면 역시 기존 제품과는 또 차원이 달랐다.
최민혁 실장을 과소평가한 것은 아니지만 그나마 한 단면을 안 장승일 실장도 착잡한 얼굴이었다.
“기존 TV 사업부의 모든 기술력과 경험이 완전히 녹아든 제품이 바로 이 콜린스입니다. 그러니 완성도 면에서 다른 제품과 비교조차 하기 힘듭니다.”
“허.”
놀람은 계속되지 않았다.
최용욱 회장은 뒤늦게 최민혁이 지금까지 해왔던 작업을 떠올리다가 한 가지 사실에 혀를 찼다.
비록 자기 지분을 증여하지 않았다고 해도 고작 1,600원 가격에 넘겼다.
이 콜린스 모델이 시장에 본격적으로 팔리기 시작하면 그 주가가 얼마나 될지 누구도 장담하기 어려웠다. 자신조차 KM 전자 주가가 3,000원만 넘어도 지분을 다 넘기지는 않았을 테니까.
“…대단한 놈이다.”
장승일 실장 역시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껏 최 실장님이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이해를 못했습니다. 이제야 알게 되었습니다. 전부 다 이 콜린스 제품 때문입니다.”
하지만 이미 오성 전자 임직원을 빼돌린 일을 떠올린 최용욱 회장은 고개를 갸웃했다.
“가서 한번 자세히 확인해 봐. 그리고 문경이 그놈 동태도 잘 살펴봐. 아마 이 사실을 알면 그냥 안 있을 테니까.”
“알겠습니다.”
그리고 한 가지를 지적했다.
“다른 이는 몰라도 최두진 사장에게는 콜린스와 관련된 이야기를 해주게. 만일 억울하다면 따로 보상을 해주겠다고 해.”
“바로 처리하겠습니다.”
* * *
“하, 씨발.”
최문경 부회장은 자신 앞에 놓인 콜린스 샘플을 보면서 이를 뽀드득 갈았다. 너무 화가 나서 신경 안정제를 또 먹었다.
기획 조정실에서 받은 샘플 하나를 천경구 과장을 통해서 어렵게 빼돌린 권재홍 비서실장도 최문경 부회장의 눈치만 봤다.
‘빌어먹을.’
아니, 그룹 비서실장이 왜 기획 조정실 눈치를 봐야 하는지 분노했지만 일단 참았다. 그 역시 최민혁 실장이 뒤에서 이런 짓을 하고 있을지는 상상도 못했다.
특히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KM 전자 지분이다. 이 콜린스 모델이 본격적으로 팔리면 KM 전자 주가가 어떻게 될지는 불을 보듯 뻔했다.
배가 너무 아파서 미칠 것 같았던 최문경 부회장은 다시 냉수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아무리 마셔도 분노가 가라앉지 않았다.
“…아버지도 이미 알았던 거야?”
“천경구 과장 말로는 구길모 차장도 황당해했다고 합니다. 그는 오히려 장승일 실장에게 이것 때문에 따졌다고 합니다.”
“그래? 하아, 장 실장도 몰랐다라. 재미있구나. 진짜 재미있어.”
사실 그룹 기획 조정실에서 계열사 내부에서 진행되는 일을 몰랐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이야기다. 비록 계열이 분리되었다고 하나, 아직은 KM 그룹 계열사 중의 하나가 KM 전자였던 것이다.
물론 지금은 둘 사이의 관계 사슬이 다 끊어지고 있다고 해도 그 사실은 변치 않았다.
다만 그나마 있던 KM 전자와의 영업 관계를 다 끊으라고 지시 내렸던 최문경 부회장은 최민혁의 꼼수에 내심 치를 떨었다.
“민혁이 고놈이 의도적으로 그런 거야?”
“지금 봐서는 그렇게 보입니다. 솔직히 이런 모델의 개발이 끝났다면 굳이 다른 계열사에 의존할 이유는 없습니다.”
“수출인가?”
“네. 이 정도 모델이라면 충분히 해볼 만합니다. 소니라도 해도 겁이 나지 않을 정도인데, 오성 전자는 신경도 쓰지 않았을 겁니다.”
“그러면 난 완전히 병신 짓을 한 거네?”
“…….”
“이봐, 권재홍 실장, 내가 지금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나?”
“…죄송합니다.”
최문경 부회장도 살기가 가득한 눈으로 권재홍 비서실장을 쳐다보았지만, 곧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권재홍 비서실장을 깬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었다.
“그러면 KM 전자 영업 팀이나 마케팅 팀에서도 몰랐나?”
“네. 그쪽에 있는 친구 이야기로는 사업부 회의에서 처음 알았다고 했습니다. 심지어 오영근 사장이나 문형섭 부사장 역시 그때 알았고, 상당히 충격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결국 콜린스 모델 양산 업무와 관련된 인물이 아닌 이들은 이 사실을 전혀 몰랐습니다.”
“민혁이 그놈은 알았고?”
“네. 이번 발표를 주관한 사람이 최민혁 실장이었으니까요. KM 전자 임원 중에 최민혁 실장이 주도했다고 봐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