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115화 (115/1,021)

#115

그제야 상황을 알게 된 오영근 사장이 풀썩 자리에 앉았다.

최용욱 회장이나 최문경 부회장은 KM 그룹을 총괄한다. 따라서 그들이 콜린스 모델에 대해서 알게 된다면 정보는 밑으로 흐르게 마련이다.

‘아니, 의도적으로 흘릴 수도 있지.’

거기에 경쟁사도 문제다. 이미 오성 전자가 꼼수를 부려서 파고들었으니, 다른 업체가 그러지 말라는 법도 없었다.

최민혁 홀로 그들과 싸우면서 견제를 했기에 그나마 여기까지 왔다고 생각했다.

오영근 사장도 새삼스러운 눈길로 최민혁 실장을 쳐다보았다.

“…정말 잘했네.”

최민혁은 달라진 오영근 사장의 태도에 내심 혀를 내둘렀다. 그가 오영근 사장을 높이 본 것은 저렇게 편견에 휩싸이지 않는 공정한 태도 때문이었다.

“전 최선을 다한 것뿐입니다.”

“그래, 그게 맞아. 그런데 난 사장 자리에 있으면서 그걸 잘 못 해.”

“제 생각은 다릅니다. 사장은 사장다워야 하고, 기획실장은 기획실장다워야 합니다. 자기 역할을 제대로 하지 않은 외야수가 투수를 하는 분위기가 되면 진짜 개판이 됩니다. 사장님은 모름지기 사장 역할을 잘해왔습니다. 다만 밑에서 사장님을 제대로 도와주지 못한 것뿐입니다.”

“음.”

놀라운 평가에 오영근 사장은 슬쩍 입을 다물고 말았다.

이제는 최민혁 독재가 오히려 격이 다른 지도력으로 보였다.

하지만 문형섭 부사장은 보안 문제보다는 도대체 이 콜린스 모델을 어떻게 개발했는지가 더 궁금했다.

“최 실장, 난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어. 오성 전자나 LC 전자도 다 이와 유사한 프로젝트를 진행하다가 접었네. 그런데 이 모델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 건가?”

“이미 발표회 때 충분히 설명했습니다만?”

“최구만 과장 말인가? 나도 백그라운드는 알겠어. 하지만 그건 더 말도 안 돼. 그 친구 혼자 힘으로는 불가능해.”

“김갑래 과장과 윤선기 대리도 있었습니다.”

“자네도 날 우습게 아나. 좋아, 그렇다고 치세. 이 정도 모델을 개발하려면 막대한 비용이 들어. 그 돈은 도대체 어떻게 마련한 건가?”

사실 이게 문제였다.

‘그 전용 자금 중에 일부는 비자금하고도 관련이 있으니까.’

그러니 이 문제를 덮을 수밖에 없었다.

“그거야 전 연구소장님과도 알아서 했겠죠. 제가 그것까지 알 수는 없죠.”

어깨를 으쓱한 최민혁은 연구 예산 주제를 슬쩍 기술적인 문제로 넘어갔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담당자가 와서 여러분의 의문을 풀어줄 테니까.”

아직도 감정이 풀리지 않은 이들은 다들 최민혁 실장을 잡아먹을 듯이 쳐다보기만 했다.

콜린스 모델은 그야말로 KM 전자의 미래를 좌우할 물건이다.

이 개발 정보를 사장에게도 비밀로 했으니.

아무리 오너라고 해도 선을 넘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또 그렇지 않을 수도 있었다.

피치 못한 상황에 정보를 독점한 최민혁도 자기 잘못을 인정해서인지 그들 시선을 슬쩍 피하고 말았다.

‘우리 첫째 큰아버지의 스토커 기질 때문에 어쩔 수가 없었지.’란 말까지 굳이 하려다가 참았다. 다들 오영근 사장의 눈치를 보면서 스스로 깨달은 것이었다.

최민혁이 왜 내색하지 않는지도.

* * *

최구만 과장은 일약 KM 전자의 영웅이 되면서 뜨거운 환호를 받았다. 오혜정 비서를 통해서 호출을 듣자 당당한 걸음으로 실장실로 향했다.

가는 중간에 최병연 팀장을 비롯한 몇 사람을 복도에서 만났다.

“회사가 분위기가 시끌시끌한데, 갑자기 무슨 일이라도 있어?”

굳이 자신이 설명하기보다는 직접 보는 것이 더 좋다고 생각한 최구만 과장은 씩 웃었다.

“곧 알게 되겠죠.”

어깨동무를 한 최병연 팀장은 넌지시 최구만 과장에게 툴툴거렸다.

“뭐야? 설마 나한테 숨기는 것이 있어?”

친근한 행동에도 내색하지 않았다.

“과장 나부랭이가 뭐 아는 게 있습니까?”

“사업부 회의에 자네가 스타 되었다는 소리가 파다하던데, 정말 그럴 거야? 우리 최 과장이 이제 홀로서기 해서 기분이 좋아.”

시기가 아닌 진짜 격려.

보통 사람이라면 어떻게 해서라도 자기 밑에 직원 실적을 깔아뭉개려 할 텐데, 그런 사람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최병연 팀장의 성정이 얼마나 넓은지를 잘 보여주고 있었다.

최구만 과장은 새삼스러운 최병연 팀장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사실 콜린스의 개발은 최병연 팀장이 다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자료를 받아서 노가다만 했던 최구만 과장은 머리를 긁적였다.

“아직 멀었죠.”

“에이, 또 이런다. 내가 들은 사내 소문 정도면 충분하지.”

최병연 팀장은 말을 하면서도 고개를 계속 갸웃거렸다.

최구만 과장의 의미심장한 눈빛이 자신이 아는 눈빛과는 달랐다.

더욱이 최구만 과장은 실장실 문을 스스로 열어주었다.

“자, 이제 영웅 출두합니다.”

“쯧,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 * *

툴툴거리면서 안으로 들어선 최병연도 실장실 안에 가득 모여 있는 KM 전자 임원의 모습에 깜짝 놀라서 주춤했다.

실장실 중앙에 놓인 콜린스 모델은 차창을 통해서 들어온 햇빛 때문에 더 유려한 자태를 한껏 뽐내고 있었다.

콜린스 디자인은 세계 TV 시장에 나온 그 어떤 모델보다 월등했다.

아직 콜린스에 대해서 잘 모르는 최병연 팀장도 깜짝 놀랐다.

“맙소사.”

뒤를 따른 최병연 팀원 역시 다들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대부분이 TV 연구소에서 있던 이들이라서 그 가치를 바로 알아보았다.

하지만 한편으로 디자인 자체가 자신이 몇 년 전에 테스트했던 것과 유사해서 놀랐다.

다만 최병연 팀장은 마치 귀신에 홀린 듯이 콜린스 화면에 다가가서 모니터 화면을 부드럽게 만졌다. 본능적으로 익숙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이 아는 디자인과는 달랐지만, 그 속을 알아본 것이었다.

특히 초슬림으로 가기 위해서 편향 코일부터 시작해서 고압 변성기를 직접 다 디자인하고, 설계했기에 누구보다 콜린스 내부를 절로 떠올렸다.

자신이 만약 충분한 자금, 인력, 기술이 있었다면 만들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형태의 모델이 지금 눈앞에 떡 나타났다.

충격을 받은 최병연 팀장은 의혹이 가득한 얼굴로 최구만 과장을 쳐다보았다.

“서, 설마…….”

최구만 과장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최병연 팀장의 추측이 맞는다는 것을 확인해 주었다.

“맞습니다. 팀장님이, 아니, 우리 팀이 개발하다가 중단한 그 모델입니다.”

오성 전자로 이직해서 나름 연봉이 많이 올랐지만 늘 마음 한구석에서 떨치지 못했던 것이 바로 KM 전자에게 남겨둔 자기 아들이었다.

최병연 팀장의 입이 간헐적으로 떨렸다.

“서, 성공했구나.”

“네, 제가 마무리했습니다. 비록 팀장님이 떠났지만 남아 있는 자료가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 자료를 토대로 프로젝트를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이 혁신적인 디자인으로 무장한 콜린스는 바로 그때 자료를 기반으로 해서 최 실장이 완성한 것입니다.”

콜린스 모델을 마치 연인처럼 쓰다듬으면서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다.

자신의 혼이 배어 있는 콜린스 모델.

결국 마무리를 못한 것이 그렇게 마음속에 응어리로 남아 있었다.

다시 KM 전자로 돌아온 것도 이 모델을 끝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미련 때문이었다.

한철수 차장도 혀를 내두른 채 멍하니 콜린스 모델을 살피기만 했다.

“하, 이게 이런 식으로 완성되다니.”

온갖 잡일을 다 했던 이현탁 과장 역시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콜린스 모델을 살폈다.

“…얇은 모델도 분명히 가능했죠. 최 전무만 아니었다면 이런 식으로 진행했을 겁니다. 설마 그게 이런 식으로 완성되다니.”

디자인 자체의 완성도는 그들이 상상한 것과는 또 격이 달랐던 것이었다.

그들은 믿을 수가 없는 눈으로 다시 최구만 과장을 쳐다보았다.

한창 시끄럽던 이들은 눈동자만 도르르 굴리면서 네 사람의 대화에 주목했다.

과거 TV 연구소에서 있었던 일을 잘 아는 임원들은 그제야 과거 일을 하나하나 떠올리다가 뒤늦게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그랬구나.”

한동안 최훈열 전무와 김현우 상무 때문에 이사회는 하루도 조용한 날이 없었다.

안 좋은 일이라서 머리 한구석에 넣어둔 아픈 기억이 다시 떠올렸다. 굳이 최민혁에게 묻지 않아도 어떻게 된 상황인지 이제야 알았다.

그 일에 책임이 있는 오영근 사장은 착잡한 얼굴은 한 채 한동안 입을 열지 못했다.

특히 문형섭 부사장은 최병연 팀이 떠나는 것을 극구 말렸던 사람이라서 말없이 최병연 팀장의 어깨를 가볍게 두들겨 주었다.

최민혁은 만족스러운 얼굴을 한 채 직접 화이트보드를 가져와서 최구만 과장에게 보드 마커를 내밀면서 말했다.

“이제 무대가 마련되었으니, 그동안 미처 못 했던 말을 한번 해보세요. 여기 답을 얻고 싶은 분이 많으니까요. 아주 생사람을 잡는데, 짜증 나서 죽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는 결국 눈물을 주르르 흘리고 있는 최병연 팀장에게 말했다.

“시작했던 일을 이제 마무리하셔야죠.”

“아, 알겠습니다.”

최병연 팀장은 설마 최민혁이 콜린스를 이런 식으로 마무리했을지는 상상도 못했다. 뒤늦게야 왜 최민혁이 자신을 그렇게 높이 평가하는지도 깨달았다.

자신을 알아준 최민혁에 대한 충격은 전율 그 자체였다.

최민혁은 그런 분위기에도 슬쩍 한 걸음 물러났다.

“자자, 조연은 빠지고, 이제 주인공이 나설 타이밍입니다.”

시작은 최구만 과장이었다.

하지만 그 역시 완성만 했을 뿐인지 자세한 원천기술에 대해서는 몰랐다.

최병연 팀장이 자연스럽게 그 뒤를 이었다. 그는 마치 몇 년의 시간을 거슬러 온 사람처럼 잠깐 입을 다물었다가 고압 변성기가 어떤 식으로 되어 있는지 개략적인 설명을 시작했다.

[이렇게 얇은 모양이 되면 전자빔을 제어하기 어렵다는 것은 알 겁니다. 저라고 해서 뾰쪽한 수가 없어서 이 부분은 전부 다 외주를 주어서 연구 개발을 진행했습니다. 하지만 대학 연구 팀에서는 제작하기가 많은 한계가 있었습니다.]

실상 외주를 맡은 연구진 역시 처음부터 비관적으로 나갔다.

전자빔을 마음대로 조정할 수 있는 기술이 이론적으로 가능해도 실제 구현은 아주 어려웠다. 소니를 비롯한 그 어떤 회사도 성공하지 못한 일이었다.

이들 외주 연구원을 옆에서 채찍 하면서 밀어붙인 이가 바로 최병연 팀장이었다.

[사실 그런 부분이 어려웠습니다. 오성 전자처럼 자금 사정이 넉넉한 것은 아니어서 직접 뛰면서 연구원의 문제점을 도와야 했습니다.]

‘정확히는 최훈열 전무 방해가 더 문제였습니다만.’이라는 말까지 굳이 하지는 않았다.

엔지니어가 연구원 역할까지 다 해야 했다.

지난 3년의 개발 과정에서 일어난 자잘한 이야기가 진행되자 다들 입을 다문 채 멍하니 강연을 듣기만 할 뿐이었다.

콜린스 개발이 쉬운 일이 아니니 우여곡절은 있어야 했다.

난관은 그들이 생각한 것보다 더 복잡했다.

참여 연구원 역시 예상을 훌쩍 뛰어넘었다.

최병연 팀은 다들 자발적으로 나서서 이리저리 뛰어다니면서 문제를 하나씩 풀어갔다.

그럼에도 사장된 콜린스.

충혈된 눈을 한 채 찢어져라 외치던 최병연 팀장의 모습을 다시 떠올린 오영근 사장이나 문형섭 부사장은 탄식하면서도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런데 죽어버린 콜린스의 생명을 깨운 사람이 최민혁 실장이었다.

[그랬구나.]

실장실에 모인 이들은 놀라운 시선으로 최민혁 실장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이전에도 최민혁 실장의 능력을 알아보았지만, 이제는 그런 시선이 아니라 사뭇 자신과는 격이 다른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

최민혁은 팔짱을 낀 채 뒤로 물러나서 물끄러미 그 광경을 쳐다보기만 했다.

다들 지난 일에 직간접적으로 다 연관이 있는 터라 착잡한 얼굴을 한 채 멍하니 최병연 팀장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시간이 갈수록 전문적인 기술 분야로 들어가는데, 도통 이해할 수가 없었다.

최민혁은 그저 탄성을 토하는 임직원의 모습에 만족했다.

가끔 자신을 향하는 뜨거운 시선도 나쁘지는 않았다.

‘좋군.’

* * *

최근 들어서 무선 통신 사업자에 대한 기대는 그 어느 때보다 뜨거웠다. KM 그룹 역시 이 분야에 대해서 계속 조사했다.

비록 현직에서는 물러난 최용욱 회장도 미래산업에 관한 관심을 놓지 않았다.

“안 회장이 너무 욕심이 많은 것 같아. 설마 컨소시엄 형태라고 해도 한국 통신이 독점한 시외전화사업까지 밀고 들어가다니.”

특히 최근 데이콤 지분을 인수한 오성 전자의 행태는 많은 이들에게서 비난받았다.

당연히 PCS 관련 분야에서 오성 전자 같은 대기업은 배제되어야 한다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PCS가 비록 보행자 중심이라고 해도 하나의 단말기로 음성, 데이터, 영상까지 송수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채윤집 집사는 오히려 이 부분에 대해서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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