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3
난감한 최주호 부장도 혀를 찼다.
“요즘 영업 팀 실적이 안 좋은 것은 압니다. 그런데 딱히 최 실장님이 그 점에 대해서 지적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마음 편하게 하세요.”
“경영자 마음이 화장실 들어갈 때와 나갈 때가 다르다는 것 모릅니까. 결과가 없으면 결국 저에게 책임이 다 날아와요.”
“설마 최 실장님이 그렇게까지 할까요?”
“허, 답답하네요.”
최주호 부장은 다행히 콜린스 관련된 정보를 일부 얻었다. 자세한 것은 잘 모르지만, 최민혁이 뭔가 준비한다는 정도는 알았다.
‘그게 물건이란 소리가 있어. 지금처럼 기밀을 유지하는 것도 경쟁업체에 정보가 흘러들어 가는 것을 최대한 막을 목적일 테니까.’
탐욕스러운 오성 전자가 얼마나 지독한지 잘 아는 그는 그저 최민혁만을 옹호했다.
“좀 기다려 보세요. 최 실장님이 다 생각이 있을 겁니다.”
“생각? 지금 회사 분위기 보고도 그럽니까? 요즘 대리가 입는 복장을 보세요. 양복이 아니라 어디 소풍 가는 옷을 입고 나와요!”
“하하하.”
최주호 팀장도 웃기만 했다. 그 역시 마음이 편한 것은 아니지만, 이제는 복장 자율화에 어느 정도 적응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런 상황은 두 사람만 해당하는 것은 아니었다.
사업부 전체 회의 때문에 자리한 이들 대다수는 걱정과 우려를 드러냈다.
비록 최민혁이 1,300억이라는 현금을 확보했지만, 미래 성장 엔진이 불투명하기 때문이다.
팔 물건이 없으니, 홍보 활동 자체가 아예 멈추었다.
그런데 최민혁은 정보를 홀로 독점한 채 아무것도 알리지 않았다.
그저 소문만 무성했다.
그들은 때마침 대회의실에 들어오는 임원의 모습을 발견하자 물끄러미 쳐다보기만 했다.
* * *
오성 전자 김현우 수석 부장 사태는 생각보다는 더 시끄러웠다.
자신이 살기 위해서 비디오 특허의 가치를 더 끌어올린 김현우 수석 부장은 한영일보 인터뷰를 시작으로 심지어 방송에도 나갔다.
최두진 사장도 내막을 알았지만, 오성 전자 사태를 보자 어쩔 수 없이 자신의 방송 인맥을 이용해서 김현우 수석 부장을 도와주었다.
한영일보와 메이저 방송국이 총대를 메자 모든 언론이 이 기사를 키웠고, 비디오 특허 가치는 덕분에 한껏 부풀려졌다.
마치 오성 전자가 KM 전자의 혁신적인 기술을 빼돌리기 위해서 김현우 수석 부장을 희생양으로 삼았다는 식이 된 것이었다.
권태성 실장은 오성 전자 법무 팀을 총동원해서 싸웠다.
정확히는 오성 전자 이미지 때문에 다른 한편으로 협상에 들어갔다.
김현우 수석 부장이 오히려 상황을 유리하게 풀어간 것이었다.
과거에 조용히 넘어갔던 KM 전자의 비디오 특허는 한껏 더 주목을 받았다.
이 뉴스를 접한 KM 전자 직원도 STB 사업부가 900억에 매각한 것에 대해서 당혹스럽기만 했다.
더욱이 최근 최민혁의 노골적인 구조조정 문제는 더 주목받았다.
사업부 회의 분위기는 좋을 리가 없었다.
최민혁은 따가운 임직원의 시선에도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입고 있는 옷이 그 증거였다.
정장을 입은 다른 임원과는 달리 그는 청바지에, 면티만 달랑 입고 있었다.
최민혁 자신의 개성을 살려서 극적인 느낌을 주는 점에서는 나쁘지 않았다.
그런데 아무리 복장 자율화가 되었다고 하지만 사업부 회의에 저런 옷을 입고 오다니.
파격적인 복장에 다들 멍하니 최민혁 실장을 쳐다보기만 했다.
물론 동행한 이사진 역시 최민혁 실장을 걱정스럽게 쳐다보았다.
김현우 사태가 일파만파 커지면서 최민혁에 대한 이미지 역시 혼란했다.
회사 내에 소문은 많은데, 정작 제대로 알려진 것은 없었다.
최민혁은 이 설에 대해서 그 어떤 언급도 하지 않았고, 심지어 그 뜬소문을 좀 더 퍼트려서 회사를 더 혼란하게 만들었다.
그는 오히려 다른 임원의 복장에 대해서 이미 사내 공지를 했음에도 변화가 없자 불만을 토로했다.
[사내 복장 자율화가 적극 시행되기 위해서는 임원분들이 나서야 합니다. 그런데 지금처럼 과거 구태의연한 복장을 고집하면, 변하는 것이 뭐가 있겠습니까?]
불신에 가득한 사업부 회의 분위기를 읽은 문형섭 부사장이 혀를 찼다. 차마 회사 경영권을 움켜쥔 최민혁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입는 옷 가지고 뭐라고 하지 말게나.]
[특히 문 부사장님이 문제입니다. 조금은 자유로운 생각을 해보시죠.]
[복장 자율화의 의미는 정장을 입든, 평상복을 입든, 청바지를 입던 자신이 결정하는 거지 않은가. 자네 말은 앞뒤가 맞지 않아.]
[으음, 그렇기는 하지만 이건 제가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회사는 늘 바뀌어야 합니다. 새로운 혁신의 출발은 자기 고정관념을 바꾸는 것이니까요.]
[아니, 그러면 오 사장님 보고 청바지 입고 출근하란 소리야?]
[나쁘지는 않죠.]
“…….”
김현우 상무 인터뷰 때문에 다시 언론을 통해서 KM 전자 이름이 오르내리자 초조해진 오영근 사장은 민망한지 걸음 속도를 더 올려서 단상 앞자리에 앉았다.
최민혁의 눈치를 보는 다른 임원들은 차마 불만을 토로하지 않았다.
늘 당당한 문형섭 부사장만이 최민혁에게 계속 잔소리할 뿐이었다.
[진짜 내가 이런 말 안 하려고 했는데…….]
“…….”
그들이 지나는 통로 바로 옆에 앉은 김부영 부장은 기가 차서 입을 다물고 말았다.
비관적인 분위기는 더욱더 고조되었다.
정말 최민혁 실장이 대단한 사람일까 하는 의문을 가진 것이었다.
그리고 재무팀을 시작으로 해서 한 사람씩 발표가 시작되었다.
[사업부 발표 시작합니다.]
* * *
[…2단 분리형 컴포넌트 엠비-M9은 모델은 하반기에 시판될 예정입니다. 입체 음향 기능을 특히 강화해서 음질 성능을 대폭 향상했습니다. 이것으로 오디오 사업부 발표를 마칩니다.]
작년 분기 대비 30% 가까운 매출 증가를 끌어올린 오디오 사업부 발표는 힘과 패기가 넘쳤다.
망한다는 소리를 들어왔던 KM 전자 실무진조차 고개를 갸웃한 채 손뼉을 쳤다.
김현우 사태 이후에 미래 먹거리를 오성 전자에 멍청하게 넘겼다는 비관적인 소리가 나오는 마당에 오디오 사업부도 한물갔다는 이야기가 팽배했다.
그런데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전부 다 헛소문에 불과했다.
TV 사업부 발표 역시 나쁘지 않았다. 특히 이번 분기에 1억 흑자로 돌아섰다는 놀라운 발표가 뒤를 이어서 나왔다.
[진짜인가?]
[아니, 저런 수치가 나오는데, KM 전자가 파산한다고 하는 소문은 뭐지?]
짝짝짝.
손뼉을 치던 이들조차 뭔가 좀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신제품 관련해서는 최구만 과장이 단상 위에 올랐다.
그런데 이런 자리가 익숙지 않은 최구만 과장은 발표 내내 버벅거렸다.
콜린스 관련된 기술적인 내용이 워낙에 독특해서 듣는 이들은 다들 고개를 갸웃했다.
[저게 가능해?]
[오성 전자도 저런 시도를 했다가 다 말아먹었다고 들었는데,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려는 걸까?]
그럴듯한 이야기를 하는데, 쉽게 잘 이해를 못 한 것이었다.
김갑래 과장이 옆에서 도와주었지만 발표하는 것이 서툴렀다.
김부영 영업 팀장은 가슴이 답답해서 혀를 찼다.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일전에 기획 팀에서 조언 요청을 받은 그 자료 같은데, 설마 저런 모델 양산이 가능하다고 하는 건지, 아니면 개발비를 더 뜯어낼 목적인지 모르겠네요.”
회의 분위기가 다시 소란스러웠다.
최민혁도 혀를 찼다.
‘쯧, 정말 손이 많이 가는 분들이야.’
* * *
최민혁도 최구만 과장을 띄워 주려고 세 사람을 올렸는데,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자 참다못해서 천천히 단상 위에 올랐다.
청바지와 티를 달랑 걸친 복장만 해도 파격적이라서 다들 혀를 내둘렀다.
오영근 사장을 비롯한 문형섭 부사장도 너무 놀라서 멍하니 쳐다보기만 했다.
따가운 KM 전자 실무진의 시선에도 최민혁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는 조성돈 팀장을 비롯한 기획 팀의 불안한 시선에도 오히려 단상 위에 마이크만을 따로 빼내서 단상 중앙으로 걸어갔다.
[최민혁 실장입니다. 제가 이 자리에 올라온 것은 아무래도 우리 최구만 과장님이 너무 긴장한 것 때문입니다.]
[……죄송합니다.]
식은땀을 줄줄 흘리는 최구만 과장을 향해서 유쾌하게 말했다.
[이런 이런. 제가 최 과장님을 질책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스스로 성과를 만들었다면 그것을 잘 포장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한 겁니다.]
[네.]
최민혁이 나서서 친구처럼 최구만 과장과 김갑래 과장과 일상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자 두 사람의 긴장도 사라졌다.
[좋네요. 이제 긴장 좀 풀립니까.]
[아, 네.]
[아무래도 안산 TV 연구소에서 일만 하다가 이런 발표회 자리에 나오니, 어색하죠.]
보통 차장급 이상의 실무진이라면 발표도 제법 하는 편이다.
하지만 최구만 과장이나, 김갑래 과장, 윤선기 대리는 전형적인 방구석 엔지니어로 사회생활에 모가 많이 난 사람이다.
이런 발표 자리는 서툴렀다.
평소 조직 생활에서도 소통 면에서 부정적인 면이 있어서 종종 오해를 산다.
마치 정성근 대리처럼.
하지만 그들이 얼마나 대단한 엔지니어인지 잘 아는 최민혁은 그들을 그냥 내버려둘 수는 없었다.
집게손가락으로 로댕의 생각하는 남자 조각과 비슷한 포즈를 취한 채 시선을 끌었다.
그리고 단상 좌우로 왔다 갔다 하면서 직원의 시선을 다시 끌어모았다.
[으음, 아마 요즘 어수선한 회사 분위기 때문에 당혹스러운 분이 많을 겁니다. 경쟁회사는 다들 죽어라고 노력하는데, 정작 우리 회사만 결과가 없으니까요. 최민혁 실장이란 놈이 오너 핏줄이라고 횡포를 부리는 것이 아닌가? 불만을 많이 품으시겠죠?]
조용했다.
불안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최민혁이 숨김없이 그대로 이야기하는 것에 다들 눈을 크게 치켜떴다.
시작부터 너무 파격적이라서 뭐라고 말하는 이는 없었다.
조성돈 팀장조차 작년 사업 계획서 수정안과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하는 최민혁이 걱정스럽기만 했다.
다만 그도 콜린스 모델을 떠올리자 결국 피식 웃기만 했다.
최민혁이 나름 일종의 쇼를 벌인다는 것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었다.
양손을 쫙 펼친 채 마치 원맨쇼를 하는 최민혁 모습은 마치 무대를 공연하는 희극인 같았다.
최민혁은 마치 그런 조성돈 팀장의 마음은 읽은 사람처럼 느긋하게 단상을 계속 돌아다니면서 이런저런 푸념을 털어놓았다.
[KM 전자는 망한다는 소리가 있죠.]
[KM 전자는 직원을 마구잡이로 자른다는 소리도 있고요.]
[어제 김현우 상무 뉴스 덕분에 최훈열 전무 소송도 다시 뜨겁게 주목받았습니다. 오늘 언론기사 보면 정말 우리 회사는 오늘 당장 망할 것 같습니다.]
[KM 전자는 망하고, 또 파산합니다. 아니, 수백 번도 더 망한 것 같습니다. 입만 열면 KM 전자는 망해야 한다고 합니다.]
불안한 이야기로 시선을 끌었다고 판단하자 그제야 본론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게 뭐가 중요하겠습니까. 회사는 모름지기 제대로 된 제품을 만들어서 팔기만 하면 됩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네.]
다시 현실을 깨달은 탓에 나온 침울한 대답.
때마침 장승일 실장을 비롯한 기조실 직원이 회의실 뒤편에 슬그머니 들어와서 앉았다.
최민혁은 그 모습에 피식 웃으면서 안선종 팀장, 김창호 부장을 호출했다.
[두 분은 이 자리에 올라와 보세요.]
갑작스러운 사태에 두 사람은 당황했지만 어쩔 수 없이 단상 위에 올랐다. 늘 안산 공장만 있다가 이번 회의에 참석한 것이 익숙지 않았다.
[그거 아십니까. 다른 사람은 다들 회사에 끌려 다니기만 할 때 이분들은 회사를 걱정해서 나름대로 온 힘을 다했습니다. 열악한 연구 자금에도 미래 가치가 있다면 끊임없이 투자를 해왔습니다. 특히 최구만 과장은 외부의 그 어떤 압력에도 굴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된다는 믿음 그 하나만으로 계속 밀어붙였습니다. 이분들이 똘똘 뭉쳐서 회사 분위기에 상관없이 자기 일만 한 겁니다.]
노골적인 칭찬에 세 사람은 차마 얼굴을 들지 못했다.
특히 안선종 팀장은 설마 최민혁이 사장을 포함한 임원이 다 모인 사업부 회의에서 자신들을 칭찬할지 몰랐다.
[자, 그러면 일단 물건부터 볼까요?]
하지만 최민혁은 그제야 손뼉을 치면서 신호를 보냈다.
단상 뒤편을 막아 놓았던 커튼이 자연스럽게 양쪽으로 벌어지면서 그 뒤쪽에 배치되어 있던 콜린스 모델이 드러났다.
정성근 대리를 비롯한 몇 사람이 콜린스 모델을 앞으로 쭉 밀면서 단상 앞쪽으로 몰았다.
[이 세 분이 힘든 여건 속에서도 만든 Slim TV, 바로 콜린스입니다.]
[!!!]
최민혁 실장의 엉뚱한 소리에 지쳐가던 이들은 다들 깜짝 놀라서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심지어 제일 앞쪽에 앉아 있던 오영근 사장을 비롯한 임원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고 말았다.
무대 앞에 놓인 콜린스는 비스듬한 형태로 늘어서 있는 터라 정면과 측면의 디자인을 바로 알아봤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