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109화 (109/1,021)

#109

그는 평소라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라고 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누군가 이 사태에 관해서 책임을 져야 하니까.

아직 임권수 부장이 이 일을 맡은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지금 당장 그에게 모든 책임을 돌릴 수도 없었다.

차라리 김현우 수석 부장이 사기를 친 것이라면 자신은 그나마 책임에서 벗어날 수도 있었다.

‘어쩌나.’

어쩔 수 없는 차선이지만 다른 대안은 없었다.

고민을 거듭할수록 짜증 났고, 문득 한 사람을 떠올리고 말았다.

‘…설마 이것도 최민혁 실장의 함정이야? 말도 안 돼. 그럴 리가 없잖아.’

사전에 STB 사업부를 인수하는 것에 절대 반대하던 황광수 차장을 힐끗 쳐다보았다. 사실 그의 조언을 받아들인 결과가 최악의 상황에 이 사업을 책임질 사람으로 임권수 부장을 선택했다.

‘젠장맞을.’

* * *

오성 전자 기획실의 태도는 시간이 갈수록 차갑게 변해갔다.

단순히 사내 문제를 떠나서 법적인 문제로 비화할 조짐이 드러났다.

오성 전자 내에 도는 괴이한 소문을 접한 김현우 수석 부장은 뒤늦게 위기감을 느끼자 안절부절못했다. 그는 뒤늦게야 후회했다.

‘그냥 KM 전자에 붙어 있어야 했어.’

하지만 이미 기차는 한창 떠나고 난 다음이었고, 지금은 자신이 탄 배에 구멍이 뚫려서 침몰하는 중이었다.

다른 대안을 찾을 수가 없자 결국 최두진 사장을 찾아갔다.

“아버지, 이번 한 번만 도와주세요.”

뜬금없는 이야기에 최두진은 황당했다.

“너 오성 전자 들어간 지 얼마나 되었다고 그런 소리를 하는 거야?”

“그게 오성 전자 분위기가…….”

내막을 잘 모르는 최두진 사장이었지만, 더 이상 김현우의 꼴을 보기도 싫었다. 그리고 별로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이놈의 상판을 더 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짜증이 났다.

“일없다.”

“아버지, 이번 한 번 딱 도와주십시오. 다시는 이런 부탁 안 하겠습니다.”

“너 저번에도 그런 말 했다.”

“아닙니다. 정말 이번이 마지막입니다. 제 목숨 살려준다고 생각해 주십시오.”

“그놈의 변명은 지긋지긋하다. 이번에도 최민혁 실장 탓이라고 할 거야?”

사실 배후는 최민혁이었지만 연결 고리를 전혀 모르는 김현우 상무는 입술을 깨물었다. 악독한 최민혁이 그럴 수도 있다 싶었지만, 증거가 없었다.

아무리 최민혁이라도 오성 전자 권태성 실장에게 압력을 행사하기는 어려웠다.

“그, 그건 아닙니다. 하, 하지만 제가 오죽하면 이렇게 아버지를 찾아와서 부탁하겠습니까. 정말 이번만 제발 도와주십시오.”

“…….”

‘도대체 오성 전자 내에 무슨 일이 있기에 이놈이 이 지경이 된 거야?’

최두진 사장은 비쩍 말란 버린 아들의 모습에 탄식하고 말았다.

“그 좋은 회사에 그냥 붙어 있으라고 내가 몇 번이나 말했잖아!”

뒤늦게 오영근 사장과 문형섭 부사장을 떠올린 김현우 수석 부장은 고개를 숙였다.

세상 무서울 줄 모르고 날뛰던 그가 막상 오성 전자란 조직에 들어가고서야 알았다.

이미 STB 사업부 특허권은 전부 오성 전자에 다 넘어갔다. 솔직히 오성 전자에서 쫓겨나면, 진짜 갈 데가 없었다.

“아버지, 정말 마지막입니다. 제발 이번 한 번만 도와주십시오.”

안절부절못하는 아들의 모습에도 최두진 사장은 냉정하게 나갔다.

“네가 선택한 운명이다. 이제는 나도 더 이상 도와줄 수 없어. 그동안에 너도 많은 인맥을 맺었을 테니, 필요한 사람을 찾아가 봐. 정 아니다 싶으면 최문경 부회장도 있으니까!”

“아버지.”

“야, 이놈아, 생각을 좀 해 봐. 내가 오성 전자에 무슨 힘을 발휘할 수가 있어? 너 설마 다시 KM 그룹으로 돌아온다는 소리야? 인간의 탈을 쓰고 그게 가당키나 할 소리야?”

“하, 하지만…….”

“닥쳐!”

크게 낙담한 김현우 수석 부장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래, 최문경 부회장이 있어.’

* * *

최문경 부회장은 KM 산업 채권 담보 문제 때문에 미국에 계속 있다가 일이 제대로 풀리지 않자 미칠 것만 같았다.

그는 최훈열 전무 재판 때문에 정신없었던 몇 달의 시간을 떠올리면서 이를 갈았다.

‘빌어먹을.’

터진 계약을 메꾸기 위해서 전 세계를 종횡무진 누볐지만, 막상 얻은 것이라고는 없이 제자리다.

아니, 오히려 사업은 후퇴했다.

결국 현행 유지라도 하기 위해서 죽어라고 뛰고, 또 뛰었다.

박살 난 계약을 다시 새로 체결하는데, 여러 가지 이권을 내놓아야 했다.

도대체 이게 뭐 하는 짓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런데 김현우 수석 부장이 찾아왔다는 이야기를 듣자 고개를 갸웃하다가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그럴 줄 알았다. 오성 전자가 말이 좋아서 한국 최고의 기업이지, 직원이 그렇다는 소리는 아니니까. 그 돼지가 적응하는 게 더 이상하지.’

다만 최민혁에 대해서 작업 지시를 해놓은 것을 확인하고자 겸사겸사 한국에 다시 돌아왔다.

그는 김현우 수석을 만나기에 앞서서 그의 현재 상황에 대해서 민상수 부장에게서 조사를 진행하게 했는데, 뜻밖의 보고도 받았다.

바로 KM 전자 스카우트 전쟁 사건이었다.

오성 전자가 KM 전자 직원을 빼간 것이 아니라 그 반대였다.

그것도 그 자신조차 기억하고 있는 최병연 팀장을 위시한 팀원이었다.

아니 심지어 면접까지 봤고, 벌써 조직 개편까지 일부 진행되었다.

“이게 도대체 무슨 소리야?”

분노한 최문경 부회장 시선을 차마 볼 수 없었던 민상수 부장도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희도 얼마 전에 안 사실입니다. KM 전자에서 최병연 팀장을 비롯해서 같이 일했던 오성 전자 직원을 한 번에 데리고 왔습니다. 물론 퇴사 날짜는 다르게 했지만, KM 전자로 입사한 것은 사실입니다.”

“아니, 그게 말이 돼? 상황은 잘 모르겠지만 이미 회사를 그만둔 놈을 다시 입사시키다니. 최소한 사규는 지켜야 하잖아. KM 전자 인사 팀은 도대체 뭐 하는 새끼야?”

“그게 좀…….”

민상수 부장은 권재홍 비서실장의 눈치를 보면서 머뭇거렸다.

결국 권재홍 비서실장이 나섰다.

“회장님의 나머지 지분이 최민혁 실장님에게 다 넘어갔습니다. 그 이후로 KM 전자 기획실 분위기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쉽게 말해서 KM 그룹과 KM 전자는 이제 남남이라는 뜻이다.

분노한 최문경 부회장은 마치 소시오패스 같았다.

“이제 그룹 계열 분리했다고 제 맘대로 한다는 소리야? 권 실장,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당신이 비서실장이라면 사전에 손을 써야 할 것 아냐. 최소한 기획 팀장 정도는 알아서 우리 사람으로 만들어야지, 지금 와서 그게 무슨 개소리야?”

권재홍 비서실장도 노도와도 같은 최문경 부회장 분노에 몸을 움츠렸다. 최문경 부회장이 분노하면 앞뒤 안 가리는 것을 잘 알았다.

민상수 부장은 슬쩍 권재홍 비서실장의 뒤로 가서 몸을 사렸다.

자칫하다가는 전 KM 전자 실장처럼 회사에서 잘릴 수도 있기 때문이다.

분노한 황소처럼 벌벌 떨던 최문경 부회장도 10분 정도 지나서야 겨우 이성을 차렸다.

“권 실장,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권재홍 비서실장도 눈치를 보면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KM 전자의 조성돈 부장은 뜻밖에 자기 주관이 뚜렷한 사람입니다. 겉으로는 윗선의 지시를 잘 따르는 것 같아도 딱 거기까지입니다. 자기도 손해를 입을 만하면 한 걸음 물러납니다. 그 술수가 워낙에 교묘해서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오죽하면 최 전무님도 그 수법에 당했겠습니까?”

“…그게 또 무슨 소리야?”

그는 손동권 전 기획실장 사태를 차분하게 설명하면서 당시 조성돈 부장이 어떤 식으로 처신했는지 하나둘씩 설명했다.

당연히 이런 보고는 이미 몇 번에 걸쳐서 올라갔다.

물론 그때 보고는 추론이 대부분이다.

인제 와서 뒤늦게 조성돈 팀장에 관한 조사를 하고서야 그 교묘한 수법을 파악했다.

그런데 웃기는 것은 사실은 이제 KM 그룹도 KM 전자에 어떠한 영향력도 행사할 수가 없었다.

“그 말은… 조 팀장 그 작자가 제법 괜찮은 친구란 말인가?”

“최훈열 전무가 KM 전자를 엉망으로 만들 때도 알아서 잘 처리했으니, 무시할 만한 친구는 아닙니다. 장 실장도 잘 알고 있으니까요.”

“하.”

물론 자신 역시 이들 문제에 대해서 소홀히 했다는 것을 인정하지만, 속이 타들어 가는 것을 참지 못한 최문경 부회장은 신경안정제를 먹고 나서야 겨우 숨을 다독거렸다.

그는 이성을 차리자 뒤늦게야 이 문제가 결코 하루아침에 일어난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좋아, 그렇다고 하자. 내부 사정을 몰라서 이제야 사실을 알았다. 결국, 지분이 문제란 소리인데…….”

최용욱 회장이 증여한 것에 관해서는 그도 사전에 알고 있었지만, 뒤늦게 탄식했다. 당시는 그냥 증여하면 끝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그게 KM 그룹과의 연결 고리를 끊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KM 전자가 독립해 버리면 KM 그룹을 통해서 얻는 일거리가 줄어들기 때문에 KM 그룹 계열사끼리 서로 도와줘서 생기는 KM 전자 매출 상당 부분이 격감한다.

‘매출도 만만치 않은데, 그놈의 1,300억이란 현금 때문인가?’

KM 전자 상황은 KM 그룹과는 전혀 달랐다.

인정할 것은 인정했다.

자연스럽게 왜 이 사태가 일어난 것인지에 대해서 주목했다.

최문경 부회장도 최민혁이 오성 전자의 위험성을 모르지 않을 거라고 봤다.

“도대체 왜 민혁이 그놈이 갑자기 오성 전자 직원까지 빼돌리면서 이 짓을 하는 거야?”

“그게 아마도 신제품 개발 때문으로 압니다. 오성 전관에도 CRT 3만 대를 요청했으니까요. 그쪽에서도 정신없이 샘플을 만들고 있습니다.”

“오성 전관이라고? 아니, 기존 CRT 거래 업체는 어떻게 하고?”

“알아보니, 그쪽 수량도 같았습니다. 심지어 LC 전자나 소니 측과 만나서 협상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파면 팔수록 나오는 황당한 이야기에 어이가 없었다.

“그거 다 합치면 10만 대는 넘을 것 같은데, 아니 그 많은 물량을 어떻게 판다고 그러는 거야?”

“그게 사실… 이상합니다.”

최민혁의 지시를 받은 김명준 과장 덕분에 KM 전자 보안이 계속 강화되어서 KM 전자 내부 사정을 알 수가 없었다.

가장 큰 문제는 역시 최민혁이 이미 경영권을 완전히 장악한 상황이라서 KM 전자 내부에 설사 불만을 품은 이들이라고 해도 몸을 사렸다.

최훈열 전무와 김현우 상무가 퇴출당하고 나서는 그 현상이 더 심화한 것이었다.

“가만. 그러면 김현우 상무 그 새끼가 계속 연락한 것도 그 일과 관련이 있는 거야?”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지금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민혁이 이 새끼 솜씨구나.”

“아직 증거가 명확하지 않습니다. 오성 전자 내부에서도 잘 모르는 상황입니다.”

“권태성 실장 그 새끼도 몰라?”

“…네.”

‘아직 심증뿐이란 이야기인가. 아니, 도대체 그게 어떻게 가능해?’

“미치겠네.”

이만큼 알려진 것도 김현우 상무의 행적을 조사하면서 드러난 것이라는 것을 알자, 최문경 부회장은 기가 차서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는 이대로 KM 전자가 독립되는 것을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었다. 이를 갈다가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버지를 만나야겠어.”

“연락해 놓겠습니다.”

“아, 그리고 김현우 상무에게 연락 오면 아예 받지 마.”

“네.”

* * *

김현우 수석 부장은 어떻게 해서라도 최문경 부회장에게 연락하려 했다. 하지만 아예 연락되지 않자 크게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때 오성 전자 감사 팀이 나서서 김현우 수석 부장을 조사하기 시작했고, 그를 사기와 횡령 혐의로 고소해 버렸다.

오성 전자에 입사한 지 불과 얼마 안 되는 짧은 시기에 프로젝트 자금 일부를 마음대로 쓴 것 때문이었다.

그런데 사기는 혐의가 모호해서 명확하지가 않았다.

문제는 오성 전자 감사 팀에서 김현우 수석 부장을 죽이려 한다는 점이다.

결국 김현우 수석 부장을 따라서 이직한 이들은 대부분 감사팀의 대상이 되어 버렸다.

김현우 수석 부장 팀은 죄다 업무에서 손을 뗄 수밖에 없었다.

안국호 부장이 슬쩍 김현우 수석 부장 팀을 대행해서 그 업무를 인수받았다.

이 황당한 사태는 최근 권태성 실장에게 경고를 받은 장승일 실장이 뒤늦게 파악했다. 그로서는 황당하기만 했다.

결국 관련 사태를 자세히 조사하는 와중에 김현우 상무와 최문경 부회장의 동선을 파악했다.

그는 최문경 부회장이 또 갑자기 한국에 귀환하자 그 내막을 파다가 김현우 상무 때문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즉시 김명준 과장에게 통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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