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6
문형섭 부사장 역시 기획실이 돌아가는 낌새를 느꼈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최민혁 실장이라면 사전에 말했을 것이라 생각했다.
“회장님도 몇 번이나 말한 부분입니다. 조금만 참아 보시죠.”
두 사람의 불만은 어쩔 수가 없었다. 최민혁 역시 오성 전자의 갑작스러운 공격에 대응하면서 바로 보고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다고 중요한 안건을 최민혁 독단으로 결정할 수는 없었다.
그런 두 사람 앞에 뜬금없이 나타난 최민혁은 경력자 채용에 관한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경력자를 채용해야겠습니다.”
최근 많은 임직원이 나갔으니,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서 프로필을 확인하다가 깜짝 놀랐다.
“아니, 이 친구들은 전부 KM 전자에 있다가 그만뒀잖은가?”
“네. 대형 TV를 이끌어가던 최병연 팀이죠. 문제 될 것이 있습니까?”
“아니, 최 실장, 문제라기보다는 회사를 그만둔 사람을 다시 채용하는 것이 좀 그렇지 않은가?”
최민혁도 조직을 그만둔 직원을 다시 채용하는 것이 무슨 문제인지 잘 알았다. 회사가 장난도 아닌데, 입사와 퇴사를 반복하는 것을 내버려 두면 조직 분위기에도 좋지가 않기 때문이다.
“보통 경우라면 그 직원에게 문제를 물을 수도 있습니다. 조직에 적응을 잘 못한 거죠. 그런데 이 경우는 다릅니다. 최훈열 전무의 불법 행위 때문에 피해를 본 경우입니다. 아니, 범죄자와 대응해서 뾰족한 방법이 있습니까?”
“그거야…….”
“그리고 문형섭 부사장님도 최훈열 전무의 내막은 다 아시지 않습니까. 설마 모른다고 하실 겁니까?”
최훈열 전무와 관련된 지난 일을 아직도 기억하던 문형섭 부사장은 슬쩍 시선을 피하고 말았다. 그 역시 책임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최문경 부회장의 압박에 뒤로 물러섰었다.
“하, 최 실장, 지금 와서 그런 이야기까지 하는 이유를 모르겠어.”
최민혁은 어깨를 으쓱했다.
“전 과거의 잘못된 잘못을 바로 잡고 싶을 뿐입니다.”
“하지만 만약 이들을 재입사시키면 다른 사람도 문제가 될 거야. 누구는 퇴사 후에 재입사가 되는데, 누구는 안 된다고 할 것 아닐까.”
그런 논리라면 쓸데없는 논쟁이 된다는 것을 뻔히 아는 최민혁은 두 눈을 부릅뜬 채 소리쳤다.
“이런 사태는 있어서는 안 됩니다. 아무런 이유도 없이 임직원을 자르면 안 됩니다. 그런 일이 있었다면 바로 잡아야 합니다. 그래야 회사와 임직원 간의 결속이 강해집니다!”
그걸 모르는 사람이 누가 있나.
현실이 그렇지 않으니까.
바지 사장 노릇을 했던 오영근 사장도 혀를 찰 수밖에 없었다.
“이봐, 최 실장, 잘 좀 생각해 봐. 자네 논리라면 최훈열 전무 때문에 그만둔 사람을 전부 다 재입사시킬 수도 있다는 거잖아.”
“어느 정도 검증된 인재가 본인이 원한다면 그럴 생각입니다.”
“아니, 그런 사람이 몇 명이나 되는 줄 알아?”
“설마 100명이 넘겠습니까. 그들이 다 괜찮다면 받아들일 생각입니다.”
“아니, 이 친구야. 당장 STB 사업부를 매각해서 필요한 인원이 없어. 그런데 생각도 없이 그들을 뽑아서 어쩌겠다는 소리야?”
최민혁 눈빛이 의미심장하게 반짝였다.
“일자리가 있다면 괜찮다는 말이군요.”
“아니, 내 말은 그런 소리가 아니잖아!”
차라리 조용할 때가 좋았다는 생각을 한 오영근 사장도 최민혁 실장을 째려봤다. 문형섭 부사장 역시 다르지 않았다.
“모든 일은 잘될 겁니다.”
“허.”
이제는 KM 전자 지분만이 아니라 자신의 생사여탈권까지 쥔 최민혁 실장의 말을 아무런 근거도 없이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는 결국 한숨을 내쉬었다.
“후유, 이럴 거면 최 실장 자네가 사장하게.”
하지만 최민혁은 냉정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제 나이가 몇 살인지 아시고도 그런 말씀을 합니까. 남들이 다 비웃습니다.”
오영근 사장도 일축했다.
“나이 많은 내가 계속 바지 사장하란 소리야?”
“바지 사장이란 이야기는 자신을 스스로 비하하는 겁니다. 제가 언제 사장님이 경영권에 간섭한 적이 있습니까? 잘 생각해 보세요.”
기분이 나빴던 오영근 사장도 뒤늦게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없지.”
“그 보세요. 제가 이렇게 큰소리쳐서 기분이 나쁜 것은 압니다. 하지만 젊은 사람의 패기라고 봐 주십시오. 원래 경험 많은 분이 젊은이를 이끌어가는 것이 맞지 않습니까?”
“…그래. 내가 잘못했네.”
오영근 사장이 두 손을 들었고, 결국 침묵했다.
이사회를 장악하다 못해서 독재까지 하는 최민혁 서슬에 항복했다.
너무 나갔다고 생각한 최민혁도 목소리를 슬그머니 낮추었다.
“그리고 이번 일은 예외적인 경우입니다. 오성 전자에서 우리 인력을 빼가는 수작을 부리지 않았다면 저도 이러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게 무슨 소리인가?”
최민혁은 기획실 인력을 빼가려고 했던 오성 전자 기획 팀의 꼼수에 대해서 장황하게 설명했다.
“시작은 오성 전자의 권태성 실장이…….”
뒤늦게야 내막을 알게 된 오영근 사장도 혀를 내두르면서 묵묵히 듣기만 했다.
그리고 보복으로 오성 전자 임직원을 빼돌렸다는 말에 감탄했다.
오성 전자의 내부 갈등을 교묘하게 이용해서 부추긴 최민혁 솜씨에 혀를 내두른 것이다.
“…알겠네.”
“아, 그리고 다른 임원에게도 말해주십시오. 면접을 곧 진행해야 하니까요.”
“그러지.”
그는 그제야 자리를 떠난 최민혁을 보면서 새삼 혀를 내둘렀다. 설마 일을 이런 식으로 풀어갈지는 상상도 못했다.
‘오성 전자 뒤통수를 쳐서 인력을 빼왔다고? 진짜 대단한 친구야.’
* * *
최병연 팀의 면접은 서류 전형을 비롯해 1, 2차까지 순탄하게 흘러갔다.
한 사람당 1분이라는 초고속 면접을 통해서 진행된 것이다.
최종 임원 면접 역시 크게 다르지는 않았다. 오영근 사장이 나서서 한 이야기 때문인지 원종상 전무나 이일태 이사는 큰 문제를 만들지 않았다.
사실 두 사람은 최민혁 실장 눈치만 보는 중이라서 단 한마디 불만도 토로하지 않았다.
문형섭 부사장은 꼭 최민혁 때문이 아니라도 임원 면접 자리에서 다시 만난 최병연 팀장을 보자 크게 만족했다.
“설마 최 부장 자네를 이렇게 다시 보게 될 줄은 몰랐어.”
“저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민망해진 최병연 팀장은 다들 안면이 있는 임원 얼굴을 보면서 지난 일을 떠올렸다. 갈등이 심할 때는 이들과 얼굴을 붉히기까지 했다.
쌍욕이 오간 최훈열 전무나 김현우 상무가 없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오성 전자 분위기는 어땠나. 거기서도 한 건 크게 했다면서?”
“전 최선을 다했을 뿐입니다. 그런데 조직이 제 뜻대로 되지 않았을 뿐입니다.”
면접 이야기를 듣기가 무섭게 오성 전자에 있는 동창을 통해서 알아본 문형섭 부사장은 혀를 찼다.
“안국호 부장 말이군. 그 친구는 오성 전자 직계도 아니라고 하던데, 도대체 무슨 배경이 있는지 모르겠어. 자네도 마음고생 많이 했겠어.”
“후유, 그 일은 더 말하고 싶지 않습니다.”
“알아보니 장난이 아니더군. 남의 실적 가로채기는 그 시작이고, 욕심을 많아서 하지도 못한 프로젝트를 다 욕심낸다고 해.”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오히려 오영근 사장이 궁금해서 문형섭 부사장에게 질문했다.
“그렇게 지독한 친구인가?”
“말도 마십시오. 김현우 상무보다 한 수 위입니다. 심지어 비디오 특허 관련 프로젝트 하나도 그 친구가 가로챘다고 합니다.”
“김 상무가 꽤 열받았겠어?”
“둘이 대판 싸웠다고 소문이 자자합니다. 둘 다 자기 밥그릇에는 예민하니까요. 하지만 안국호 부장은 비록 방계라고 해도 오성 핏줄이죠. 그러니 김현우 상무가 오히려 박살 날 수밖에 없죠.”
두 사람의 대립과 갈등은 많은 직원이 보는 사무실에서 일어났다.
둘 다 탐욕에 관해서는 타의 추종을 허락하지 않기에 멱살까지 잡은 채 난리를 부렸다.
그나마 안국호 부장 윗선에서 소문을 막았지만, 완전히 덮지는 못했다.
안국호 부장은 김현우 상무와 갈등 때문에 최병연 팀장에 관한 일을 미처 알지 못했다.
다급하게 채용을 밀어붙인 최민혁도 김현우 상무 소식에 혀를 내둘렀다.
“아무리 김현우 상무라고 해도 이제 회사를 옮긴 지 얼마 되지도 않는데, 회사 내에서 그런 소란을 피웠다는 말입니까?”
“…….”
임원 면접 자리에 나름 긴장한 최병연 팀장도 오성 전자 사태로 시끄러운 분위기에 난감해서 눈동자만 굴렸다.
자기 프로필에 관한 이야기는 전혀 없이 오히려 김현우 상무 이야기만 하자 기가 찼다.
더욱이 안국호 부장 논쟁은 끝도 없이 계속될 것만 같았다.
최병연 팀장이 조용히 눈치를 보다가 결국 끼어들었다.
“안국호 부장은 다른 사람과는 달리 욕심이 많습니다. 자기 눈에 꽂혔다 하면 다른 것을 일절 돌아보지 않습니다. 아이러니한 점은 실적도 나쁘지 않습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위에서는 이런 안국호 부장을 나쁘게 보지 않습니다. 조직 관리에 필요악이라고 보니까요.”
최민혁도 혀를 내둘렀다.
“설마 위에서 모른 척한다는 말입니까?”
“네. 최훈열 전무를 생각하시… 크흠, 죄송합니다. 그게 오성 가문으로서는 자기 핏줄이니까요. 그러니 문제가 있어도 결과적으로 잘 풀리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사냥개를 풀어놓은 겁니다. 아마 김현우 상무도 그런 부분에 대해서는 잘 몰랐을 겁니다.”
‘지금쯤은 알겠죠.’란 말은 굳이 하지도 않았다.
바로 최병연 팀장 옆자리에 앉아 있던 한철수 차장이 손을 들었다.
“직접 경험해 보지 않으면 정말 알기 어렵습니다. 꼭 북한 노동당을 떠올리면 됩니다. 자기 계열이 아니면 다 소모품이니까요. 김현우 상무도 KM 전자에 있을 때 그 위치였다가 이번에 반대가 된 거죠.”
오성 전자 조직이라면 김현우 상무를 상대로 충분히 학대할 것이라 예상했던 최민혁도 이런 사태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생각보다 더 심각한가 보군요.”
“두 사람 성향은 같이 양립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김현우 상무가 무려 10kg이 빠졌다고 하니, 받는 스트레스가 상상을 초월할 겁니다.”
멧돼지를 떠올리게 하던 김현우 상무가 그렇게 살이 많이 빠졌다면 스트레스가 살인적이라는 것을 뒤늦게 느낀 문형섭 부사장은 혀를 찼고, 다른 이들 역시 어이가 없었다.
오영근 사장은 힐끗 이현탁 과장을 쳐다보았다.
면접 당사자에게 오히려 동질감을 느꼈다.
다만 오성 전자 출신인 다른 몇 사람은 달랐는데, 그중 눈치만 보고 있던 오상현 과장을 쳐다보았다.
“자네는 오성 전자에서도 잘 적응한 것 같은데, 굳이 왜 이직한 건가?”
“전 최 팀장님이 좋습니다. 저분과 같이 일할 수 있다면 만족합니다.”
“그런가?”
“네. 이전 팀장님과는 전혀 다릅니다.”
오상현 과장은 자신이 당했던 사연을 구구절절 늘어놓았다.
면접 자리에서 할 이야기는 아니지만,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오상현 과장도 OS 분야에서는 탁월한 실력자이기 때문이다.
전문적인 부분에 대해서 문형섭 부사장이 질문을 해보았다.
그런데 오상현 과장은 마치 브리핑이라도 하는 것처럼 OS 구조와 실제적인 적용 문제에 대해서 가감 없이 털어놓았다.
“상용 OS와는 달리 실시간 OS는 실시간 관리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설계 방식에 따라서 차이가 있습니다.”
스케줄링 방식 구조에 대해서는 마치 여기서 코딩을 하는 것처럼 개념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직관적으로 나열했다.
그는 심지어 면접장 한쪽에 놓인 화이트보드를 가져와서 자신이 어떤 부분에 경험이 많은지에 대해서 숨김없이 그대로 다 설명했다.
소심한 면을 보였던 처음과는 달리 자기 전문성 분야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자 오히려 성난 황소처럼 날뛴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이 은근한 시선으로 최민혁 실장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그 동기가 무엇인지 명확하게 드러났다.
그들 역시 최병연 팀장과 관련된 사실을 알아보면서 뒤늦게 KM 전자의 사연을 안 것이다.
그러니 KM 전자의 고질적인 문제를 해결한 최민혁을 다시 볼 수밖에 없었다.
분위기를 파악한 오영근 사장은 그제야 넌지시 최민혁 실장을 쳐다보았다.
“최 실장, 자네는 할 말 없나?”
예상을 뛰어넘은 인재에 내심 놀란 최민혁 실장은 어깨를 으쓱했다.
“전 괜찮습니다.”
“그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