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
조성돈 팀장은 그제야 최민혁이 이제까지 한 말이 그냥 대충 한 말이 아니라 큰 그림 바탕 위에서 나온 이야기라는 것을 깨달았다.
당장 산더미 같은 질문이 떠올랐지만, 굳이 묻지는 않았다.
정말 자신이 알아야 할 사실이라면 이미 말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니면 스스로 알아보라는 뜻이겠지.’
문득 이번 일이 생각보다는 더 잘 풀릴지 모른다는 생각이 떠올랐다.
TV 사업부만 해도 그렇다.
다른 것을 떠나서 콜린스 모델이 출시된다면 큰 화제를 일으킬 수도 있었다.
‘정말 10만 대, 아니, 5만 대만 팔려도 콜린스 매출액만 무려 2천억이 넘어.’
* * *
콜린스 모델 양산을 위한 부품 수급을 비롯한 작업은 여러 가지 문제에도 불구하고 그럭저럭 잘 풀려갔다.
디자인 변경 전에 이미 문제가 되었던 부분 역시 작은 문제가 있었지만, 일정에 큰 영향을 줄 정도는 아니었다.
이보다는 오히려 다른 문제가 생겼는데, 바로 인력 수급이었다.
보안을 강화하는 중에 새로운 인력 수급을 소홀히 한 결과였다.
이건 콜린스 모델뿐만 아니라 다른 생산 모델에도 똑같이 적용되었다.
조성돈 팀장도 이런 현상 때문에 최병연 팀장이 이직하기 전에 있었던 일을 더 꼼꼼하게 확인했다. 그 역시 뒤늦게야 최병연 팀이라면 믿을 만한 이들이라는 것을 확신했다.
‘최 실장님이 그래서 이런 시도를 한 것이야.’
그는 최병연 팀장과는 그저 안면만 있을 뿐 친하지 않았다. 때문에 우선 TV 연구소를 임시로 책임지고 있는 안선종 팀장을 찾아갔다.
그러나 안선종 팀장 역시 최병연 팀장과는 그렇게 친한 편이 아니라서 최병연 팀장 밑에서 일했던 최구만 과장을 따로 불렀다.
콜린스 양산 때문에 피로에 쩔어 있던 최구만 과장은 뜬금없이 최병연 팀장에 대해 물어오자 고개를 갸웃했다.
“최 팀장님 말입니까?”
마음이 급한 조성돈 팀장은 넌지시 지난 일을 하나씩 언급했다.
“그분이 회사를 떠난 것은 자의적인 판단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최훈열 전무가 원인인데, 최훈열 전무는 회사에서 퇴직했습니다. 지금이라면 다시 회사로 돌아오고도 남죠.”
이성적으로는 수긍하지만, 과연 그렇게 되겠느냐고 생각한 최구만 과장은 혀를 찼다.
“그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잘 모르셔서 그런 말씀을 하는 겁니다. 최훈열 전무가 준 모욕은 두 분이 생각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조성돈 팀장 역시 듣기만 한 내용이었지만 많은 업무 경험을 한 그가 그 사태를 모를 수는 없어서 탄식하면서 입을 열었다.
“압니다. 제가 그런 제안을 들었다면 욕을 했을지 모르죠. 그래도 한 번쯤은 시도해 볼 만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글쎄요. 오성 전자에서 잘 적응한 분이 제가 요청한다고 올까요? 더욱이 저랑 그분 사이에 앙금이 남아 있어요.”
최구만 과장은 몇 차례 연락하면서 과거 둘 사이에 쌓였던 오해를 풀었다. 그러나 설사 자신이 나선다고 해도 스카우트 제안이 잘될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하지만 최민혁에게 지시를 받은 조성돈 팀장은 쉽게 포기하지 않았다.
“두 분 갈등의 동기도 최훈열 전무인 것으로 압니다. 그러니 제가 직접 나서서 중재할 테니, 자리만 마련해 주십시오. 실장님이 직접 지시한 겁니다.”
‘최민혁 실장’의 이름이 나오자 최구만 과장도 곧 태도를 바꾸었다.
“그건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지금 그분이 회사로 복귀해도 어수선한 이 분위기에 잘 적응을 할까요?”
조성돈 팀장은 방긋 미소 지었다.
“실장님께서는 다른 일을 맡길 계획입니다. 아마 오성 전자에서도 TV 설계가 아니라 다른 일을 맡고 있을 테니, 큰 문제는 없을 겁니다.”
“아, 동종업체 문제 때문에 TV 사업이 아니라 모바일 쪽에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어차피 저도 지난 일 때문에라도 한 번 연락하려고 했으니, 잘되었습니다.”
“부탁합니다.”
조성돈 부장도 크게 기대하지 않았지만 최구만 과장이 나서 준다면 어쩌면 잘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문득 자신과 같이 이야기를 나눈 이들의 눈빛이 달라졌다는 것을 확인하자 최민혁 실장이 왜 일을 이렇게 풀어 가는지 깨달았다.
‘잘못된 과거를 바로 잡는 것도 중요하겠지. 대형 TV를 이끌어가던 최병연 팀장이었으니까.’
* * *
오성 전자는 최근 구조조정을 진행하면서 사업부 내부에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자연스럽게 새롭게 떠오른 사업 아이템에 관한 연구 개발이 더 늘어난 것이다.
그중에 한 분야가 주파수공용통신(TRS)과 개인휴대통신(PCS) 사업이다.
이 황금 어장을 둘러싼 기업 쟁탈전은 첨예하게 대립하였다.
때문에 주파수공용통신 단말기 쪽을 담당하게 된 최병연 팀장은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이 하던 PCS 단말기 개발이 막바지 단계에서 다른 팀에 이관되었기 때문이다.
‘후유, 이제 지친다.’
뜬금없는 조치였다. 더욱이 자기 실적을 가로챈 놈이 오성 전자 로열가 인맥이라는 것을 알자 이제는 화도 나지 않았다.
새삼 최훈열 전무에게 당했던 일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그 새끼 때문에 신규 프로젝트 개발을 할 수가 없었어.’
그 당시에 얼마나 지독하게 싸웠는지 아직도 잘 잊히지 않았다.
착잡한 마음에 치밀어 오르는 분노를 겨우 가라앉힌 최병연 팀장은 구내식당에서 점심을 먹다가 마침 TV에 나오는 최훈열 전무의 모습을 봤다.
새치가 가득한 머리를 한 채 다급하게 재판받으러 들어가는데, 뒤에서는 벌떼 같은 기자들이 몰려와서 계속 괴롭혔다.
재판이 예정된 것보다 더 길어지면서 생긴 일이었다.
전관 남수현 변호사가 비록 초반에는 실수했지만, 재판에서는 좀 더 유리한 국면을 이끌어내면서 재판은 오히려 검찰에 불리하게 흘러갔다.
다행이라면 워낙에 유죄 증거가 명확하다는 점이다.
이 묘한 상황 때문에 기자의 관심은 몇 달 전과 비교해도 계속 뜨겁기만 했다.
판사 매수설이 계속 흘러나오기 때문이다.
그러니 남수현 변호사가 신이 아닌 이상 재판을 아주 유리한 국면으로 이끌 수는 없었다.
마녀사냥 형식으로 흘러가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이런 상황에 더 만족한 최병연 팀장은 기분이 좋았다.
‘좋네.’
지난 정신적인 상처가 이제는 좀 씻겨 나가는 것 같아서 기분이 좋았다.
식판을 든 한철수 차장이 그의 맞은편에서 퉁명스러운 어조로 말했다.
“아, 최 팀장님은 밥 먹으러 혼자 가면 어떻게 합니까? 계속 찾았지 않습니까!”
“안 보이더라.”
동글동글한 체형의 이현탁 과장 역시 의뭉스럽게 툴툴거렸다.
“최 팀장님 찾는다고 다들 난리가 났지 뭡니까. 아니 회의 끝나고 혼자 그렇게 갑자기 사라지면 어떻게 합니까?”
“미안하다. 기분이 좋지 않아서 그래.”
키 190cm에 덩치도 씨름 선수 같은 한철수 차장이 잔소리했다.
“그 뻔한 이야기 아닙니까. 다들 최 팀장님이 억울하게 실적 빼앗긴 것을 압니다. 이제 다 털어버리고 정신을 차려야죠. 청승맞게 이게 무슨 타령입니까.”
“그래.”
“TRS가 문제가 많다는 것은 다 압니다. 그렇다고 그 새끼랑 싸울 수도 없는 일 아닙니까. 설마 또 최훈열 전무한테 당했던 것처럼 당할 겁니까?”
한철수 차장이 TV를 가리키면서 목소리를 높였다. 지난 일을 제발 잊으라는 충고다. 이유야 어쨌든 지금은 오성 전자에 적응했다고 보기 때문이다.
분위기를 아는 최병연 팀장은 고맙다는 말을 하고 나서는 미역국을 훌훌 마셨다. 겨우 감정이 가라앉은 것을 느꼈다.
두 사람 역시 TV를 보며 최훈열 전무가 기자들에게 둘러싸여서 구경거리가 된 것을 통쾌하게 여겼다.
주변에 있던 다른 임직원이 쳐다봐도 신경 쓰지 않았다.
“최 전무 저 새끼, 꼴좋다.”
이현탁 과장 역시 이죽거렸다.
“그렇게 우리 팀을 못 잡아서 난리를 치더니, 저 모양이 되었네요. 사필귀정이라더니. 딱 맞는 말입니다. 저렇게 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최훈열 전무 재판이라는 반찬이 더해지자 분위기는 나쁘지 않았다. 줄줄이 옆에 와서 앉는 다른 팀원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최병연 팀장은 마음이 편치 않았다. 자기 때문에 또 KM 전자에 있을 때와 같은 일을 당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차라리 TV 사업부 쪽으로 보내 달라고 한번 이야기해 볼까?’
시간이 제법 흐른 지금이라면 안 될 것도 없어 보였다.
그런데 역시 걱정되는 것은 직계도 아닌 방계 출신의 안국호 부장이다.
자신이 재벌 4세라고 떠벌리는 그 새끼가 자신에게 앙심을 품고 있었다.
이유는 생각보다 간단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PCS 프로젝트를 잘 마무리했기 때문이다.
머릿속이 복잡한 최병연 팀장은 갑자기 걸려온 전화를 받으면서 고개를 갸웃했다.
“최 과장? 나야 그냥 그렇지. 그래. 안 그래도 최훈열 전무 일이 궁금해서 연락하려고 했어. 알았어. 그 장소에서 보자고.”
한철수 차장이 고개를 갸웃했다.
“최구만 과장 전화입니까?”
“어. 만나서 긴히 할 이야기가 있다고 하네.”
“제가 같이 가도 되죠?”
“안 될 이유는 없잖아.”
“잘됐네요.”
* * *
조성돈 팀장은 최병연 팀장과 미팅을 약속하고 나서 최민혁 실장에게 보고했다. 혹시라도 변동 사안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함이다.
최민혁도 최병연 팀장을 설득할 수 있는 대안을 떠올려 보았다. 그런데 신뢰 문제 때문에 대놓고 말하기는 곤란했다.
“저도 같이 가겠습니다.”
“이번에는 제가 알아서 하겠습니다.”
“설마 제 능력을 의심하는 겁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지금까지 잘 지내던 최병연 팀장이 갑자기 실장님을 만나면 크게 혼란스러울 겁니다. 차근차근 단계를 밟아가는 것이 좋습니다.”
사실 갑자기 나타나서 이직 제안을 했는데 그걸 받아들이면, 이후 문제 될 소지가 있다.
최민혁 자신조차 나중에 또 저 사람이 이직 제안을 받은 건 아닐지 의심하게 될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조성돈 팀장은 부드러운 어조로 말했다.
“실장님이 모든 일을 다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니 이번 일은 저에게 맡겨 주십시오.”
“하긴 조 부장님이 이런 쪽 일은 전문가죠.”
“과찬입니다.”
“꼭 그렇지도 않죠.”
최민혁은 최근 콜린스 모델 양산을 위한 작업 속도를 올리기 위해서 무리하게 진행했지만, 조직 관리 부분에서는 그럴 수가 없었다.
사람 마음까지 가속할 수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직접 시행착오도 경험해 본 터라 뒤늦게 자기반성을 했다.
“잘 좀 부탁합니다. 최근 인력이 너무 많이 빠져나가서 인력을 뽑아야 하는데, 믿을 만한 사람 고르기가 쉽지 않아요. 앞으로 프로젝트는 특히 보안이 필요한 일이라서 더 신경을 써야 합니다.”
조성돈 팀장도 최민혁이 왜 저런 말을 하는지 일주일 전에는 이해를 못 했다. 그런데 MP3 플레이어에 대한 자료를 조사하면서 뒤늦게 알았다.
누구보다 최민혁 실장 밑에서 그 일을 경험한 조성돈 팀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잘 알겠습니다. 저도 MP3 플레이어에 대한 감을 잡았습니다. 실장님이 무슨 걱정을 하는지 누구보다 잘 압니다.”
“알았습니다.”
든든한 조성돈 팀장의 이야기에 최민혁은 그제야 안도했다.
‘잘될 거야.’
* * *
최병연 팀장 역시 최구만 과장이 잘 지내나 싶어서 꽤 궁금했다. 언제 한번 만나서 술이라도 한잔하고 싶었다.
연락을 받고 나서 한철수 차장과 같이 최구만 과장을 만나러 갔다.
서울에서 가끔 자주 가는 술집에는 최구만 과장을 비롯한 안선종 팀장도 같이 자리했다. 그리고 안면이 있는 조성돈 팀장 모습에 고개를 갸웃했다.
“최 과장, 오랜만이야.”
옆에 동행한 한철수 차장은 커다란 덩치로 최구만 과장을 안아주면서 호들갑을 떨었다.
“와, 최 과장, 이제 회사 다닐 만하겠어. 설마 최 전무가 그 모양이 될 줄 누가 알았겠어.”
최병연 팀장 역시 인사하면서도 회사 내부 사정이 궁금해서 이런저런 질문부터 했다. 그 역시 최훈열 전무가 어떻게 감옥에 가게 된 것인지 알고 싶었다.
최구만 과장 역시 내막을 잘 모르는 터라 사실과 추측을 섞어서 설명했다.
내용은 꽤 쇼킹했다.
그중에 백미는 역시 대학교 1학년생인 최민혁 실장이다.
“최민혁 실장이 최훈열 전무를 감옥에 보냈다고? 아니 어떻게 그게 가능해?”
“저도 자세한 것은 모릅니다. 다만 그분이 중앙지검 인맥을 동원해서 안산 공장 내에서도 불법을 저지른 이들을 죄다 구속했습니다.”
“그러면 언론에서 언급한 것이 그거였구나.”
“말도 마세요. 공장은 발칵 뒤집혔습니다. 기사로 나온 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알음알음 소식은 들은 최병연 팀장은 안산 공장 소식에 혀를 내둘렀다.
“그렇겠지.”
사실 대규모 수사관이 우르르 몰려와서 공장을 다 뒤집어엎는 모습을 상상한 최병연 팀장도 경험하지 못한 일이라서 실감하지 못했다.
‘최민혁 실장이라……. 도대체 어떤 분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