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9
“그건 제가 판단합니다. 그저 이력서만 적당히 작성해서 제출만 해주면 됩니다. 나머지는 제가 알아서 할 테니까요.”
“이력서라면…….”
“너무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습니다. 기존에 회사에서 했던 일을 중심으로 작성하면 됩니다. 이력서 검토를 통해서 우리 회사 직원이 부족한 부분을 채울 예정입니다. 서류 전형은 그것이면 충분하고, 면접 역시 요식적인 절차일 뿐입니다.”
정성근 대리는 흥미로운 눈으로 상대를 조심스럽게 살폈다. 중후한 중년인 이만용 사장은 꽤 듬직해 보였기 때문이다.
“프로젝트 관련된 부분을 말하는 건가요?”
이만용 사장은 크게 강조도 하지 않은 채 마치 자연스럽게 말했다.
“네. 특히 최근 프로젝트 위주로 해서 구체적으로 만들면 더 큰 도움이 될 겁니다.”
“한번 생각해 볼게요.”
“기회는 그렇게 자주 오는 것이 아닙니다. 세계적인 오성 전자에서 일해 볼 기회입니다. 그것도 최대한 보상을 받으면서 말입니다.”
“잘 알았습니다.”
정성근 대리도 솔직히 상대의 제안에 깜짝 놀랐지만 애초에 오성 전자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진지한 상대의 태도에 더 놀랐다.
어수룩한 스카우트가 아니라 오성 전자를 등에 업은 업체라고 느꼈다.
‘설마 이거 나에게만 이런 제안을 한 것은 아니겠지?’
겉으로는 표정 없는 연기를 펼치던 이만용 사장도 솔깃한 정성근 대리의 반응에 내심 쾌재를 불렀다.
‘됐다.’
* * *
보통 스카우트 제안을 받으면 혼자 고민을 하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어지간해서 가족에게도 잘 말하지 않는다.
하지만 정성근 대리는 이만용 사장이 생각하는 사람과는 달랐다. 회사에 출근하기가 무섭게 조성돈 팀장에게 있었던 일을 토씨 하나 안 틀리고 줄줄이 다 말해 버렸다.
“흠.”
조성돈 팀장은 새삼 다른 눈으로 정성근 대리를 쳐다보았다. 두 배가 넘는 파격적인 연봉, 과장 조기 승진까지 약속을 받았음에도 무덤덤한 정성근 대리가 신기하기만 했다.
“정 대리, 우리 회사보다 여건이 더 월등한데, 갈등이 안 되나?”
“전 여기가 좋습니다.”
“아니, 내 말은 오성 전자 과장 승진을 말하는 거야. 우리 회사로 치면 차장 직급이나 마찬가지야. 두 직급이나 올라가. 나라도 그런 제안을 거절하기는 힘들 것 같아.”
“과장 승진하면 뭐 달라지는 것이 있나요. 골치만 아픈 걸요. 연봉도 많이 받으면 일을 많이 해야 하지 않나요? 전 그게 싫습니다.”
남다른 정성근 대리의 말에 혀를 내두른 조성돈 팀장도 탄식했다.
“…그런가.”
하지만 조성돈 팀장도 미처 모르는 사실이 있다. 정성근 대리는 바보가 아니다. 그 자신도 자신의 단점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KM 전자 기획 팀은 그것을 알면서도 가족처럼 감싸주었다. 만약 KM 전자가 아니라 다른 회사였다면 1년을 버티지 못하고 회사를 퇴직했다는 것을 느꼈다.
“여긴 형님 같은 배 과장도 있습니다. 든든한 삼촌 같은 박상기 차장님도 아주 좋습니다. 무엇보다 제 아버님 같은 조 팀장님도 있습니다.”
“흠…….”
민망해진 조성돈 팀장은 피식 웃으면서 정성근 대리 어깨를 가볍게 토닥여 주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기획 팀이지만 몇 년 동안 단 한 사람의 이직자도 없었다. 그게 다 자신의 인품 때문이라는 것을 이번에 느꼈다. 기분이 나쁠 리가 없었다.
“내가 다 무안해.”
“아닙니다.”
* * *
조성돈 팀장은 정성근 대리를 통해서 이만용 사장 제안을 몇 차례 확인한 후에 다른 직원을 불러서 일일이 면담했다.
역시 대리 직급은 다 스카우트 제안을 받았고, 과장급도 있었다.
심지어 박상기 차장도 그 대상이었다.
“아, 이 나이에 스카우트 제안을 받고 나니 기분이 참 묘합니다. 가슴이 떨려서 혼났습니다. 이만용 사장이란 분 정말 말이 듬직했습니다.”
“그렇습니까.”
“팀장님도 제 능력을 좀 인정해 주세요. 아니, 오성 전자로 이직하면 바로 부장 승진과 동시에 한 팀을 맡기겠다고 하지 뭡니까. 전 심각하게 갈등 중입니다.”
배신하겠다고 말을 하는 그의 태도는 오만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마음을 바꿀 일이었다면 이렇게 숨김없이 그대로 말하지는 않을 일이다.
누구보다 박상기 차장의 성격을 잘 아는 조성돈 팀장은 그저 웃기만 했고, 최민혁 실장을 찾아가서 스카우트 관련 일을 설명했다.
최민혁은 뜻밖에 덤덤했다. 이 정도 일은 당연히 예상했다. 오성 전자가 그렇게 쉽게 포기하면 그게 더 이상했다.
‘내가 일을 복잡하게 풀어가는 것도 이 때문이니까. 미래 기술이고 다 필요 없지. 중간에 이런 식으로 인력을 빼가면 도루묵이니까.’
그랬다.
이런 문제 때문에 최민혁이 이제까지 일을 서두를 수가 없었다. 그래서 굳이 최훈열 전무를 감옥에 보내서 최문경 부회장 세력을 줄인 것이다.
“스카우트라…….”
“가볍게 볼 일은 아닙니다.”
오성 전관을 통해서 수작을 부린 최민혁은 오성 전자 기획실도 당분간 몸을 사릴 것이라 봤다.
왜냐하면 오성 전자와 오성 전관이 같은 계열사라고 해도 경쟁 관계로, 전석재 전무 같은 사람이 자기 밥그릇을 건드리는 권태성 실장을 그냥 놔둘 리가 없었다.
그런데 그 사이에 또 다른 꼼수를 부리고 있었으니.
‘당분간은 좀 조용하나 싶었는데, 이게 또 문제구나. 하여간에 집요한 놈들이라니까.’
문제는 또 있었다.
최문경 부회장도 만만치 않은 상대이지만 오성 전자는 그보다 더 심하다. 지금 당장은 오성 전자를 대놓고 공격할 수는 없었다.
‘데이콤 지분을 계속 들고 있을 것 그랬나. 아냐 데이콤 주가 폭락을 보면 어쩔 수가 없지. 일단 최두진 지분 매각대금을 제외하고, 2,200억이란 현금을 챙겼으니. 그걸로 만족해야 해.’
고민에 빠진 최민혁을 보자 조성돈 팀장도 이미 이런 일을 몇 번 경험했기에 다시 경고했다.
“콜린스 때문입니다. 임권수 부장도 지금 오성 전자 기획 팀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절대로 내버려 둬서는 안 됩니다.”
이 일을 그냥 덮고 갈 생각은 없었다.
“그렇겠죠.”
“기조실에 있었던 임권수 부장은 우리 KM 전자 내부에 대해서 속속들이 압니다. 정성근 대리에 대한 자료도 그렇게 얻었을 겁니다.”
“설마 회사로 이직한 후에 바로 뒤통수를 쳤을까요?
“분명합니다.”
최민혁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그는 아는 미래에서는 이런 일은 없었다.
‘아니, 어쩌면 당연하지. 첫째 큰아버지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잖아. 오성 전자에 정보만 흘려도 이런 상황이 만들어지니까. 나 때문에 미래가 바뀌면서 이런 상황이 연출된 거야.’
조성돈 팀장은 걱정스러운 시선으로 최민혁을 쳐다보았다.
“아무래도 오성 전자가 단단히 작정한 것 같은데, 정말 걱정입니다.”
“맞습니다. 이번 일도 우리 부회장님 솜씨인데, 끝이 안 날 겁니다.”
조성돈 팀장은 최문경 부회장 이름이 나오자 크게 우려했다.
“정말 부회장님이 이렇게까지 했을까요?”
“오성 전자 기획실이 미친놈처럼 날뛰는 게 그냥 일어날 일은 아니에요. STB 매각 때문에 단단히 독이 오른 애들을 이용하기도 쉽죠. 이런 기회를 첫째 큰아버지가 그냥 둘 리가 없어요.”
“하지만 제가 장승일 실장에게도 듣기로 당분간 후계 갈등은 없다고 들었습니다.”
“대놓고 헛짓을 못 하는 것뿐입니다. 우리 첫째 큰아버지는 자신이 직접 움직이지 않아요. 다른 경쟁자를 이용해서 제거하는 방식을 많이 사용하죠. 흔히 말하는 차도살인지계라고 해야 할까요?”
“네? 차도……?”
“아, 아닙니다.”
그도 무협소설을 잘 모르는 조성돈 팀장에게 굳이 음모에 대해서 말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한 가지 문제를 지적했다.
“최훈열 전무 예를 들면 알 수가 있죠. 저에게 지분을 주고, 절 쳐내려고 최훈열 전무를 이용한 것에 불과합니다.”
“…설마 그렇게까지 했을까요?”
“한번 조사해 보세요.”
이전과는 달리 다시 비슷한 일에 직면한 조성돈 팀장도 마냥 최민혁의 말을 무시하지 않았다.
하지만 최민혁은 이번 일을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런 일은 생길 것이라 생각했다. 굳이 원천기술에 집착하는 것도 이런 일에 대비하기 위함이었다.
‘아니, 이번 기회를 통해서 마지막 점검을 하는 것도 나쁘지 않아. 떠날 사람은 보내 주는 것이 최선일 테니까.’
그보다는 오성 전자의 행동에 화가 났다.
“일단 이번 일에 대한 보복을 한번 고민해 보세요.”
“알겠습니다.”
* * *
스카우트 제안 사태를 뒤늦게 알게 된 KM 기획 팀의 분위기는 뒤숭숭했다. 혹시라도 스카우트 제안을 받고 넘어갈 수도 있기 때문이다.
특히 최민혁 실장의 대응책이란 지시에 다들 머리를 굴렸지만 뾰쪽한 답을 찾지는 못했다.
정성근 대리가 억울한 듯 툴툴거렸다.
“스카우트에는 스카우트로 대응하면 좋을 것 같은데, 오성 전자 임직원이 그런 제안을 받을 리는 없어서 아쉽네요.”
“이봐, 정 대리,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좀 막나갔다. 오성 전자에 적응한 사람이 KM 전자로 올 리가 없잖아. 더욱이 STB 사업부까지 매각한 마당에 지금 기존 직원 중에도 흔들리는 사람이 많아.”
이런저런 이야기는 나왔지만, 막상 답을 찾지는 못했다.
애초에 KM 전자와 오성 전자 규모를 비교하는 것 자체가 말이 되지 않았다.
조성돈 팀장도 뾰쪽한 대안이 없었지만 일단 최민혁 실장에게 지금까지 검토한 내용만 보고했다.
그도 사실 잔소리를 들을 각오까지 했는데, 최민혁은 그 검토 내용 중에 정성근 대리의 주장에 주목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란 말인가.’
처음에는 그도 가볍게 생각했지만, 문득 꼭 그렇지 않다는 것을 떠올렸다. 당장 정성근 대리만 해도 스카우트 제안을 거절했기 때문이다.
“가만. 이 스카우트 보복이 꼭 안 된다고 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우리라고 해서 반대로 행동하지 못할 이유는 없어요. 보복으로 오성 전자 쪽 인재를 끌어옵시다.”
“…설마 오성 전자 직원을 스카우트할 생각입니까? 하지만 그건 좀 무리입니다. 오성 전자 직원이 우리에게 올 이유가 있습니까?”
“그거야 평범한 일반 직원은 그렇죠. 하지만 피치 못할 사정으로 오성 전자 직원이 된 사람이라면 다르지 않을까요?”
“누굴 말씀하시는 겁니까?”
“최병연 팀장이죠.”
“최 팀장이라면… 상황이 좀 다르군요.”
최병연 팀장과 최훈열 전무의 갈등은 TV 사업부 내에서도 꽤 알려졌다. 특히 TV 사업부를 먹여 살리다시피 한 최병연 팀장은 실력도 실력이지만 그 영향력도 실로 대단했다.
최훈열 전무가 TV 사업부 내에 자기 사람을 박아서 최병연 팀에게 압력을 행사한 것도 다 그런 이유 때문이었다.
막상 대응책을 제안한 최민혁은 넌지시 조성돈 팀장에게 말했다.
“제가 최병연 팀장이 어떤 사람인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TV 사업부에서 왕 노릇을 한 사람입니다. 최훈열 전무하고도 피 터지게 싸운 사람인데, 오성 전자 내부 텃새에 조용히 있을 리가 없어요.”
“하긴 그럴 겁니다. 리더십이 대단하기는 하지만, 아니다 싶으면 실장이나 사장도 들이박아 버리는 사람이니까요.”
“그런 사람이 과연 오성 전자 가서 적응을 잘하고 있겠습니까?”
“그렇기는 합니다. 그러면 TV 사업부 매각은 이제 포기하시는 겁니까?”
“아뇨. 그건 조 팀장님이 더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러면 TV 사업부 경력이 있는 사람을 다시 데리고 와서 TV 사업부를 매각하겠다는 말씀입니까?”
“그거야 최병연 팀장이 오성 전자에서 TV 설계를 맡고 있다면 그렇겠죠. 하지만 제가 알기로 오성 전자도 경쟁업체 직원에게 TV 설계를 바로 맡겼을 리가 없어요. 다른 일을 하고 있을 겁니다. 지금쯤이면 다시 TV 파트에 갔을 수도 있겠지만, 그쪽 TV 사업부 내의 알력도 장난 아닐 겁니다. 과연 그자들이 유니크한 최병연 팀장을 그대로 둘 리가 없습니다.”
만약 최병연이 오성 전자에서 신형 TV를 개발하고 있다면 언론을 통해서 알려졌을 것이다. 경쟁업체 직원을 빼돌린 일이기 때문이다.
굳이 사람이 넘쳐나는 오성 전자에서 그렇게까지 할 이유는 없었다.
“알겠습니다. 제가 한번 TV 사업부를 통해서 알아보겠습니다.”
“아, 혹시 그쪽에서 앞으로 뭘 할 것이냐 물으면 MP3 플레이어라고 말해 주세요.”
“그런데 그런 제품은 없었습니다. 제가 지금까지 확인한 바로…….”
“당연히 지금은 없을 겁니다. 필요한 엔지니어는 칩 설계, OS, 애플, 기구, 디자인 담당자입니다. 아마 최병연 팀장은 지금쯤 이런 업무와도 관련이 있을 겁니다. 그러니 그런 점을 강조하세요. 필요하다면 아는 오성 전자 다른 임직원도 좋다고 하세요. 능력만 좋다면 다 좋습니다.”
“…알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