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
“그렇지. 이제 생각나네. 그러면 좀 이상하네. 망해가는 회사 아니었어?”
“저도 그렇게 알았는데, 생각보다는 멀쩡하게 잘 돌아가나 봅니다.”
최훈열의 재판이 워낙에 공중파를 통해서 이슈가 된 터라 KM 전자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은 최악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주가 1,600원대에서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이다.
그런데 정작 그 배 안에 있는 선원은 오히려 희희낙락했다.
얼마나 밝은 얼굴을 해서인지 오히려 오성 전관보다 더 나은 회사처럼 보였다.
회사 분위기가 도저히 이해되지 않았던 전석재 전무는 오히려 인상을 찡그렸다.
“포기한 건가?”
다른 여러 업체를 돌아다녀도 이런 분위기는 처음 접한 주종상 부장도 인상을 찡그렸다. 간혹 어려운 상황에 부닥친 중견 기업의 분위기를 자주 경험해 봤기 때문이었다.
“그런 분위기는 아닌 것 같습니다.”
“참 별의별 회사가 다 있어.”
전석재 전무는 회사 분위기가 참 독특하다고 생각하며 본사 1층까지 자신을 마중 나온 비서를 쳐다보았다.
“최민혁 실장님 비서인 오혜정이라고 합니다. 실장님이 지금 기다리고 있습니다.”
“안내 부탁해요.”
“네.”
그도 여색을 밝히는 스타일은 아니지만, 너무 이상적인 오혜정 비서에 마른침을 삼켰다. 그것은 뒤를 따른 이들 역시 다르지 않았다.
‘망해가는 회사의 비서가 이 정도라니. 완전히 미친 것 아냐?’
전석재 전무는 낯선 회사 분위기 때문에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한 가지만 물어봅시다. 요즘 KM 전자 분위기도 안 좋은 것으로 아는데, 여기 분위기는 좀 다른 것 같습니다.”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닙니다.”
“오 비서도 이 회사가 좋은가 봐요.”
“저에게는 최고의 회사라고 생각합니다.”
밝게 웃는 미소는 결코 꾸민 것이 아니었다.
전석재 전무도 오혜정 비서가 마음에 들어서인지 하대하지 않은 채 계속 질문했다.
하지만 오혜정 비서는 상대 기분을 건드리지 않는 정도에서 짧게 대답해 주었다.
“그렇습니까?”
‘진짜 괜찮네.’
* * *
전석재 전무는 은근히 오혜정 비서가 마음에 들어서 계속 질문을 했는데, 실장실이 있는 층에 도착해서는 더욱 놀랐다.
비서실 여직원이 우르르 몰려가는데, 하나같이 시선을 끄는 미인이었다.
대다수는 오혜정 비서에게 밝게 웃으면서 인사하는데, 그 모습이 한 폭의 화보였다.
‘…이놈의 회사는 여자 얼굴만 보고 사람을 뽑는 건가?’
오성 전자 인사 팀에서 외모를 보기는 하지만 KM 전자와 비교할 바가 아니었다.
하지만 더 황당한 것은 그녀의 얼굴에 떠오른 밝은 분위기다.
TV에서는 연일 위기를 강조하는 KM 전자.
얼마 전에 미래 성장 엔진인 STB 사업부까지 오성 전자에 팔아치웠다.
그런 회사의 내부 분위기는 오성 전관이 아니라 오성 전자보다 훨씬 나은 분위기를 연출했다.
전석재 전무는 오징어 같은 자기 여비서를 떠올리면서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다른 것은 몰라도 비서 미모만큼은 부러웠다.
뒤따른 주종상 부장도 여자를 가까이하는 타입이 아님에도 쉽게 시선을 떼지 못했다. 특히 자신의 이상형인 오수연 비서를 보자 아예 걸음을 떼지 못했다.
“……!”
자신의 첫사랑보다 더 아름다운 그녀 모습에 발걸음을 쉽게 떼지 못했다.
“주 부장!”
“아, 죄, 죄송합니다.”
주종상 부장은 같이 간 영업 팀 몇 사람에게 눈총을 주며 머리를 흔들었다.
‘설마 이게 미인계는 아니겠지?’
* * *
다행히 미인계 따위는 없었다.
다만 있다고 한다면 자기 아들보다 더 어린 녀석이 실장실 의자에 앉아 있다가 일어나서 자신을 최민혁 실장이라고 소개했다는 점이다.
최민혁 실장이 어리다는 소리를 듣기는 했지만, 이 정도인지는 몰랐다.
전석재 전무도 악수를 하기는 했지만 역시 당황하기는 매한가지였다.
오혜정 비서가 때마침 냉커피를 가져와서 그들 앞에 내놓았다.
“오 비서, 조 팀장님 좀 부탁해요.”
“네, 실장님.”
해맑게 웃는 모습이 또 그렇게 아름다울 수가 없었다.
몸가짐을 조심한 몸놀림.
흠모하는 직장 상사를 바라보는 그 시선은 절대로 꾸민 것이 아니었다.
머리에 피도 안 마른 녀석에게 저런 행동을 보이는 것 자체가 더 이상했다.
“…….”
넋을 잃고 있던 오성 전관 직원은 다시 최민혁을 힐끗 보았다.
베이지 톤의 체크무늬 재킷, 쓰리버튼으로 대중적인 옷이었다.
평상복으로 일반적인 정장과는 많이 달랐다.
최민혁은 따가운 시선에 어깨를 으쓱했다.
“아, 우리 회사가 복장 자율화를 얼만 전부터 했습니다. 그래서 남의 눈살을 찌푸리게 할 정도만 아니면 괜찮습니다.”
“저도 간혹 언론에서 보기는 했지만 벌써 복장 자율화를 시행하다니, 인상 깊습니다.”
“오성 전관도 한번 시도해 보세요. 분위기가 나쁘지 않습니다.”
“네.”
잠깐의 침묵.
전석재 전무는 눈치를 보다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외람된 질문이지만 정말 KM 전자 기획실장입니까?”
최민혁은 딱히 기분 나빠하지 않았다. 최근 복장 자율화 덕분에 안 그래도 어린 외모가 더 어려 보였기 때문이었다.
“네. 제가 좀 어려서 당황하시는 분이 많은 것 같더라고요.”
“아, 네. 죄송합니다. 그런 의도로 한 말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아뇨. 충분히 이해합니다.”
한때 최고의 주가를 떨친 여배우 정미선의 유전자를 물려받았기에 최민혁 외모도 어지간한 배우보다 훨씬 나았다.
특히 자기 관리를 철저히 하면서 분위기는 더 살아날 수밖에 없다.
심지어 회사 내에서 영향력을 더 키워가면서 과거와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보여주었다.
그런 모습을 뒤늦게 발견한 전석재 전무는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처음에는 너무 어린 나이 때문에 최민혁을 대수롭지 않게 봤지만, 막상 말을 섞어 보고서야 자신이 착각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소위 낙하산으로 자리를 차지한 다른 재벌 3세와는 기품 자체가 달랐다.
“이거 아무래도 제가 정식으로 사과드려야겠습니다.”
“하하하, 괜찮습니다. 전 오히려 칭찬 같아서 기분이 좋습니다.”
“흠.”
전석재 전무는 오히려 소탈한 최민혁의 태도에 더 놀란 눈으로 쳐다보았다.
때마침 조성돈 팀장, 박상기 차장, 배종대 과장이 줄줄이 들어왔다. 두 사람도 TV 사업부와 관련이 있기에 이 자리에 같이 참석한 것이었다.
분위기가 진지해지자 전석재 전무도 태도를 정중하게 바꾸었다.
“KM 전자 명성은 자주 들었습니다. 저희 쪽에서 같이 일해보고 싶은 회사입니다. 그나마 늦게라도 연락을 받아서 영광입니다.”
CRT 분야에는 세계적인 명성을 떨치고 있는 오성 전관의 전무가 자신을 낮춘 것이었다.
오성 그룹의 갑질을 나름 예상한 최민혁도 갑작스러운 태세 전환이 오히려 의아하기만 했다.
“천만에요.”
슬쩍 허리를 낮춘 태도에도 최민혁은 그다지 방심하지 않았다. 오성 전관 직원이 고압적이라는 소설과는 달리 현실에서는 그런 일이 있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실적이 안 나오면 잘리니까. 특히 임원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지.’
거래 규모도 3만 대를 가볍게 넘어간다. 눈치가 있다면 그 물량은 더 늘어날 수 있다는 것을 예상할 수 있다.
이런 거래를 가볍게 생각하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하지만 최민혁이 오늘 그를 부른 것은 다른 의도가 있어서였다.
“이번 신모델에서 사용되는 37인치 CRT인데, 저희랑 거래하는 업체의 생산에 한계가 있어서 다른 업체를 찾는 중입니다.”
“그러면 초도 물량이 정말 3만 대라는 말씀입니까?”
“일단 양산 전 단계에서는 물량이 그보다 좀 더 적겠죠. 하지만 본격적으로 양산을 시작하면 아마 주민이 대폭 늘어날 겁니다.”
아직 개발 단계라고 알아들은 전석재 전무는 크게 실망했다. 개발 중이라면 얼마든지 없던 것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최민혁은 피식 웃었다.
“아직 보안 계약을 한 상황이 아니라서 자료를 보여줄 수는 없지만 이미 협력업체를 통해서 어느 정도 제품 신뢰성 확인이 끝났습니다. 그렇게 비관적으로 볼 필요는 없습니다. 오죽하면 LC 전자를 비롯한 필립스 측과도 협상하고 있겠습니까?”
“…그렇습니까.”
의아한 이야기다.
그가 아는 한 KM 전자의 그 어떤 모델도 시작부터 저렇게 생산하지는 않았다. 도대체 무슨 근거로 저렇게 나오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LC 전자, 특히 필립스 이야기가 나오자 전석재 전무의 표정이 완전히 바뀌었다. 차라리 몰랐다면 그나마 났겠지만, 지금처럼 알게 된 상황에서 만약 필립스에게 엿 먹으면 타격을 받을 수도 있었다.
최민혁은 상대가 미끼를 물었다고 판단하자 슬쩍 목소리를 바꾸었다.
“그리고 외람된 이야기지만, 조금 전에 확인한 사실인데, 오성 전자 직원이 자꾸 저희 오성 안산 공장 협력업체에 얼쩡거린다지 뭡니까? 그쪽과 미팅할 때까지는 몰랐습니다.”
“네?”
“오성 전자 임직원이 저희 안산 공장 협력업체를 염탐하고 있다는 소리가 있어요. 과연 이런 업체 계열사와 정상적인 거래가 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는 버럭 화를 냈다.
“우리 오성 그룹은 절대로 그런 일을 하지 않습니다!”
최민혁은 기묘한 표정을 짓고 있는 김명준 과장에게서 사진을 받아서 직접 보여주었다. 심지어 찍힌 당사자 프로필까지 옆에 같이 첨부했다.
그들이 주고받은 자료.
특히 KM 편향 코일과 KM 고압 변압기에 대한 관련 자료다.
죄다 특허로 묶여 있어서 본다고 해서 달라질 것은 없지만 오성 전자 직원이 뭔가를 캐고 있다는 것을 충분히 보여주었다.
“이래도 아닙니까?”
“…….”
크게 당황한 전석재 전무는 식은땀을 흘렸다.
최민혁은 넌지시 한 가지 사실을 더 말해주었다.
“오리운 전기에 물량이 배분되기는 했지만, 초도 물량이 3만 대가 넘습니다. 아마 양산이 진행되면 더 늘어날 것입니다.”
“글쎄요.”
“아, 모를 수도 있겠군요. 정 궁금하면 오리운 전기 쪽을 확인해 보세요. 매출이 늘어난다면 타격이 크겠죠. LC 전자 쪽에 물량이 더 늘어난다면 상황이 아주 안 좋을 겁니다. 요즘 CRT 업계가 힘들다고 하는데, 전석재 전무님이 어찌 될지 모르겠습니다.”
그는 최민혁에게 양해를 구한 후에 회의실을 나가서 다급하게 어디론가 전화했다.
최민혁은 씩 웃었다.
“오늘 커피는 참 시원해서 좋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계약 때문에 이 자리에 온 기획 팀은 서로 눈치를 주고받으며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오성 전관 직원 역시 당황하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리고 1차 미팅은 이렇게 끝나고 말았다.
* * *
“죄송합니다.”
꾸벅 고개를 숙인 권태성 실장은 크게 당황한 채 힐끗 사진을 다시 쳐다보았다.
단단히 굳은 안색으로 사진을 돌려보고 있는 임권수 부장이나 황광수 차장 역시 난감하기는 매한가지다.
다른 계열사인 오성 전관의 전석재 전무가 자신들의 행적에 대해서 걸고넘어질 줄은 몰랐다.
전석재 전무도 크게 화가 난 것은 아니었다.
“저도 권 실장님이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해도 최소한 들키지는 말아야 할 것 아닙니까. 아니, 협력업체 통해서 내부 정보를 빼낸다는 소리를 제가 들어야 합니까?”
“면목이 없습니다.”
“이게 그렇게 사과한다고 해서 될 문제입니까? 만약 이 사진이 검찰에 넘어갔다면 어쩔 뻔했습니까. KM 전자에서 최훈열 전무처럼 고소하겠다고 난리를 칠 것 아닙니까.”
당장에 큰 범죄는 아니다.
문제는 이걸로 중견 업체의 기술을 빼돌리기 위해서 협력업체를 압박했다고 몰아갈 수도 있다.
특히 최훈열 전무 사태를 일으킨 KM 전자라면 그보다 더한 이슈를 만들 수도 있었다.
권태성 실장 안색이 좋을 리가 없었다.
그 역시 잊을 만하면 나오는 최훈열 전무 사건을 모를 수가 없었다.
특히 오성 그룹 내부 알력 싸움에서 밀리는 권태성 실장은 전석재 전무에게 함부로 할 수는 없었다.
전석재 전무는 깊은 우려를 드러냈다.
“이건 그냥 지켜보는 사진이라서 다행입니다. 만약 공장 안에 들어가거나 아니면 다른 KM 전자 직원을 만나는 장면이 찍혔다면 어쩔 뻔했습니까?”
“제가 KM 전자를 얕잡아보았습니다. 다음에는 이런 일이 없도록 주의하겠습니다.”
“앞으로 정말 조심해야 할 겁니다. 만약 언론을 통해서 이런 사진이 기사화된다면 타격이 이만저만이 아닐 겁니다.”
“…네.”
화를 내던 전석재 전무가 떠나자 겨우 한숨을 내쉰 권태성 실장은 짜증이 나서 결국 담배를 베어 물고 말았다.
실내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음에도 다른 이들은 별다른 내색을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