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
기획 팀에서 따로 다양한 업체를 만나서 부품 단가를 낮춘다.
대림 전자와 계약을 하긴 했으나, 차선책이 될 업체를 따로 만나는 것이다.
KM 편향 코일이나 KM 고압 변성기 역시 예외는 아니다.
TV 사업부를 담당한 배종대 과장은 정성근 대리, 박광민, 정영일, 심지어 멀티미디어 쪽을 담당한 임웅 대리를 데리고 이 일에 매달렸다.
그런 중에 문득 한 가지 특이한 점을 발견했다.
“이거 계약 물량이 정말 십만 대가 맞습니까?”
박상기 차장도 이 일을 같이 도와주고 있었기에 고개를 갸웃했다.
“실장님 의욕이 과해서 그렇게 설정한 것뿐일 거야. 아무리 많아도 5만 대 정도로 생각하면 되겠지.”
5만 대 정도만 되어도 400만 원 기준으로 보면 매출이 무려 2,000억이나 된다. 기존 KM 전자의 매출을 가볍게 넘어가는 수치였다.
실제로 단 하나의 모델로 이 정도 매출이 나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거기에 KM 전자는 아직 내수 시장 위주로만 움직였다.
과연 세계시장에서 얼마나 많이 팔릴지는 실감하지 못했다.
“…진짜 그 정도로 팔릴까요?”
“그게 문제지.”
박상기 차장도 곤혹스러운 표정으로 조성돈 팀장을 쳐다보았다.
KM 전자만이 아니라 소니를 비롯한 다른 회사의 대형 TV 판매량을 확인하고 있던 조성돈 팀장도 관자놀이를 쿡쿡 눌렀다.
계약서상에도 아직 물량 대비 단가에 대해서 명확하게 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각 물량에 따라서 제품 단가가 전혀 다릅니다.”
업체의 수익 개선 방법 중 하나가 부품 단가를 낮추는 것이다. 3%만 낮추어도 그만큼 이익이 늘어난다. 이 쉬운 방법을 포기할 리가 없다.
하물며 계약할 때는 어떻게 해서라도 매출을 올려야 하는 하도급 업체에서 단가를 최대한 낮출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걸 꼭 갑질이라고 하기도 모호한 것이 계약하려는 업체는 많기 때문이다.
기획 팀이 하는 일이 그것이다.
즉 최민혁 실장 선에서 그리는 그림은 대략 10만 대를 팔겠다고 한 것이지, 실제로 그 물량이 정해진 것은 아니었다.
이 조율에 따라서 부품 단가는 또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부품 가격을 어떻게 조율하느냐에 따라서 적게 수십억, 많게는 수백억을 절감할 수 있는 일인데, 간단한 리가 없다.
업체와의 협상도 이제부터 시작이었다.
조성돈 팀장은 두통으로 고통받은 환자 같은 얼굴을 한 채 입을 열었다.
“일단 업체마다 3만 개부터 시작해서 5만 개, 7만 개, 10만 개씩으로 나누어서 견적을 요청해. 필요하다면 TV 사업부 생기 팀 쪽과 협력해서 부품을 어느 정도 수급할 지도 기준을 정하고. 영업 팀은 박상기 차장이 따로 알아봐.”
“알겠습니다.”
마침 오혜정 비서에게서 최민혁이 호출했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능하면 월 생산 카파도 감안해서 문제가 없도록 정리해.”
“네.”
다들 그제야 각자 자기 맡은 일에 매달렸는데, 난감한 얼굴이었다. 그들도 콜린스가 혁신적인 제품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설마 십만 대씩 팔릴 거라고는 상상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도 기대를 전혀 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이제까지 축 처져 있던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 * *
조성돈 팀장은 최민혁이 왜 불렀는지보다 콜린스 부품 관련 항목을 지적하면서 질문했다.
“실장님, 여기 십만 대라고 주문 수요를 요청해 놨는데, 정말 이 숫자로 구매할 겁니까?”
보통 양산 전에 좀 부풀려서 계약상에 편의를 도모할 수가 있다. 솔직히 미래 생산 물량을 정확히 알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당장 대림 전자에 구매 요청한 물량도 얼마든지 바뀔 수가 있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KM 편향 코일이나 KM 고압 변성기도 만약을 대비해서 대림 전자가 아니라 다른 업체에 추가로 주문을 요청한 것이다.
대림 전자 역시 이런 문제 때문에 오성 전자의 요청을 쉽게 거절하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최민혁은 마치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 아니, 정말 이 많은 부품을 한 번에 주문할 생각이란 말입니까?”
“물론 한 번에는 아니죠. 그래도 1차 물량은 십만 대를 넘을 겁니다. 물론 양산 검토가 다 끝난 후에 이야기입니다.”
그도 콜린스 자체를 떠올리면서 많이 팔릴 것이라 추론했지만, 곧 고개를 내저었다.
“그건 불가능합니다.”
“아니, 왜요?”
“하아, 다른 부품은 몰라도 CRT 같은 경우에는 업체에서도 생산 카파가 정해져 있습니다. 37인치 대형 CRT 경우에는 한 달에 고작 2~3천 대가 다입니다.”
예상치 못한 현실을 직면한 최민혁도 혀를 내두르고 말았다.
‘판매량이 급증하면 생산 자체가 어려워진다는 소리잖아?’
“어, 그런가요? 잠깐만요. 혹시 대기업에 주문한 것 아닙니까?”
“그게 초도 물량이 적어서 그쪽에서는 받아주지도 않습니다. 결국 TV 연구소에서 자주 거래하는 오리운 전기 쪽에 요청해서 진행한 것입니다.”
전 세계 CRT 시장 점유율 8.4%를 차지한 오리운 전기도 KM 전자가 무시할 만한 회사는 아니었다.
“그렇다는 이야기는…….”
“네. 2~3천 대 물량이라면 괜찮겠지만 1만 대만 넘어가도 답이 없습니다. 그쪽에서는 할 수 있다고 외치는데, 그건 어렵습니다.”
“그렇습니까?”
바로 얽히고설킨 현실.
기존 KM 전자에서 생산하는 TV 수량은 딱 범위가 정해져 있다. 그 이상의 판매 수량은 오리운 전기에서도 예상하지 않았다.
오성 전자가 굳이 대림 전자를 파고드는 것도 이런 예상치와 다르기 때문이고, 물론 괜한 문제를 만들기 싫어서 기존 오성 계열사와 거래를 통해서 정보를 얻은 것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간단한 거래 과정에서 이것저것 질문할 때 보안을 유지하기 어려웠다.
어느 정도 이런 상황을 짐작하는 최민혁도 순간 머리가 아팠지만, 문득 한 가지를 떠올렸다.
“혹시 다른 CRT 업체에서 공급받는 것이 어려운 겁니까?”
“그건 아닙니다. 우리 쪽에서 설계를 다 했으니, 그 사양만 전해주면 원하는 대로 만들어 줍니다. 이 정도 물량이라면 그쪽도 환영할 겁니다.”
“그거 좋네요.”
흥미로운 사실.
안 그래도 오성 전자를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하던 최민혁은 괜찮은 아이디어 하나를 떠올렸다.
‘오성 전자 계열사라고 해도 2~3만 대 물량이라면 무시할 수는 없겠지. 지금처럼 겁 없이 나대지는 못할 거야.’
어차피 지금과 같은 거래에서 갑은 KM 전자다. 제품을 공급하는 대기업이 아니다. 주도권을 쥔 KM 전자가 얼마든지 갑이 될 수도 있었다.
‘경쟁을 시키면 더 확실하지.’
거래가 늘어나면 지금의 오성 전자 기획실에 대한 압박도 어렵지가 않다. 그래도 말을 안 들으면 LC 전자도 이용하면 된다.
물량을 늘리다가 갑자기 오성 전자 기획실의 행패를 명분 삼아서 LC 전자나 정 안 되면 소니 쪽으로 돌려 버린다.
그 책임은 과연 누가 질까.
최민혁은 물량을 늘려 가면서 오성 전관에 숨김없이 그대로 압력을 행사한다면 당분간은 괜찮을 것으로 생각했다.
즉 콜린스 보안에 대해서 완전히 막을 수 없다면 차라리 공격적으로 나서서 부품 계약으로 압력을 넣겠다고 마음먹었다.
‘오성 전자는 이 정도면 충분하겠지.’
“오성 전관 쪽과 한번 약속을 잡아 주세요. 초도 주문 물량은 최대 3만 대입니다.”
“오성 전관 쪽에 말입니까?”
“그 정도 물량이면 그들도 거절하지는 않을 겁니다. 가능하면 여러 업체로 나누어서 서로 견제를 시키도록 해야죠.”
“그렇기는 합니다만…….”
워낙에 물량이 적어서 오성 전관 쪽과는 거래조차 할 생각이 없었던 조성돈 팀장 처지에서는 곤혹스럽기만 했다.
물량이 많아지면 재고로 쌓일 위험도 있었다.
“정말 그 수량으로 주문하실 생각입니까?”
“돈이 부족합니까?”
무려 1,300억이란 현금을 챙긴 KM 전자에서 당장 현금 걱정을 할 이유는 없었다. 그렇다고 해도 몇 백억은 가볍게 넘어가는 돈이었다.
“…그건 아닙니다. 하지만 기존 차입금을 어느 정도 정리할 필요가 있습니다.”
“알아요. 그게 모범적인 답입니다. 하지만 이 콜린스 모델이 더 우선입니다. 제 말을 믿어 보세요. 이 모델은 잘될 겁니다.”
“그렇지만…….”
그도 여전히 망설였다. 제품 자체가 괜찮다는 것을 알아도 실제 팔아서 매출이 그런지는 알 수가 없었다. 만약 제대로 안 팔리면 다 재고로 남을 텐데, 그건 회사에 큰 부담을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미래의 디자인 방향을 잘 아는 최민혁은 피식 웃었다.
“잘될 겁니다. 상식적으로 콜린스 모델과 소니 모델 비교해 보세요.”
두 가지 모델에 대한 분석 자료를 떠올린 조성돈 팀장도 나쁘지 않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소니가 가지는 브랜드 영향력을 무시할 수는 없었다. 문제는 소비자 반응이 과연 예상한 대로 나올지를 알 수가 없었다.
“…잘 알겠습니다.”
그도 소니 모델 디자인을 떠올렸다. 쓰게 웃으면서 실장실을 나섰다.
‘확실히 콜린스가 소니에 비해서 그렇게 뒤처지는 것은 없으니까.’
* * *
TV의 대형화는 점점 컬러 브라운관이 주력으로 바뀌었다.
20인치 이상의 모델이 급격히 늘어나면서 그 이상의 모델도 이제는 고가품이 아니었다.
세계 최고의 시장 점유율을 가진 오성 전관은 14인치 모델을 줄이는 대신에, 20인치 모델 생산을 크게 늘렸다.
특히 25인치 모델은 무려 2배 가까이 생산량이 늘어나면서 변화를 견인했다.
결국 이 대형 모델을 담당하는 전석재 전무는 하루도 쉴 틈이 없었다. 고객의 니즈를 최대한 반영하고, 시장 변화를 주시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그도 KM 전자의 조성돈 팀장에게서 온 연락에는 고개를 갸웃했다.
“KM 전자는 들어본 것도 같은데, 이게 무슨 소리야?”
이미 몇 번이나 확인해 본 대형 CRT 영업 1팀 주종상 부장 역시 고개를 갸웃했다.
“직접 전화를 걸어서 몇 차례 확인했는데, 틀림없다고 합니다.”
“아니, KM 전자가 뭐 하는 회사인데, 초도 물량 3만 대를 주문해? LC 전자도 한 모델만 이렇게 많이 주문하는 경우는 흔치 않잖아.”
“그게… 일단 한번 보시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전석재 전무도 KM 전자의 이력을 확인하고선 STB 사업부를 오성 전자에게 900억에 매각해서 주목을 받은 회사라는 것을 깨달았다.
심지어 협력 업체를 상대로 뜯은 돈이 무려 400억이었다.
“…돈은 충분하군.”
“그런데 KM 전자를 꼭 무시할 것은 아닙니다. 당장 대운 전자의 임팩트 개벽만 해도 3년간 50억 연구비를 투자해서 모든 성능을 끌어올렸지 않습니까?”
임팩트 개벽은 색상, 명암, 선명도와 같은 화질을 특히 개선했다. 롤 모델 자체가 소니라서 최고 수준의 고화질 컬러를 자랑한다.
대구경 전자총으로 무장한 이 모델은 색 재현비율만 44%를 넘어서 자연색에 가깝도록 그 품질을 끌어올렸다.
외광 반사율이 45% 감소한 것만으로도 꽤 매력적인 제품이었다.
“말만 무성할 뿐이야. 그거 팔아봐야 얼마나 판다고 그래? 그놈들은 허풍만 떨지, 정작 뚜껑을 열어보면 물량이 얼마 되지 않아.”
“하지만 KM 전자가 대형 TV 영역에서는 나름 인지도를 얻고 있습니다. 대운 전자에 비해서도 한 수 위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만 부품을 공급받는 것은 아니잖아. 그러면 대략 10만 대를 팔겠다는 의도인데, 이게 가능할까?”
“확실히 그건 좀 그러네요. 설마 그렇다고 저희에게 사기를 치겠습니까?”
“나중에 가서 갑자기 계약을 취소할 수도 있지. 이런 쓸데없는 일에 엮였다가 곤란할 수도 있어. 하지만 자네 말처럼 무시할 수는 없어.”
이런 업체가 참 애매하다. 차라리 LC 전자라면 마음 편하게 주문을 받을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렇다고 납품 계약을 거절하기도 그랬다.
전석재 전무도 이걸 장난으로 봐야 할지, 아니면 진지하게 봐야 할지 고민했다. 진짜라면 부장 선에서 맡겨서는 안 될 일이었다.
“이봐, 주 부장, 다시 확인해 보고 문제가 없다면 직접 가서 만나 보자고.”
“준비하겠습니다.”
* * *
대형 TV 시장 분위기는 그야말로 전쟁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런 CRT 시장 분위기 때문에 전석재 전무가 굳이 KM 전자 같은 작은 회사(?)의 요청도 무시하지 않은 채 적극 움직였다.
KM 전자 본사를 보고서야 흥미를 느꼈고, 회사 안으로 들어가서 밝은 임직원 분위기를 살피고서야 호기심을 느꼈다.
“회사 분위기는 괜찮아.”
“그러게 말입니다. 최훈열 전무 재판 때문에 주가도 폭락해서 난리가 났는데, 정작 회사 임직원은 전혀 모르는 것 같습니다.”
“아, 최 전무 재판, 그 친구가 이 회사 임원이었어?”
“네. 10개가 넘는 혐의 때문에 난리가 났지 않습니까. 법원에 사람들이 몰려가서 대규모 시위를 벌이면서 뉴스를 탔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