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
“그런데 그 과정에서 부품 계약도 추가로 체결했는데, 물량이 무려 10만 대나 된다고 합니다.”
“설마 TV 부품을 말하는 거야?”
“네.”
그는 전 KM 그룹 기조실 출신인 팀장 임권수 부장을 쳐다보았다.
“임 부장, 저게 무슨 말인가?”
“그건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아니, 좀 이상합니다. KM 전자에서 판매하는 TV 수량이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주로 대형 TV 위주이니, 많아 봐야 몇 만 대 수준에 불과합니다.”
250~400만 원대 대형 TV 위주라서 전체 수량을 몽땅 다 합쳐도 십만 대를 넘어가지 않았다. 그런데 무려 십만 대란 숫자는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만약 저게 사실이라면 지금 오성 전자 기획 팀에서 검토하고 있는 TV 사업부에도 큰 영향을 줄 것이 분명했다.
아마 KM 전자에게서 STB 사업부를 인수하지 않았다면 무시했을 테지만 이미 뜨거운 맛을 본 권태성 실장은 방심하지 않았다.
“아무래도 KM 전자 쪽에 인원을 추가로 배치해서 자세히 알아봐. KM 안산 쪽이 어렵다면 협력업체를 일일이 확인해. 필요하다면 계약 몇 건을 던져 줘도 괜찮아.”
“알겠습니다.”
두 사람은 곧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황광수 차장은 힐끗 KM 그룹 기조실에 있을 때 안면이 있었던 임권수 부장을 쳐다보았다.
썩 좋아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말은 정말 기름 장어 못지않게 잘하는데, 실상 실속이 별로 없었다.
필요하다면 밑에 부하 직원 실적 가로채기는 그다음이었다.
‘하필이면 이 양반일까.’
임권수 부장도 황광수 차장 시선을 느꼈지만, 슬쩍 무시했다.
권태성 실장은 그 미묘한 분위기를 발견했지만 내색하지는 않았다. 황광수 차장 능력은 좋았지만 여러 가지 한계를 보였다.
사람이 믿을 만하기는 하지만 융통성이 너무 없었다.
그런 면에서 본다면 임권수 부장은 황광수 차장과는 달랐다.
‘둘이 잘하겠지.’
* * *
황광수 차장은 대림 전자 입구에서 임권수 부장을 향해 넌지시 말했다.
“굳이 꼭 이럴 필요가 있습니까?”
“무슨 말이야?”
“너무 지나친 것이 아닌가 싶어서요.”
“이상한 소리를 하는군. 대림 전자가 꼭 KM 전자와 거래를 하는 것은 아니잖아. 더욱이 프린트 사업부에서 새로운 고압 변성기를 요구하는 것은 사실이지. 그리고 대림 전자에서 제안한 샘플도 나쁘지 않았어.”
“정말 그런 이유 때문입니까?”
그제야 몸을 돌린 임권수 부장은 짜증스러운 눈빛으로 황광수 차장을 쳐다보았다.
“자네는 매사에 그게 문제야. 권재홍 비서실장에게 찍힌 것도 그 때문이고. 능력 있는 사람이 왜 그렇게 멍청하게 굴어?”
입술을 살짝 깨문 황광수 차장은 KM 본사에 있을 때 일을 떠올렸다. 시작은 역시 최훈열 전무와의 관계 때문이다.
그게 문제가 되면서 권재홍 비서실장에게도 찍혀 버렸다.
장승일 실장이 그나마 우산이 되어 주었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었다.
특히 자신 때문에 장승일 실장이 최문경 부회장에게 박살이 나는 모습을 보자 견딜 수가 없었다.
임권수 부장이 그런 장승일 실장을 좋아할 리가 없었다.
결국 두 사람은 알게 모르게 계속 갈등할 수밖에 없었다.
자신과는 이직 사유가 많이 달랐다.
“그래도 자신이 몸담았던 회사도 생각을 해줘야 하지 않습니까.”
“아, 알아. 그래서 대림 전자 이용해서 다른 수작을 부릴 생각은 없어. 자꾸 앞서갈 생각은 마!”
입술을 깨문 황광수 차장은 임권수 부장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이찬형 부사장이 건물 입구까지 나와서 두 사람을 환대했다. 그도 자존심이 있었지만 오성 전자 기획 팀 앞에서는 속을 드러내지 않았다.
최민혁 실장을 대할 때와는 천양지차였다.
손동권 사장 역시 크게 다르지 않았다.
“굳이 이렇게 찾아오실 필요 없었습니다. 제가 좋은 장소로…….”
심란한 임권수 부장은 손동권 사장의 입을 막은 후에 고압 변성기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신형 고압 변성기 제안서를 잘 받아보았습니다. 샘플도 만족스럽던데, 연구소 쪽에서 원하는 몇 가지 작업을 진행했으면 합니다.”
발주 물량만 무려 10만 대가 넘는 거래였다.
손동권 사장도 영업 팀을 통해서 제안한 거래가 성공적으로 될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오성 전자 기획 팀의 실세가 나타나자 오히려 당황했다.
당시만 해도 KM 전자를 여전히 얕보았기에 KM 고압 변성기를 살짝 바꾸어서 공급할까 고민했었던 것이다.
‘최 실장 그 새끼가 이런 사실을 사전에 알았던 것일까?’
자신이 봤던 특허 문건에 대한 분석 자료를 떠올린 그는 한숨을 내쉬었다.
“지난주에 예상치 못한 문제가 생겨서 당장은 고압 변성기를 납품하기 힘들 것 같습니다.”
“무슨 소리를 하시는 겁니까. 우리 연구 팀에서 이미 괜찮다고 확인이 끝났어요.”
당황한 손동권 사장을 대신해서 이찬형 부사장이 나섰다.
“하하하, 너무 그렇게 서두를 필요가 있겠습니까. 내부적으로 좀 더 검토를 거쳐야 합니다. 혹시라도 안정성에 문제가 생기면 곤란하지 않겠습니까. 특히 보상 문제를 신경 쓰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어차피 고압 변성기 때문에 이 자리까지 온 것이 아닌 임권수 부장은 슬쩍 미소 지었다.
“이거 오히려 더 큰 신뢰가 생깁니다. 그렇다면 계속 기다리겠습니다. 다만 그렇다고 해도 샘플과 관련 자료를 좀 더 받을 수는 있겠죠?”
“네?”
“연구 팀 담당자 말로는 관련 자료에 대한 것은 빠져 있다고 확인했습니다. 내부적으로 어떻게 동작하는지 저희도 확인이 필요합니다.”
납품만 받으면 되지, 그 내부 관련 자료까지 요구하는 행동은 이미 선을 넘은 것이다.
하지만 힘없는 중견 업체는 감히 오성 전자 기획 팀의 요구를 거절하기 어려웠다. 더욱이 제품 단가가 높아서 이렇게 기획 팀이 따로 확인하는 경우는 더 말할 것도 없었다.
손동권 사장은 내심 욕설하면서도 몇 가지 자료를 떠올렸다. 그 자료는 이미 KM 전자에서 다 특허로 출원하면서 공개가 된 것이라 문제가 될 것은 없었다.
다만 굳이 그런 점까지 언급하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그는 즉시 이찬형 부사장에게 지시를 내렸다. 이찬형 부사장은 곧바로 담당 엔지니어에게 자료와 샘플 10여 개를 받아서 그들에게 내밀었다.
“잘 아시겠지만, 회사 내부적으로 보안이 꼭 필요한 물건입니다.”
“물론입니다.”
임권수 부장은 슬쩍 별일 아닌 것처럼 한마디 했다.
“이 고압 변성기에 관심을 둔 업체가 LC 전자, 대운 전자, 그리고 KM 전자라고 했죠?”
“물론입니다. 다들 신제품 개발에 직접 적용했고, 성과도 나쁘지 않습니다.”
“알겠습니다.”
둘은 서로 꽤 만족한 얼굴로 악수했다.
당장은 KM 전자의 특허권 때문에 납품할 수는 없었지만, 이번 KM 전자와의 협상 때문에 적절한 특허료만 주면 되기에 흥분을 감추기 어려웠다.
“아쉽네.”
특허 로열티를 고민하던 이찬형 부사장 역시 혀를 찼다.
“설마 고압 변성기에 저렇게 관심을 보일지는 몰랐습니다.”
KM 고압 변성기 제조만큼은 대림 전자가 독보적인 기술을 가지고 있었다. 다만 새로운 고압 변성기에 대한 원천기술은 없었다.
최구만 과장이 콜린스 모델에 들어갈 고압 변성기 개발을 대림 전자 쪽과 같이 진행하면서 이 KM 고압 변성기에 대해서 알게 된 것이다.
KM 전자가 대림 전자와의 관계를 쉽게 단절하지 못했는데, 다른 업체 통해서 진행한 개발 결과는 그다지 좋지가 않았던 것이다.
당시 KM 전자의 요청에 손해를 감수한 채 그 제안을 들어준 것은 손동권 사장이 KM 고압 변성기 가치를 알아봤기 때문이었다.
“내가 그랬잖아. 그거 진짜 돈이 된다고.”
성격이 다혈질로 불만이 많은 이찬형 부사장도 새삼 손동권 사장의 안목에 새삼 감탄했다.
“샘플 제작할 때 손을 썼다면 기회가 있었을 텐데, 너무 아쉽습니다.”
“어쩔 수 없지. 최민혁 실장 그놈만 아니어도 다른 대안이 있었을 텐데…….”
“시기적으로 묘합니다. 설마 최 실장이 오성 전자의 움직임까지 안 것도 아닐 테고…….”
“그거야 모르지. 의도적으로 미끼를 던져 놓고, 나중에 뒤통수칠 수도 있으니까.”
“설마 최 실장이 그렇게까지 할까요?”
“사람 속은 알 수가 없어.”
손동권 사장은 최민혁과의 협상을 다시 한번 떠올리면서 인상을 찡그렸다.
이찬형 부사장은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갑자기 저러는 이유가 이상합니다. 고압 변성기 단가가 만만치 않지만 그렇다고 두 사람이 직접 와서 확인할 일은 아니지 않습니까.”
“뭔가 노림수가 있겠지만, 우리가 굳이 그런 것까지 고민할 필요는 없잖아. 어차피 KM 전자 측에는 통보를 해줘야 하니까.”
“알겠습니다.”
둘 다 이번에 협상안을 다시 한번 떠올리면서 입맛을 다셨다. 이전처럼 다른 꼼수를 부리고 싶어도 그 보상 강도가 너무 셌기 때문이다.
‘젠장.’
* * *
김명준 과장은 최문경 부회장 때문에 KM 전자 본사와 공장을 지켜보는 이들을 꽤 보냈다. 심지어 KM 그룹 본사에도 사람을 배치했다. 사람이 부족한 경우에는 흥신소까지 동원했다.
이들이 대림 전자에서 오성 전자 직원의 모습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심지어 겁을 집어먹은 대림 전자는 그 안건을 KM 전자에도 통보했다.
최민혁도 콜린스 모델의 시장성에 대한 보고서를 살피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오성 전자 기획실요?”
“네.”
“아니, 그놈들이 왜 거기서 얼쩡거립니까.”
“프린트에 적용 가능한 KM 고압 변성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고압 변성기가 프린트에도 사용할 수 있습니까?”
고압 변성기는 전자레인지부터 시작해서 산업용에 걸쳐서 광범위하게 사용된다.
최민혁도 솔직히 이런 분야는 처음이라서 사전에 조사한 김명준 과장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그 의미를 깨달았다.
“그건 정말 뜻밖이군요.”
“하지만 크게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이미 안현수 팀장이 이 일을 전담해서 법률적으로 문제가 될 부분은 다 골라냈습니다. 대림 전자가 알아서 정보를 제공하는 것도 다 그 때문입니다.”
사실 그 일을 밀어붙인 것은 최민혁 자신이었지만 그 자세한 기술적인 부분까지 알지는 못했다.
‘고압 변성기는 별로 알고 싶지도 않아.’
“하긴 오성 전자 쪽에 납품해도 특허료는 결국 따로 받으니, 오히려 잘되기를 빌어야 하겠군요.”
“맞습니다.”
최민혁은 기획 팀에 고압 변성기 특허료에 대한 관리를 다시 당부한 후에, 곰곰이 이 문제를 다시 한번 생각하다가 뒤늦게야 한 가지를 깨달았다.
“첫째 큰아버지 솜씨예요.”
김명준 과장도 대림 전자에 대한 오성 전자 기획실의 움직임이 평소와 다른 점을 뒤늦게 깨달았다.
“설마 부회장님이 오성 쪽에 정보를 흘렸다는 말입니까?”
“겉으로는 계열사 납품 안건을 걸고넘어졌을 겁니다. 그래야 티가 안 나니까요. 아마 우리 내부 정보는 모를 겁니다. 협력 업체 제안서를 통해서 알았을 테니까요.”
“굳이 그럴 필요가 있을까요?”
“김 과장님이 최근 본사도 그렇지만 안산 공장도 보안 설비를 강화했잖아요. 그러니 협력 업체를 이용한 거죠.”
특히 KM 공장 내부는 아예 음성인식을 비롯한 첨단 보안 장비를 설치했을 뿐 아니라 이제는 휴대폰 같은 개인 물품을 회사 안에 가지고 들어갈 수 없도록 규정을 바꿨다.
심지어 개인 가방이나 노트북 같은 장비 역시 외부로 반출할 때 일일이 다 확인했다.
“정말 기가 막히네요.”
“뭐, 예상한 일입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그런다고 해서 그쪽에서 알 수 있는 정보는 제한이 있으니까요. 다만 그렇다고 그냥 두고만 볼 수는 없죠.”
“어쩌시려고요?”
“고민 중입니다.”
최민혁도 최용욱 회장과의 약속 때문에 직접 공격할 수는 없어서 어떻게 해야 할지 선뜻 판단할 수가 없었다. 그는 결국 최근 KM 그룹과 관련된 굵직한 일을 한 번 쭉 살폈다.
그중에 가장 눈에 뜨인 것은 역시 샐로먼 브러더스와 같이 진행하는 연합 SB다.
‘샐로먼 브러더스는 98년에 Travels Group에 넘어가잖아. 후일 시티그룹과 합병되어서 완전히 사라지겠지. KM 그룹이 공중분해되면 결국 손해를 적지 않게 보게 될 거야.’
이걸 어떻게 해야 할 지 최민혁도 감이 잘 오지가 않았다.
“오 비서, 조 팀장님 좀 호출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 * *
기획 팀도 처음에는 콜린스 모델 때문에 충격을 받았지만 바쁘게 움직였다. 당장 그들이 고민해야 할 일은 부품 단가를 줄이는 일이었다.
몇 원에 불과한 저항 같은 작은 소자에도 예민하게 반응한다.
하물며 몇 만 원, 아니, 심지어 몇 십만 원짜리 부품 가격은 단순하게 결정할 수 없다.
비록 TV 안산 설계 팀에서 대부분 결정한다고 해도 십만 원이 넘어가는 부품은 그렇게 단순하게 결정이 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