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
손동권 사장은 까칠하게 굴던 최민혁 일행이 떠나고 나자 욕설을 퍼부었다.
“하, 뭐 저런 새끼가 다 있냐.”
안 그래도 한영 일보를 비롯한 각종 언론에서 툭하면 자신을 찾아와서 괴롭혔다. 이제는 KM 전자와 엮이는 것이 지긋지긋했다.
특히 정성근 대리라는 일주일에 한 번 꼴로 찾아와서 자신을 괴롭혔다. 그중에는 KM 편향 코일과 관련된 특허도 있었다.
혹시라도 그 특허를 이용해서 빼돌린 것이 있어서 일일이 다 검토했던 것이다.
“지긋지긋한 놈들이야!”
그래서 이번 일은 어떻게 해서라도 매듭지을 필요가 있었다.
협상도 하기 싫어서 최대한의 보상금을 사전에 이미 정해 놓았던 것이다.
이찬형 부사장 역시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굳이 끼어들지 않고 지켜본 것은 이번 계약이 나쁘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KM 편향 코일 계약이 진행된 것으로 만족해야죠. 20% 마진이면 나쁘지 않습니다.”
“그게 부사장이 할 소리야? 다른 대안은 없어?”
이찬형 부사장은 담당 부장을 불러 KM 편향 코일과 관련된 KM 전자의 특허 42건을 보여 주었다. 디자인마다 다 변화를 줘서 일일이 다 특허를 출원한 것이었다.
베끼는 것보다 차라리 그냥 새로 만드는 것이 훨씬 나았다.
“TV에 주로 사용되는 편향 코일과는 달리 소형 모바일 기기에도 얼마든지 적용할 수 있습니다. 특히 HP 프린트 쪽 담당자가 꽤 좋아하던 눈치였는데, 그 계약은 포기해야 할 듯합니다.”
“방법이 없어?”
“이 계약서 봤지 않습니까. 아마 베껴서 응용한 제품 만들면 바로 고소가 들어올 겁니다. 설마 10배로 물어줄 생각입니까?”
“아쉽네.”
“지금은 그렇고 KM 편향 코일을 납품하면서 슬며시 협상하면 될 것 같습니다. 아니면 제가 최 실장을 따로 만나서 부탁하겠습니다.”
KM 편향 코일이 돈이 된다는 것을 확실히 느낀 손동권 사장은 입맛을 다셨다. 굳이 39억이나 적극 손해배상을 한 것도 이 기술 때문이었다.
“도대체 이걸로 뭘 하려는 걸까?”
“사장님도 TV 신제품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뻔히 알면서 그러십니까?”
아직 탐욕을 버리지 못한 손동권 사장이 입맛을 다시고 말았다.
“하긴. 이런 코일이 들어가면 두께를 줄이거나 내부 구조를 단순화하는 데 큰 도움이 되겠어.”
“그것뿐이 아닙니다. 전원이 꽤 안정되어서 안정성이 높습니다. 외부 간섭에도 내성이 강해서 어지간한 외부 노이즈에 영향을 안 받습니다. 아마 화질 안정화에 큰 도움을 줄 겁니다.”
“오성 전자에서 욕심을 낼 만한 기술이네.”
“그럴 겁니다. 아마 그래서 특허로 미친 듯이 떡칠을 하고 있는 거고요. 지난주에 추가로 낸 특허만 해도 벌써 10건이나 됩니다.”
“미친놈들 아냐?”
“그만큼 위기감을 느끼겠죠.”
“그런데 정말 이상해. 도대체 최대 10만 대 가까운 물량이라니. 아니, TV를 얼마나 팔아치운다고 이러는 것일까?”
“글쎄요.”
그도 고개를 갸웃했다. 그만큼 최민혁 실장의 행동은 이해하기가 쉽지 않았다.
손동권 사장은 여전히 입맛을 다셨지만, 이번에는 뾰쪽한 수가 없었다. 일단 KM 전자 신제품 납기에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만 해도 이익이니까.’
그리고 이를 통해서 이번 최훈열 전무의 이슈를 덮어 버릴 수 있었다.
차라리 그게 대림 전자의 처지에서는 이익이었던 것이다.
* * *
대림 전자와의 협상은 이제 시작이었다. 고압 변성기를 비롯한 핵심 부품과 관련이 있는 업체는 전부 KM 전자와 재협상을 체결했다.
협력 업체도 적게는 10억, 많게는 45억 가까이 손해배상을 해주었지만 이제까지 본 이익을 고려하면 그다지 큰 손해는 아니었다.
심지어 추가로 계약한 주문 물량 규모가 생각보다 컸다.
서로 이익이었다.
이 덕분에 세금을 제한 순수 보상금이 무려 400억이 훌쩍 넘어갔다.
KM 전자는 STB 사업부 매각대금 900억까지 합치면 1,300억이나 되는 현금을 고스란히 벌어들였다.
최민혁이 쉬쉬하려고 노력했지만 이런 사실이 외부에 알려지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했다.
대림 전자는 아예 KM 전자에 대한 보상과 재계약을 통해서 깨끗한 회사로 거듭나겠다는 의지를 언론을 통해서 보여주었던 것이다.
[지난 불미스러운 일에 대해서는 다시 한번 KM 전자와 국민께 사과드립니다. KM 전자에는 충분한 보상을 했습니다. 오히려 이런 위기를 극복해서 KM 전자와의 관계를 더욱 강화할 예정입니다.]
언론을 통해서 이 일 처리는 자연스럽게 알려졌다.
대림 전자를 비롯한 KM 전자의 협력 업체는 그 덕분에 최훈열 전무 이슈를 보상 이슈로 극복하면서 다시 신뢰를 얻었다.
심지어 피해자인 KM 전자가 나서서 이들 업체를 공인해 주었다.
이 특이한 사건은 언론을 통해서도 몇 번이나 뉴스로 나갔다.
뉴스를 통해서 이 사실을 안 민상수 부장은 곧바로 미국에 있는 권재홍 비서실장에게 이 특이한 사실을 보고했다.
뉴욕에서 샐로먼 브러더스의 동아시아 담당 데니스 샐로먼 이사를 만나려고 준비를 하던 권재홍 비서실장은 뜬금없는 국내 소식에 신경이 잔뜩 서 있는 최문경 부회장의 눈치부터 봤다.
“데니스 이 개새끼가 지금 도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모르겠네. 아니, 갑자기 왜 KM 산업 채권을 달라는 거야?”
샐로먼 브러더스와의 기존 협상에는 KM 산업 채권은 관련이 없었다. 계열사 지분이면 충분하다고 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 채권이 바로 KM 전자였다.
그런데 지분 대다수가 최민혁에게 다 넘어가면서 이제는 상황이 바뀐 것이었다.
권재홍 비서실장이 혹시나 싶어서 장승일 실장에게 몇 번이나 연락해도 연결이 되지 않자 최민혁 실장에게 다급하게 전화를 해보았다.
대답은 아주 간단했다.
[제 눈에 흙이 들어가는 한이 있어도 그룹 담보 따위는 하지 않을 겁니다. 아니, 차입금이 필요하면 KM 산업 지분으로 하세요. 왜 아무런 관련이 없는 KM 전자를 걸고 들어갑니까? 황 비서실장은 나이가 들어서 치매라도 온 겁니까? 그 말이 되는 소리를 좀 하세요!]
살다 보니 치매 소리를 들었다.
악명이 자자하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이번에 직접 경험해 본 권재홍 비서실장도 혀를 내둘렀다.
그는 이대로 대화 내용을 말했다가는 최문경 부회장에게 맞을 거라고 생각해 빙빙 돌려서 말했다. 장승일 실장이 중간에 반대한다고 둘러댄 것이다.
“아무래도 장 실장 말이 전혀 허무맹랑한 것은 아닌 것 같습니다.”
“무슨 소리야. 설마 이 새끼들이 우리 그룹을 노린다는 말을 하는 거야?”
그는 심지어 샐로먼 브러더스 핑계를 걸고넘어졌다.
“그렇지 않고야 국내에서 그 난리가 났는데, 아무런 태도 변화가 없다는 것이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지금 몇몇 다른 투자 은행에서는 이미 저희 쪽 투자를 포기했습니다.”
“아, 엿같다.”
넥타이를 풀어서 패대기를 친 최문경 회장은 호텔 냉장고 안에 든 맥주를 꺼내서 벌컥벌컥 마셨다. 이제 좀 안정이 되는 것 같았다.
“후유, 미안. 진정을 좀 해야 하는데…….”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쉰 권재홍 비서실장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차라리 이번 기회에 일단 한 걸음 물러나는 것이 어떨까요?”
“지금 와서 포기하자고?”
“어차피 저희가 꼭 급한 것은 없지 않습니까? 꼭 서둘러서 일을 풀어갈 정도로 회사 사정이 나쁜 것도 아닙니다. 정부에서 그렇게 은행에 압력을 넣었지만 멀쩡한 것만 봐도 충분합니다.”
“그렇지. 권 실장 말이 맞아. 내가 너무 흥분한 것 같아.”
평소에도 감정 변화가 별로 없는 권재홍 비서실장은 냉큼 말했다.
“비록 저도 장 실장을 싫어하지만, 그 친구 말이 이제까지 틀린 적은 없습니다. 자존심 상하지만 지금까지 장 실장이 한 이야기를 한 번쯤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래.”
겨우 감정을 가라앉힌 최문경 부회장은 그제야 조금 전에 한국에서 받은 전화를 떠올렸다.
“무슨 일이래?”
“최훈열 전무 때문에 KM 전자와 이제까지 불법을 저지른 업체에서 보상금을 받았는데, 모두 400억이나 된다고 합니다.”
업체 갑질이라면 나름의 일가견이 있는 최문경 부회장도 최민혁의 악랄한 수법에 감탄했다.
“허, 아니 그걸 협력 업체에게서 다 뜯어냈다는 소리야? 그걸 민혁이가 했다고? 아니, 그놈이 그렇게 악독했어?”
“그게 웃기는 게, 그 400억이란 돈으로 협력업체는 저마다 빠른 성장을 했다고 합니다. 그러니 꼭 손해만 본 것은 아닙니다. 최훈열 재판 이야기만 나오면 피곤해서 타협했습니다.”
“결국 훈열이가 남 좋은 일만 했다는 소리네.”
“네.”
술수라면 세상 누구라도 지지 않을 최문경 부회장도 감탄했다. 생돈 400억을 뜯어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아는 까닭이다.
“400억이라……. 정말 능력도 좋네. 설마 그거 다 민혁이 작품이야?”
“확실합니다. 최 실장이 안산 공장으로 내려갔고, 협력 업체를 방문한 다음에 일어난 일이니까요.”
“대단한걸.”
“그러게 말입니다.”
두 사람은 한동안 침묵했다. 얼핏 간단해 보여도 생돈을 그냥 뜯길 업체는 별로 없다. 순순히 그냥 돈을 내놓을 리가 없었다.
얼마든지 대기업의 갑질이라고 언론플레이해서 막을 방법이 많았던 것이다.
“아, 재계약도 했다는 소리를 봐서는 다른 신제품을 개발한 것이 분명합니다.”
“무슨 신제품?”
“그게 아직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민상수 팀장 말로는 어제부터 공장 보안을 강화해서 내부를 아예 들여다볼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래 봐야 별거 있을까? TV 신제품 개발하는 데 얼마나 시간이 많이 걸리는지 잘 알면서 그래.”
“그건 그렇습니다. 그래서 저도 기존 제품을 업그레이드한 것이 아닌가 추론만 했습니다.”
“TV 사업부지?”
“네.”
최문경 부회장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그냥 넘겨 버릴 생각은 없었다. 최용욱 회장 경고도 고려해서 다른 대안을 더 올렸다.
“잘됐네. 그러면 오성 전자 쪽에 그 정보를 흘려 봐. 잘은 모르지만 900억에 STB 사업부를 인수한 오성 전자 분위기는 좋지 않을 테니까. 아마 그놈들이면 꽤 좋아할 거야.”
“그들이 움직일까요?”
“뭐, 상관없잖아. 그들이 해도 그만, 하지 않아도 그만이야. 둘이 싸움 붙여 놓으면 뭔가 있다면 나올 테니까.”
“…저기 그러다가 KM 전자에 타격이라도 입을 수 있습니다.”
“내 생각은 달라. 아직 어떻게 돌아가는지 상황을 모르겠지만, 너무 순탄하게 잘 풀려. 민혁이 배후에 아버지가 있을 수도 있고, 아니면 다른 놈이 있을 수도 있지. 그놈들 솜씨를 한번 보자고.”
“…알겠습니다.”
* * *
STB 사업부를 인수한 후 오성 전자 분위기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었다. 일단 매력적인 특허를 인수한 점에서는 좋았지만 다른 문제가 뒤늦게 드러났다.
오성 전기 기획실에 잠깐 있다가 이번 오성 전자 기획 3팀에 합류한 임권수 부장이 한 가지 문제를 발견한 것이었다.
“김현우 상무 말입니까? 완전히 꼴통입니다. 아니, 그런 것도 안 알아봤습니까?”
“알아보기는 했지. 그래도 비디오 관련 핵심 특허를 고안한 사람인데, 능력을 무시할 수는 없잖아?”
“저도 다른 쪽에 있을 때 보기는 했지만 김 상무가 그런 실적을 냈다는 것은 말도 안 됩니다. 그 작자는 여색을 지독히 밝혀서 제대로 업무는 안 합니다. 대주주인 최두진 사장의 서자이기 때문에 지금까지 잘 버틴 거죠. 그게 아니었다면 옛날에 쫓겨났을 겁니다. 아니, 그런 사실도 몰랐다는 말입니까?”
얼핏 생각하면 오성 전자 기획실에서 간과했다고 생각했을 수 있다. 그런데 실장 김현우 상무 프로필 중에는 그런 부분도 있었다.
비디오 특허가 너무 압도적이라서 여색을 밝히는 천재라고만 생각했다.
아니, 그만큼 최민혁의 술수가 교묘했다고 볼 수도 있었다. 애초에 비디오 특허 관련해서 아는 사람은 세 명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
너무 성급했다고 뒤늦게 판단한 권태성 실장은 굳은 얼굴을 한 채 아무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너무 빨리 KM 전자를 떠났다고 생각한 황광수 차장은 입만 빠끔거렸다.
물론 평판을 따로 조사하기는 했지만 워낙에 독보적인 실적을 내놓은 터라 그저 여색을 좋아하는 단점이 있다고만 생각했다.
문제는 최근 김현우 상무와 그의 팀에 대한 실적을 황광수 차장이 확인하게 된 것이었다.
아직 출근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어수선한 분위기 때문에 제대로 된 결과를 내놓을 수 없다고 볼 수도 있었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자신들이 알아서 뭔가 하려는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업무 중에도 온갖 이상한 짓을 하는 이들도 있었다.
마침 기획실 직원 한 명이 회의 중에 한 사람이 들어와서 자료를 내놓았다.
황광수 차장은 그 자료를 받아서 확인하다가 인상을 찡그렸다.
한숨을 쉬던 권태성 실장은 불안한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또 무슨 일인가?”
“그게… KM 전자가 협력 업체에서 보상금으로 400억을 받았다고 합니다.”
“부품 부풀리기 통해서 이득 본 것 말하는 거야? 참 많이도 받았네. 그런데 그런 일까지 굳이 신경 쓸 필요는 없잖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