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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93화 (93/1,021)

#93

“싫으면 여기서 이번 의뢰를 포기하겠습니다. 이건 계약 위반이 아닙니다. 당신이 요청한 의뢰 계약서에는 김명준 과장 같은 인물은 없었으니까.”

민상수 부장은 짜증스러웠지만 차마 내색하지는 않았다. 지시를 받을 때 이미 몇 차례 실패로 이 바닥의 최고 전문가인 박상기 소장을 콕 찍어서 진행했기 때문이다.

“그가 그렇게 위험한 인물입니까?”

“직접 경험해 보기 바랍니다.”

“…알겠습니다. 지급하죠. 하지만 결과는 분명해야 할 겁니다.”

“결과는 장담 못 합니다. 자꾸 그런 식으로 압박할 거면 없던 걸로 하세요. 알아보니, 그쪽은 이미 수차례에 걸쳐서 이 일을 진행하다가 실패한 것으로 압니다. 그런데 저희라고 해서 무슨 뾰쪽한 수가 있겠습니까?”

“…아, 좋아요.”

은근히 사람 속을 뒤집는 박상기 소장에게 화가 났지만, 지금은 방법이 없었다.

아니, 그는 차라리 잘되었다고 생각했다. 결과적으로 보면 비서실 직원이나 이미 의뢰를 몇 차례 맡겼던 다른 흥신소에 비해서 결과를 얻었기 때문이다.

‘아예 없는 것보다는 났잖아.’

* * *

민상수 부장은 박상기 흥신소 소장 때문에 짜증이 나 있었지만, 권재홍 비서실장에게서 별다른 질책을 듣지 않아 한편으로는 다행스러운 심정이었다.

“확실히 김명준 과장에 관한 조사를 제대로 하지 않았어.”

그 역시 이미 몇 차례 조사했던 터라 김명준 과장에 대한 것도 확인하기는 했다. 문제는 특임대 출신이라는 것만 확인했을 뿐이고, 그의 자세한 프로필을 조사하지 않았다.

당시에는 경호원 한 명이 무슨 영향력을 미칠까 싶어서 넘어갔다.

그런데 결과는 예상한 것과는 많이 달랐다.

민상수 부장도 평소라면 열나게 깨질 상황을 대비한 것과는 다른 반응에 오히려 박상기 소장의 능력을 더 부풀렸다.

“박 소장이 이제까지 실패한 의뢰가 거의 없다고 할 정도로 이 업계 내에서 꽤 유명합니다. 그런 이가 겁먹을 정도면 김명준 과장은 보통 사람이 아닐 겁니다.”

“그렇겠지. 그래야 말이 되지. 어째 조사를 해도 계속 중간에 막힌다고 싶었는데, 다 이것 때문이었어.”

최문경 부회장은 방심했지만 최소한 권재홍 비서실장은 알아서 계속 최민혁 실장의 주변을 검사했는데, 그 과정에서 너무 많은 실패를 경험했다.

당시에는 차입금과 최훈열 전무 문제 때문에 비서실이 발칵 뒤집혀서 미처 확인하지 못했는데, 막상 다시 들여다보고서야 이상한 점을 찾은 것이었다.

권재홍 비서실장은 김명준 과장을 따로 조사하라고 지시를 내린 후에 최민혁 실장의 동선에 대해 말했다. 비록 행적뿐이었지만 말이다.

“최 실장이 안산 공장에서 무슨 일을 했는지 알 수는 없겠나?”

“…그게 이번에 최 전무 때문에 압수수색을 당한 후에 저희 쪽과 관련된 인물도 구속되거나 회사를 퇴직했습니다.”

대체로 윗선에 라인이 있는 인물은 야심이 있는 이들이었다. 그들 역시 안산 공장 내부에 만연한 횡령 분위기를 타고 온갖 불법을 다 저질렀다.

이번 압수수색 후에 줄줄이 체포된 이들 중에는 많았다.

거기에 일부 그나마 아는 이들도 겁먹고 회사를 다 그만둬 버렸다.

“전혀 방법이 없어?”

“박 소장 말로는 시간이 좀 더 필요하다고 합니다. 김명준 과장이 안산 공장에 사는 것도 아니니까요.”

“인력을 더 추가하면 어떨까?”

이전과는 달리 민상수 부장도 부정적이었다.

“박 소장이 좀 건방지기는 하지만 실력은 확실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다른 이들은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괜히 돈만 깨지고, 오히려 시선을 끌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저것 걸리는 것이 계속 나오자 권재홍 비서실장도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지금 대림 전자로 간 것까지 확인했다고?”

“네. 그곳에서 뭘 하는지는 따로 조사해서 보고하겠다고 했습니다. 간접적인 조사는 전혀 불가능하지 않으니까요.”

“알겠네. 하지만 이번 일은 부회장님이 직접 보고를 받아. 그러니 철저하게 확인을 해야 할 거야. 필요하다면 비서 2팀 인원을 다 동원해도 좋아.”

“네.”

민상수 부장은 인천공항으로 떠나는 권재홍 비서실장의 뒷모습을 보면서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김명준 과장을 떠나서 최민혁 실장과 관련된 루머는 이미 잘 알고 있었다. 특히 최 실장과 관련된 일은 하나하나가 이해하기 힘든 일이 대부분이었다.

‘이번 일은 영 찜찜해.’

* * *

고압 변성기 주로 제조하는 대림 전자는 KM 전자 덕분에 수십 배 성장한 중견기업 중의 하나였다. 그들은 이 기술력을 토대로 DY 편향 코일 분야에도 중점을 둬서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에서도 인정받았다.

그렇게 잘 나가던 대림 전자도 이번 최훈열 전무 사건과 연루되면서 몇 사람이 검찰 조사를 받았다.

다행이라면 담당자가 초범이고, 솔직하게 자기 죄를 시인한 상황이라서 집행유예가 불가능하지 않았다.

손동권 사장 처지에서는 가장 최선의 시나리오였다.

그런데 꼭 상황이 좋게만 흘러가지 않았다.

최민혁의 지시를 받은 김명준 과장이 흘린 지라시에 흥미를 느낀 범용구 기자가 직접 회사를 찾아와서 이번 사건과 관련해서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그는 마치 하이에나처럼 최훈열 전무와 대림 전자와의 긴밀한 관계에 대해서 물고 늘어졌다.

문제는 이 부분이 아직 수사를 받지 않는 부분이라는 점이다.

그런데 몇 년 전의 일까지 다 들추어서 불법적으로 수백억의 이익을 본 것처럼 지적했다.

안 그래도 이 문제 때문에 대림 전자의 신뢰성이 바닥에 떨어졌는데, 이제는 지하로 내려갈 것을 염려한 손동권 사장은 안절부절못할 수밖에 없었다.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

음흉한 미소를 짓는 범용구 기자는 어깨를 으쓱했다.

“뭘 이런 것을 다 주시고, 감사히 받겠습니다.”

넙죽 봉투를 가볍게 확인한 후에 챙긴 범용구 기자는 시시덕거렸다.

“잘 좀 부탁합니다.”

“걱정하지 마세요. 대림 전자는 앞으로 최훈열 전무와 관련된 기사에 들어가는 일은 없을 테니까.”

“혹시라도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라도 연락을 주십시오.”

“하하하, 아닙니다. 기자 나부랭이가 아는 것이 있나요.”

범용구 기자는 그제야 자리에서 일어났지만 이번에 부사장이 된 이찬형 부사장의 분노에 가득한 시선을 어깨를 으쓱했다.

‘자식들, 장사 하루 이틀 하나?’

그는 휘파람까지 불면서 대림 전자 사장실을 나서다가 문득 우르르 몰려온 일행을 발견했다. 먹잇감을 노리는 뱀의 눈으로 그들을 살폈다.

그런데 상대가 자신을 먼저 알아봤다.

“어? 범 기자 아닙니까?”

“누구… 최 실장님?”

최민혁은 불과 몇 시간 전에 김명준 과장 통해서 흘린 정보를 이용해서 번개처럼 움직인 범용구 기자 행동에 내심 혀를 내둘렀다.

‘아니, 벌써 나타난 거야? 하여간에 돈이 된다고 하면 귀신같이 움직이네.’

굳이 그런 내심까지 밝히지 않았다.

“이런 설마 여기서 보게 되다니. 세상이 참 좁습니다.”

“…그러게요.”

그는 크게 당황했다. 이미 최민혁 실장의 행보를 거의 감시 수준으로 지켜보는 터라 최민혁이 지금 KM 전자를 꿀꺽했다는 것 정도는 알았다.

더욱이 그 수법이 얼마나 기가 막힌지 소름마저 느꼈다.

‘설마 오성 전자에 STB 사업부를 900억에 매각할지는 몰랐어.’

다른 어떤 일보다 오성 전자 일은 불가사의하기까지 했다.

불행히 오성 전자도, KM 전자의 입에 자물쇠를 채운 터라 내막을 자세히 알 수 없었다.

이번 일도 마찬가지다.

불과 몇 시간 전에 제보를 받기가 무섭게 자신이 먼저 나섰고, 재미를 봤다.

최민혁은 자신이 부추기는 했지만, 너무 지나쳐도 곤란했다.

“다 좋은데, 업체에서 뇌물 받다가 걸리면 검찰에서 그냥 있지 않을 텐데, 괜찮겠습니까?”

“네? 무, 무슨 말씀을…….”

지금처럼 업체를 협박하고 난 후가 딱 적당했다.

여기서 더 문제가 커지면 자신도 곤란해서 슬쩍 협박했다.

“빨리 사라지란 말입니다. 안 그러면 제가 검찰에 제보할지 모르니까.”

그는 실제로 휴대폰 번호를 꾹꾹 누르기 시작했다.

이미 최민혁에게 당했던 범용구 기자는 그 술수가 얼마나 치밀한지 잘 알기에 겁부터 집어먹고 허겁지겁 도망쳤다.

최민혁은 자신이 정보를 흘리기는 했지만, 그 결과에 새삼 혀를 내둘렀다.

‘쯧.’

* * *

대림 전자 손동권 사장은 다혈질적인 인물이라서 강자에게 아부를, 약자에게는 갖은 갑질을 하던 인물이다. 그는 최근 KM 전자 경영권을 완전히 쥔 최민혁 실장이 나타났다는 말에 복도까지 나서서 최민혁을 환대했다.

“오, 맙소사, 최 실장님을 이렇게 뵙다니, 영광입니다.”

과장된 그 모습에 이찬형 부사장은 인상을 잔뜩 찌푸렸지만, 굳이 뭐라고 하지는 않았다. 그 역시 손동권 사장 성격을 잘 알기 때문이다.

‘저런 게 필요하기는 하지.’

최민혁은 대림 전자 기술을 모두 쥐고 있는 이찬형 부상과 악수를 하면서도 사장실로 들어갔다. 그는 생각보다 저 자세인 손동권 사장을 보면서 일이 생각보다는 쉬울 것이라 확신했다.

‘범용구 기자가 와서 깽판을 쳤을 테니, 속이 타들어 가겠지.

최훈열 전무처럼 갖은 수단을 다 동원한 것은 아니지만 민사 소송 관련해서는 이미 몇 개월 동안 계속 작업했다.

지금 최훈열 전무 재판과 동시에 진행되는 대림 전자 재판은 사실 당사자 처벌로 끝난다.

하지만 민사 소송은 이야기가 좀 달랐다.

대림 산업이 KM 전자에 직접 피해를 줬기 때문이다.

소송에서 이기는 것은 어렵지 않았고, 중요한 것은 배상 금액이었다.

문제는 그 소송이 진행되면 최훈열 재판과 같이 엮어서 언론에서 계속 대림 전자를 공격할 것이다.

이제 한창 세계시장으로 웅비의 날개를 펼 준비를 하는 대림 전자에게는 치명적인 일이었다.

최민혁은 글로벌시장으로 나가려는 대림 산업 기술맵을 누구보다 잘 기억하기에 기묘한 미소를 한 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꿀꺽.

뻔뻔한 손동권 사장도 마른침을 삼켰고, 이찬형 부사장은 한숨을 내쉬었다. KM 전자와 싸워봐야 자신만 만신창이가 된다는 것을 잘 알았다.

아니, 이제는 지긋지긋했다.

최훈열 전무에 관한 뉴스만 나오면 대림 전자도 같이 엮여서 나오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범용구 기자 같은 쓰레기가 와서 돈을 뜯어가겠는가.

이찬형 부사장은 눈치만 보는 손동권 부사장을 보다 못해서 자신이 나섰다.

“보상금은 얼마면 됩니까?”

“호오, 시원하시네요.”

“저희가 잘못한 것은 잘 압니다. 그렇다고 그 일이 무슨 죽을죄도 아니지 않습니까. 따지고 보면 최훈열 전무 때문에 일어난 일입니다.”

“그래서 죄가 없다?”

“아닙니다. 저희가 지은 죄에 대한 보상을 해드리겠습니다. 대신에 그쪽에서 준비 중인 민사소송은 그만둬 주십시오.”

정확히는 아직 민사소송이 진행된 것이 아니라 그저 흉내만 내고 있었던 참이다. 그저 언론사가 그 뉴스를 받아서 확대 과장을 했을 뿐이었다.

최민혁은 힐끗 온갖 고가의 물건으로 가득한 손동권 사장의 집무실을 돌아보면서 혀를 내둘렀다.

‘내 사무실보다 훨씬 낫네. 돈을 많이 벌기는 벌었나 보구나.’

대림 전자가 중소기업이기는 하지만 몇몇 품목에 한해서만큼은 글로벌시장에서도 통할 정도로 품질이 우수했다.

그러니 국내시장에 안주한 KM 전자보다 오히려 더 빠르게 성장한 것이다.

손동권 사장도 최민혁의 눈빛이 차갑게 변한 것을 보자 승부수를 던졌다.

“39억 드리겠습니다.”

“좋습니다.”

최민혁도 별다른 흥정 없이 상대 제안을 받았다. 굳이 대림 전자와 같은 중견기업과 싸우고 싶지 않았다. 39억이면 보상으로 충분했다.

대신 다른 한 가지를 제안했다.

“이미 그쪽에서 편향 코일 시제품 개발을 협력한 것을 알고 있습니다. 앞으로 KM 편향 코일을 잘 납품해 주면 됩니다.”

그리고 내놓은 것은 KM 편향 코일과 납품과 관련된 계약서였다.

쾌재를 부른 손동권 사장도 내부 정보를 빼돌리거나, 특허를 침해하는 것에 대해서 10배나 되는 위약금을 확인하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이게 뭡니까?”

“다음에는 실수하지 않을 거라 믿습니다만 우리도 보험이 필요합니다. 계약서처럼 납기를 잘 지키면, 별다른 문제는 없을 겁니다. 다만 혹시라도 KM 편향 코일을 베껴서 엉뚱한 짓을 한다면 그만한 대가를 치러야 할 겁니다. 정 그걸로 뭔가 하고 싶다면 로열티를 내세요.”

“…알겠습니다.”

그도 민사소송보다는 차라리 이게 낫다고 생각했다. 계약하고 난 후에 이걸 이용해서 추락한 회사 이미지를 다시 복원할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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