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
“아무래도 저희 쪽에서 실적이 좋으면 여러 가지로 문제가 되니까요. 그러니 사사건건 시비를 걸었죠. 제대로 뭔가 할 수를 없었습니다.”
“회사가 돌아간 게 신기하네요.”
“그래도 기존 모델에 대해서는 또 제품 관리를 철저히 했습니다. 그게 참 아이러니하죠. 나름 엔지니어 자부심이 있었다고 해야 할까요?”
집착이었다.
아이러니한 점은 또 그게 통했다는 것이다.
이런 노력 때문에 품질 측면에서는 오성 전자보다 나았다.
따라서 KM 전자 TV를 좋아하는 고정 수요층이 그렇게 해서 생긴 것이다.
‘하지만 변화에는 쉽게 따라잡지 못하지. 그게 결국 몰락의 원인이니까.’
다르게 말해서 이미 퇴사한 이들 실력도 대단했다.
그런데 역시 문제가 되는 것은 사출성형기다. 외주업체에 주문해도 작업할 사출성형기는 따로 제작해야 한다.
“사실 비용이 문제입니다. 이대로 주문하면 기존 모델 대비 단가가 너무 많이 올라갑니다. 양산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이번 모델만 집중해서 몸값을 최대한 키운 후에 팔아치울 생각만 하는 최민혁은 비용 문제에 대해서는 또 다른 대안을 이미 연구했다.
‘한영 일보의 범용구 기자라면 협력업체가 불법을 저지른 것을 그냥 두고만 보지 않겠지. 한몫 단단히 잡을 기회니까.’
“900억으로도 여전히 자금이 걱정된다면 최훈열 전무랑 엮인 업체를 상대로 민사 소송을 진행할 거라고 언론에 흘리세요. 아마 최훈열 전무 재판 기사와 엮으면 꽤 먹음직해서 벌떼처럼 달려들 겁니다.”
이미 기획 팀 내부에서도 검토되었던 내용이라 고개를 끄덕였다.
“…알겠습니다.”
최민혁은 피식 웃었다.
“물론 제품 가격을 더 올리고, 품질 관리를 더 철저히 해야 할 겁니다. 단 하나의 제품 불량도 용납 안 해야 하고요.”
“알겠습니다.”
그는 한 번으로 끝내지 않았다. 설사 TV 사업부를 매각한다고 해도 KM 전자의 브랜드 가치를 키울 생각이었다.
“고객이 만족할 때까지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거기에는 제품 품질도 있습니다. 지금까지 잘해온 것 압니다.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세계 최고 브랜드란 이미지를 만드는 것이 중요합니다.”
“네.”
그들은 새삼 최민혁을 다른 눈으로 쳐다보았다. 지금까지는 그저 사내 정치에만 큰 영향을 발휘했는데, 이제는 제품에 대한 것도 체크하기 때문이다.
이런 모습은 그들이 예상한 것과는 큰 차이가 있었다.
회의실 분위기는 그 어느 때보다 밝았다. 비록 양산을 앞두고 갑자기 설계 변경이 되었지만, 막상 나온 샘플을 보자 다들 고생한 보람을 느낀 것이었다.
물론 여전히 경악한 채 아직도 이성을 차리지 못한 사람도 있었다.
* * *
조성돈 팀장도 최민혁의 능력을 잘 알았지만, 최근 콜린스 모델 신제품 개발과 관련해서는 조금씩 걱정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공장에 가서 떡하니 나온 콜린스 샘플을 보자 충격에 빠지고 말았다.
도저히 시간상으로 나올 수가 없는 물건이었다. 아니, 제품 기획안이 나오기가 무섭게 샘플이 떡하니 나왔으니, 그게 정상이면 더한 일이었다.
그는 결국 KM 본사 주차장에 도착하기가 무섭게 최민혁의 뒤로 쪼르르 달려가서 질문했다.
“실장님, 도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이미 안 팀장이 말했지 않습니까. 기존에 이미 개발했던 프로젝트가 있었다고요. 그 모델이 최 전무 때문에 드롭된 겁니다. 이번에 그 프로젝트를 다시 진행했고, 신제품에 적용해 결과가 빨리 나온 겁니다.”
그의 상식으로는 도저히 이해하기 힘든 말이었다. 오죽하면 그 말 많은 배종대 과장이 너무 허탈해서 입을 다물고 있겠는가.
“…말이 안 되지 않습니까?”
“그만큼 최 전무나 그 밑에 라인이 행패를 부린 겁니다. 일을 열심히 하는 이들 발목을 잡아서 깽판을 친 거죠. 그들이 사라지니, 자연스럽게 결과가 팍팍 나온 거죠.”
“하,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최민혁은 천천히 엘리베이터 쪽으로 이동하면서 말해주었다.
“또 이런 것도 있겠죠. 기존에 이미 만들어 놓은 것을 수정해서 기간을 단축했을 겁니다. 제가 한 것이 있다면 돈을 아끼지 않고 그들을 밀어준 것이겠죠. 그러니 결과가 안 나오면 더 이상하죠.”
“실장님은 실무진과 협의를 통해서 그걸 반영한 디자인을 고려한 것이고요?”
“설마 제 독단으로 밀어붙였겠습니까? 공장 쪽에 검토를 거친 후에 진행합니다. 그러니 결과가 저렇게 바로 나올 수밖에 없죠.”
“그렇다고 해도 당장 양산을 벌써 검토하는 것 같은데, 별문제가 없을까요?”
“아마 괜찮을 겁니다.”
그는 이제까지 몇 달 동안 어느 정도 양산 신뢰성 테스트를 끝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비록 외형이 바뀌면서 새로 다시 테스트를 진행해야 하지만 이번에는 그렇게 크게 일정이 늘어질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짧으면 한 달, 길면 두 달 정도겠지.’
최민혁은 그보다 다른 점을 지적했다.
“이제 본격적으로 움직이셔야죠. 관련 팀을 불러 현실적인 콜린스 문제를 하나씩 점검해 보세요. 해야 할 일이 많을 겁니다.”
“…알겠습니다.”
의혹만 가득했던 두 사람의 눈빛도 뒤늦게 의욕으로 불타올랐다.
이제까지 암울하기만 했던 KM 전자의 분위기에 큰 변화가 생긴 것을 뒤늦게 깨달은 것이었다.
‘콜린스라면… 유럽이나 미국 시장도 노려볼 만해!’
* * *
조성돈 팀장에게 설명을 들은 기획 팀은 당연히 뒤집혔다.
배종대 과장은 이제 겨우 흥분을 가라앉힌 채 침을 튀겨가면서 콜린스 이야기를 풀어놓았다.
정성근 대리는 이미 어느 정도 알고 있었지만, 디자인이 바뀌었다는 말에 슬쩍 질문했다.
“혹시 사진 찍은 거 없습니까?”
“있지.”
콜린스 사진은 여러 각도에서 찍혀서 비록 실물보다는 못하다고 해도 그 유려한 외형을 잘 보여주었다.
이 사진을 본 기획 팀은 다들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아니, 이게 뭡니까? 이제 제품 기획안이 나온 것 아닙니까? 어떻게 샘플이 벌써 나옵니까?”
“나도 몰라.”
그건 조성돈 팀장도 답해줄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는 어느새 안선종 팀장에게 전화해서 자초지종을 묻고 있었다.
하지만 그도 최민혁에 따로 보안 지시를 받아서 자세한 설명을 해주지 않았다.
[조 팀장님 마음은 압니다. 너무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기존에 개발했던 모델을 잘 적용해서 일정을 단축했을 뿐입니다.]
[제가 대형 TV에 대해서 전혀 모르는 바보로 아는 겁니까?]
[제가 해줄 수 있는 말은 여기까지입니다.]
안선종 팀장이 예민하게 나온 것은 최민혁의 지시도 있지만, 연구 예산 일부를 전용한 것 때문인데, 이게 엄밀히 말해서 횡령이기 때문이다.
그 역시 뒤늦게 공장 임직원이 구속되는 것을 계속 지켜보면서 좀 더 이 부분에 대해서 냉정하게 처신한 것이었다.
기획 팀에서 콜린스 관련 예산을 따로 편성해서 적용하면 그런 문제는 다 사라진다.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일이지만 일반인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아직 경영 승계 싸움이 완전히 끝난 것도 아니잖아. 최 부회장이 KM 전자를 노린다는 소문은 이미 자자하니까.’
* * *
민상수는 KM 그룹 비서실 2팀 팀장으로 KM 전자를 비롯한 계열사를 주로 관리했는데, 이전과는 전혀 다른 기조실 태도에 치를 떨었다.
“이 새끼들이 정말 같은 회사 직원 맞아? 아니, 툭하면 장 실장님 허락을 구해야 한다니,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야?”
주로 올해 들어와서 KM 전자 내부 자료를 요구했는데, 기조실에서는 예민할 정도로 보안에 철저했던 것이었다.
그는 결국 본사 근처의 한 커피숍에서 서울 흥신소 소장 박상기를 만났다. 외형적으로만 보면 이제 30대 후반 나이에 마른 체형이다.
특수 부대 출신으로 경찰 경력만 10년이 넘어서 다부진 느낌을 준다.
평소에도 흥신소 소장답지 않게 당당한 그였지만, 오늘은 이전과는 사뭇 달랐다.
“의뢰금을 좀 더 주셔야겠습니다.”
“무슨 소리입니까?”
그는 김명준 과장 사진을 앞으로 내밀었는데, 그 밑에는 프로필도 첨부되어 있었다. 주로 한국 특임대 출신에 대한 것 위주로 언급되었을 뿐이지, 다른 것은 별로 없었다.
민상수 부장은 영문을 몰라서 고개를 갸웃했다.
“아니, 고작 이걸로 비용을 더 달라는 겁니까? 제가 무슨 납치를 하라든지, 아니면 폭력을 사용하라고 했습니까? 고작 감시만 하라고 했지 않습니까.”
“그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아니, 그러면 세상에 쉬운 일이 어디 있다고 이러는 겁니까?”
고객의 압박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박상기 소장은 냉정하게 말했다.
“제 인맥 중에 특임대 나온 친구도 있습니다. 그쪽 통해서 알아본 바로는 김명준 과장에 대해서 아는 이가 아무도 없었습니다. 심지어 같은 군대 기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게 무슨 문제라도 됩니까?”
“후유, 군대를 갔다 오신 분이 그런 말씀을 하면 어떻게 합니까. 다른 것은 몰라도 최소한 자기 기수끼리는 어느 정도 소통합니다. 심지어 그 밑에 기수도 알음알음 압니다. 그런데 그런 라인이 없다는 것은 한 가지를 의미합니다.”
“뭘 의미한다는 거죠?”
“특임대 내에서도 특수한 임무를 수행한 프로페셔널이겠죠.”
안 그래도 최근 기조실과의 갈등 때문에 짜증이 난 민상수 부장은 버럭 화를 냈다.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합니까?”
“뭐 싫으면 여기까지 합시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난 박상기 소장은 몸을 바로 돌려버렸다.
민상수 부장은 아차 싶었는지 박상기 소장의 손을 잡아서 다시 자리에 앉혔다. 그는 그제야 뭔가 좀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긴 비서실 직원의 감시를 귀신같이 확인했어. 심지어 그 내용을 장 실장에게 보고한 것도 가볍게 생각할 일은 아니지.’
“…제가 특임대 내부를 잘 모릅니다. 그게 그렇게 문제가 됩니까?”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치들은 다양한 실전을 경험한 살인 기계니까요. 그런데 그런 이들 중에서 비밀리에 다루어지는 인물이니, 더 설명할 것도 없죠. 오죽하면 저희 애들 추적이 바로 들통나서 아예 대놓고 추적했겠습니까?”
“아니, 그러면 그쪽에서 감시한다는 것을 안다는 말입니까?”
“전직 기자 출신이 몰래 추적한 겁니다. 설사 걸린다고 해도 기자라고 신분을 밝히면 손을 쓸 수가 없어요.”
“기자라…….”
“무슨 수를 사용해도 김명준 과장의 시선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차라리 당당하게 대놓고 감시한 거죠. 기자라고 하면 귀찮아서라도 손을 안 대니까요. 그쪽에서 원한 것 아닙니까?”
“그건 좀…….”
“어차피 그쪽에서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라면서요. 저희가 그쪽이랑 관련이 없으면 상관이 없죠. 저만 아는 사실을 누가 알겠습니까?”
“뭐 그렇기는 하지만 확인해 볼 수도 있는데, 그건 생각하지 않은 겁니까?”
박상기 소장은 자신이 운영하고 있는 작은 언론사 신분증을 보여주었다. 작은 언론사는 사실 돈도 안 되었지만, 운영을 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 흥신소 일 때문이었다.
그래서 KM 그룹 같은 곳에서도 박상기 소장에게 의뢰하는 것이다.
“완전히 가짜는 아닙니다.”
“하.”
그는 당당한 박상기 소장을 일별한 후에 그가 조사한 최민혁의 동선에 대한 것을 하나하나 살폈다.
“다 좋은데… 여기 KM 전자 안산 공장으로 갔다고 되어 있는데, 그 안에서 뭘 하고 있는지에 관한 내용은 왜 없는 겁니까?”
“공장 안까지 들어가는 것은 위험하니까요.”
“설마 김명준 과장에게 몽땅 당하기라도 한다는 말입니까?”
“아마 그 이상일 겁니다. 그리고 이번 의뢰는 감시가 목적이지, 납치는 아닙니다. 아, 그리고 미리 말하는 것이지만 그 이상 의뢰는 안 합니다. 리스크가 너무 큽니다.”
“도대체 이해를 못 하겠습니다.”
“정 궁금하면 그쪽에서 김명준 과장의 프로필을 조사해보세요. 그러면 어느 선 이상에서는 더 이상 조사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될 테니까.”
“설마 아직도 군과 무슨 관련이 있다는 말입니까?”
“저도 자세한 것은 모르지만, 따로 관리하는 이가 있는 것 같습니다.”
“아니, 수십 년 전에 퇴임해서 이제 경호원 하는 인물을 군에서 따로 감시한다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입니까?”
“진짜 전문가라면 안 될 일도 없죠.”
박상기 소장은 의외로 이 일을 내켜 하지 않았다. 그는 굳이 의뢰 건도 많은데, 문제 소지가 있는 일은 정리하고 싶었다.
“…….”
그는 자신이 사전에 조사한 최민혁의 주변 인물 중에 김명준 과장과 관련된 구체적인 자료 내용을 하나하나 떠올렸다.
‘확실히 이상한 구석이 많았어. 아니, 인사 팀에서 왜 그런 인물을 따로 조사하지 않은 것일까?’
정확히는 최병문 상무의 부탁을 받은 최용욱 회장이 김명준 과장의 과거를 덮어버렸다.
김명준 과장은 문제를 만들지 않는 타입이라서 조용히 넘어갔다. 아마 지금처럼 문제가 되지 않았다면 김명준 과장의 과거 이력을 가지고 트집을 잡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최민혁 실장에 대해서 철저하게 파면서 자연스럽게 김명준 과장의 정체성이 드러난 것에 불과했다.
“좋습니다. 의뢰금을 얼마나 올려 달라는 말입니까?”
“다섯 배.”
“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