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
결정을 내린 최민혁은 조성돈 팀장을 따로 불러서 콜린스의 시장성 문제를 가지고 협의했다.
역시 조성돈 팀장은 지난 일을 제법 잘 기억하고 있었다.
“안선종 팀장 이야기가 맞습니다. 그 당시에는 고급형은 아예 배제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대형 TV 수요가 상당합니다. 오성 전자가 굳이 대형 TV 시장을 공략하려는 이유이니까요.”
콜린스 모델은 몇 년 전에는 시장성 때문에 어려웠겠지만, 지금은 아니었다. 오성 전자를 비롯한 한국 가전 업체는 전부 다 대형 TV 시장에 진출하려고 할 정도로 뜨거웠던 것이었다.
‘일단 오성 전자가 정신 번쩍 들 정도로 엿을 먹이는 것이 좋겠어.’
“그러면 이 기회에 신형 TV를 개발하는 것은 어떨까요?”
“신형 TV 말입니까? 이미 기존 모델을 업그레이드한 CK-3803AP 모델이 하반기에 곧 출시될 겁니다.”
“아뇨. 그런 모델 말고, 아예 새로운 모델을 말하는 겁니다.”
최근 STB 사업부를 매각한 후 새로운 성장 엔진 때문에 골머리를 앓고 있는 조성돈 팀장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실장님, 의욕은 잘 알겠지만 지금 상황이 그렇게 좋은 편이 아닙니다. 신제품 개발 하나 하는 것이 간단하지가 않습니다.”
“몇 년씩 걸려서 신제품을 개발할 생각은 없습니다. 짧으면 3개월, 늦어도 5개월 안에는 새로운 차세대 모델을 내놓을 겁니다.”
“…….”
조성돈 팀장은 기가 막힌 나머지 아무런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대운 전자의 최근 모델만 해도 무려 3년에 걸쳐서 100억 가까운 자금을 퍼부어서 만들었다. 그런데도 문제가 많다고 말이 많았다.
하물며 엔지니어 숫자도 대운 전자에 비할 바가 아닌 KM 전자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조성돈 팀장도 현실적인 문제를 가지고 최민혁을 설득하려니, 맥이 다 빠졌다.
아마 최훈열 전무가 이런 소리를 했다면 조성돈 팀장은 아예 비웃고 말았겠지만 비범하다 못해서 신비스럽기까지 한 최민혁 앞에서는 그럴 수가 없었다.
“…진담입니까?”
최민혁도 자신의 말을 모르지 않았다.
“하하하, 믿지 않으시는군요. 이걸 토대로 해서 일단 개발 보고서를 올리세요.”
그가 내놓은 서류는 안선종 팀장의 조언을 받아서 수정한 아이디어 콘셉트 형태였다. 기존 대형 TV의 문제점을 획기적으로 개선해서 두께를 대폭 줄인 평면 모델이었다.
디자인은 마치 차량처럼 곡선형으로 멋지게 빠졌고, 심지어 그 외형이 알루미늄을 채용해서 일반적인 TV와는 격이 달랐다.
비록 전자총 때문에 뒤가 툭 튀어나오는 것은 어쩔 수가 없지만, 최소한 측면에서 비스듬하게 봤을 때는 보이지 않게 되어 있었다.
정면과 측면만 놓고 본다면 집안 분위기마저 바꿀 정도로 고급스러운 이미지였다.
더 황당한 것은 디자인이 진짜 디자인이라는 점이었다.
“…….”
보기엔 정말 환상적인 모델이지만, 조성돈 팀장은 딱 보는 것만으로 현실적으로 이게 얼마나 개발하기 힘든 것인지 알았기에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단호하게 일축했다.
“이건 좀 어렵습니다.”
“그렇게 비관적입니까?”
“일단 개발이 될지는 불확실하고, 설사 된다고 해도 양산까지 최소 3년은 족히 걸릴 겁니다.”
그리고 한마디 더.
“아마 그때 가서는 오성 전자가 대형 TV를 막 찍어내기 시작할 텐데, 최악엔 회사를 말아먹을 겁니다.”
하지만 비관적인 대답에도 최민혁은 단호했다.
“일단 이 개요를 토대로 해서 살을 한번 붙여보세요. 혹시 압니까? 우리 TV 사업부의 경험 많은 분들이 기존 노하우를 최대한 활용해서 초단기에 개발할지 말입니다.”
말도 안 되는 최민혁 주장에 조성돈 부장도 은근히 화를 냈다.
“아무리 우리 회사 엔지니어가 이쪽에 경험이 많다고 해도 이런 형태 디자인 TV를 단기간에 개발할 수는 없습니다!”
극적인 반응에도 최민혁은 오히려 턱을 쓰다듬으면서 느긋하게 말했다.
“그렇게 어려울까요?”
“네, 말도 안 됩니다. 아니, 운이 좋아서 설사 된다고 해도 최소 400만 원이 넘는 이 비싼 TV가 팔리지 않을 겁니다.”
“부품을 전부 다 우리 쪽에서 개발한다면 단가가 많이 떨어져서 400만 원 안쪽으로 맞출 수 있습니다.”
“그렇겠죠. 하지만 그 기간은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TV 안에 들어가는 부품 하나하나에 경험이 많이 필요합니다.”
“우리 회사에서 이미 구축해 놓은 노하우가 있지 않습니까. 그걸 믿어보죠.”
“하.”
조성돈 팀장도 질린 얼굴로 최민혁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도대체 최민혁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최민혁도 자세한 내막을 굳이 말해주지는 않았다.
“일단 해보세요. 해보고 나서, 그때 가서 다시 결정합시다.”
단호한 최민혁.
단 한 치의 물러섬을 보이지 않았다.
조성돈 팀장은 결국 최민혁을 설득하기 시작했다.
“실장님이 지금 실적 때문에 다급한 모습을 보이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안 되는 것은 안 됩니다. 최훈열 전무조차 이런 황당한 일을 벌이지는 않았습니다.”
최민혁도 피식 웃었다.
“일단 해보고 나서 안 된다면 그때 포기하기로 하죠. 무조건 안 된다고 하면 정말 회사 미래는 암울한 겁니다.”
“…알겠습니다.”
그는 착잡한 얼굴을 한 채 힐끗 최민혁 제안서를 살펴보았다. 일단 지시를 받은 처지에 결과를 내놓기는 해야 하는데, 도저히 자신이 없었다.
그렇다고 최민혁 주장처럼 해보지도 않고 안 된다고 말하기도 곤란했다.
‘일단 해보는 데까지 해볼 수밖에 없겠어.’
최민혁은 그런 모습이 마음이 들었다. 아는 만큼 보인다고, 저 제품 개발이 얼마나 어려운지 잘 알고 있는데 저런 태도를 보이니까.
‘알아서 대안을 잘 모색하겠지. 걱정되는 것은 콜린스의 예상 판매 매출이니까. 특히 유럽이나 미국 쪽이 가장 중요해.’
사실 최민혁도 솔직히 얼마나 제품이 팔려 나갈지는 예상 못 했다. KM 전자 TV는 국내에서는 나름의 명성이 있지만 해외는 아니었다. 그래도 지금까지 나름 좋은 제품 인지도를 쌓아왔으니, 그것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할아버지도 기업 체질 개선을 위해서 꾸준하게 투자를 해왔을 거야. 맨땅에 삽질하는 것은 아니니까. 어느 정도 성과는 나와. 그 정도면 충분하지.’
* * *
조성돈 팀장은 우선 기획 팀을 전원 호출해서 이 새로운 기획안을 검토했다.
아니나 다를까, 어지간한 일에 부정하지 않는 박상기 차장이 반대했다.
“이게 정말 될 거라 생각하십니까?”
예상한 반대라서 조성돈 팀장도 딱히 반박하지도 않았다.
“아뇨. 그런데 최 실장님의 지시사항입니다.”
아마 최민혁이 처음 출근했을 때라면 기획 팀도 노골적인 불만을 토로하고, 오히려 보이콧을 외쳤을 것이다.
그런데 이미 최민혁 실장의 귀신이 곡할 놀라운 모습을 본 기획 팀은 마냥 안 된다고 부정하지는 않았다.
특히 배종대 과장은 오히려 혀를 내둘렀다.
“전 다른 것을 떠나서, 이런 제품이 있다면 한 400만 원 안팎이라면 사보고 싶어요.”
이영란 대리 역시 다르지 않았다.
“집에 저런 멋진 TV 놔놓으면, 거실 분위기도 한결 달라질 것 같아요.”
정영일 사원만큼은 다른 의견을 내놓았다.
“저도 잘은 모르지만 단가가 엄청나게 올라가서 가격이 만만치 않을 텐데, 저게 정말 팔릴까요?”
정성근 대리가 일축했다.
“저런 제품이 있다면 난 사들이고 싶어. 어설픈 저가 TV보다는 저렇게 확실히 제품이 오히려 신뢰성이 더 좋잖아.”
다양한 의견이 나왔지만 역시 의견은 반반이었다.
아니 괜찮을 거라는 의견이 좀 우세했다.
조성돈 팀장도 확실히 몇 년 전과는 분위기가 바뀌었다는 것을 느꼈다.
‘하긴 내년에 OECD 가입한다는 소리가 있잖아. 결국, 이미 OECD 국가 시민이라면 이런 TV를 충분히 살 수도 있다는 소리인가?’
“다 좋은데, 문제는 역시 현실성이야. 이 콜린스 제품을 개발하려면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알 수가 없어.”
“확실히 그러네요. 저도 그냥 개발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개발 시작하면 언제 프로젝트가 완성될지 걱정되네요.”
그도 어느 정도 팀원에게 방향을 정해주었다고 생각하자 다음 지시로 넘어갔다.
“흠, 그러면 일단 각 담당을 나누어줄 테니, 각자 검토해서 이번 주말까지 보고를 올려. 필요하다면 공장이나 연구소 쪽에도 알아봐.”
“알겠습니다.”
* * *
조성돈 팀장은 어느 정도 기획안 형태가 나오자 박상기 차장과 같이 김부영 영업팀장을 만나서 이 새로운 제품에 대해서 협의했다.
단가 때문에 질색할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김부영 영업 팀장은 크게 반발하지 않았다.
“얼마 전에 미국이나 유럽 쪽 구매자를 만났는데, 뜻밖에 이런 제품을 많이 찾았습니다. 만약 오성 전자가 이런 제품을 내놓았다면 대박 쳤을 겁니다. 그런데 과연 우리 인지도로는 잘 될지 모르겠습니다.”
“가능성은 있다는 말이군요.”
“대형 TV에 대한 유럽이나 미국 소비자의 반응이 나쁘지 않아요. 오성 전자가 독이 오른 독사처럼 우리를 노리는 것도 다 그런 이유 때문이죠. 다만 제가 알기로 이 정도 모델을 개발하는 것이 쉽지 않을 텐데, 가능하겠습니까?”
“무슨 말씀입니까?”
“이것저것 기술적인 한계가 많은 것으로 압니다. 제품 개발하다가 실패한 업체도 많고요. LC 전자도 이런 프로젝트를 몇 개 진행하다가 다 말아먹었습니다.”
사실 LC 전자만이 아니라 대운 전자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처음에는 다들 새로운 도전이라고 달려들었다가 투자비만 다 날려 먹고 말았다.
조성돈 팀장은 이미 예상한 일이라서 매우 놀라지 않았다.
“최 실장님이 장담하신 일이니, 아마 될 겁니다.”
“실장님이 직접 말입니까?”
“네.”
김부영 영업팀장도 이 제품의 품질이 정말 좋을까 의구심이 떠올랐지만 차마 최민혁 실장이 진행한다는 일을 반대할 수는 없었다.
그는 의외로 긍정적인 미래를 말해주었다.
“이런 대형 TV 수출 시장 규모도 계속 늘어나서 내년에는 30억 달러가 넘을 것을 감안하면 가능성이 없지는 않습니다. 다만 당장 부담스러운 점은 오성 전자뿐만 아니라 솔직히 엄두가 안 나는 소니와 파나소닉과 같은 일본 가전 대기업을 넘어서야 한다는 전제가 붙습니다.”
“어쩔 수 없죠.”
사실 조성돈 팀장도 오성 전자만 걱정했는데, 막상 소니 이야기를 듣자 힘이 잘 나지 않았다. 새삼 최훈열 전문 때문에 잃어버린 2년의 세월이 아쉽기만 했다.
‘하긴 소니가 있었지. 으음, 이런 제품 개발이 가능만 하다면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냐. 만약 사전에 준비했다면 도전이라도 해볼 텐데…….’
* * *
“좋군요. 반대하는 팀은 없는 거죠?”
“영업 팀을 포함해서 다들 문제가 없는 제품이 있다면 못 팔 물건은 아니라고 했습니다. 다만 워낙에 브랜드 파워가 밀려서 세계 TV 시장을 장악한 소니 때문에 걱정했습니다.”
“알아요. 그래서 이 일을 해보려고 하는 겁니다. 오성 전자는 적당한 모델로 해볼 만합니다. 그런데 어설픈 제품으로는 소니와 경쟁 자체가 안 됩니다. 이 콜린스를 통해서 우리 KM 전자의 브랜드를 확립하고 싶으니까요.”
“그거야 제품이 있다는 전제가 아닙니까. 다들 걱정하는 것은 이런 제품 개발에는 부정적이었습니다. 사실 시간이 걸려도 나오기만 한다면 찬성할 정도였으니까요.”
최민혁 눈빛이 강하게 반짝였다.
“우리 TV 연구소 실력을 믿어봅시다. 그들이라면 할 수 있습니다.”
“…네.”
그는 도대체 무슨 근거로 최민혁이 저런 자신감을 보이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TV 사업부가 무슨 만능의 연구소라도 어려울 것 같았다. 그렇다고 이미 STB 사업부를 900억에 매각할 놀라운 최민혁의 수완을 무시하지는 않았다.
아직도 이런저런 별별 소리가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900억에 팔아치웠기 때문이다.
‘하긴 대단한 분이지. 그런데 이번 일은 사업부 매각과는 차원이 달라. 신제품 개발인데, 너무 의욕이 과한 것이 아닐까.’
* * *
최민혁은 사업 타당성 검토를 끝내자 STB 사업부 매각에 침울한 오영근 사장 사장실을 찾아가서 앞으로 일에 대해서 말했다.
“괜찮습니까?”
오영근 사장 안색은 좋지가 않았다.
“최 실장이 그런 말을 하면 안 되지. 이제 회장님 지분까지 챙겼으니, 나를 자를 셈인가?”
“하하하, 말도 안 됩니다.”
그는 쾌활하게 웃으면서 오영근 사장을 다독거려 주었다.
다행히 오영근 사장도 최민혁 성격을 잘 알아서인지 크게 반감을 드러내지 않았다.
“앞으로가 걱정이야. 자네 능력이 좋아서 900억을 챙긴 것은 좋아. 그런데 돈이 있다고 해서 회사 이익이 나는 것은 아니잖아.”
“지금부터는 돈이 아니라 우리 연구 팀 노하우로 돈을 벌 겁니다.”
그제야 오영근 사장도 최민혁을 다시 쳐다보았다. 이미 최민혁이 일사천리로 진행한 일이 그냥 일어났다고 보지는 않기 때문이다.
“무엇부터 할 생각인가?”
“신제품 개발이 우선이겠죠.”
“최 실장, 이런 말 하기는 그렇지만 우리에게 시간이 그렇게 많지 않아. 몇 년씩 신제품 개발할 여유가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