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
“그리고 초기 생산 물량을 늘리면 어느 정도 가격을 더 낮출 수도 있습니다. 요는 그만큼 팔려야 하니, 디자인이 더 중요하죠. 이 디자인을 가지고 가서 다듬어주세요. 중요한 일이니, 최선을 다해주시기 바랍니다.”
“…네.”
강선주 부장은 의문은 많았지만, 굳이 묻지는 않았다. 디자인 팀 부장답게 디자인만 잘하면 되니까. 그리고 기술적인 문제에 대해서 최민혁이 모른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이걸 그냥 갑자기 내놓을 리가 없을 테니까.’
물론 최민혁은 한 가지 점을 강조했다.
“보안에 신경을 써주세요. 필요하다면 최소한 인원으로 작업해 주시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디자인 특허 출원까지 해야 합니다. 이 모델로 출원하되, 방어 특허를 위해서 가능한 모든 디자인을 더 추가하세요. 법무 팀과는 따로 상의하시고요.”
“알겠습니다.”
그녀도 오너의 말을 가볍게 듣지 않았다. 저렇게 구체적인 지시를 내렸다는 의미를 이것을 제품화하겠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다만 한 가지 의문을 떨칠 수가 없었다.
‘도대체 이걸 누가 고안한 것일까?’
* * *
강선주 부장은 퇴근 이후에도 최민혁 실장에게 얻은 지시를 말하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이 오른팔인 박정혜 과장만 남자, 넌지시 스케치를 보여주었다.
“이게 뭐죠?”
박정혜 과장 역시 STB 사업부가 아웃된 것 때문에 심란했는데, 이 디자인을 보자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최 실장님의 비밀 작업 지시안.”
“네? 설마 최민혁 실장님 말하는 거예요?”
“응.”
“……?”
놀란 박정혜 과장은 다시 한번 면밀히 디자인 스케치를 확인했다. 하지만 그녀도 곧 놀라운 디자인에 혀를 내둘렀다.
특히 바디와 거치대를 따로 분리해서 가벼운 느낌을 준 디자인에 감탄했다.
물론 현실적인 문제를 바로 지적했다.
“이거 밑에 거치대만 해도 비용이 만만치 않을 텐데요? 이 무게를 감당하려면 어지간한 재질로는 어림도 없을 거예요.”
“알아. 비용이 제법 들겠지만, 디자인적으로는 정말 괜찮잖아.”
“그렇다고 해도 이런 모델 개발하기가 쉽지 않아요. 이렇게 얇은 TV는 다른 회사에서 본 적이 없어요. 오성 전자가 아니라 설사 소니라고 해도 이런 모델은 없었어요.”
“그렇지. 하지만 최 실장님이 따로 다른 직원에게 알리지 말고 너랑 나 둘이만 해서 보고하라고 하잖아. 장난도 아니고, 단순한 신형 시제품 모델만은 아닌 것 같아.”
“설마 특허까지 출원하라고 했나요?”
“어, 다른 회사들이 베낄 것을 대비해서 방어 특허까지 같이 내라고 했으니까.”
“하.”
두 사람은 안 그래도 어수수한 회사 분위기 속에서 이런 지시를 받자 당황스럽기만 했다.
물론 그 일을 주도한 사람이 최민혁 실장이라는 것을 잘 알았다.
“뭐, 하라면 해야지.”
“알았어요.”
두 사람은 각자 역할 분담을 해서 스케치를 토대로 디자인 작업에 착수했다. 하지만 다른 일과는 달리 구체적인 스케치 작업 때문에 일은 생각보다 힘들지가 않았다.
최민혁이 고안한 디자인 특허는 이미 미래에 나온 제품을 기반으로 했기 때문에 디자인 구현 자체가 어렵지 않았던 것이다.
* * *
최민혁은 삼 일 만에 강선주 부장이 가져온 디자인에 방긋 미소 지었다.
“수고했습니다.”
삼 일 밤을 꼬박 새워서 다크서클이 가득한 강선주 부장은 그제야 질문했다.
“실장님, 정말 이 제품을 개발할 생각입니까?”
이미 속은 다 개발이 끝난 것을 잘 아는 최민혁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럴 생각입니다. 안 그러면 방어 디자인 특허까지 내라는 말을 안 했을 테니까요. 아, 이왕이면 본사 그룹 법무 팀의 안현수 팀장을 따로 만나서 특허 출원 작업을 같이 작업을 진행하세요. 중요한 일이니, 쓸데없이 다른 팀에 알리지 말고요.”
“알겠습니다.”
강선주 부장은 도깨비 같은 지시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최민혁을 쳐다보았다. 그녀가 경험한 바로는 지금과 같이 설계하기 힘든 디자인은 늘 드롭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최민혁은 마치 이게 확정이라도 된 것처럼 말하는 것이 신기했다.
“저기… 실장님, 제가 정말 잘 몰라서 그런데, 도대체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자세한 것은 지금 말할 수가 없습니다. 그만큼 중요한 일이라고 생각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그녀는 결국 몇 번을 망설이다가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이래서 다들 최 실장님이 하는 일에 대해서 잘 모르는 건가. 하지만 저런 디자인을 어떻게 구한 것일까? 따로 외주를 줘서는 저런 결과가 나올 리가 없을 텐데…….’
* * *
최민혁은 최종 디자인이 나오자 안산 TV 연구소의 안선종 팀장에게 자신이 작업한 메일을 보낸 후에 즉시 전화를 걸었다.
[최민혁입니다.]
[아, 실장님, 오랜만입니다. 공장에서 소식 잘 듣고 있습니다.]
[걱정해 준 덕분에 저는 잘 지내고 있습니다. 다름이 아니라 콜린스 관련해서 금형을 수정하면 시간이 오래 걸리겠습니까?]
[디자인이 바뀌었습니까?]
[네.]
[디자인 타입에 따라서 다 다릅니다.]
[제가 조금 전에 이메일을 보냈는데, 지금 확인이 가능할까요?]
[디자인을 확인한 후에 제가 다시 전화 드리겠습니다.]
* * *
안선종 팀장은 이미 KM 전자에 대해서 꽤 잘 알았는데, 벨린 투자 역시 어느 정도 안다. 이 회사에서 최두진 사장의 지분을 인수했다는 소식을 들은 그는 KM 전자 경영권이 이미 최민혁 손에 넘어갔다는 것을 확신했다.
특히 최훈열 전무의 구속에도 최민혁이 얼마나 용의주도하게 손을 쓴 것인지도 어림짐작했다.
그래서 최민혁의 간단한 지시에도 진지하게 검토를 했다.
물론 최구만 과장을 비롯한 콜린스 담당자를 직접 호출해서 확인까지 했다.
“디자인이 진짜 끝내줍니다.”
“지금 그 소리를 들으려고 자네를 부른 것이 아니야? 최 과장 자네 생각은 어때?”
“…아마 큰 문제는 없을 겁니다.”
“어? 정말?”
놀라는 것이 당연했다. 단 하나의 디자인만 바뀌어도 테스트를 새로이 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콜린스 모델을 개발한 엔지니어가 바보는 아니다. 그들 역시 이렇게 얇은 대형 TV를 개발하면서 다양한 시도를 이미 했던 것이다.
“얇은 평면 TV를 개발하면서 디자인도 고려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니 다양한 문제점을 사전에 검토해야 했는데, 이런 디자인 모형도 있습니다. 심지어 금형을 만들어서 확인까지 했으니까요.”
“어땠어?”
“약간의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문제는 그렇게 심각한 것은 아니니까요. 당장에 연구비가 부족해서 제대로 확인을 못 했을 뿐이지, 지금처럼 지원이 빵빵한 상황에서 못할 것도 없죠.”
실제로 최구만 과장이 가져온 자료는 단순히 그 혼자 검토한 것이 아니라, 원래 대형 팀이 주도적으로 한 것이었다.
단적인 예로 고온 상태에서 열확산이 잘 안 되면 표면 온도가 불균형을 이룬다. 결과적으로 변형이나 균열이 발생한다.
TV 내부적으로 온도 불균형이 일어나면 브라운관 수명과 품질에도 큰 영향을 준다. 따라서 브라운관 자체에 유리와 비슷한 성질을 가지는 산화마그네슘 분말을 이용해서 열량 제어도 한다.
금형 자체가 바뀌게 되면, 이런 특성 자체가 다 바뀐다.
문제는 생산 단가 때문에 열 특성이 좋은 것을 얼마든지 쓸 수가 없다.
안선종 팀장은 몇 남지 않은 머리카락을 가볍게 쓰다듬으면서 감탄했다.
“최 과장, 자네 정말 대단해.”
“저보다는 최병연 팀장님이 정말 놀랍죠. 얇은 TV 특성을 이용하면 얼마든지 제품 가치를 올릴 수 있다고 생각해서 이런 테스트를 같이 진행했으니까요. 당시 다섯 가지 디자인을 나눠서 다 테스트를 진행했죠.”
“그러면 그때 이런 디자인이 드롭된 것도 역시 최훈열 전무 때문이었나?”
“네. 최훈열 전무 사람이 많았습니다. 특히 신연식 과장 시선도 무시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지금 구속된 대형 1팀 팀장인 남건식 팀장에게 하루 단위로 다 보고했으니까요.”
가벼운 푸념이다.
그런데 당시 상황이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
대형 TV 팀장인 전 최병연 팀장은 TV 사업부를 먹여 살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실력자였다.
TV 사업부를 쥐고 흔들려고 한 최훈열 전무가 최병연 팀장을 좋아할 리가 없었다.
결국 둘의 갈등은 시간이 갈수록 점점 심해졌다.
최훈열 전무도 TV 사업부를 실권자인 최병연 팀장을 쉽게 다룰 수가 없어서 꽤 오랫동안 압박도 하고, 제안도 했었다.
조상도가 연구소장이 되면서 이 승부도 서서히 바뀌었다.
그가 주도적으로 나서서 자기 사람을 키우자 최병연 팀장도 그 압력에 밀렸다.
하지만 불리한 상황에서도 최병연 팀장은 전 손동권 기획실장의 손을 잡고 악착같이 최훈열 전무와 피 터지게 싸웠다.
그러나 불행히도 김현우 상무마저 최훈열 전무 편을 들면서 상황이 최병연 팀장에게 불리해졌다.
결국 손동권 기획실장이 회사를 그만두면서 상황이 극적으로 흘러갔다.
더 견디지 못한 최병연 팀장은 결국 다른 대안을 찾을 수가 없자 뜻을 같이하는 팀원과 같이 오성 전자로 이직해 버렸다.
이런 내막까지 잘 모르는 안선종 팀장은 불안하게 쳐다보았다.
“그런데 재질을 알루미늄을 이용한 형태로 만들면 문제가 되지 않을까?”
“쉽지는 않습니다. 이것도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단적인 예로 안테나 감도가 문제인데, 이것도 기구 형태를 바꾸면 됩니다. 윤 대리가 잘 아는데, 잠깐만요.”
연락받고 나타난 윤선기 대리는 간단한 설명을 듣자 자신의 수첩에서 과거 디자인한 몇 가지 안테나 모형을 보여 주었다.
실제로 시제품을 개발한 자료에는 이와 관련된 대안책이 너무도 잘 나와 있었다.
“이런 형태를 적용하면 안테나 감도는 큰 문제가 안 될 겁니다. 다만 알루미늄을 사용하게 되면 단가가 꽤 올라갈 텐데요?”
하지만 이미 최민혁의 능력에 감복한 안선종 팀장은 그를 의심하지 않았다.
“자네가 그런 걱정은 안 해도 괜찮아. 중요한 것은 된다는 말이군. 일정은 얼마나 더 늘어질까?”
“넉넉하게 하면 두 달, 빡빡하게 하면 한 달 정도면 될 겁니다. 우리 협력 업체에서 이런 디자인을 한 경험이 있어서 그걸 살짝 변경만 하면 됩니다.”
“이 디자인으로?”
“똑같지는 않지만 거의 비슷해서 큰 수정은 필요 없을 겁니다. 비용을 더 들이면 그 기간을 대폭 단축할 수도 있습니다.”
“아니, 이미 진행했다면 왜 이런 디자인으로 개발하지 않은 거야?”
“단가 때문에 연구소장님과 최훈열 전무가 결사반대하면서 양산 전에 드롭되었죠.”
정확히는 협력 업체의 부품 부풀리기와도 관련이 있었다.
당시 이 일에 관여한 업체는 최훈열 전무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
이 외에도 여러 가지 문제가 있어서 프로젝트는 무산되었다.
“양산이 쉽지 않다라…….”
“이런 형태의 디자인은 제조 공정에서 쉽게 불량이 날 겁니다. 아마 그것까지 고려하면 생산 비용은 15% 이상 더 들어갑니다.”
“공급 가격이 많이 올라가겠어.”
“네. 그런데 2년 전에는 이 대형 TV에 대한 수요도 별로 없었습니다. 지금은 그때와는 다르니, 꼭 장담하기 어렵습니다. 판매량만 늘어난다면 얼마든지 그런 손실을 메꿀 만합니다.”
“얼마든지 고객 수요가 있다?”
“네. 그리고 생산기술도 문제가 되어서 힘들었지만, 지금은 다를 겁니다.”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는 이야기네.”
“네. 그리고 어차피 이 모델은 비쌀 수밖에 없습니다. 어중간한 모델을 만들 바에는 차라리 확실한 이런 모델이 좋지 않을까요?”
“기획 팀 이야기로는 국내는 이제 막 시장 규모가 늘어나지만, 미국이나 유럽 시장은 다르죠. 특히 일본 역시 이런 고가 TV를 선호하는 사람이 많으니까요.”
“알겠네.”
안선종 팀장도 최민혁 실장의 능력을 알기 때문에 일단 지시에 따랐지만, 막상 현실적인 문제점을 파악하고서야 그 의미를 깨달았다.
이런 문제점을 대략 요약해서 최민혁에게 보냈고, 전화로도 알렸다.
* * *
최민혁도 원래는 콜린스에 손을 크게 안 대려고 했지만 구린 디자인 때문에 도저히 넘어갈 수가 없었다.
만약 양산이 어렵다면 무리하게 밀어붙일 생각은 없었다.
그런데 안선종 팀장에게서 오케이 사인을 받자 갈등했다.
‘고냐, 스톱이냐?’
미래 지식을 기반으로 한 새로운 시도였다.
환경이 달라서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는 장담하지 못했다.
그래도 소니의 그 두꺼운 모델에 비하면 혁신적인 제품이니 안 팔릴 거라 생각하지 않았다.
‘그래야 오성 전자가 미끼를 물 테니까. 그것도 비싼 가격에.’
최민혁은 오성 전자가 만약 콜린스 모델을 안다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자신을 공격하리라는 것 정도는 예상했다.
그게 자신이 원한 것이기 때문이다.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어차피 오성 전자에게 비싸게 팔아먹으려면 최대한 가격을 올릴 필요가 있었다.
즉 고만고만한 제품보다는 차라리 최고의 고가 모델로 오히려 시선을 끄는 것이 훨씬 나았다.
‘좋아. 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