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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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승일 실장 역시 KM 전자의 상황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굳이 KM 전자의 상황을 주시하는 것도 그 이유였다.
MP3 플레이어 조사를 맡긴 구길모 차장을 불렀다.
“MP3는 어때?”
“솔직히 잘 모르겠습니다. 도대체 이걸로 뭘 하겠다는 것인지 알 수가 없습니다. 차라리 노트북이라면 이해가 되는데, 수익성이 없습니다.”
PC를 사용한 MP3 음원 재생기는 그래도 가능한 일이었다. 그런데 이 MP3를 휴대용으로 들고 다닌다는 생각 자체를 할 수가 없었다.
아직 휴대용 카세트테이프가 주류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었다.
PC 동호회에서는 나름 이 MP3에 주목하는 사람이 있기는 했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매니아 중심으로 흘러가는 상황이라서 KM 전자에서 관심을 기울일 정도는 아니었다.
하물며 가전 3사를 비롯한 다른 대기업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장승일 실장은 최민혁의 움직임을 결코 가볍게 생각하지 않았다.
“연합 SB 증권 설립 문제 때문에 정신없는 건 알지만, 이 일도 소홀히 하지 마. 자네도 이제는 최 실장님 능력을 알 것 아냐. 그분이 이 일을 비밀리에 진행하는 것엔 다 이유가 있을 거야.”
“…알겠습니다.”
그는 구길모 차장을 데리고 바로 최문경 부회장실을 찾아갔다.
연합 SB 증권 문제 때문에 고민에 빠진 최문경 부회장은 장승일 실장이 들어온 것도 모른 채 권재홍 비서실장과 밀담을 나누었다.
“부회장님!”
“어? 장 실장이 웬일이야?”
“어떻게 회장님이 경고한 지 이틀을 넘기지 못합니까? 분명히 회장님이 최민혁 실장님 일에 손 떼라고 한 것으로 압니다만.”
그는 오히려 버럭 화를 냈다.
“…무슨 소리를 하는 건가? 아니, 내가 언제 민혁이를 건드렸다는 거야?”
“제가 이런 일로 최 실장님에게 잔소리를 들어야 합니까? 아니, 만약 이 일을 회장님께 직접 말씀드리면 어떤 일이 생길지는 생각하지 않습니까?”
장승일 실장은 최민혁에게 받은 증거 사진을 최문경 부회장 앞에 던졌다.
“…….”
최문경 부회장은 안색을 잔뜩 구긴 채 권재홍 비서실장을 쳐다보았다.
권재홍 비서실장 역시 곤혹스러운 얼굴을 한 채 사진을 살폈다. 최민혁 실장이 이렇게 빨리 안 것도 놀랐지만, 설마 대놓고 장승일 실장에게 고자질할지는 상상을 못한 것이었다.
장승일 실장은 두 사람의 표정 변화에 감정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회장님에게 바로 보고를 드리겠습니다.”
최문경 부회장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서 장승일 실장의 손을 잡았다.
“장 실장, 뭔가 오해가 있었던 거야. 밑에 애들이 지시를 잘못 알아듣고, 사고를 친 거라고.”
“정말입니까?”
“그럼. 내가 아버지의 경고를 가볍게 생각할 리가 없잖아.”
“그걸 어떻게 믿습니까?”
“이봐, 장 실장, 생각해 봐. 이번 일로 아버지는 회사 지분을 걸고 경고했어. 그런데 어떻게 내가 함부로 움직이겠나. 밑에 애들이 내막을 잘 모르고, 도를 지나친 거야. 내가 충분히 경고할 테니, 이번 한 번만 좀 참아줘.”
장승일 실장도 최문경 부회장의 저자세에 은근히 놀랐다. 그 역시 최용욱 회장이 직접 경고했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다른 일과는 달리 심각하다는 것을 느꼈다.
‘이제야 회장님이 나서는 건가?’
물론 최용욱 회장 성정을 잘 아는 장승일 실장도 극한대립으로 가지는 않았다. 어차피 이런 일로 보고한다고 해도 경고에 그치기 때문이다.
“한 번만 더 이런 일이 생기면 바로 회장님에게 보고 해서 조치하겠습니다.”
“…그래.”
장승일 실장이 떠나는 것을 확인한 최문경 부회장은 어금니를 부러지도록 갈면서 식은땀을 흘리고 있는 권재홍 비서실장을 쳐다보았다.
“이 친구야, 조심 좀 해야 할 것 아냐!”
“죄송합니다. 설마 대놓고 이렇게 나올지는 상상도 못했습니다.”
그도 너무 갑작스러운 일이라서 자리에 풀썩 앉고 말았다.
“민혁이 이놈이 정말 보통이 아니네. 나도 이제까지 쉽게 생각했는데, 아니었어.”
“어떻게 할까요?”
“일단 애들 다 철수시켜. 당분간은 조심하는 것이 좋겠어.”
“죄송합니다.”
“죄송할 일을 만들지 마!”
그는 뒤늦게야 자칫하면 정말 아버지가 이 일로 KM 산업의 지분 일부를 최민혁에게 넘겼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빌어먹을.’
* * *
깔끔하게 정리를 한 장승일 실장이 다시 전화했다.
[제가 최문경 부회장님을 만나서 다시는 그런 일이 없을 거라고 약속을 받았습니다.]
[정말입니까?]
[만약 다시 한번 그런 일이 생기면, 회장님께 직접 보고해서 KM 산업 지분 일부를 최 실장님에게 증여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당분간은 걱정 안 해도 될 겁니다.]
KM 산업의 지분을 얻을 방법이 없던 최민혁도 휘파람을 불었다.
[와우, 이거 첫째 큰아버지가 절 건드리기를 기다려야 할 것 같군요.]
‘가만. 이것도 괜찮을 것 같은데…….’
그런데 이 일이 쉽게 될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지금이야 최문경 부회장도 자신을 몰라서 실수한 것이니, 앞으로 더 조심할 것이다.
[부회장님이 바보도 아닌데, 아마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 새로 설립하는 연합 SB 증권 일이 더 중요하니까요.]
[설마 차입금에 대한 차선책으로 증권사를 설립하는 겁니까?]
[SB 측의 제안을 무시할 수도 없고, 당장 그룹 자금 사정 때문입니다. KM 산업은 추가적인 공장 투자 문제 때문에 KM 전자 쪽에는 신경 쓰기 어려울 겁니다.]
최민혁은 여전히 차입금을 포기하지 않은 모습에 혀를 찼지만, 굳이 지적하지는 않았다. 대화 중에 최민혁은 문득 이 일이 일어났던 것을 떠올렸다.
‘흥미롭군. 미래가 비틀려도 일어난 일은 일어난다는 것일까?’
원래는 차입금이 먼저였고, 연합 SB 증권이 그다음이었다. 연합 SB 증권이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면 추가 투자가 이어진다.
가랑비에 옷이 젖듯이 KM 그룹 차입금은 계속 늘어날 수밖에 없다.
최민혁이 어떻게 해서라도 막았는데, 또다시 틈이 생긴 것이었다.
[그런데도 사람 보내서 감시하는 것을 보면 우리 첫째 큰아버지 생각은 다른가 보죠?]
[…혹시라도 그런 일이 생기면 저에게 바로 연락을 주십시오. 지금처럼 KM 그룹이 어수선한 상황에서 회장님도 이전처럼 내버려 두지 않을 겁니다.]
[지분 증여에 힘써준 것도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그 돈이면 꽤 요긴한 곳에 쓸 수가 있습니다.]
[천만에요.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라도 연락을 주십시오.]
[그러죠.]
[아, 임기석 부장에게 MP3 플레이어란 말을 들었는데, 그게 무엇입니까?]
최민혁은 예민하게 반응하는 장승일 실장의 행동에 내심 감탄했다. 힌트만 줬는데, 그걸로 조사를 했기 때문이다.
‘확실히 능력이 좋아. 물론 그렇다고 정보를 풀 생각은 없지.’
[세상에 공짜는 없습니다. 기조실 실장님이라면 스스로 한번 알아보셔야죠.]
[그게… 저도 답을 찾지 못했습니다. 기조실 내부 인력을 동원해도 나오는 것은 별로 없고, 정확히 무엇을 하려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좀 더 파보세요. 고작 그런 각오로 뭘 하겠다는 겁니까? 전쟁에 임한 병사라면 모름지기 임전무퇴의 정신이 필요한 법입니다!]
또 구박은 받은 장승일 실장은 착잡했다.
[…네.]
최민혁은 뒤늦게 통화가 끝난 후에 장승일 실장이 최용욱 회장에게 자신에 대해서 긍정적으로 보고했다는 것을 확신했다.
‘하긴 장 실장은 오직 회사밖에 모르는 사람이니까.’
* * *
최민혁은 KM 전자 지분에 대한 작업을 끝내자 곧 다음 작업에 착수했다.
그런데 김명준 과장을 통해서 비밀리에 얻은, 한창 양산 사전 준비 작업 중인 가칭 모델 ‘콜린스’의 자료를 받아서 확인한 후엔 다소 실망했다.
처음 콜린스를 봤을 때는 워낙에 충격적이라서 미처 간과한 부분을 뒤늦게 발견했다.
‘디자인이 좀 구려.’
브라운관 TV의 한계 때문에 어쩔 수 없다는 것을 알아도 이 콜린스 모델은 평면 TV 형태라서 얼마든지 디자인적으로 고급스러움을 강조할 수 있었다.
최민혁은 특히 애플의 아이멕 디자인을 떠올려 보았다.
쉽지는 않지만 얼마든지 적용할 수 있었다.
‘시간이 좀 걸리겠지.’
지금 받은 자료만 잘 보면 외각을 얼마든지 잘라도 가능했다.
그는 오혜정 비서에게 부탁해서 도화지 하나를 요청했고, 그 도화지를 꺼내서 가볍게 스케치하기 시작했다.
실버 컬러의 산뜻함과 얇은 점을 강조했고, 여기에 KM 전자 브랜드를 살릴 만한 로고를 고민하다가 따스한 집안 모델을 강조로 한 로고까지 만들었다.
“…….”
늘 옆에서 최민혁을 지키던 김명준 과장이 넌지시 그 작업을 가만히 지켜보았다. 그리고 그냥 쭉 도화지를 장식하는 미래 지향적인 디자인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최민혁은 디자인이 다 끝나자 꽤 만족한 얼굴로 김명준 과장을 쳐다보았다.
“어때요?”
“…좋네요.”
“음, 고작 그 정도인가요?”
“아, 진짜 놀랐습니다. 정말 보고도 잘 믿기지 않습니다. 제가 옆에서 보지 않았다면 실장님이 이 디자인을 했다는 것을 믿지 않았을 겁니다.”
이 자리에서 즉석에서 만든 디자인.
김명준 과장이 아무리 디자인에 대해서 잘 모른다고 해도 미국에서 다른 이를 경호할 때도 봤기에 저게 얼마나 대단한지는 잘 알았다.
최민혁은 어깨를 으쓱했다.
“미리 말하지만, 이건 그냥 신문을 많이 보다 보니 자연스럽게 영감이 떠오른 겁니다.”
김명준 과장은 멍하니 도화지에 그려진 혁신적인 TV 디자인을 보기만 할 뿐 반박하지 못했다. 어차피 질문해도 최민혁의 대답은 짐작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걸 어디에 쓸 생각입니까?”
“당연히 TV에 사용해야죠. 디자인 팀의 강선주 부장을 좀 불러주세요.”
“…알겠습니다.”
그는 나가면서도 콜린스 디자인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자리에 앉아서 한 시간 남짓 그렸는데, 결과가 나왔다.
이 사실을 누구에게 말해도 믿을 사람은 없을 것 같았다.
‘다른 사람에게는 말하지 말아야겠어.’
* * *
KM 전자 본사에 있는 디자인 팀은 다른 몇몇 팀과는 달리 요즘 STB 사업부 매각 때문에 분위기가 그다지 좋지가 않았다.
일단 STB 사업과 관련된 디자인 일거리가 줄었기 때문이다.
더 큰 문제는 오성 전자를 비롯한 가전 3사의 TV 사업부에 대한 공략 때문이다.
TV 사업부도 좋지 않은 분위기가 연출되자 자연스럽게 디자인 팀 프로젝트가 날아갔다.
심지어 요즘은 소니를 비롯한 일본 가전업체마저 기웃거리는 상황이었다.
이 문제는 이미 기획 팀에서 적극 나서서 차라리 KM 전자의 대리점을 이용해 그들과 계약해서 판매 대행하자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미쳤다니까.”
디자인 팀의 강선주는 소심한 성격임에도 회사의 미친 분위기를 욕했다. 가면 갈수록 디자인 팀의 입지가 줄어들자 심각하게 고민되기 시작한 것이다.
‘나도 차라리 이직할까?’
STB 사업부가 오성 전자로 매각되면서 일어난 변화는 그녀에게 영향을 준 것이었다.
그런데 김명준 과장을 통해서 갑자기 호출을 받자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일이지?’
강선주 부장은 영문을 몰라서 굳은 얼굴로 실장실을 찾아갔는데, 그곳에서 자기 동생보다 더 어린 최민혁을 보아도 별로 놀라지 않았다.
이미 회사 내에 파다한 소문 정도는 누구보다 잘 알았으나, 도대체 어떻게 경영권을 장악한 것인지는 모를 일이라 일단 몸을 사렸다.
그녀는 가벼운 인사와 동시에 최민혁이 내민 스케치를 보았다.
“……?”
처음에는 이게 뭔가 싶었는데, 막상 한번 훑어보는 것만으로 금방 알아챘다.
“TV?”
“바로, 아니, 굳이 설명이 필요 없겠군요. 어때요?”
“…이건 놀랍습니다.”
겉으로 표정 없는 모습과는 달리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은 강선주 부장은 도저히 입을 열 수가 없었다.
그도 그럴 , 고급스럽게 다듬어진 바디의 색감을 모를 수가 없었다.
알루미늄이 주는 그 빛깔은 기존의 TV 디자인과는 차원이 달랐다.
심지어 세계 최강이라는 소니 제품에 비해서도 한 수 위로 보였다.
다만 그녀도 이미 TV 사업부 엔지니어 쪽에서 요구한 디자인을 많이 받아봤기에 이런 모델에 무슨 한계가 있는지 잘 알았다.
“작년에 이와 유사한 형태의 디자인을 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생산 단가 때문에 포기했습니다. 재료비용과 생산 비용만 해도 대당 30-50만 원 가까이 더 추가됩니다.”
“그러면 더 비싸게 팔면 되죠. 320만 원 제품을 370만 원에 팔면 간단하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렇게 해서는 가전 3사랑 경쟁해서 이기기 어려울 겁니다.”
“이 디자인을 보고도 그런 말씀이 나옵니까? 정말 우리 고객층이 비싸다고 등을 돌릴 같습니까.”
그녀도 솔직히 그 부분에 대해서는 말을 아꼈다. 당시에 그 디자인이 쑥 들어간 것도 최훈열 전무가 깽판 쳤기 때문이었다.
‘나름 나쁘지 않았지.’
“…그건 잘 모르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