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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85화 (85/1,021)

#85

최문경 부회장은 뜬금없이 튀어나온 최민혁의 이름에 눈을 껌뻑거렸다.

하지만 최훈열이 박살이 난 후에 은근히 자신이 KM 전자를 가질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최동영 상무는 목이 찢어져라 소리쳤다.

“아버지!!!”

생경한 최동영 상무의 행동에 최문경 부회장은 화를 내려다가 슬쩍 입을 다문 채 눈동자를 굴렸다. 그도 KM 전자에 관심이 많았지만, 아직 셋째 때문에 지켜만 보고 있었다.

그런데 발톱을 숨기기만 하던 셋째가 저렇게 미묘한 반응을 보이자 내심 웃었다.

‘이놈이 이제 속내를 보이는구나. 설마 KM 전자를 노리고 있었다니. 허 참, 얌전한 놈이 오히려 더 무섭다니까. 이제까지 어떻게 참았대?’

최용욱 회장 역시 아예 한 걸음 물러나 버린 최문경 부회장의 모습을 힐끗 살핀 후에 분노로 달아오른 최동영 상무를 쳐다보았다.

이제까지 최동영 상무는 어지간한 일에는 별다른 태도 변화를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마치 소시오패스를 떠올리게 할 정도였다.

이전이라면 이런 부분을 질책하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설마 동영이 네 녀석이 안 회장과 붙어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냐?”

입술을 꽉 깨문 최동영 상무는 단호하게 말했다.

“그건 아닙니다. 하지만 할아버지와 안 회장님 사이가 하루 이틀 만에 만들어진 것도 아니지 않습니까. 안 회장님이 다른 기업에 했듯이 기업 사냥꾼처럼 공격할 거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과거에는 그랬지. 그런데 이제는 상황이 바뀌었다. 다음 분기 대형 TV 국내 시장 규모가 10%에 불과한 국내와는 달리 외국 시장은 50% 가까이 더 늘어나기 때문이다.”

폭발적인 대형 TV 시장 성장은 유럽이나 미국의 중산층 변화와도 관련이 있다. 활황기 덕분에 소득을 많이 번 이들이 고가품을 얼마든지 구매했다.

“하, 하지만…….”

“어디 그뿐이야? LC 전자를 비롯한 대기업 대부분이 국내만이 아니라 필리핀이나 베트남에 수천억 규모로 투자를 늘리고 있어. 반도체를 주력으로 하는 우리 처지에서 도저히 따라갈 수가 없다.”

그는 아예 뒤로 물러나 있는 최문경 부회장을 힐끗 쳐다보았다.

“문경아, 너라면 알지?”

안 그래도 최근 동아시아와 미국을 오갔던 최문경 부회장은 글로벌시장의 변화를 잘 알았다. 굳은 얼굴을 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지 말씀이 맞습니다. 확실히 이전과는 달라진 것 같습니다.”

최동영 상무가 저 말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모를 리가 없었다.

“차, 차입금만 받으면…….”

“그 차입금도 당장은 어렵다. 적어도 1년은 지나야 상황이 반전될 거다. 그때 가서는 디지털 TV 시장이 서서히 열릴 거다. 그게 한두 푼인 줄 아냐. LC 전자 그놈은 5천억, 6천억을 퍼붓는다. 거기에 대응하는 투자자금은 어떻게 또 마련할 거야?”

“…….”

최동영 상무는 어금니를 꽉 깨문 채 침묵했다. 최용욱 회장의 판단은 틀리지 않았다. 실제로 그 역시 장승일 실장에게서 최근 경영 기획안 수정 보고서를 받아 봤기 때문이다.

최문경 부회장은 물끄러미 불구경만 한 채 열심히 머리를 굴렸는데, 확실히 아버지 이야기를 무시할 수는 없었다.

그는 냉정한 얼굴로 묵묵히 최근 자신이 봤던 것을 정리했고, 급할 것도 없어서 최동영 상무가 어떻게 나오나 지켜봤다.

“…알겠습니다.”

최동영 상무는 놀랍게도 인내한 채 결국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래. 그 태도. 할 때는 해야겠지만 아니라고 생각되면 물러나는 자세가 필요해. 오늘 내가 그것을 깨닫는다면 KM 전자 가치보다 훨씬 값비싼 보상일 거다.”

‘정말 방심할 수 없는 놈이라니까.’

옆에서 지켜만 보던 최문경 부회장은 결국 자신이 나섰다.

“그러면 그 지분은 누구에게 매각할 생각입니까?”

“민혁이다.”

“네? 설마 제 조카 민혁이 그 녀석을 말씀하시는 것은 아니겠죠?”

“맞아.”

“아니, 그놈이 무슨 돈이 있다고 그럽니까?”

최용욱 회장은 피식 웃으면서 최민혁이 어떻게 430억을 마련했는지 말해주었다. 두 사람 역시 데이콤 지분 폭등과 폭락 사태를 잘 알기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데이콤 지분 폭등은 그럴 수가 있다고 쳐도 폭락은 의외였다.

오성 전자가 계열사 통해서 데이콤 지분을 인수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20만 원을 뛰어넘었지만, 지금은 12만 원대까지 폭락했기 때문이다.

데이콤이 워낙에 극적인 상황을 연출한 터라 이익을 본 사람은 별로 없었다.

그런데 그 와중에 무려 200억을 챙긴 이가 최민혁이라는 말이었다.

“이 무슨 개…….”

그는 아버지의 따가운 시선을 보자 입을 슬그머니 다물고 말았다.

“알다시피 그룹 사정이 지금 좋지가 않아. 그런데 외부 세력도 아닌 손자 녀석이 주식으로 번 돈을 가지고 지분을 사들이겠다고 하잖아. 그래서 너희 둘을 불렀다.”

두 사람은 반대를 위한 반대를 하려다가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막상 KM 전자 상황을 떠올려 보고서야 먹을 것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었다.

그리고 왜 아버지가 굳이 일을 이렇게 풀어가려고 하는지도 이해했다.

다른 계열사와는 달리 KM 전자는 계륵이었다.

지금 당장은 차라리 최민혁 손에 지분을 맡겨두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430억이 비록 적은 돈이라고 해도 꽤 유용하게 쓸 수도 있었다.

최용욱 회장도 자식이 머리에 연기가 날 정도로 맹렬하게 굴리는 모습을 보면서 피식 웃다가 결론을 내버렸다.

“할 말이 있으면 지금 해라.”

“…알겠습니다.”

두 사람은 많은 고민을 한 끝에 결국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최민혁 이 새끼는 도대체 지금까지 뭘 하고 다닌 거야? KM 전자는 또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아무래도 한번 확인을 해봐야겠어.’

* * *

최근 잘나가는 기업은 잘나갔지만 그렇지 않은 기업은 상황이 좀 달랐다. 구조조정이 필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구조조정의 칼바람을 경험한 이들은 다들 선배와 후배가 퇴직한 것을 보면서 가슴 아파했다. 언젠가는 자신 역시 그 대상이 되기 때문이다.

중견 회사는 지금 환경 아래에서 견디기 어려운 경우에 죽느냐, 사느냐의 문제다.

그런 의미에서 본다면 STB 사업부 매각은 오히려 반대다.

떠나는 사람은 웃으면서 떠났다.

남은 이들은 텅텅 빈 사무실 환경에 오히려 입맛을 다셨다.

공채덕 과장은 특히 천선구 과장과 그 패거리가 사라진 것에 환호했지만, 지금 상황을 썩 좋게 생각하지는 않았다.

오성 전자 실무진이 나타나서 필요한 서류와 심지어 서버에 있는 개발 자료를 하나씩 다 긁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죄송합니다. 저희도 이러고 싶어서 이러는 것은 아닙니다. 윗선 압력이 하도 심해서 최선을 다하는 것뿐입니다.”

“아니에요.”

그는 자기 PC 안에 작업한 파일 목록을 일일이 다 설명해 주었다. 제법 많은 돈을 들여서 사업부를 인수한 오성 전자 실무 팀에게 싫은 소리를 하지는 않았다.

‘도대체 이게 어떻게 900억 가치가 되는 것일까?’

김흥준 과장 역시 백업 하드 내용을 일일이 설명해 주면서 눈빛으로 대화했다.

‘나도 몰라.’

‘정말 아는 것 없어? 이거 가치 없다는 건 조금만 파면 나올 텐데…….’

‘그 비디오 특허 때문에 혹시나 꿍쳐 둔 것이 있나 확인하는 것 같아.’

‘그런 게 있을 리가 없잖아.’

‘그러게 말이야.’

결국 답을 찾지 못한 공채덕 과장은 착잡한 표정을 한 채 한 쪽에서 망부석처럼 멍하니 서 있는 임기석 부장 옆에 다가갔다.

“팀장님, 괜찮으세요?”

“…속 시원해. 공 과장은?”

“지금까지 했던 일을 몽땅 다 털리고 나니, 기분이 찜찜해요. 그리고 저도 사업부 매각 경험이 없어서 잘은 모르는데, 오성 전자라서 그런지 많이 다른 것 같아요.”

“돈이 한두 푼이 아니니까.”

“900억이라는 소리가 있던데, 그게 정말입니까?”

“어, 맞아.”

“아니, 우리 사업부가 무슨 돈이 된다고 그 엄청난 금액을 줬다는 말입니까?”

임기석 부장은 피식 웃으면서 자기 책상에 꽂혀 있는 비디오 관련 특허 서류철 파일을 꺼내서 내밀었다.

그 서류를 확인한 공채덕 과장은 경악했고, 김홍준 과장을 비롯한 남은 인력 역시 충격을 받기는 매한가지였다.

그들은 역시 다른 사람처럼 임기석 부장에게 질문했다.

하지만 임기석 부장은 마침 걸려온 전화 때문에 더 대답할 수가 없었다.

[임기석 부장입니다.]

[전 기조실의 장성일 실장입니다. 회장님이 부장님을 찾습니다. 문자로 주소를 보낼 테니, 거기로 오시면 됩니다.]

[네?]

[뭐 그렇게 큰일은 아닙니다. 이번 STB 매각과 관련해서 몇 가지 질문할 것이 있을 뿐입니다.]

[아, 알겠습니다.]

임기석 부장은 회장 호출에 깜짝 놀랐지만, STB 사업부 매각과 관련해서 자신이 한 일을 떠올리자 금방 돌아가는 상황을 이해했다.

공채덕 과장은 여전히 불만이었다.

“저기 팀장님, 뭔가 좀 말씀해 주셔야 하는 것 아닙니까? 아니, 결과가 다 나오고 나서 저희에게 말하면 어떻게 합니까?”

“실장님이 보안을 요구했어. 너희 두 사람도 이해해야 해.”

“후유, 알겠습니다.”

* * *

임기석 부장은 실장실을 찾아가서 최민혁 실장에게 자신이 받은 전화 내용을 말했다.

최민혁은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아, 결국 회장님이 호출했다는 말입니까?”

“네. 금요일 오전에 한남동으로 직접 오라고 연락받았습니다.”

“할아버지가 직접 불렀다라…….”

그다지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아무리 김현우 상무가 입을 다물었다고 해도 안현수 팀장을 통해서 어느 정도 STB 사업부 매각 정보가 넘어갔을 테니까.

결국 계속 파다 보면, 그 비디오 특허와 관련된 실무자를 찾을 수밖에 없다.

최용욱 회장은 최민혁 자신에게 직접 물어보면 되겠지만, 아무래도 제삼자의 의견을 통해서 확인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긴 KM 전자 지분을 넘기기 전에 능력 확인은 필수지. 경영 능력이 없다면 큰아버지와 형평성 문제도 있을 수가 있어.’

임기석 부장은 다소 걱정스러운 얼굴로 툴툴거렸다.

“솔직히 저랑 이동호 교수랑 이번 일과 관련해서 한 것이 거의 없습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실장님이 다 했습니다.”

물론 이번 일 때문에 오성 전자 직원이 다시 이동호 교수 연구실을 찾아가서 관련 자료를 몽땅 거둬들여 가 버렸다.

뿔이 난 이동호 교수는 비록 계약서상에 명시되었다고 해도 임기석 부장에게 잔소리한 것까지 말하지는 않았다.

“흠.”

최민혁은 지금은 최문경 부회장 때문에라도 그럴 수가 없었다.

“제가 관여한 것을 빼고, 나머지는 사실대로 말하세요.”

“제가 잘은 모르지만, 의도적으로 실장님이 능력을 숨기려고 한 것 같은데, 괜찮겠습니까?”

“그건 어떻게 알았어요?”

“김현우 상무를 그렇게 띄워 주는 게 이상했으니까요. 만약 그 비디오 특허에 무슨 함정이 있다면 어느 정도 앞뒤가 맞아 들어갑니다.”

“제법 눈치가 빠릅니다.”

그는 머리를 긁적이면서 멋쩍은 듯 말했다.

“이제 겨우 알았습니다. 그런데…….”

“생각을 해보세요. 김 상무 같은 사람이 오성 전자에서 얼마나 버틸까요?”

“짧으면 한 달, 길면 두 달 정도입니다.”

“잘 아시네요. 그러니 그쪽 문제는 신경 쓰지 마세요. 할아버지에게 가서는 저에 관한 것만 빼고, 그냥 경험한 그대로 다 말하세요.”

“…알겠습니다.”

그리고…….

“지금 남아 있는 직원은 앞으로 무슨 일을 하게 되는 겁니까?”

“아, 비슷한 일을 할 겁니다. MPEG 관련 특허 연구하고, 거기에 맞는 제품을 개발하게 될 겁니다.”

“무슨 제품인지 알 수가 없을까요?”

“MP3 플레이어.”

그는 최민혁이 더 자세한 것을 말해주지 않자 조용히 물러나면서 스스로 고민하기 시작했다.

‘MP3 플레이어가 뭐지?’

* * *

아직 MP3 플레이어 제품 자체가 나오지 않았기에 임기석 부장은 남은 팀원에게 관련 자료를 모으라고 지시한 후 자신도 자료를 살펴보았다.

PC 동호회를 통해서 MP3 파일에 대한 것을 파악하고 나서야 최민혁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았다.

다만 컴퓨터를 이용한 플레이어는 아닐 것이라고 확신해서 다시 자료를 살피다가 세상에 그런 제품이 없다는 것을 파악했다.

그는 결국 MP3에 대한 자료부터 천천히 제조사를 진행하면서 흥미로운 점을 많이 찾아냈다.

‘기존 오디오 플레이어를 말하는 것은 아냐. MP3 파일로 듣는 것이니까. 그런데 MP3 파일을 어떻게 재생하지?’

답은 쉽게 나오지 않았다.

최민혁이 던진 간단한 화두는 시간이 갈수록 그의 흥미를 자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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