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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84화 (84/1,021)

#84

* * *

최문경 부회장은 갑작스러운 아버지의 경고를 듣고 나서도 권재홍 비서실장을 통해서 KM 전자와 관련된 사안을 확인했다.

이미 알고 있었던 사실이지만 혹시라도 뭔가 잘못된 정보가 아닐까 생각하던 그도 오성 전자가 STB 사업부를 정말 900억에 인수한 것에 혀를 내둘렀다.

“권 실장, 그게 정말인가?”

“네. 황광수 차장을 통해서 확인한 사실입니다.”

“아니, 고작 150억이면 충분할 STB 사업부를 오성 전자가 900억이나 주고 샀는데, 말이나 되는 소리야? 언론의 오보여야 해!”

“사실입니다. 안현수 팀장 말로는 오성 전자가 STB 사업부에서 만든 원천기술에 관심이 많았다고 했습니다.”

“안현수 법무 팀장? 아니, 바쁜 친구는 또 왜 거기에 낀 거야?”

“최민혁 실장이 따로 요청해서 이루어진 일입니다.”

“민혁이? 그게 정말이었어? 아니, 그놈이 아는 게 뭐가 있다고 사업부 매각 일에 끼어들어?”

“하지만 결과적으로 900억 매각을 성공적으로 이룬 덕분에 KM 전자 내에서도 최민혁 실장 인기가 좋습니다. KM 전자 주가가 크게 내려가지 않는 이유도 그 때문입니다.”

보통 사업부 매각에 따라서 주가는 하락하기 마련인데, 무려 900억 이익을 챙기면서 두고 보자는 심리가 강했다.

“좋아. 그렇다고 하자. 그 벨린 투자란 곳은 어떻게 된 거야? 막내가 죽고 나서 정리한 것으로 아는데?”

“자금은 다 뺐지만 남아 있는 것이 좀 있었습니다. 아무래도 껍데기를 누군가 인수한 것 같습니다. 외국계 자본인데, 아직 정체를 파악하지는 못했습니다.”

“그것도 이상하네. 계속 한번 알아봐.”

“알겠습니다.”

그는 갑자기 일어난 KM 전자 일도 그렇고, 아버지의 경고 때문에 머리가 아팠다. 더 황당한 것은 그 당사자가 입을 열지 않는다는 것이다.

특히 최두진 사장은 그조차 함부로 할 수가 없는 사람이다. 도대체 어째서 최두진 사장이 그런 행동을 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일전에 최두진이 몇 마디 남기긴 했었다.

[너희 집구석 일에 난 이제 질려서 간섭 안 하련다. 앞으로 나에게 그런 일로 전화하지 마. 귀찮게 하면 그냥 두지 않겠어!]

그러고는 늘 국내만 있던 양반이 해외로 나가 버렸다.

‘외국으로 갑자기 출장 간 것도 웃기는 일이잖아.’

마침 아버지에게 다시 연락이 오자 자리에서 일어났다.

해외 업무 때문에 정신없이 돌아다녀서 지쳤지만 쉴 수가 없었다.

‘피곤하네.’

* * *

한남동 저택은 평소처럼 조용하지 않았다. 입구에는 얼마 전에 본 차량이 서 있었다.

그들의 인사를 듣고서야 셋째가 데리고 있는 이들이라는 것을 알았다.

집 안에는 늘 조용하기만 한 최동영이 담배를 문 채 서 있었다.

“형, 이번 필리핀 일은 고마워.”

“고맙긴. 네가 고생했지.”

“라모스 대통령 직접 만나서 설득한 사람은 형이잖아. 지속적인 투자와 기술협력 때문에 필리핀 관리도 꽤 만족한 눈치였어.”

필리핀 공장 설립도 견제 때문에 주춤하다가 차입금 문제가 터지면서 압력을 받자, 어쩔 수 없이 KM 건설 진행을 도왔다.

최문경 부회장은 첨단 반도체 패키지 기술을 필리핀에 이전해 줄 것을 약속하면서까지 KM 건설이 도로를 비롯한 간접 시설 건설을 따낼 수 있도록 해준 것이었다.

차라리 다른 업체랑 손을 잡을 생각을 했던 최문경 부회장으로서는 속이 타는 일이었다. 물론 겉으로 그런 내심을 드러내지 않았다.

“내가 한 것이 뭐가 있겠냐. 그만큼 KM 건설이 자리를 잡았다는 것이잖아. 앞으로도 잘 좀 부탁한다. 우리도 국내에 추가로 공장을 건설할 계획은 많아.”

“당연하지.”

하지만 최동영도 립 서비스를 믿지 않았다. 그 역시 최문경 부회장이 필리핀 일에 자신을 배제하려고 했다는 정보를 얻었기 때문이다.

‘그놈의 차입금 때문이겠지. 그리고 아버지의 시선을 의식했을 거고.’

두 형제는 겉으로 웃었지만 내심은 복잡하기만 했다.

“그런데 넌 여기 웬일이야?”

“아버지가 불렀으니까.”

“너도?”

“어, 아마 둘째 형 때문에 할 말이 좀 있나 보지. 아니면 KM 전자 지분 매각 건일 수도 있고.”

“매각 건에 대해서 넌 혹시 아는 거 없냐?”

“나도 몰라. 최 사장님은 해외로 나갔다고만 하는데, 연락을 피하는 것 같아.”

“아니, 왜?”

“형도 김현우 상무가 최 사장님 아들인 것은 알잖아.”

“알지. 이번에 오성 전자로 보따리 싸서 완전히 이동했더라.”

“아마 그 일 때문이 아닐까 싶어. 괜히 관계가 복잡해질 것 같으니, 잠깐 잠적한 것이겠지.”

“아니, 고작 그런 일 때문에 해외로 도피한다고? 우리가 무슨 채권자라도 되냐?”

“말하기 곤란한 것이 있나 보지.”

“그러냐.”

심드렁한 최문경 부회장은 그다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미 매각은 진행된 일이라서 더 생각하기 싫었다.

‘아버지는 사전에 들었을지도.’

* * *

최용욱 회장은 두 사람을 보자 최근 일어난 일에 대해 훈훈한 이야기부터 했다. 최문경 부회장을 보자마자 압박했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최문경 부회장은 그게 오히려 더 이상해서 눈만 끔뻑거렸다.

그래도 국외에서 생고생했다가 들어왔는데, 단 한마디의 칭찬도 없다가 갑자기 그 안건을 꺼내자 오히려 어리둥절했다.

“이번 필리핀 건은 두 사람이 서로 협조해서 잘 풀었더구나.”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최민혁 때문에 정신이 팔린 최용욱 회장도 두 사람과 KM 지분 문제를 상의하려다 보니 뒤늦게 확인한 사안이었다.

그도 두 사람 관계를 잘 아는 터라 차입금 문제 때문에 서로 힘을 합쳤다는 것을 뒤늦게 눈치챘다. 평소에도 그랬으면 하는 바람이지만 그것까지 굳이 말하지는 않았다.

문제는 역시 KM 전자의 지분이다.

첫째도, 셋째도 은근히 KM 전자 지분을 포기하지 않았다.

아마도 말을 꺼내면 민감하게 반응할 것이 분명했다.

그래도 한 번은 거쳐야 할 일이었다.

“KM 전자 지분 말인데…….”

최문경 부회장이 이상한 분위기에 참지 못하고 슬쩍 끼어들었다.

“최두진 사장님이 지분을 매각한 것은 아버지 허락을 받았기에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혹시 여기에 대해서 아시는 것이 있습니까?”

그는 아들이 말을 끊었음에도 평소처럼 화내기보다는 오히려 여기서 시작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해서 부드럽게 말했다.

“글쎄다. 그 친구 말로는 다른 계열사와는 달리 KM 전자가 꽤 불안하다는 소리를 했어.”

“몇 년에 걸친 KM 전자 적자는 저도 압니다. 하지만 그건 훈열 그놈이 방만한 경영을 해서 생긴 문제일 뿐입니다.”

최용욱 회장도 별생각이 없다가 아들의 반응에 인상을 찌푸렸다.

“그걸 잘 아는 놈이 이제까지 아무런 조언도 안 해줬냐? 지금처럼 둘째를 도왔다면 그렇게까지 나빠지지 않았을 텐데?”

“훈열이도 이미 다 컸습니다. 제가 왈가왈부할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다만 시간이 지나면 멀쩡해질 회사였습니다. 김현우 상무를 통해서 이야기를 듣는 최두진 사장이 그걸 모를 리가 있습니까?”

“무슨 뜻이냐?”

“제가 아는 최두진 사장님은 고작 돈 몇 푼에 지분을 팔 분이 아닙니다. 설사 1,000억, 아니, 2,000억을 준다고 해도 아버지 허락이 없이는 지분을 팔 분이 아니죠. 아버지가 허락하지 않았다면 그 일은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흠.”

두 사람의 관계를 너무도 잘 아는 최문경 부회장의 말에 최용욱 회장도 곤혹스럽기만 했다. 이 미묘한 관계 때문에 외부에서 경영권을 공격하기도 쉽지 않았던 것이다.

그건 두 사람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 역시 아버지뿐만 아니라 최두진 사장까지 고민해야 할 터라 그저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건 맞다. 하지만 세월이 많이 흘렀다. 김현우 그놈 때문에 우리 둘이 서로 대립도 했어. 그 친구는 이제까지 자신이 도와준 것이 있으니, 계속 참아달라고 요청도 했어. 이제는 서로 한계에 온 거지.”

“아버지 말씀이 그렇다면, 그런 것으로 알겠습니다.”

‘요놈 봐라.’

최용욱 회장은 새삼 자신 앞에서 반기를 드는 첫째 모습이 익숙하지 않았다. 하지만 한편으로 마음이 든든했다.

그래서 더 문제였다.

자신 역시 이미 두 사람이 자기 지분 매각에 대해서 반발할 것이라 예상했지만, 생각보다는 더 심해질 것 같았다.

그래서 슬쩍 방향을 바꾸었다.

“안 회장이 몇 달 전에 TV 사업부에 관한 관심을 보였다. 본격적인 사업을 하기에 앞서서 우리 사업부를 인수하겠다고 하더구나.”

“네?!”

두 사람은 갑작스러운 이야기에 화들짝 놀랐다.

“나도 처음에는 화가 났지만 안 회장 말도 무시할 수가 없어. 대형 TV 수요가 급격히 늘어난 상황이라서 이전처럼 소극적일 수가 없으니까.”

“맙소사 그러면 오성 전자에서 진짜 본격적으로 대형 TV 시장에 뛰어드는 겁니까?”

“그래. 그것도 다른 계열사와 협력을 통해서 대대적인 투자를 진행할 거다. 아무리 기술과 브랜드가 탄탄하다고 해도 오성 전자를 이길 수는 없어.”

“설마 TV 사업부를 매각하시려는 겁니까?”

“그건 고민 중이다. 다만 상황이 녹록지 않아서 문제야. 네가 그래서 첫째 너에게 미리 KM 전자에 관심 끊으라고 한 거야.”

최문경 부회장도 오성 전자 안 회장 이야기를 듣자 한숨을 내쉬었다. KM 산업과는 달리 TV 사업은 오성 전자랑 싸워서 이길 수가 없었다.

하물며 LC 전자나 대운 전자 역시 막대한 돈을 퍼붓고 있을 것이다.

시간이 갈수록 TV 사업부 몰락은 필연이다. 안 회장이 TV 사업부를 매각하라고 한 것도 최용욱 회장과의 관계 때문이었다.

KM 전자 인수가 아니라 매각해야 할 때였다.

그도 착잡한 얼굴로 TV 사업부에 깊은 애정을 가진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그건 알겠습니다. 하면 앞으로 어찌할 생각입니까?”

“내 지분을 매각할 생각이다.”

하지만 정확히 사정을 확인하지 않은 지금 당장 TV 사업부 매각은 곤란했다.

“절대로 안 됩니다!”

“대안이 있느냐?”

“저희가 한번 알아보겠습니다!”

두 사람도 이제는 더 참을 수가 없어서 그냥 서재를 나가 버렸다.

최용욱 회장은 자식 반응에 혀를 차면서도 굳이 말리지 않았다.

‘알아본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으니까.’

그런 면에서 본다면…….

‘민혁이 이 녀석은 이미 사실을 잘 알 텐데, 굳이 왜 내 지분까지 욕심내는 것일까? 뭔가 좀 이상하잖아.’

* * *

최문경 부회장과 최동영 상무는 분노하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당장 장승일 실장을 찾아가서 이 문제를 따졌다.

장승일 실장은 이미 최민혁 지시를 받아서 경영 기획안을 대폭 수정하고 있기에 그 자료 중에 일부를 그들에게 보여주었다.

바로 TV 사업부를 포함한 KM 전자의 암울한 미래였다.

특히 수정된 X 리포트는 더 버전 업 되어 있었는데, 그 결과는 과거 언론을 통해서 말이 나온 X 리포트보다 더 참혹했다.

KM 전자는 길어야 3, 4년 정도를 정점으로 몰락하기 때문이었다.

“씨발.”

최문경 회장은 길길이 날뛰는 최동영 상무를 힐끗 쳐다보면서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훈열이 이놈이 완전히 회사를 말아먹었구나.”

그랬다.

지난 3년은 KM 전자의 체질을 개선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그 좋은 기회를 날려 먹고 난 다음에 나타난 강자를 상대로 승산이 없었다.

장승일 실장은 굳이 최민혁 실장과 관련된 부분에 대해서는 일절 말하지 않았다.

“이런 말 하기는 그렇지만 왜 망해가는 회사에 욕심내는 겁니까?”

“그걸 누가 장담해?”

“방법이 있기는 합니다. TV 사업부에 5천억 규모의 투자를 늘리면 됩니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다른 가전 3사와 경쟁할 수 있겠습니까?”

“…….”

두 사람은 열심히 주판을 두들겨 봤지만 리스크가 너무 컸다. 자칫하다가 자신들이 담당한 계열사마저 휘청할 것이 분명했다.

‘빌어먹을.’

* * *

두 사람은 결국 다시 최용욱 회장을 찾아갈 수밖에 없었고, 누구에게 매각할 것인지 확인부터 했다.

“정말 오성 전자에 TV 사업부를 매각할 생각입니까?”

“아니.”

최동영이 참다못해서 끼어들었다.

“아직 시간은 충분합니다. 아무리 오성 전자라고 해도 갑자기 대형 TV에 집중할 수는 없어요. 아직 시장이 성숙한 것도 아닌데, 손실만 클 테니까요.”

“그래, 맞아. 안 회장이 그래서 TV 사업부에 관심을 두는 것이니까. 시간이 제법 걸릴 거다. 그런데 그냥 쉽게 물러날 수는 없잖아. 그래서 민혁이 그 녀석에게 넘길까, 지금 고민 중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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