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83화 (83/1,021)

#83

최용욱 회장도 두 사람의 꿍꿍이를 느꼈지만, 차라리 잘되었다고 생각했다. 최민혁이 만약 KM 전자의 지분을 가지고 있으면, 오히려 최훈열 전무를 견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최문경 부회장에 대한 견제 수단으로 안전장치를 마련했다.

최민혁이 만약 자식들 틈바구니에서 세상의 쓴맛을 경험한다면 차라리 험난한 삶을 잘 풀어갈 것이라 예상했다.

그는 특히 외가가 DL 그룹인 최훈열에 대해서는 나름 신경을 썼다. TV 사업부를 비롯한 KM 전자를 노리는 그들이 지금처럼 계속 침묵할 것이라 보지 않았던 것이었다.

그런데 오늘 다시 만난 최민혁은 집을 떠날 때의 그 모습이 아니었다.

축 늘어진 어깨, 겁먹은 강아지 같은 눈, 심지어 제대로 자기주장도 펴지 못해서 한마디도 하지 못하던 소심한 모습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당당하다 못해서 세상을 오시할 만한 강한 눈빛을 가진 사나이가 되어서 나타난 것이었다.

“…….”

눈을 계속 끔뻑거리던 최용욱 회장은 뒤늦게야 자신이 뭔가 큰 착각을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이 의아하게 생각했던 최민혁에 관한 리포트는 큰 의미가 없었다.

‘두진이 그 친구가 왜 그렇게 이 녀석 이야기를 자꾸 하나 했는데, 그럴 만도 하구나. 세상 무서울 것이 없던 그 친구가 계속 찾아올 때부터 짐작했어야 했는데…….’

“마시거라.”

최민혁은 김이경이 다시 내온 녹차를 홀짝이며 느긋하게 차 맛을 음미했다.

“좋네요.”

“그러냐?”

“…….”

겨우 이성을 회복하고 서재에 들어온 김이경 여사는 최용욱 회장의 눈치를 보면서 최민혁을 다시 살폈다.

‘도대체… 같은 사람 맞아?’

그녀가 아는 최민혁은 소심하고, 겁도 많아서 단 한마디도 제대로 하지 못하던 애송이었다. 그런데 지금 마주한 최민혁은 그런 모습을 전혀 찾을 수가 없었다.

“그만 나가 보아라.”

“네, 아버님.”

최용욱 회장은 한쪽에 조용히 물러나 있는 장승일 실장을 힐끗 곁눈질하며 살폈다. 그의 안색 역시 평소와는 많이 달라져 있었다.

‘…장 실장.’

따가운 최용욱 회장의 시선에 장승일 실장도 시선을 피하고 말았다. 그도 최민혁을 조사했지만, 자세한 것을 밝히지 못했다.

‘아니, 증거가 있어야 뭐라도 말하지.’

카더라 소리는 컸지만 정작 드러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심지어 비디오 특허만 해도 그렇다. 아무리 봐도 그냥 하늘에서 뚝 떨어진 특허였다. 도대체 최민혁이 그걸 어떻게 구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이미 채윤집 집사로 교차 검증까지 한 최용욱 회장도 혀를 찼다.

“민혁아.”

“네, 할아버지.”

그는 지금 직면한 문제보다는 최훈열 전무와 관련된 일부터 꺼냈다.

“회사 내에서 이런저런 소식이 들리더구나. 차입금 관련해서도 둘째 훈열이하고도 사이가 안 좋다는 소리도 있어.”

어른의 잔소리에도 최민혁은 제대로 대답했다.

“딱히 둘째 큰아버지와는 관계없이 이미 그만둔 전 손동권 기획실장의 의견과 누적된 회사 적자를 토대로 분석한 겁니다.”

“회사 일이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냐.”

“할아버지 말씀은 도통 이해하기 힘듭니다. KM 전자의 적자는 몇 년간 지속됐고, 그 원인은 대부분 TV 사업부였습니다. 특히 둘째 큰아버지는 지속되는 고객 클레임을 무시한 채 무조건 신제품 타령만 하고, 개발 엔지니어의 반대까지 무릅쓰며 막 밀어붙였습니다. 덕분에 불편을 경험을 한 고객은 다 이탈하는 중입니다.”

“그거야…….”

“아뇨. 할아버지는 지금 KM 전자의 현실을 모릅니다. 다른 이들과는 달리 KM 전자에 충실한 고객층 이탈은 곧 KM 전자 몰락을 의미합니다.”

최민혁은 이미 준비해 온 KM 전자의 제품에 대한 고객 감상평을 정리한 글을 최용욱 회장에게 직접 보여주었다.

“이게 회장님이 말씀하시는 경영입니까? 도대체 둘째 큰아버지가 한 게 뭡니까? 그나마 최고의 명가 소리를 듣는 오디오 제품 명성이 아니었다면 회사 상표 가치는 똥값이 되었을 겁니다.”

그리고 KM 전자에 관한 부정적인 이야기는 끝없이 이어졌다.

“끙.”

또박또박 지적하는 최민혁의 공격은 한동안 계속되었다.

무슨 말만 하면 정교한 논리로 때려 부수는 최민혁의 행동은 아예 작정하고 온 것 같았다.

15분 가까운 궤멸적인 공격에 질린 최용욱 회장도 두 손을 들고 말았다.

“결국 네 말은 지금 KM 전자 상황이 나빠지고 있어서 여기에 차입금을 들이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란 소리야?”

“그보다 더 심합니다. 이자 비용이 더해지면 KM 전자는 버티지 못할 겁니다. 거기에 KM 그룹 전체적으로 휘청일 때는 패닉이 올 겁니다.”

이전과는 달리 X 리포트 수정안을 통해서 알고는 있지만 한번 부정해 보았다.

“그건 아니야.”

“회장님은 그걸 어떻게 장담합니까? 만약 위기가 오면 KM 그룹은 공중분해 될 겁니다. 그때 가서 잘못했다고 자책하실 겁니까? 차입금을 준 승냥이들은 이때라고 소치면서 그룹을 공중분해 해서 헐값을 팔아넘길 겁니다!”

이미 장승일 실장 통해서 최종 보고를 받아서 한기를 느꼈던 최용욱 회장도 대놓고 KM 그룹이 망할 거라는 소리에 발끈했다.

“아니, 이놈이!”

최용욱 회장은 분노하면서도, 자기 눈을 정면에서 직시하고 있는 최민혁을 차마 공격하지 못했다. 이미 기조실의 재분석을 통해 KM 그룹 내부의 사정을 확인했기 때문이다.

놀라운 것은 최민혁이 버릇없이 공격하고 있는 내용이 별반 다르지 않다는 점이다.

특히 구체적인 면에서 최민혁 의견은 오히려 더 합리적이고, 설득력이 있었다.

“민혁아, 내 말은…….”

“할아버지, 이 일은 인정에 끌려서 누굴 봐주고, 누굴 안 봐주는 일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쌓아올린 KM 그룹이라는 탑을 무너뜨릴 겁니까?”

“도대체 갑자기 왜 그러는 거야? 설마 네가 가진 지분을 누가 줬는지도 몰라?”

“지분을 받은 것이 고마워서 도움이 되는 조언을 하는 겁니다. 지금 회장님 곁에는 누구 하나 그런 사람이 없습니다!”

“음.”

손자의 포격에 녹아웃이 된 최용욱 회장은 눈을 감은 채 침묵했다. 조금 전 최민혁이 한 이야기를 다시 한번 떠올려 보였다.

수십 년 동안 재계에서 잔뼈가 굵은 그는 고작 감정에 휩쓸려서 최민혁의 이야기를 가볍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결국 진솔한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민혁아, 설사 네 말이 백번 맞는다고 하자. 그런데 이 KM 그룹은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야. 더 많은 주주가 있다. 그들을 설득시키는 일이 간단하지만은 않아.”

“설마 고작 그게 두려워서 피하신다는 비겁한 변명을 하시는 겁니까? 중요한 것은 신뢰입니다. 다시 한번 솔직하게 그들에게 말해서 신뢰를 회복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허.”

손자에게 잔소리를 듣자 최용욱 회장도 한동안 반박하지 못했다.

그리도 입을 다물 수는 없었다.

“고놈이 말투 참. 아무래도 네 녀석이 지금까지 뭔가 쌓인 것이 있나 본데, 지금은 가서 잠깐 쉬어라. 흥분을 가라앉히고 나서 다시 이야기하자꾸나.”

“알겠습니다.”

정확히는 최용욱 회장 자신이 할 말이 없어서 한 말이었다. 최민혁은 굳이 건강이 좋지 않은 할아버지를 밀어붙일 생각은 없었다.

‘이 정도면 알아들은 것 같네.’

그는 새삼 고개를 살짝 숙이는 장승일 실장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 * *

북한산 최고봉은 서울과 경기도를 한눈에 볼 수가 있어서 대표적인 코스로 꼽힌다.

평소 건강 때문에 등산을 즐기는 최용욱 회장이지만, 오늘은 새삼 골치 아픈 일을 떨칠 수 있었다.

그는 힘들지 않은 모습으로 따라오는 최민혁을 보면서 혀를 내둘렀다.

“평소에 운동도 하느냐?”

“아무래도 건강이 최고니까요.”

바위 위에 잠깐 엉덩이를 걸친 최용욱 회장은 굳은 표정을 한 장승일 실장의 모습에 혀를 내둘렀다. 어제 최민혁과 대화하면서 새삼 손자의 변화된 모습을 느꼈기 때문이다.

‘보고만으로 한계가 있으니까.’

북한산 경관을 감상하는 최민혁의 모습은 어제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그 뒤를 따른 김명준 과장은 마치 산책이라도 나온 것 같았다.

단 하나의 땀방울도 흐르지 않는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저 친구도 보통은 아냐. 막내 녀석은 어떻게 저런 친구를 구한 것일까?’

외국에서 주로 비자금 관리를 하던 막내가 갑자기 자기 왼팔이라면서 데려온 김명준 과장의 모습이 새삼 떠올랐다.

그리고 막내가 사망한 후에 피눈물을 흘리던 그 모습도.

아직도 섬뜩한 그 기억은 쉽게 떨치지 못했다.

김명준 과장은 죄책감을 이기지 못해서 결국 최민혁의 경호원이 되었다.

그가 굳이 반대할 이유는 없어서 내버려두었는데, 막상 지금 와서 보면 김명준 과장도 이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자신을 보자 씩 웃는 최민혁의 모습에 혀를 내둘렀다.

‘이렇게 독한 놈이니, 훈열이가 빌빌거렸던 거야. 어쩌면 이 녀석이 정말 그놈을 감방에 보냈을 수도 있어. 그런데 이놈이 원래부터 이랬나?’

그가 기억하는 최민혁은 절대 그렇지가 않았다. 본가에 들어와서 산다고 해도 주로 식사할 때만 보았고, 그때도 깊은 이야기를 나누지 않았다.

최민혁은 이미 어제 충분히 자기주장을 피력했다고 생각했는지 이번엔 승부수를 던졌다.

“지금은 외부 압력 때문에 차입금 문제에 관해서 물러나 있는 것을 압니다. 하지만 일 년 후라면 할아버지 생각은 바뀌겠죠.”

“그러냐?”

“정 안 되면 KM 전자만이라도 이번 일에서 빼주십시오. 그게 어렵다면 KM 전자 주식을 제값 받고 팔고 싶습니다.”

“그건 안 된다. 네가 뭔가 착각하는 것 같은데, 이미 지분을 너에게 넘긴 순간에 그 일은 결정 난 거다. KM 전자 지분 가치만큼 네 자산이다. 책임감이 있다면 넌 그런 소리를 할 자격이 없다. 네 말대로라면 침몰하는 KM 전자를 내버려 둔 채 너 혼자만 살아남겠다는 소리 아니냐?”

단호하게 변해 버린 최용욱 회장의 태도에 최민혁은 혀를 내둘렀다.

‘역시 할아버지는 최 전무와는 많이 다르구나.’

“좋습니다. 그렇다면 할아버지 말씀처럼 회사에 대한 책임감 때문에 적극 나서서 할아버지의 지분을 매입하고 싶습니다.”

“…….”

그는 이미 최민혁의 명의로 된 450억의 출처를 잘 알고 있었다.

새삼 최두진 사장이 자기보고 한 황당한 소리가 떠올랐다.

장승일 실장에게 듣기는 했지만 정말 얼굴 앞에서 자기보고 주식을 팔라는 소리를 들을지는 상상도 못했다.

하지만 최민혁은 단호했다.

“정 안 되면, 회사를 조각내서 다 매각할 생각입니다. 지금의 저라면 꼭 못할 것도 없습니다. 할아버지 지분만으로 저를 막기는 어려울 겁니다.”

“너 지금 이 할아비를 협박하는 거야?”

“협박이 아니라 할아버지가 말씀한 것처럼 KM 전자에 책임감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지금이라도 고가에 회사를 매각하면 임직원은 그만한 대우를 받습니다. 당장 STB 사업부만 보세요. 900억 매각을 떠나서 단 한 사람의 임직원도 강제로 해고하지 않았습니다.”

그건 사실이었다.

오성 전자도 비싼 가격에 STB 사업부를 인수할 때부터 구조조정보다는 숙련된 인력을 효율적으로 사용할 계획까지 마쳤던 것이다.

시기적으로 오성 전자는 무섭게 팽창하고 있었기에 가능했다.

‘지분 매각이라…….’

최용욱 회장은 잠깐 생각에 잠겼다. 막상 손자에게서 지분을 팔라는 소리를 듣고 나서는 KM 전자 보고서를 다시 떠올렸다.

상황이 그렇게 좋지 않았다.

최두진 사장이 왜 지분을 매각했을까 싶었는데, 막상 자신이 그 처지에 처하자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오성 전자가 문제겠지. 아니, DL 전자를 비롯한 가전 3사 역시 뜯어먹으려고 하고 있어. 그래서 체질 개선을 하려고 한 것인데, 수익성이 갑자기 좋아질 수는 없어. 만약 그게 실패한다면, 이놈 말처럼 회사는 정말 어려워진다.’

“후유, 정말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냐?”

“아마 이보다 더 나빠질 겁니다. 제가 할아버지라면 차입금 문제는 보류한 채 우선 KM 전자를 포함한 그룹 내실부터 다질 겁니다.”

“하지만 다른 기업을 봐라.”

“그게 중요합니까? 중요한 것은 우리죠. 남 눈치보다 회사 가치에 집중하는 것이 오히려 상황이 바뀌면, 더 좋을 기회를 잡을 수 있습니다.”

최민혁 말은 이제 그저 자기주장이 아니었다.

이미 KM 전자 경영권을 자기 힘으로 쟁취한 패자의 말이었다.

아무리 최용욱 회장이라고 해도 함부로 무시할 수는 없었다. 문제는 KM 전자 지분을 넘기는 것이 간단한 일만은 아니라는 점이었다.

‘만약 이 사실을 알면, 내가 아무리 경고했다고 해도 욕심 많은 첫째나 셋째 녀석이 그냥 있으려고 하지 않을 텐데…….’

“알겠다. 하지만 간단한 문제가 아니야. 나중에 다시 할아비랑 이야기하자꾸나.”

“알겠습니다.”

최민혁도 너무 일방적으로 밀어붙이면 반감을 산다는 것을 알기에 한 걸음 물러났다. 이미 최용욱 회장이 과거 꼬장꼬장했던 모습과는 차이가 있는 것을 보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450억에 지분을 받았으면 좋겠는데. 아무래도 다른 큰아버지가 문제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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