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82화 (82/1,021)

#82

하지만 이런 뉴스는 불과 하루를 넘기지 않은 채 다 사라졌다.

데이콤 주가 폭락 이후에 괜히 주목받기 싫었던 오성 전자에서 또다시 손을 쓴 것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KM 전자의 주가였다.

KM 전자의 주가는 폭락과 반등을 거듭하면서 춤을 추었다.

신기한 점은 그런 상황에서도 900억 매각 소식이 있고 난 후에 주가가 반등해서 1,600원에 안착했다.

그러나 소액 주주는 오성 전자에 STB 사업부를 무려 900억에 매각했다는 사실을 안 후라 딱히 경영진을 비난하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최민혁이 430억을 벌어들였던 신의 투자도 주목을 받았다.

최민혁은 굳이 지금도 상장 이래로 최저 주가를 갱신하는 KM 전자 주가를 더 인위적으로 떨어뜨릴 생각이 없어서 느긋하게 기다렸는데, 장승일 실장의 방문에 고개를 갸웃했다.

“최 실장님의 지분 매입 제안 때문에 KM 전자에 대해서 몇 가지 조사를 진행하고 있습니다.”

“무슨 조사죠?”

“일테면 오혜정 비서 같은 경우입니다.”

그는 오혜정 비서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나서도 한동안 말을 하지 않았다.

꿈에서 봤든 석연치 않았든 그녀의 삶 일부를 떠올렸기 때문이다.

당시 최민혁은 드러난 사실만 가지고 오혜정 비서를 조사했는데, 최훈열 전무의 집요한 욕망을 고려하면 그가 아는 진실과는 다를 수도 있었다.

‘어쩌면 오혜정 비서의 자살에는 최훈열 전무가 관련이 있을지도 모르지.’

최민혁은 물끄러미 장승일 실장을 쳐다보았다.

“결국 오 비서 일은 저에게 맡기겠다고 이 말이군요.”

“회장님은 최 전무의 잘못을 바로잡기를 원하셨습니다.”

“오혜정 비서 일만 해도 간단합니다.”

“네?”

“아니, 생각을 해보세요. 미스코리아 대회 본선에 나가서 결국 하는 게 연예인이거나 아니면 그와 유사한 일 아닙니까. 그 일을 만들어주면 됩니다.”

“어떻게 말씀입니까?”

“우리 회사 모델도 괜찮죠. 사내 모델로 선정해서 내보내면 답이 나오겠지. 정말 뜰 거였다면 결국 뜨게 될 테니까. 그다음은 본인 선택입니다.”

“아, 정말 좋은 방법입니다.”

“장 실장님이 너무 복잡하게 생각해서 그런 겁니다. 인생은 생각해 보면 간단하니까. 욕망이 눈을 가려서 제대로 보지 못하는 것뿐입니다.”

“제가요?”

“공무원처럼 안정을 찾는 게 장 실장님 성격 아닙니까.”

“아닙니다.”

“아니긴요. 뻔히 보이는데…….”

그랬다. 공무원과 비슷한 성향이 있는 장승일 실장은 큰 욕망은 없었다. 그저 KM 그룹이 적당히 잘 굴러가기만을 원했다.

“끙.”

“오 비서는 걱정하지 마세요. 정말 문제가 되는 것은 첫째 큰아버지이니까.”

“아, 최 부회장님은 걱정 안 해도 될 겁니다. 회장님 지시에 따라서 당분간 KM 전자를 비롯한 계열사 일에서 손을 뗄 거니까.”

예상 밖의 이야기에 흥미롭게 쳐다보았다.

“오, 정말입니까?”

“최 부회장님에 대한 견제책 때문에 KM 전자를 다시 재조사를 진행한 것입니다. 특히 최훈열 전무가 저지른 오혜정 비서 일 때문에 회장님이 단단히 열받았습니다. 그래서 최훈열 전무의 일탈에 관해서 전면 재조사를 하고 있습니다.”

“하긴 할아버지 성격에 그렇겠죠.”

최용욱 회장의 청렴함은 제법 알려졌다. 당장 한남동 300평 주택 개별 납세액을 비롯한 세금 문제에 한해서는 깨끗하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KM 전자 내력을 다시 팠다면 오히려 경영 문제보다는 그런 소소한 문제에 더 접근했을 것이다.

그런 성격이기에 자식에 대해서 우려의 시선으로 지켜봤다.

최민혁이 기획실장 자리에 앉을 수 있었던 것도 다 그 이유 때문이다.

하지만 최민혁은 이제까지 이런 문제를 다 알고 있으면서도 입을 다문 장승일 실장을 더 높이 평가했다.

‘나로서는 그저 고맙지.’

“가만 생각해 보니, 할아버지가 이런 사실을 알았을 리가 없을 거고, 최훈열 전무에 대해서 장 실장님이 숨겨둔 한 수가 이거였군요.”

“흠흠.”

“세상 참 무섭습니다.”

최민혁은 진짜 놀라운 감정을 담아서 장승일 실장을 쳐다보았다. 최훈열 전무의 약점을 이제야 비로소 하나씩 내놓는 인내심에 감탄했다.

“그렇지 않습니다. 기조실에서 따로 취합된 자료를 확인 중에 우연히 나온 것뿐입니다.”

“우연히……. 그렇게 알겠습니다.”

“네.”

“그러면 언제 한남동을 방문하면 됩니까?”

“이번 주말이 좋을 듯합니다.”

“알겠습니다.”

* * *

최민혁은 예상한 것보다 늦은 최용욱 회장의 소환 통보에 느긋하게 움직였다.

다시 찾은 한남동 저택은 중세시대의 거대한 성처럼 느껴졌던 과거와는 달리 이제는 그렇게 커 보이지 않았다.

폴리 원단을 채용한 재킷과 클래식하면서도 편안한 느낌을 주는 바지를 입은 최민혁의 분위기는 여유가 넘쳐흘렀다.

김명준 과장은 너무 격식 없는 최민혁의 복장에 한마디 할까 하다가 관뒀다. 잔소리하면 더 엉뚱한 소리를 할 것 같았다.

아니나 다를까 최민혁은 김명준 과장의 시선을 의식하자 툴툴거렸다.

“우리도 회사 복장 자유화를 전면적으로 실시해야겠어요.”

“너무 성급하지 않을까요?”

사원의 자율성과 개성을 살려주기 위해 유니폼을 폐지하는 기업이 늘면서 자연스럽게 근무복에 대한 규제 역시 사라졌다.

HY 자동차 여직원 공장 제복이 그 한 예이다.

하지만 대부분 대기업은 여전히 복장 자유화에 제한을 걸었다.

최민혁은 딱히 직원을 생각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불편했다.

“아뇨. 오히려 지금이 딱 좋습니다. 조 팀장과 한번 상의를 해보세요.”

“…알겠습니다.”

김명준 과장이 앞장선 덕분에 저택 안으로 들어가는 것도 특별한 일은 없었다.

기다리고 있는 사람은 전 그룹 비서실장 채윤집이었다. 그는 최용욱 회장의 최측근으로 저택을 관리하는 집사이기도 했다.

“김 과장, 오랜만일세.”

“잘 지내셨습니까?”

“나야 소일하고 있어. 보자, 민혁 도련님을 다시 보니, 좋습니다. 집을 떠날 때보다 훨씬 좋아지셨습니다. 정말 보기 좋습니다.”

“채 집사님도 나이를 거꾸로 먹는 것 같습니다.”

살결이 한결 좋아진 채윤집은 날카로운 인상과는 달리 허허 웃기만 했다. 하지만 그는 냉정한 눈빛으로 최민혁 위아래를 살폈다.

복장에서 보여주는 그 여유는 저택을 떠날 때와는 차원이 달랐다.

그때는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아예 자신의 눈을 보지도 못했으니까.

그런데 지금은 마치 옆집 아저씨처럼 살갑게 자신을 대했다.

어지간한 임원도 이 저택에 오면, 기를 쓰지 못하는 것과는 대조적이었다.

‘최동영 상무도 저 정도는 아니잖아. 확실히 많이 바뀐 것은 같은데, 도대체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기에 저렇게 변한 것일까?’

특히 한국대 생활을 살펴본 바로는 재벌 3세 망나니 저리 가라 할 정도였다. 두 눈으로 본 최민혁은 그런 소문과는 전혀 달랐다.

장승일 기조실 실장과는 다른 라인을 구축하고 있는 그로서는 이미 얻은 정보를 다시 확인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면 다른 정보도 문제다.

김명준 과장이 따로 움직여서 주식으로 재미를 자주 봤다는 것까지 알았지만, 자세한 내막까지는 몰랐다.

지금 벨린 투자에 남아 있는 이들은 김명준 과장에게 워낙에 충실한 이들이라서 아직 정보를 제대로 확인하지 못했다.

“벨린 투자 쪽하고는 잘되어갑니까?”

“그럭저럭 요.”

그가 아는 바로는 벨린 투자 쪽은 이미 KM 그룹과는 별로 관계가 없었다.

“혹시 벨린 투자에 변화라도 있습니까? 제가 알기로 회사가 매각되었다는 소리도 있던데…….”

“글쎄요.”

그런데 최민혁은 교묘하게 질문을 다 피해 갔다.

“저는 요즘 회사에 적응한다고 정신이 없습니다. 지금은 STB 사업부 매각 때문에 어수선한 회사를 정리하고 있고요. 아주 힘들어 죽겠습니다.”

집요하게 벨린 투자에 대해서 물고 늘어졌지만, 교묘하게 그 질문을 다 피해간 최민혁은 절대로 단 하나의 정보도 답하지 않았다.

인상을 찡그린 채윤집 집사는 혀를 내둘렀다.

“그렇습니까.”

친절하게 현관문까지 열어주는 채윤집 집사.

다른 비서실 직원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지켜보기만 했다.

최민혁은 채윤집 집사를 슬그머니 쳐다보았다.

‘이 양반도 강단이 만만치 않아. 할아버지를 끝까지 지킨 사람이었으니, 그럴 만도 하지. 그룹 내의 어두운 정보도 많이 알고 있다고 하던데, 할아버지 비자금까지 관리하는 걸까?’

* * *

접시 깨지는 소리가 쨍그랑 나면서 집 안을 관리하는 이들이 한 사람에게 달려갔다.

이 소동을 만든 이는 최문경 부회장의 안사람인 김이경 여사였다. 그녀는 최민혁을 보자 놀라서 찻잔을 떨어뜨렸다.

KM 전자에서 일어난 일 때문에 최민혁을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하는 중에 유령처럼 나타난 그를 보자 깜짝 놀란 것이었다.

최민혁이 본가를 나가는데, 일조를 한 사람 중의 한 사람인 김이경은 당황한 감정을 추스르기 위해서 심호흡까지 했다.

그리고 태세를 전환했다.

“어머, 민혁이구나.”

떨리는 목소리까지 감추지 못한 김이경 여사는 최민혁을 차마 쳐다보지 못했다.

그룹 후계 구도가 탄탄하다고 해도 아직 완전히 최문경이 회장 자리에 앉은 것도 아니라서 김이경 여사가 최훈열 전무, 막내 최동열 상무를 세심하게 살펴 왔었다.

그녀도 최훈열 전무가 박살 날 때마다 환호했고, 감방에 들어갔을 때는 열광했다.

문제는 그 이후였다. KM 그룹 내에서 최훈열 전무의 구속 배후에 최민혁이 있다는 소리가 나온 것이다.

그녀도 뒤늦게 그 사실을 캐기 시작했지만 명확한 증거를 찾지는 못했다.

최민혁은 굳이 말을 섞지 않더라도 의미심장한 그녀의 눈빛에서 얼마나 자신을 주시해 왔는지가 충분히 느껴지자 씩 웃어 주었다.

“첫째 큰아버지도 잘 지내셨죠?”

“응. 민혁이가 걱정해 준 덕분에 별일이 없었어. 영란이도 네 이야기 많이 하더라.”

현재 KM 산업 기획팀 과장으로 일하는 최영란은 정말 최민혁의 이야기를 자주 했다. 정확히는 최민혁이 기획실장인 것에 불만을 품었고, 김이경에게 매일 하소연했다.

차녀 최지연은 자신도 부장부터 하겠다고 고집을 부리고 있었다.

심지어 막내 고3 최정수는 대학 입학과 동시에 휴학을 낸 후에 기획실장을 하겠다고 노골적으로 주장했다.

“아, 참, 내 정신 좀 봐.”

그녀는 부산을 떨면서 다시 허겁지겁 주방으로 가버렸다.

최민혁은 갑자기 나타난 자신 때문에 크게 당황한 김이경의 모습에 피식 웃고 말았다.

“…….”

집안의 암호랑이를 마치 고양이처럼 다룬 최민혁의 행동에 채윤집 집사는 떨떠름한 얼굴을 한 채 침묵했다.

그가 아는 최민혁은 김이경에게 단 한마디 말도 붙이지 못했다. 그리고 실제로 김이경은 과거에 최민혁을 겉으로는 좋게 대했을 뿐이었다.

최민혁은 마치 이웃집 아줌마를 만나기라도 한 것처럼 어깨를 으쓱했다.

“우리 첫째 큰어머님은 여전한 것 같아요.”

“평소 회장님에게 갈 찻잔을 저렇게 떨어뜨린 적은 없습니다만.”

“그렇습니까?”

“딱히 별 이야기는 안 한 것 같은데…….”

“보고도 모르십니까? 전 그냥 인사만 했을 뿐입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창백하게 굳은 김이경의 얼굴을 떠올린 채윤집 집사는 새삼 최민혁을 다시 쳐다보았다. 그가 기억한 바로 김이경은 집안에서 왕따가 된 최민혁을 정신적으로 많이 괴롭혔다.

그런데 지금 상황은 오히려 그 반대였다.

김이경이 왜 최민혁을 그런 눈으로 쳐다봤는지 짐작하면서도 잘 이해하지 못했다.

“확실히 도련님은 너무 많이 바뀌어서 정말 제가 알던 그분인지도 의심스럽습니다.”

최민혁은 집안에 일하는 사람에게 손거울을 받아서 확인했다.

“별로 달라진 것은 없어 보입니다만.”

“하하하.”

그는 최민혁이 이 집에 살 때만 해도 자신을 부담스러워했던 시선을 떠올리면서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고 말았다.

“아닙니다. 가시죠. 회장님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네.”

* * *

최용욱 회장도 최병문의 사후에 최민혁의 존재를 알았지만, 장남 최문경의 시선을 의식해서 자기 마음대로 하지 못했다.

그런데 최문경 부회장은 자발적으로 나서서 최민혁을 본가로 데려왔다.

매우 놀란 최용욱 회장은 최문경 부회장의 경영 실적 부진에 대해서도 가볍게 넘어갔다.

[기업을 경영하다 보면 잘될 때도 있지만 힘든 시기도 있어.]

당시 최용욱 회장은 주변 시선을 의식해서 최민혁과 일정한 거리를 두었다.

그럼에도 평범한 서민의 삶을 살아온 최민혁은 집안에서 왕따가 되어서 힘들게 생활했다.

내심 안쓰럽게 쳐다보던 최용욱 회장도 답답했지만, 손을 쓸 수가 없었다.

그런데 최민혁이 한국대에 입학하면서 상황이 좀 달라졌다.

최문경 부회장과 김이경 큰며느리가 최민혁의 독립을 주장한 것이었다.

[대학생이면 스스로 뭔가 할 때가 되었지 않습니까.]

단순히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몇 가지 조건을 내걸어서 최병문의 유산을 최민혁에게 물려주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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