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
평소 사회 활동을 통해서도 외부에 얼굴이 제법 알려진 김이경은 겉으로는 부드럽게 대하면서도 쉽게 최문경 부회장 말을 넘기지 않았다.
“당신 여기 와봐요.”
“나 좀 피곤한데, 내일 이야기하면 안 될까?”
“잠깐이면 돼요.”
깐깐한 그녀의 말에 최문경 부회장은 내키지 않았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평소 회사 일에 그녀의 조언을 받는 것은 이미 습관이 되었던 탓이다.
최문경 부회장은 양복을 벗어서 저택을 관리하는 이에게 넘겨주고는 맞은편에 와서 앉았다. 그런데 집안일을 하는 사람은 이미 지시를 받은 사람처럼 사라지고 없었다.
“우리 아빠가 당신과 약속한 것은 기억하고 있죠?”
“물론이지. 내가 장인어른 말씀을 잊을 리가 없잖아.”
“그 약속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우리 두 사람 관계도 중요하다는 것을 아시죠?”
“그룹 후계 관련된 이야기인데, 당연하잖아.”
저기압인 김이경 여사의 비위를 건드리지 않기 위해서 최소한 말을 부드럽게 했다.
“좋아요. 그러면 이제 쉽게 이야기하죠. 최두진 사장 지분 매각 이야기는 뭐예요? 정말 민혁이가 그 지분을 다 인수했어요?”
공시로 짧게 나온 내용.
알아도 이상하지 않았지만, 시차 때문에 피곤한 최문경 부회장은 속에서 욕이란 욕이 다 나오는 것을 억지로 참았다.
“KM 전자 적자가 심했잖아.”
“그 적자는 하루 이틀 된 것도 아니잖아요. 더욱이 아버님이 허락하지 않았다면 그분이 지분을 매각할 리가 없어요.”
“그렇지.”
‘그게 사실 이상하지. STB 사업부 매각은 그 다음 순서였으니까. 최 사장이 지분을 매각하지 않았다면 일어날 수가 없었어.’
“제 말은 그런 사실을 당신이 알았다면 사전에 알렸을 수도 있잖아요. 그룹 사정이 안 좋다면 저 처가에서 나설 수도 있고요.”
“그게…….”
‘차마 자신도 STB 사업부 매각 보고서를 살피면서 며칠 전에 알았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STB 사업부 매각도 장 실장, 아니, 아버지 주도 하에 황당하게 진행되었어.’
장승일 실장이 중간에 슬쩍 그 정보를 차단하고, 뒤늦게 안 최용욱 회장은 오히려 어물쩍 넘겼다는 것까지는 알지 못했다.
심지어 최민혁이 얼마나 비밀리에 신속하게 처리했는지 제대로 아는 사람이 없었다. 언론조차 이보다는 최훈열 재판에 더 집중했다.
“당신 설마 몰랐던 거예요?”
“아니. KM 전자 지분 관계가 복잡한 것은 당신도 잘 알잖아. 나라고 해서 최두진 사장도 있고, 문형섭 부사장을 건드릴 수가 없어서 지켜만 본 거야. 알고 보니 아버지가 승인한 거였어.”
실제로 대주주 최두진의 지지를 받는 김현우도 힘이 있지만, 중도층 주주의 지지를 받는 문형섭 부사장 역시 나름 영향력을 발휘했다.
특히 최용욱 회장의 지지를 받는 오영근 사장이 주도적이었다.
나머지 기타 주주의 지지를 받는 이들까지 해서 네 개로 쪼개져 있었다.
한심한 눈으로 남편을 쳐다본 김이경 여사도 복잡한 KM 전자 주주 세력층을 듣자 한숨을 내쉬었다.
“부회장이란 사람이 계열사 하나 관리도 못 하고 있다니. 아, 좋아요. 아버님이 끼어들었다면 어쩔 수가 없죠. 거긴 별로 크지도 않은 회사가 왜 그렇게 복잡한지 모르겠네요.”
목소리가 내려가자 안도한 최문경 부회장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나도 KM 전자 내에 끼어들 수는 없어. 자칫하면 KM 산업으로 불똥이 튈 수도 있어. 그러면 아버지가 바로 영향력을 발휘할 거야.”
최근 또 계속되는 최훈열 재판 뉴스 때문에 노이로제마저 걸린 김이경은 차갑게 말했다.
“그런가요. 하지만 최 전무님 하는 것을 보면 여자 문제도 있던데요. 설마 당신도 그런 것은 아니겠죠?”
“내가 그럴 리가 없잖아.”
“만약 내가 확인해서 오혜정 비서 같은 문제가 있다면 그냥 두지 않을 거예요!”
‘그건 또 어떻게 알았을까?’
“그, 그래.”
그도 최훈열 전무 욕을 하면서 여자 문제에 한해서는 입을 다물었다.
“분명히 경고했어요.”
“알았어.”
최문경 부회장은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지만 때마침 걸려온 전화를 확인하고 차가운 김이경 여사 시선에 전화를 끊어버리려다가 상대가 장승일 실장이라는 것을 알자 전화를 받았다.
[회장님이 지금 찾으십니다.]
[어.]
시차 때문에 잠이 쏟아지는 상황에서 계속 일이 터지자 짜증난 최문경 부회장은 따가운 김이경 여사의 시선을 받자 힘없이 말했다.
“우리 회장님이 오래. 아무래도 최두진 사장 지분 매각과 STB 사업부 매각 건 때문인 것 같아.”
“저도 같이 갈까요?”
“그건 아닌 것 같아.”
“알았어요. 하지만 정신 바짝 차리세요. 저도 최두진 사장님 측에 만나자고 해봤는데, 아예 피하는 눈치였어요. 그럴 행동을 하지 않는 분인데, 뭔가 더 있다는 말이에요!”
“알았어.”
‘그건 확실히 이상하네.’
* * *
최민혁은 최용욱 회장을 만나고 싶다는 제안을 한 이후에 갑자기 미국에 있던 최문경 부회장이 국내로 돌아왔다는 정보를 김명준 과장에게 들었다.
“흠.”
“왜 그러십니까?”
“좀 빠른 것 같아서요.”
“그게 무슨 말입니까?”
지금까지는 최문경 부회장의 시선을 차입금 쪽으로 돌린 덕분에 그의 시선을 잘 피했다.
아마 평소의 그였다면 최두진 사장이 지분을 매각하는 것을 그냥 지켜봤을 리가 없다. 필요하다면 처가의 도움을 얻어서라도 얼마든지 지분 확보를 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앞으로 조심해야겠어.’
“둘째 큰아버지 배후에는 첫째 큰아버지가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아, 물론 대놓고 지시한 것은 아니죠. 상황을 그럴듯하게 만들었으니까요. 지금까지는 그랬죠.”
이미 한 번 들었던 이야기라서 김명준 과장은 듣기만 했다.
“특히 KM 전자 내에 최두진 사장 지분 때문에 첫째 큰아버지도 간섭하기 어려웠죠. 그런데 만약 그 영향력이 사라진다면 상황이 달라진 거죠.”
“설마 KM 전자 경영권 싸움에도 끼어들 거라는 말씀입니까?”
“분명히 그렇게 될 겁니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조용했지 않습니까?”
“정부에서 훼방 놓은 덕분에 깨진 계약을 복원하려고 정신이 없었던 것뿐입니다. 지금까지 문제가 되었던 광주 공장부터 시작해서 해외 투자까지 모든 것이 잘 해결되고 있잖아요.”
특히 최문경 부회장은 필리핀 반도체 조립 공장 역시 최동영 KM 건설 상무와 손을 잡은 채 아슬아슬하게 문제를 잘 풀어갔다.
위기 상황에서 자존심을 버린 채 최동영 상무와도 손을 잡은 것이다.
“겉으로 보면 흠이 많은 것 같지만 그게 또 그렇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그런 점이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도 영향을 줍니다.”
“의외군요. 최 부회장님을 그렇게 높이 평가할 줄은 몰랐습니다.”
“김 과장님이 그렇게 생각하는 것 자체가 첫째 큰아버지의 장점이죠. 지금도 보세요. 상황이 이상하다는 것을 알자 바로 국내로 돌아왔잖아요. 그건 KM 전자 문제 확인 때문일 겁니다.”
“하면 부회장님이 이제 본격적으로 실장님을 압박한다는 말입니까?”
“아직은 긴가민가하겠죠. 그래도 김현우 상무 통해서 내막을 알면 달라지겠죠.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견제가 들어올 테니까요.”
“지금부터는 더 조심해야 한다는 말씀이군요.”
“네. 할아버지가 굳이 최문경 부회장을 따로 부른 이유도 연장선입니다. 할아버지 지분 매각 전에 최소한 최문경 부회장에게는 알려야 하니까요. 자연스럽게 지금까지 제 행적도 최문경 부회장의 귀에 들어갈 겁니다.”
“저는 최문경 부회장의 동선을 철저하게 확인하겠습니다.”
“잘 부탁해요.”
이미 임시 주주총회에서 아찔한 경험을 한 최민혁은 이번에 반드시 할아버지의 지분을 얻기 위해서 단단히 마음먹었다.
‘할아버지와 쉽게 갔으면 좋겠는데……. 문제는 첫째 큰아버지야. 쓸쓸 나에게 관심을 돌릴 때가 되었어. 최악의 경우에 오성 전자 같은 애들을 이용해서 방해할 수도 있잖아. 방법이 뭐가 있을까?’
* * *
KM 전자가 안 좋은 것은 TV 사업부의 작년 적자가 무려 700억이 넘는다는 점이다. 이것 때문에 TV 사업부 연구원이 작년에만 15명이 그만뒀는데, 오성 전자와 LC 전자로 다 이직했다. 아직 핵심 인력 이탈은 없었지만, 그것도 시간문제였다.
막대한 차입금에 대한 기대 때문에 들떠서 KM 전자 내부에 구멍이 나 있는 것을 다들 간과했다.
KM 전자 TV 사업부 보고서에는 이런 지표가 다 빠져 있었다.
뒤늦게 추가 보고서에서 그 내용을 확인한 최용욱 회장은 한숨을 내쉬었고, 서재로 들어온 첫째를 보자 착잡했다.
최민혁의 이야기를 할 수가 없어서 둘째 재판과 관련해서 추가로 조사하다 발견한 것 중에 한 가지를 꺼냈다.
“너도 오혜정 비서 이야기는 알지?”
자신과 관계가 없는 오혜정 비서 이야기에 최문경 부회장은 화가 치밀어 오르는 것을 억지로 참았다.
“…네.”
최용욱 회장은 못마땅한 최문경의 태도에 냉정하게 말했다.
“아직 KM 산업은 네 것이 아니야?”
아내에 이어서 아버지마저 오혜정 비서 타령을 하자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갑자기 오 비서 이야기를 왜 꺼내는지 모르겠습니다.”
“여자를 매사에 조심하란 소리야. 너도 비서 엉덩이를 잡아 봤다면서?”
“하, 말도 안 됩니다!”
“증인이 많아. 설마 내 앞에서도 거짓말할 생각이냐?”
뒤늦게 회식 자리에서 있었던 일을 문제 삼는 것을 안 최문경 부회장은 어이가 없었다.
“그건 회식 자리에서 넘어질 때 실수로 그런 것뿐입니다. 제 의도는 아니었습니다!”
사실 그런지 아닌지 알 수는 없었다. 의도적인 실수인지, 정말 실수였는지 당시 그 장면을 봤던 사람이 아니라면 알 수가 없었다.
최용욱 회장도 그 부분까지는 잘 몰랐다. 이런 안건을 꺼낸 것 자체가 여자 문제를 조심하라는 경고에 가까웠다.
“그렇다고 해도 몰래 언론사에 제보까지 한 피해자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감사실 조사 결과에 따르면 네놈도 여자에게 질척거린 증거가 제법 있어. 만약 일반 임직원이었다면 퇴출당하고도 남아.”
“정말 아닙니다!”
“혹시 괜한 문제를 만들지 마. 그 직원은 이미 그만뒀으니까.”
“…네.”
조금 뜬금없는 이야기에 최문경 부회장도 당혹스럽기는 매한가지였다.
‘훈열이 이 새끼 때문에 이게 도대체 무슨 황당한 경우람.’
“그리고 훈열이 그놈이 진짜 가관이더라. 과거 미스코리아 예선 대회에서 오 비서를 떨어지게 하고, 우리 KM 전자 비서실 쪽에 지원하도록 손을 쓴 것은 알고 있어?”
‘아니, 저걸 어떻게 알았대?’
“…잘 모릅니다.”
“내가 하도 어이가 없어서 어떤 아이인가 싶어서 나도 확인을 해봤다. 올해 미스코리아 진보다 미모가 훨씬 낫더구나.”
“…….”
최문경 부회장은 억울한지 한동안 침묵했다. 자기 아버지가 왜 저런 소리를 하는지 모를 수가 없었다. 조심하란 경고였다.
“문경아.”
“…네.”
“당분간은 KM 산업에만 집중하고, 다른 계열사 쪽에서는 손을 떼. KM 전자 일도 마찬가지다. 이번 차입금 문제는 간단한 것이 아니야. 그 일에만 집중하도록 해.”
원래는 최용욱 회장에게 KM 전자 문제를 따지려고 했던 최문경 부회장은 크게 당황했다.
“하, 하지만 지금 최두진 사장님이 자기 지분을 매각한 상황입니다. 그룹 부회장으로 그냥 지켜만 보고 있으란 말입니까?”
“아니, 그 일은 내가 처리하마.”
“네? 아버지 몸은 괜찮은 겁니까?”
“걱정하지 마.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하지만 주치의도 이미 경고를 했지 않습니까. 무리하다가는 진짜 큰일 난다고요. 아무리 제가 미덥다고 해도 아직 큰 실수를 한 적이 없습니다. 제가 알아서 다 처리하겠습니다.”
“KM 산업과 다른 계열사만 처리해. 그러면 네가 걱정하는 일은 없을 테니까.”
“하, 하지만…….”
“내가 할 일은 간단해. KM 산업 경영에만 집중해. 차입금이 없다면 KM 산업도 체질 개선이 쉽지 않을 것이니까. 그 결과를 보고 싶구나.”
“…알겠습니다.”
하지만 최문경 부회장은 뭔가 좀 찜찜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도대체 아버지가 왜 이러는 걸까?’
최용욱 회장은 최민혁을 만나기 앞서서 사전 정지 작업으로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이 녀석을 가만히 두면, 분명히 KM 전자에 간섭하려고 할 거야. 이 정도면 알아서 자제하겠지. 이제 민혁이 녀석을 만나봐야겠어.’
* * *
지금까지는 고용 승계와 같은 자잘한 문제 협상과 오성 전자의 영향력 때문에 STB 사업부 매각 소식이 묻히나 싶었지만, 시간이 갈수록 언론의 관심을 다시 받았다.
사업부 인수 당사자가 오성 전자라서 특히 주목을 받은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