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80화 (80/1,021)

#80

“아, 좋아, 그건 따로 조사를 해봐. 생각해 볼수록 민혁 그놈이 용한 것 같아. 신기하단 말이야. 정말 부동산과 그 김기범이란 놈에게 빌린 돈으로 투자해서 만든 돈 맞아?”

“그건 제가 확인한 사안입니다. 이미 데이콤 지분 사들인 것은 회장님도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렇지. 그게 진짜 대박이었어. 하,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네.”

최용욱 회장은 이제 최민혁의 방문에 대해 본격적으로 고민하면서 자연스럽게 최민혁과 관련된 의혹에 대해서도 생각했다.

황당하게도 최민혁 방문을 그저 손자 방문으로만 취급할 수가 없었다.

“문경이 그 녀석은 아직도 미국에 있어?”

“Advanced MOS 협상 일도 그렇고, 미국 내의 법인 문제 때문에 아직 미국에 있습니다.”

전자는 기술적인 문제고, 후자는 차입금과 관련된 일이었다. 당장 차입금을 끌어오기 힘들어지자 계약을 재조정하러 간 것이었다.

하지만 정부에서 노골적으로 반대하는 상황이라서 해결이 쉽지가 않았다.

최문경 부회장은 그 때문에 STB 사업부 매각이나 KM 전자 지분 일 따위에는 관여할 여유가 없었다.

“그 녀석도 차입금을 반대했다고 했지?”

“그렇습니다. 손동권 전 실장보다 더 반발이 심했으니까요.”

“그 X 리포트 말이야. 우리 그룹 내에서 초창기에 검토한 자료를 한번 가져와 봐.”

“알겠습니다.”

장승일 실장도 서재를 잠깐 벗어났다가 보고서를 들고 나타나서 보여주었다.

“이것은 과거 기조실에서 요청해서 최종상 한국대 경영학 교수가 만든 KM 그룹에 대한 보고서입니다. 이미 회장님에게도 보고를 올린 내용입니다.”

얼핏 봐서는 단순히 한 기업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보고서였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그중에 적지 않은 부분이 KM 전자에 대한 것을 다루었다.

특히 몇 년 안에 KM 전자 위기는 본격화될 것이고, 만약 외부 충격이나 손실이 가해지면 가속도가 붙는 것을 예측했다.

심각한 점은 KM 전자의 부실이 다른 계열사에 전이될 때 KM 그룹의 미래 역시 불확실한 점을 지적했다.

그리고 이 보고 내용은 최근 한국 정부가 벌이고 있는 경제 정책과 엮어서 KM 그룹 존속 가치가 고작 5년에 불과하다고 냉혹하게 결론 내렸다.

“으음.”

최용욱 회장은 이미 이 보고에 대한 것을 몇 차례 들었지만, 당시 웃고 넘어간 것을 가까스로 기억했다.

“장 실장, 그때 자네가 반대하기는 했지만 결국 한 걸음 물러났지?”

“죄송합니다.”

“설마 나 때문인가?”

“…….”

장승일 실장은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한 번 꽂히면 불도저처럼 밀어붙이는 최용욱 회장의 성정을 잘 알기 때문이다.

최용욱 회장은 기존 보고서와 X 리포트 수정안과 같이 보며 두 가지를 비교했다. 그의 안색은 시간이 갈수록 딱딱하게 굳어갔다.

“혼자 있고 싶네.”

장승일 실장은 아무런 말없이 조용히 일어섰다.

“이 일도 결국 모두 민혁이 때문에 일어난 일인가?”

“네.”

“장 실장.”

“최민혁 도련님에 대한 것은 다시 원점에서 재조사해서 보고하겠습니다.”

“그 말은 몇 번이나 했어. 자네가 생각해도 이상한 게 한둘이 아니잖아. 물론 민혁이 이 녀석 심계가 보통이 아니라서 밝히기 어렵다고 해도 제대로 좀 조사를 해봐.”

“알겠습니다.”

그는 그 누구도 KM 그룹 위기에 대해서 말하지 않는 상황에서 ‘나 홀로 위기다!’라고 외친 이가 자신의 손자라는 것을 느끼자 겨우 미소를 지었다.

“설마 우리 보고서를 민혁이 녀석이 본 것은 아니겠지?”

“그 보고서를 본 사람은 회사 내에서 열 명이 넘지 않습니다. 확실한 것 중의 하나가 도련님이 회사 일에 관여한 시간은 몇 달 되지 않았습니다.”

“몇 달이라……. 허, 6개월만 회사 경영에 간섭하면 회사 기둥뿌리부터 뽑겠어.”

“…….”

최용욱 회장도 탁월한 능력을 보인 최민혁의 주장을 무시할 수가 없어서 다시 검토 중인 차입금 문제에 대해서 진지하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문경이 그 녀석 상황도 따로 확인을 해봐.”

“알겠습니다.”

* * *

겉으로는 활활 타오르는 한국 경제 위기를 논한 이는 생각보다 많았다. 그럼에도 그 주장은 어디까지나 주장에 거쳤다.

KM 그룹만 해도 세계 최고 증권 회사인 샐로먼 브러더스에게서 합작 증권사를 설립하자는 주장을 받아 왔었다.

샐로먼 브러더스는 국내 증시 영향력을 키울 목적으로 국내 업체를 접견했다.

물론 KM 그룹만이 아니라 다른 중견 기업 역시 그 대상으로 미룡상사, 경원산업 역시 빼놓기는 어렵다.

그런데 샐로먼 브러더스는 이미 3년 전에 국채 부정입찰 사건으로 제재를 받았던 기업이었다. 비록 3년이 지나서 자격요건은 해당하지만 국내 업체를 끌어들여서 한국 금융당국의 시선을 피하려고 했다.

오성 전자가 끼어들면서 상황이 바뀐 것이었다.

오성 전자도 STB 사업부 인수 공시를 했지만 다른 한 편으로 언론에 압력을 넣어서 기사를 최대한 막았다.

괜히 중견 그룹에 압력을 넣어서 사업부를 강탈했다는 소리를 듣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좋은 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KM 전자 주가 역시 크게 영향을 받았는데, STB 사업부 매각 소문에 1,300원까지 폭락한 주가는 뒤늦게 매각대금이 900억이라는 소리에 다시 1,500원까지 반등했다.

이렇듯 단기 롤러코스터를 타면서 KM 전자와 관련된 온갖 소문이 다 돌았다.

그러던 중 KM 전자의 미래 기업 가치를 걱정하는 보고서가 나오자 다시 1,400원대로 추락했다.

최민혁 조사 과정에서 손자와 자식 갈등을 새삼 느낀 최용욱 회장은 이런 상황에서도 SB의 노골적인 투자 제안에 고개를 갸웃했다.

“생각해 보면 우리 회사에 차입금에 대한 작업을 해왔던 샐로먼이란 놈들도 뭔가 다른 꿍꿍이가 있어.”

장승일 실장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프랑스, 독일, 미국 자본 역시 믿을 수 없기는 매한가지입니다. 8억 달러를 출자한다고 하지만 이것저것 옵션이 달린 조건을 보면 독이 될 사안이 많습니다. 만약 회사 수익이 제대로 나지 않으면 건립한 공장을 다 팔아치울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해서 남는 것이 없잖아?”

“하지만 기존 그룹 자산까지 다 팔아치운다면 이야기가 다릅니다.”

“으음.”

막대한 출자를 받기 위해서 그룹 담보는 불가피했다. 지분 역시 빼놓을 수가 없는 일이었고, 최민혁에게 상속한 지분 역시 마찬가지였다.

장승일 실장은 더욱 조심스럽게 말했다.

“최민혁 실장님이 얼마 전에 차입금을 그렇게 반대한 것도 자칫하면 자신에게 불똥이 튀는 것을 염려하기 때문입니다. 무조건 회장님에게 반기를 든 것은 아닙니다.”

“내가 손자에게도 바보처럼 보였나?”

“…….”

“됐어. 자네가 말하지 않아도 알겠어. 허어, 이거야 원, 도대체 왜 이제껏 아무도 말 안 한 건가. 아, 그래, 말을 했는데, 내가 무시했다고?”

그때는 사소하게 넘긴 것 하나하나가 지금은 마치 지뢰와 별반 차이가 없었다.

겉으로 볼 때는 별것 아닌데, 막상 그게 터지면 KM 그룹에 치명타를 줄 것들이었다.

심각성을 뒤늦게 깨달은 최용욱 회장은 특히 KM 전자의 지속적인 적자가 눈에 밟혔다. 차입금을 들여오면 희석되겠지만, 근본적인 회사 수익 구조가 바뀐 것은 아니었다.

“이것도 민혁이 녀석이 그렇게 주장했다고 한 것 중의 하나군.”

“특히 실장님은 아예 이들이 이것을 이용해서 KM 전자에 대한 경영권마저 가져갈 것이라고 했습니다.”

오히려 엉뚱한 곳에 투자했다가 투자 손실은 손실대로 나고, 회사 적자폭은 더 커져서 부채가 산처럼 불어날 수도 있었다.

‘이걸 왜 내가 간과하고 지나쳤을까?’

최용욱 회장은 새삼 자신이 나이가 들었다는 것을 느꼈다. 어쩌면 최민혁의 유산 상속을 서두른 것도 그 이유 때문이었다.

‘이건 잘했어.’

그 당시에는 자신도 미쳤다고 생각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면 신의 한 수였다.

최민혁이 경영 승계에 끼어들면서 자신이 걱정한 모든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 기미를 보였던 것이다.

그런데 좀 더 근원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했다.

그는 새삼 최민혁이 이제는 손자가 아니라 경영 전문가처럼 느껴지자 혀를 내둘렀다. 이제는 최민혁의 지분 매입 제안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문제는 손자에게 자기 지분을 현금 주고 판다는 점이다.

일단 이 문제도 자식들이 민감하게 반응할 일이라서 확인이 필요했다.

그는 뒤늦게 한 가지 사실을 깨달았다.

“혹시 문경이 그 녀석은 STB 사업부 매각에 대해서 알아?”

장승일 실장은 머리를 긁적였다.

“아마 일부 정보는 알아도 자세히는 모를 겁니다. 제가 가능하면 정보를 차단했으니까요.”

“…의도적으로 그런 건가?”

“굳이 오성 전자 협상과도 머리가 복잡한데, 최 부회장님까지 넣어서 문제를 만들 필요는 없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쯧.”

탐욕스러운 큰놈의 성정을 떠올린 최용욱 회장도 장승일 실장을 탓하지 않았다. 아니, 차라리 내심 잘했다고 생각하며 그 문제를 넘어갔다.

“문경이가 잠깐 한국에 온다고 했는데, 언제 도착하지?”

“내일 도착할 예정입니다.”

“그 녀석이 오면 바로 불러.”

“알겠습니다.”

* * *

최문경 부회장은 미국 법인 문제 때문에 정신없이 뛰어다니면서 새삼 위기감을 느꼈다. 차입금 문제가 뒤틀어지면서 이미 협상이 끝난 일도 흔들렸기 때문이다.

그는 특히 협상에 정신이 없는 중에 최두진 사장이 자기 지분 매각과 연이은 STB 사업부 매각 소식을 듣고 나서는 어이가 없었다.

부회장인 자신에게 단 하나의 보고도 없이 진행된 일에 분노한 것이다.

그런데 알고 보니 최용욱 회장의 승인하에 진행된 일이었다.

‘장 실장 이 개새끼가 한 짓이겠지.’

하지만 미국 내의 다급한 일 때문에 한국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전화상으로 최두진 사장에게 연락을 취해보았다.

[미안하네만 이미 지분을 최민혁 실장에게 다 넘겼어. 이제 KM 전자 건은 신경 쓰고 싶지 않네. 그 건에 대해서는 최 회장이랑 얘기해 봐!]

[?]

‘여기 민혁이가 왜 나와?’

화를 버럭 내는 최두진 사장의 목소리는 평소와는 많이 달랐다.

최문경 부회장은 일이 이상하게 꼬여가는 것에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았다.

그도 결국 KM 전자의 문제를 다시 생각하다가 문득 최민혁의 문제를 간과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특히 STB 사업부 매각에서 보여준 최민혁 능력은 간단하지만은 않았다.

‘김 상무가 뭔가 한 것일까. 아니면 최민혁 이놈이 뭔가 수작을 부릴 것일까. 도대체 뭘 어떻게 해야 150억 남짓한 사업부를 900억에 매각할 수가 있을까? 오성 전자 이놈들이 미친 것 아냐?’

그는 이제까지 최민혁을 강아지 새끼로 생각했지만, 막상 지금 와서는 다르게 생각했다.

‘너무 안이했어.’

물론 변명 거리는 있었다.

막내는 의문의 사고로 후계 구도에서 사라졌고, 셋째 최동영은 건설 사업에서 막대한 적자를 봤다.

차입금 문제가 터지자 눈치 빠른 최동영은 재산 매각에만 집중한 채 쥐 죽은 듯이 나서지 않았다.

‘KM 건설 적자도 만만치 않았으니까.’

특히 KM 전자와는 달리 건설 사업 속성상 KM 건설 역시 비자금을 마련하기 위해서 빼돌린 손실이 회사의 발목을 잡았다. 정치권에 로비라는 명분 때문이라고 하지만 재계 10대 그룹과는 자본 규모가 달랐던 것이다.

최문경 부회장은 유리한 상황에서 어쩌면 그룹 후계자 자리를 쉽게 차지할 수 있다고 확신해서 차마 최민혁에게 손을 댈 수는 없었다.

‘훈열이가 알아서 할 거라 생각했는데…….’

최훈열은 지금 재판 중이고, 1심에서 형량이 제법 나올 것이 분명했다.

인천 공항에 도착한 최문경 부회장은 피로 때문에 바로 집으로 갔다.

우선 돌아가는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서 집에서 휴식을 취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아내 김이경의 모습이 평소와는 많이 달랐다.

“미국 일은 잘 끝났어요?”

“큰 문제는 없을 것 같아.”

“그자들이 그냥 이대로 순순히 넘어가자고 하던가요?”

“그쪽에서 계약을 좀 조정해 달라고 했는데, 잘 해결 될 거야.”

사실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차입금 이자율을 약간만 조정해도 수백억, 아니, 수천억 차이가 생기니까.

특히 국내 정치 문제가 발목을 잡았다.

시간이 지나면 해결될 것이라고 믿은 최문경 부회장은 필요하다면 미국 투자자를 이용해서 미국 정가의 힘이라도 빌릴 생각이었다.

‘비자금을 더 달라니. 한국이나 미국이나 다른 것이 없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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