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9
철없는 김현우 상무 때문에 화가 난 문형섭 부사장은 목소리를 높였다.
“이제까지 한솥밥을 먹은 처지에 현실을 말해준 겁니다. 그런데 아직도 상황 파악을 못 하고 있으니, 걱정됩니다. 아니, 사장님이 그런 현실을 더 잘 알면서 아무런 말도 안 합니까?”
“그거야…….”
“최 회장님이 아니었다면 사장님도 지금까지 잘 버틸 수 있었겠습니까? 최훈열 전무 이후에 얼마나 말이 많은지는 사장님이 더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 친구도 참.”
문형섭 부사장의 날카로운 말에도 오영근 사장은 민망해할 뿐, 기분 나빠하지 않았다. 그게 사실이니까. 사실 스스로 그만두려고 했었다. 그리고 문형섭 부사장은 오히려 그것을 말렸다.
그러니 문형섭 부사장이 저렇게 대놓고 공격하는 것도 기분 나쁘지 않았다.
다 자신을 위한 충고였으니까.
문형섭 부사장은 누구보다 오성 전자의 생리를 잘 알았다.
“저에게도 스카우트 제안이 들어왔을 때 그 자리에서 거절했습니다. 왜냐하면, 여기 있으면 기계 부품처럼 사람을 대우하지 않으니까요. 전 사람 냄새가 나는 이곳이 좋은 겁니다. 그런데 지금 떠나는 직원은 어떻게 될까요? 내 새끼가 괄시받는 것이 뻔히 보이는데, 좋을 리가 있습니까.”
의외의 말에 오영근 사장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문형섭 부사장을 쳐다보았다. 결과가 없다고 직원을 매일 들들 볶는 그의 모습과는 전혀 달랐기 때문이다.
‘하긴 문형섭 부사장이 직접 직원을 괴롭히거나, 자른 적은 없었지. 큰 실수를 해도 어지간해서 다 넘어갔으니까.’
그는 흥분한 김현우 상무를 보면서 쓰게 웃었다.
“김 상무, 헤어지는 마당에 더 말하면 잔소리가 될 것 같아서 이 정도로 하겠어. 오성 전자 가서도 잘 적응하길 바라.”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래.”
김현우 상무는 한쪽에서 묘한 표정을 한 오수연 비서에게 몇 번이나 설득도 하면서 은근히 자신이 잘못했다고 몇 번이나 말했다.
“말씀은 감사합니다만, 전 여기 남겠습니다.”
“알았어. 하지만 지난 일은 내가 다시 한번 사과하지.”
“정말 괜찮습니다.”
두 사람은 다시 신바람이 난 김현우 상무가 떠나는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솔직히 그들은 아직도 지금 상황이 선뜻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귀신에 홀린 것 같다니까. 이게 모두 최 실장이 손을 쓴 거라는 건 알겠는데, 도대체 어떻게 이런 식으로 일을 꾸민 것일까?’
신바람이 난 채로 회사를 떠나는 김현우 상무 모습은 불가사의하기까지 했다.
문형섭 부사장이 결국 오영근 사장에게 툴툴거렸다.
“전 다른 것을 떠나서 최두진 사장이 왜 자기 지분을 매각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비록 벨린 투자라는 이름을 빌렸지만 말이죠.”
“나도 자세한 것은 몰라. 최 회장님이 뒤에서 손을 쓴 것 같기는 한데, 최 회장님도 자세한 것은 잘 모르는 눈치이니까.”
“네? 아니, 회장님이 뒤에서 작업한 것 아니었습니까?”
“장 실장도 뭔가 조사하는 눈치였으니, 그건 절대로 아닐 거야.”
“아니, 임 부장을 따로 만나서 물어봐도 제대로 대답을 안 해주던데, 최 실장이 도대체 무슨 수로 상황을 이렇게 만들었다는 말입니까?”
“나도 모르지.”
두 사람은 서로 이야기를 나눌수록 이 상황이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최훈열 전무 구속도 그렇지만 김현우 상무 일도 영문을 모르겠네.’
* * *
오수연 비서는 김현우 상무가 개인 짐을 챙겨서 떠나는 모습을 보면서 기분이 묘했다.
원래라면 자신이 다른 이사 비서로 옮겨야 했지만, 오히려 김현우 상무가 회사를 떠났기 때문이다.
사실 그녀 처지에서는 귀신에 홀린 것 같아서 얼떨떨했다.
같이 점심을 먹던 오혜정 비서가 망부석이 된 그녀를 위로했다.
“괜찮아?”
“아, 언니, 그냥 기분이 이상해서요.”
“김 상무가 떠난 것 때문에 그래?”
“네. 설마 이런 식으로 매듭 날지는 상상도 못 했어요.”
오혜정 비서가 피식 웃고 말았다.
“이게 모두 최 실장님의 솜씨잖아. 정말 귀신도 울고 갈 정도라니까.”
오영근 사장 비서인 한선화도 고개를 갸웃했다.
“그걸 어떻게 알아?”
“저도 자세한 것은 모르지만 임기석 부장 통해서 뭔가 한 것은 짐작해요. 이 일이 있기 전에 실장님이 임 부장님을 따로 만나서 뭔가 지시하는 것을 봤거든요.”
“에이, 그거야 매각에 앞서서 사전에 팀 분위기를 말해주려고 한 것이겠지.”
같이 점심을 먹던 다른 이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 역시 김현우 상무가 비디오 특허를 출원했다는 소문에 솔직히 놀랐던 것이다.
하지만 최민혁 실장 옆에서 늘 지켜본 오혜정 생각은 좀 달랐다.
“제가 실장님이 STB 사업부 분석하는 것을 다 봤는데, 모르겠습니까. 얼마나 크게 실망했는데요. 그런데 갑자기 떡하니 비디오 특허가 나왔지 뭐겠어요.”
“설마 이번 일도 최민혁 실장님이 손을 썼다는 말이야?”
“그건 저도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어떤 형태로든지 관여했을 겁니다. 덕분에 무려 900억에 사업부를 매각한 것이잖아요. 안 그러면 그게 말이 돼요?”
한선화 비서도 들은 내용을 떠올리면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그건 좀 이상하더라. 난 오성 전자에 왜 돈도 안 되는 STB 사업부를 무려 900억이나 주고 인수했을까 이해를 못 했어. 거기 공장 부지 부동산도 얼마 안 되잖아.”
VCR 양산 이후에 어쩔 수 없이 따로 파산한 다른 중소기업 공장을 추가로 인수했는데, 그 부동산은 가치 측면에서 그다지 강점이 없었다.
사실 오성 전자가 왜 굳이 자기 앞마당인 구미나 수원이 아니라 안산 쪽의 귀퉁이에 있는 공장을 인수했는지 의아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부분은 권태성 실장도 소니가 끼어들었다는 말을 듣기 무섭게 빠른 인수를 위해서 어쩔 수 없었다. 그러나 그들이 그런 내막까지는 자세히 알 수가 없었다.
한선화 비서도 혀를 내둘렀다.
“확실히 뭔가 더 있구나.”
오혜정 비서가 허탈한 표정의 오수연을 보면서 피식 웃고 말았다.
“솔직히 성희롱 가지고 문제 삼으면 결국 피해를 보는 것은 수연이잖아요. 설사 김현우 상무가 그 때문에 회사를 그만둔다고 해도 수연이도 회사를 그만둘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 지금 보세요. 떠나는 김 상무도 웃으면서 아무 소리 안 하고, 수연이도 별 타격이 없잖아요.”
“하지만 난 그거 싫더라. 결국, 그 작자가 오성 전자에서 잘 나간다는 소리가 되잖아.”
“과연 그럴까요? 오성 전자에 있는 제 친구 이야기 들어보니, 김 상무 같은 사람은 6개월 버티기도 어렵다고 해요. 즉 최 실장님은 자신 손이 아니라 오성 전자를 이용해서 김현우 상무를 쳐낸 것이나 마찬가지죠. 심지어 그 와중에 900억은 따로 챙겼고요.”
“와!”
옆에 있던 비서 팀 전원이 다들 입을 살짝 벌린 채 이 기묘한 사건의 진실을 깨달았다. 생각해 보면, 이상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한선화 비서도 뒤늦게야 혀를 내둘렀다.
“…우리 실장님 진짜 대단하시다.”
“비밀이 많은 분이죠.”
오혜정 비서도 공감하면서 요즘 들어서 유독 조용한 최민혁의 얼굴을 떠올렸다.
‘진짜 대단한 분이셔.’
* * *
보통 안 좋은 소리가 계속 나오게 마련인 구조조정에도 회사 내에서 오히려 훈훈한 소리가 계속 나오는 상황이 계속되었다.
기획 팀을 포함한 다른 부서에서도 다들 고개를 갸웃하기만 했다.
최민혁은 깔끔한 이 마무리에 크게 만족해서 다음 계획에 착수했다.
[네, 접니다.]
[어쩐 일로 바쁜 최 실장님이 이렇게 전화를 다 주셨습니까?]
[하하하, 장 실장님이 마음 상했나 보군요. 다름이 아니라 할아버지를 좀 뵙고 싶어서요.]
[이미 일이 다 끝났는데, 회장님에게 무슨 말을 하시려고요? 하려면 일을 하기 전에 말을 해야 한 것이 옳지 않을까요?]
[아, STB 사업부 매각 건 때문이 아니라 다른 일 때문입니다.]
장승일 실장 역시 최두진 사장의 지분을 먹은 최민혁이 다음 순서로 노릴 수 있는 것이 무엇인지 모르지 않았다.
[…설마 회장님의 KM 전자 지분 때문입니까?]
[하하하, 그렇게 짐작하시니, 말하기 편하겠네요. 미리 말씀 좀 잘 전해주세요.]
[하지만 지분 승계는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당장 최문경 부회장님도 반발하겠지만, 최동영 KM 건설 전무님도 그냥 있지 않을 겁니다. 규모만 놓고 보면 최동영 전무님이 더 그 지분을 원할 겁니다.]
[글쎄요. 과연 KM 건설 관리도 제대로 못 하는 셋째 큰아버지가 당당하게 주장할 수 있을까요?]
[그렇다고 해도 이미 지분 일부를 상속받은 상황에서 나머지 지분을…….]
[지금 그룹 사정 안 좋죠? 요즘 현금이 많이 필요한 것 같은데, 제가 돈 주고 그 지분 사들이겠습니다.]
[네?]
장승일 실장도 예상을 벗어난 최민혁 말에 깜짝 놀랐다. 아무리 지분 가치가 내려갔다고 해도 1,000억이 넘는 지분을 사들이기란 쉽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최민혁은 그렇게 많은 돈을 낼 생각은 전혀 없었다.
[잘 아시겠지만, STB 사업부 매각 사실이 알려지면 KM 전자 주가 폭락은 불가피합니다. 그러니 이번 기회가 그나마 제값 주고 팔 기회입니다.]
[…회장님 생각은 다를 겁니다.]
[알아요. 할아버지가 남이라면 지분을 절대로 팔지 않겠죠. 하지만 저라면 이야기가 다르죠. 어차피 상속할 거라면 지금 하는 것이 상속세를 아낄 수가 있어요. 괜히 STB 매각으로 주가 폭락 이후에 넘기면 말이 나올 겁니다.]
[…그건 좀 생각을 해봐야 합니다.]
[그렇죠? 그래서 제가 미리 장 실장님에게 말하는 겁니다. 시간이 그렇게 많지 않아요. 그러니 바로 약속을 잡아주세요.]
[…네.]
* * *
KM 전자의 STB 매각 관련 문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KM 전자 관련 건을 살피던 최용욱 회장도 장승일 실장이 갑자기 나타나자 의아했다.
“또 무슨 일이 터진 거야?”
“아, 아닙니다.”
“덩치가 크지도 않는 회사에서 무슨 사건·사고가 이렇게 많아?”
민망한 장승일 실장도 최용욱 회장의 분노에 그저 고개를 조아렸다. 그도 다른 계열사 관리에 정신이 없는데, 계속해서 KM 전자에 문제가 터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번 일은 최용욱 회장도 깜짝 놀랄 일이었다.
최용욱 회장도 이제는 눈치를 챘다.
“아무래도 민혁이 그놈 일 같은데, 도대체 무슨 이야기야?”
“그게 최 실장님이 회장님을 만나고 싶다고 연락을 해왔습니다.”
“아니, 손주가 할아버지 만나는데, 뭐가 그렇게 절차가 복잡해?”
사실 최민혁이 본가로 들어왔을 때 식사 시간 외에는 제대로 만난 적이 없는 최용욱 회장이 저런 말을 할 자격은 없었다.
그리고 그 이후에도 최용욱 회장은 최병문만 생각했지, 최민혁은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았다. 있다고 한다면 유산 문제였을 뿐이다.
그것도 다른 자식과의 갈등 문제를 생각하면 골치 아파서 그냥 내버려 뒀다.
그런데 이제는 그 일도 괴상하게 풀려서 최훈열 전무는 감방에 가고 말았다.
막상 시간이 지나서 최민혁과 얽힌 일을 하나하나 돌이켜보면 머릿속이 더 복잡할 수밖에 없었다.
더 심각한 것은 따로 있었다.
바로 차입금 문제다.
자연스럽게 과거 KM 전자 손동권 전 실장의 주장을 다시 떠올렸다.
그러니 감정이 상하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었다.
장승일 실장이 뻔히 기억하는 지난 일을 굳이 들먹여서 욕먹을 생각은 없었다.
“아무래도 KM 전자에서 적응한다고 정신이 없을 겁니다. 기획실장이란 자리가 만만하지 않으니까요. 최근 임시 주주총회에서도 소동이 좀 있었으니까요.”
“하긴 그게 당연하지. 그래, 도대체 그놈이 무슨 용건으로 공식 만남까지 제안한 거야?”
“회장님의 KM 전자 지분 때문입니다.”
“……?”
최용욱 회장은 처음에는 무슨 말인지 못 알아들었지만 뒤늦게 자기 지분까지 욕심낸다는 것을 깨닫고는 대노했다.
“아니, 이놈의 자식이 미친 거야?”
“아, 상속해 달라는 것이 아니라 돈 주고 직접 사들이겠다고 했습니다.”
“그래?”
최용욱 회장도 그제야 할아버지와 손자 관계가 아니라 지분 인수라는 공적인 관계라는 것을 깨닫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면 이야기가 많이 달랐다.
처음에 생각한 것처럼 손자와 할아버지 관계가 아니라서 KM 전자 지분과 관련해서 이것저것 생각할 것이 많았다.
‘첫째랑 셋째도 민감하게 반응할 텐데…….’
“두진이 지분 매입하는 데 300억을 퍼부었잖아. 남은 돈이 없을 텐데?”
“그게 벨린 투자 명의로 지분을 매입했습니다. 그러니 최 실장님 손에는 여전히 450억을 쥐고 있습니다.”
“벨린 투자 쪽에 다른 투자자라도 있다는 소리야?”
“그게 확실치가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