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78화 (78/1,021)

#78

* * *

서명까지 끝낸 최민혁은 더 STB 사업부 일로 고민하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본사로 차를 운전해 가던 김명준 과장이 계속 눈치를 보았다.

“할 말 있습니까?”

“계약을 좀 더 신중히 해야 하지 않았을까요?”

“신중하게 했습니다.”

“하지만 오혜정 비서 이야기를 들어보니, 소니 담당자가 꽤 적극적이었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얼마든지 더 이익을 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럴 겁니다. 소니는 방송사 사업 쪽에도 걸쳐 있으니까요. 우리와는 그 이익 규모 자체가 다를 겁니다.”

‘지금 한창 잘나갈 때지.’

“그런데 왜 굳이 협상을 이렇게 빨리 끝낸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900억에 깜짝 놀란 분이 할 말은 아닙니다.”

“저만 놀란 것이 아니니까요. 고작 150억 가치를 지닌 사업부를 900억에 팔아 치웠으니, 놀라지 않으면 그게 더 이상합니다.”

“그렇습니까? 하지만 모든 일은 적당한 게 좋습니다. 너무 지나친 욕심은 자신을 망쳐요.”

“…….”

무려 900억을 번 일이 적당한 일이 아니라는 말에 김명준 과장은 잠깐 멈칫했지만, 이번만큼은 최민혁의 실수라고 생각했다.

“그래도 다른 이들의 의견을 들어야 했지 않나 싶습니다.”

“안현수 팀장님 말이군요.”

“그분도 있고요. 저도 알아보니, 실력이 대단한 분이더군요.”

“알아요. 그래서 이번 일 통해서 상견례를 했지 않습니까.”

상견례라는 말에 브레이크를 밟을 뻔한 김명준 과장은 계속 말했다.

“제 말은 주변 이야기를 들어서 신중하게 결정해야 하지 않느냐는 겁니다.”

최민혁은 피식 웃었다.

“아니, 김 과장님은 900억에 매각한다고 하니, 절 미친놈으로 봤지 않습니까?”

자신만이 아니라 이번 사업부 매각에 관여한 이들은 다들 아는 사실이라서 김명준 과장은 억울했다.

“아, 그거야… 제가 그 특허 가치를 잘 몰라서 그랬습니다. 죄송합니다.”

“그러면 지금은 그 의미를 안다고 자신하는 겁니까?”

최민혁의 기묘한 말투에 깃든 의미를 이해한 김명준 과장은 안색을 굳혔다.

“…무슨 말씀입니까?”

“특허의 의미를 알았다고 지금 말하는 것 아닙니까? 그게 과연 정확한 평가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저는 잘 모릅니다. 하지만 안 팀장과 같은 전문가가 그렇게 말을 했는데…….”

“과연 그게 정확하다고 어떻게 장담합니까? 소니가 만약 그 이상의 특허를 내서 그게 표준화가 된다면 어떻게 하고요?”

“…그럴 수도 있습니까?”

“아직 결정 난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실제로 간단한 MPEG-2 오디오 파트는 이미 결정이 났지만 다른 파트는 이야기가 좀 다르다. 지금 한창 검토를 하는 중이고, 내년에 가서야 하나둘씩 결정이 난다.

소니를 비롯한 많은 다국적 기업은 자신의 제품 개발과 함께 자기 특허를 어떻게 해서라도 표준화에 채택되도록 전쟁을 벌였다.

그 최종 승자가 누군지 아직도 완벽히 정해진 것은 아니었다.

“…맙소사.”

뒤늦게 의미를 파악한 김명준 과장은 큰 충격에 빠져서 입을 다물지를 못했다.

최민혁은 그 탓에 차가 심하게 흔들리자 주의를 시켰다.

“김 과장님, 정신 좀 차리세요.”

“죄, 죄송합니다.”

“시간이 지나면 김 과장님이 알기 싫어도 다 알게 될 겁니다. 그러니 인내를 가지고 한번 지켜보세요. 제가 정말 신중하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적당한 선에서 타협한 것인지 말입니다.”

“…네.”

“매사에 욕심이 화근이 되는 겁니다.”

“…그렇지요.”

* * *

구조조정이 이루어진 여러 기업에서는 주로 30대 후반이나 40대 초반을 주 대상으로 삼는다.

대부분은 희망퇴직자를 받는 형태로 진행되는데, 순조로울 리가 없다.

대상자가 된 이들은 회사가 날 표적으로 삼는 것이 아닌가 하는 불안감에 몸을 떤다.

회사에 계속 출근하면 먼저 사직서를 낸 이들이 있다는 소문이 나돈다.

분위기가 나빠지면 결국 자발적으로 사직서를 낼 수밖에 없다.

그런데 KM 전자 STB 사업부 분위기는 오히려 이와 반대였다.

그들은 오히려 휘파람까지 불면서 자기 개인 짐을 하나둘씩 챙겼다.

천선구 과장은 그런 이들에게 웃으면서 지시를 내렸다.

“최 대리, 너 지나치게 좋아하는 것 아냐?”

“하하하, 제가 그럴 리가 있습니까. 다만 오성 전자 직원이 되어서 기분이 좀 씁쓸합니다. 설마 이렇게 오성 전자로 가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그랬다.

매각 협상안에는 고용 승계에 대한 것도 있는데, 본인이 원하면 얼마든지 오성 전자로 이동할 수가 있었다. 특히 공장 쪽 인력은 오히려 이번 매각에 쌍수를 들어서 손뼉 쳤다.

천선구 과장은 오히려 묵묵히 일하고 있는 공채덕 과장을 건드렸다.

“공 과장은 정말 여기 남을 거야?”

“…네.”

“잘 생각해 봐. STB 사업부 매각하면 자네들 할 일도 없잖아. 도대체 KM 전자에 남아서 앞으로 어쩔 생각인 거야?”

“전 여기가 좋습니다.”

“아니, 이해할 수가 없네. 페이도 오성 전자가 훨씬 낫고, 미래도 오성 전자가 훨 좋잖아. 내 와이프가 좋아서 완전히 난리야.”

은근히 이죽거리는 모양 봐서는 놀리는 뉘앙스가 강했다.

어지간해서 표정 변화가 없는 공채덕 과장도 인상을 찡그렸다.

“오성 전자 인사 관리는 빡빡한 것으로 유명한데, 천 과장님이 과연 이곳에서처럼 해서 잘 버틸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야, 공 과장 성격 나오네. 설마 내가 오성 전자에서 버티지 못하고 잘릴 거라고 하는 소리야?”

“전 오성 전자를 말하는 게 아니라, 우리 회사를 이야기하는 겁니다. 인사과에서도 천 과장님이 업무 중에 딴짓을 해서 말이 나왔지 않습니까. 그것도 김 상무가 손쓰지 않았다면, 큰 문제가 되었을 겁니다.”

“헛소리 마!”

“저도 과장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오성 전자에서 그런 짓을 했다가는 바로 잘릴지도 모르죠. 기구 팀의 김 차장님은 아예 이번 기회에 퇴직을 선택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죠.”

STB 사업부의 김명수 차장은 법정 퇴직금과는 별도로 위로금도 받으면서 그냥 회사에서 사직서를 내버렸다.

30개월 임금을 위로금 조로 받았는데, 그 금액이 상당했다.

회사에서 압력을 넣어서가 아니라 김명수 차장은 오성 전자에서 버틸 자신이 없었다. 그렇다고 김현우 상무 라인인 그가 최민혁 실장에 붙을 자신도 없었다.

“마음 씀씀이가 왜 그래? 떠나는 사람에게 축하를 해주지 못할망정 재를 뿌리는 거야?”

“전 사실을 말한 것뿐입니다.”

“배가 아프면 아프다고 해. 아니면 김현우 상무님에게 잘 말해봐. 그분이 알아서 챙겨줄 거야. 괜히 최민혁 실장 믿고 있는 임기석 부장처럼 행동하다가는 골로 갈 수도 있어.”

하지만 최민혁 실장이 한 제안을 떠올린 공채덕 과장은 뒤늦게야 왜 그때 갑자기 그런 이야기를 했는지 깨닫고는 새삼 혀를 내둘렀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세요? 최 실장님이 아무런 생각도 없이 조용하다고 보세요?”

“아니면 이렇게 조용할 리가 없잖아.”

“결과만 놓고 잘 생각해 보세요. STB 사업부 매각 대금이 무려 900억입니다. 누구보다 그게 얼마나 황당한 거래였는지 천선구 과장은 잘 알 것 아닙니까?”

안다 뿐인가.

STB 사업부를 말아먹은 사람 중의 한 명인 천선구 과장은 누구보다 그 부분을 이상하게 생각했다. 오성 전자가 미쳤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확실히 그건 좀 이상했는데…….’

오성 전자가 최근 데이콤 지분을 얻기 위해서 DL 그룹에 한 행동만 봐도 답이 나온다. 하농 인수 관련해서 DL에서 작업한 키맨을 따로 잡아서 숨김없이 그대로 협박했기 때문이다.

결국 DL 그룹은 어쩔 수 없이 데이콤 지분을 내놓았다.

최소한 그렇게는 못해도 KM 전자에 대해서 다양한 압박을 넣을 수도 있었다.

그런데 이상할 정도로 오성 전자는 KM 전자에 대해서 약한 모습을 보였다.

아니, 질질 끌 것이라 예상과는 달리 그들은 단호하게 다시 매각 협상에 임했다.

최민혁 실장 역시 이런 오성 전자를 이용해서 좀 더 높은 가격을 제시할 것이라는 예상과는 달리 900억에서 마무리했다.

일련의 거래 과정을 지켜본 많은 이들은 의문을 드러냈다.

하지만 천선구 과장의 생각은 좀 달랐다.

“그래도 결과적으로 오성 전자도 우리 김 상무님을 인정한 거잖아.”

불안해하는 천선구 과장의 얼굴을 보자 피식 웃음이 나왔다.

“됐습니다!”

공채덕 과장은 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짐을 하나둘씩 싸서 떠나는 동료 모습을 힐끗 쳐다보았다. 솔직히 지금 와서 말하는 것이지만 속이 다 시원했다.

저들 중에 평소에 제대로 일을 하는 사람은 손에 꼽았다.

아니, 자기 일만 하면 그나마 다행이다.

오히려 업무에 훼방을 놓는 경우가 많았다.

김현우 상무가 자리를 지키면 다들 열심히 일하는 척하고, 그럴듯한 보고만 할 뿐이었다.

심지어 자신과 김홍준 과장을 왕따까지 시켜서 자기들끼리 놀았다.

당장 지난달에 오성 전자를 그만두고 LC 전자로 옮겨간 친구 푸념을 떠올렸다. 새삼 최민혁의 심계에 소름을 느꼈다.

‘그렇다고 해도 오성 전자 가서 잘 적응했으면 좋겠네. 하지만 내 친구 이야기 들어보면, 정말 빡셔. 잘 버틸 수 있을까? 실장님도 그런 의도일까? 오성 전자 손을 이용해서 부담스러운 김현우 상무를 제거할 목적일까?’

* * *

김현우 상무 역시 오히려 신바람이 난 STB 사업부 분위기를 전해 듣고는 웃음을 그치지 않았다. 그렇게 악귀 같은 최민혁이 이제는 천사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래도 900억은 정말 의외였어.’

이 문제 때문에 권태성 실장에게도 한 소리 들었는데, 정말 모른다고 강변했다.

실상 오성 전자 사람이 될 그가 회사 비밀을 원수 같은 최민혁에게 알린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았다.

‘다행히 오해는 풀었어.’

마침 오영근 사장과 문형섭 부사장 두 사람이 같이 전무실로 왔다.

“이봐, 김 상무, 정말 괜찮겠어?”

“뭐 직급이 수석 팀장으로 내려가는 것은 어쩔 수가 없죠. 제 실적을 걸고넘어지는데, 감수해야죠. 그래도 한 파트를 담당한 파트장 아닙니까. 제대로 된 성과가 나오면 바로 승진시켜 주겠죠.”

오성 전자에서 김현우 상무 직책을 수석 부장으로 내린 것은 어쩔 수가 없었다. 아직 결과가 명확하게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STB 표준화가 과시적으로 진행된다면 이사로 승진할 예정이다.

만약 KM 전자 지난 성과라도 있었다면 이사 직급이 가능하겠지만 그게 또 그렇지도 않았다.

최두진 사장 백으로 이사를 거쳐서 바로 상무로 승진한 것도 문제였다.

문형섭 부사장은 이런 오성 전자의 결정을 보면서 그들이 김현우 상무를 어떤 식으로 보고 있는지 추측해서 조언을 해주었다.

“내가 김 상무 자네랑 사이가 좋은 것은 아니어서 이런 말 하는 것이 아니야. 그놈들은 우리 회사처럼 널널하지 않아. 그러니 조심하는 것이 좋을 거야.”

“허, 황광수 차장에게 저도 자세한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그런데 오성 전자 텃세가 있는데, 제가 그걸 모르겠습니까?”

“그런 말이 아니야. 최두진 사장 때문에 이곳 생활은 편할 수도 있어. 그런데 오성 전자에서는 그런 변명이 안 통할 거야.”

“걱정하지 마세요. 제 나이가 몇인데, 그런 사회생활을 모르겠습니까. 실적만 있으면 다 된다고 한 것이 부사장님 아닙니까? 이번 비디오 특허가 그 예입니다.”

어느 정도 내막을 들은 문형섭 부장은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그건 임기석 부장 작품이잖아.”

의외로 진실을 잘 아는 대답에 인상을 찡그렸다.

“아니, 헤어지는 마당에 갑자기 또 무슨 말씀을 하는 겁니까? 그거 다 제가 주도해서 한 겁니다. 임 부장은 제가 지시한 대로 따랐을 뿐이고요.”

평소라면 굳이 더 따지지 않았겠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그런 변명 따위를 하지 말라고 하는 소리야!”

“도대체 왜 그러시는 겁니까. 솔직히 부러우면 부럽다고 하세요. 저희 파트는 오성 전자 내에서도 독립적인 조직으로 인정까지 받았습니다. 모든 권한은 저에게 있습니다. 이곳에 있는 것보다 더 권한도 셉니다!”

“에휴, 이 답답한 친구야. 말은 그렇게 하는데, 실적이 없으면 칼같이 자네를 압박할 거야. 필요하다면 바로 잘라 버릴 수도 있어. 그러기 위해서 자네에게 아예 모든 권한을 넘긴 거야. 설마 그때 가서도 최두진 사장 변명할 거야?!”

“헛소리 좀 마십시오!”

버럭 소리 지른 김현우 상무는 인상을 찡그린 채 오히려 분노했다.

오영근 사장이 결국 다시 나섰다.

“문 부사장, 자네는 또 왜 그래. 이미 다 끝난 일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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