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72화 (72/1,021)

#72

이 자리에 참석한 이들 대다수는 KM 전자 내부 사정에 대해서 알음알음 알고 있었다. 비록 최두진 사장 때문에 온 것이라 해도 마찬가지다.

그런 그들이 최민혁이 주식을 내놓으라고 한다고 한들 내놓을 사람은 아니었다.

하지만 최두진 사장의 눈짓을 받은 민기식 변호사가 결국 소리쳤다.

[그 주식을 사들일 돈이 있습니까?]

김명준 과장에게서 통장을 받은 최민혁이 손을 들었다.

[여기 450억이 든 통장이 있습니다. 제 명의입니다. 직접 보세요. 다시 말하지만, 손해를 봤다는 분은 여기 리스트를 작성만 하세요.]

민기식 변호사는 김명준 과장의 옆에 있던 한 친구가 가져온 통장 내역을 확인하고는 최두진 사장을 쳐다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알겠습니다.]

물론 다른 한 사람이 슬쩍 질문했다.

[그 많은 돈이 전부 최 실장님 재산이란 말입니까?]

[이 돈 출처가 궁금합니까? 별것 없습니다. 제가 주식 투자해서 몇 개월 만에 번 돈입니다.]

약간의 설명이 이어지자 침묵은 더 오래갔다. 다들 믿기 어려울 정도로 놀라운 최민혁의 투자 실력을 멍하니 듣기만 했다.

‘맙소사.’

특히 데이콤 지분을 이용해서 한 큐에 200억 넘게 벌었다는 말에 혀를 찬 이도 많았다. 그들 역시 갑작스러운 데이콤 주가 폭등 사건을 누구보다 잘 알기 때문이었다.

‘세상에… 주식의 신도 아니고, 바닥에서 사서 꼭대기에 팔다니.’

최민혁은 자기 자랑은 이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좋습니다. 그러면 본론으로 들어가서 KM 전자 주가 하락 폭이 크다는 것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회사를 경영하다 보면 어려울 때도 있고, 좋을 시절도 오기 마련입니다.]

자기가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받은 최두진 사장은 분노보다는 허탈한 표정으로 웃었다. 그 역시 최민혁의 주식 초대박 투자에 질려 있었다.

[지금의 위기는 그저 스쳐 지나가는 일에 불과합니다. 다음 분기 실적 발표 후에 자세히 발표할 것입니다만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처럼 회사 미래가 그렇게 불투명한 것은 아닙니다. KM 전자는 혁신을 통해서 새로운 미래 가치를 창출하게 될 겁니다. 그것은 결국 주주 모두에게 그 이익이 돌아갈 겁니다.]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실제로 최훈열 전무 구속 이후에 회사 내부적으로 구조조정이 이루어지면서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하지만 최민혁도 최두진 사장 때문에 더 자세한 것을 말하지 않았다.

[주주 여러분이 조금 참으면 그만한 보답은 갈 것입니다. 그러니까 너무 초조해하거나 걱정하지 마세요. 저 최민혁을 믿고 묵묵히 지켜봐 주시기 바랍니다.]

“…….”

최두진 사장도 민기식 변호사를 통해서 데이콤의 주가 변동에 대한 것을 다시 듣고는 더 이상의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자신이 선동한 주주들은 다들 최민혁의 압도적인 기세에 눌려서 결국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김홍수조차 최두진 사장에게 눈짓으로 계속 사과를 보내더니 오히려 최민혁 실장을 전혀 다른 시선으로 쳐다보았다.

돈을 이용한 자신과는 달리 최민혁은 달달한 몇 마디로 말로써 그들을 휘어잡은 것이었다.

‘대단한 놈이네.’

* * *

최두진 사장도 임시 주주총회를 통해서 최민혁을 압박할 생각이었지만 막상 실패하자 고민에 빠졌다.

그런데 최민혁은 마치 이런 그의 내심을 들여다본 것처럼 다시 나타났다.

그는 이전의 부드러운 분위기와는 달리 주주총회에서 당한 일을 복수라도 하는 것처럼 협박부터 했다.

“검찰에서 가만히 있지 않을 겁니다.”

기가 죽은 최두진 사장도 이전처럼 강하게 나갈 수가 없었다.

“현우 그놈 말이야. 그게 나랑 무슨 관계가 있다고 하는 소리야?”

“김현우 상무는 문제가 아닙니다. 그가 손을 댄 비자금이 문제죠. 만약 그 비자금 출처가 사장님이라는 소문이 나면 문제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질 겁니다.”

“하하하,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도 마!”

하지만 최민혁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박경일 팀장이 준비해 둔 자료를 내밀었다.

“어르신 말씀은 일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비자금 자료를 가지고 사용하기에 따라서 그런 말은 의미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제가 그자들이라면 이번 기회를 이용해서 어르신 재산을 노릴 겁니다.”

“…….”

비자금 관련 자료를 살피던 최두진 사장의 안색은 창백하게 변했다. 또한 옆에서 같이 자료를 본 민기식 변호사는 아예 안색이 사색으로 바뀌었다.

최훈열 전무가 비자금 관련된 일을 주로 전담한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그 비자금을 전하는 과정에서 접대를 담당한 이는 바로 김현우 상무였다. 그는 최훈열 전무와는 달리 증거를 이곳저곳에 흘렸다.

그 자료 중에는 심지어 CCTV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최훈열 전무라면 철저하게 증거를 남기지 않았을 테지만 김현우 상무는 그렇지 못했다.

심지어 김현우 상무는 따로 2차 접대를 빙자해서 마약까지 동원해 일반인을 성 접대로 밀어 넣기까지 했었다.

뒤늦게 자신이 당했다는 것을 안 피의자가 이 사건을 고소했지만 묻혀 버렸다.

그런데 김명준 과장이 그 피의자를 일일이 다 만나서 추가 자료를 얻은 것이었다.

아마 이 자료가 외부에 알려진다면 나라가 떠들썩해질 일이었다.

“…이, 이걸 어, 어떻게 얻은 거냐?”

“저도 비자금 관련 증거 자료를 찾는 중에 발견한 것들입니다. 보험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김현우 상무가 KM 전자에 저지른 피해만 해도 기회비용까지 합치면 족히 200억은 넘습니다. 아니, 재산상의 피해가 다가 아니라 조직 자체를 쑥대밭으로 만들었습니다. 특히 인사건 권한을 남용해서…….”

줄줄이 나오는 서류는 김현우 상무가 저지른 범죄에 대한 증거였다.

얼마나 꼼꼼한지 우영민 과장은 옆에서 슬쩍 서류를 받아서 확인했다. 그의 입이 딱 벌어진 것만으로 그 심각성을 잘 보여주었다.

억울한 최민혁은 자신이 마치 김현우 상무 때문에 재산상의 피해를 본 피해자 코스프레를 주야장천 늘어놓았다.

“어르신도 양심이 있다면 그러시면 안 됩니다. 벨린 투자도 자금 사정이 좋지 않아서 많이는 못 드립니다. 그러니 적당히 타협하시죠. 그러면 이 자료는 세상에 나오지 않을 겁니다.”

“…날 협박하는 거야?”

“천만에요. STB 사업부 매각이 성사되면 KM 전자 주가는 폭락에 폭락을 거듭할 겁니다. 차라리 지금 이 시점에서 손 터는 것이 오히려 어르신에게 이익입니다.”

기가 막힌 최두진 사장은 최민혁에게 화를 냈다.

“그러는 넌 헐값에 지분을 인수하는 거구나.”

“전 큰 욕심 없습니다. KM 전자면 만족합니다. 비록 미래가 없는 회사지만 망할 것으로 생각하지 않습니다. 제가 어르신에게 부탁을 하는 겁니다.”

수백억 차익을 보면서 시치미를 뚝 떼는 최민혁 행동에 질린 최두진 사장은 탄식하고 말았다.

“허, 이거야 원.”

협박을 가장한 하소연에 최두진 사장도 마냥 무시할 수는 없었다. 특히 김현우 상무가 이제까지 해온 범죄가 큰 문제였다.

그는 잠깐 눈을 감은 채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아마 평소라면 이런 협상 따위는 아예 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런데 걸려 있는 것이 김현우 상무다.

‘자칫하면 현우 이 녀석도 훈열이 그 녀석처럼 감방에 가. 뉴스에 나와서 마녀사냥당하면 견디지 못할 거야. 차라리 지분을 넘겨야 하나?’

KM 전자 지분을 정리하고, 김현우 상무 역시 깔끔하게 KM 전자와 헤어진다면 더 이상 이 문제와 엮일 일은 없었다.

비록 재산상의 손실이 크지만, 그것은 김현우가 KM 전자에 입힌 손실을 살피면 꼭 그렇게 나쁜 것만은 아니었다.

당장 KM 산업 주가 상승 때문에 이익을 본 액수만 해도 이 손실을 충분히 메꾸고도 남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최두진 사장은 사채시장에서 구르고 구른 이였다. 그는 새삼스러운 눈길로 최민혁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두 가지만 묻자. 순순히 답해주면 나도 고집을 피우지 않으마.”

“넵.”

“이번 일은 모두 네가 계획한 거야?”

“네? 으음, 무슨 말인지 모르겠습니다. 김현우 상무가 자발적으로 나가겠다고 한 것인데, 그걸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까?”

“그 정도면 충분하다. 다른 하나는 현우 그 녀석을 건드리지 않아야 한다. 그것만 만족한다면 250억으로는 곤란하지만 300억으로 협상하마.”

“좋습니다!”

기꺼운 최민혁의 허락에 최두진 사장은 결국 분노보다는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그도 최민혁의 기백에 감탄했기 때문이었다.

‘허, 용욱 그 친구의 한창때 모습을 보는 것 같구나.’

두 사람이 서로 손을 잡자 협상은 순조롭게 잘 진행되었다.

경영권 프리미엄을 감안하면 무려 900억 이상 가치의 지분을 300억을 넘기는 계약이었다. 아니, 세금 문제까지 감안하면 그 이상의 이익이 날 거래였다.

하지만 최두진 사장으로는 김현우 상무 때문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다만 그 역시 완전히 바보가 아니라서 한 가지를 고려했다.

‘STB 사업부를 매각한다면 KM 전자 주가는 내년까지도 암울해. 특히 TV 사업부마저 오성 전자에 밀리면, 존립 자체가 어려워. 차라리 이 시점에서 주식을 정리하는 게 맞아.’

* * *

M&A 거래는 다양한 방식으로 이루어지기에 절차가 모두 달라서 딱히 정해진 방식은 없는데, 이사회나 주주가 관여하는 경우에는 여러 가지 법적인 고려가 취해진다.

그런데 지배 주식의 매각은 공개되었든, 비공개가 되었든 대주주 마음이다.

다만 대주주도 대주주 간의 관계 때문에 비공개적으로 타협을 보기는 한다.

최두진 사장도 그런 관례에 따라서 최용욱 회장과 이미 암묵적으로 타결을 본 마당에 KM 전자 이사회나 주주총회에 특별히 알리지 채 벨린 투자에 자기 지분을 다 매각했다.

이 거래는 언론에서도 짧게 언급되면서 별다른 주목을 받지 않았다.

심지어 회사 공시로도 발표되었지만 아는 이는 별로 없었다.

켕기는 것이 많은 최민혁도, STB 사업부 매각 이후에 주가 폭락을 걱정한 최두진 사장도, 뭔가 있다는 것만 짐작하는 장승일 실장도 굳이 이 일이 언론을 통해서 회자하기를 내버려 둘 수가 없었다.

최민혁은 헐값에 벨린 투자가 지분을 매입한 것을 염려했고, 최두진 사장은 STB 사업부를 매각 후에 주가 폭락을 걱정했으며, 장승일 실장은 구설수에 계속 오르내리는 KM 전자 지분의 대량 거래가 굳이 외부에 떠들썩하게 알려지기를 원치 않았던 것이다.

언론 역시 1,600원대까지 폭락한 KM 전자 지분 따위에는 관심이 없었다.

이보다는 데이콤 주가 폭등 때문에 잠깐 반등한 코스피가 다시 하락세로 바뀌어서 바닥이 얼마가 될지에 더 관심이 많았다.

그들은 오히려 데이콤 주가가 추락하는 것도 오성 전자 음모론을 내세우면서 공격하기 바빴다.

하지만 이정원 과장은 이번 데이콤 지분 덕분에 단단히 재미를 봤지만, 조성돈 팀장의 투자 대박이 부러워서 지하철 출퇴근 시간에 요즘 기사를 꼼꼼하게 읽다가 이 공시를 봤다.

‘아니 이게 도대체 무슨 일이야?’

기획 팀이 자신도 알지 못하는 대주주 대량 지분 거래를 뉴스를 통해서 확인한 것이었다. 그는 사무실에 도착하기가 무섭게 이 이야기를 해보았다.

“어? 정말이네?”

투자에 관심이 많은 배종대 과장은 그 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그런데 박상기 차장은 이미 이 사실을 알고 있었다.

“실장님이 보안을 유지하기 위한 일이라서 다른 사람에게는 알리지 않았어.”

최두진 사장과 STB 사업부 관계를 잘 아는 이정원 과장은 펄쩍 뛰었다.

“차장님, 아무래 그래도 저에게는 말을 해주셔야 했지 않습니까?”

“이 일은 그룹 차원에서 이미 검토가 된 일이야. 사장이나 부사장님도 심각하게 고민하는 일이라서 괜히 소문이 날 것을 염려해서 이 과장 자네에게는 알리지 못했어.”

눈치가 칼같은 정성근 대리가 슬쩍 한마디 했다.

“결국 STB 사업부 정리를 위한 사전 정지 작업이군요.”

“흠.”

박상기 차장은 시선을 피했고, 막 출근한 조성돈 팀장은 아예 모른 척 자기 자리로 가서 대화에 끼지도 않았다.

다른 기획 팀원은 다들 자신과 직접적인 연관이 없어서 그저 눈치만 봤다.

그런데 STB 사업부 관리가 자기 밥그릇인 이정원 과장은 평소와 달랐다.

“저, 정말 STB 사업부를 매각하는 겁니까?”

“글쎄.”

박상기 차장도 곤혹스러운 얼굴을 한 채 시선을 피하고 말았다. 이정원 과장도 피해 당사자이지만 정작 가장 큰 충격을 받는 이들은 STB 사업부 소속 직원들이다.

현재 나오는 이야기로는 오성 전자에 매각한다고 하는데, 그 일이 만약 진행된다면 강제 구조조정은 불가피했다.

VCR를 비롯해서 STB 사업부와 관련된 인원 중에 적지 않은 이들이 잘려 나갈 것이다.

이제까지 검토만 하던 분위기와는 달리 진짜 구조조정이 된다는 말에 다들 천근 바위를 머리에 얹은 사람처럼 입을 다물었다.

이정원 과장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조성돈 팀장에게 다가갔다.

“팀장님, 그러면 기존 STB 사업부 인력은 어떻게 되는 겁니까? 그중에 어느 정도만 회사에 남는 겁니까? 최소한 저에게는 알려주셔야 합니다. 그쪽에서 물어보면 뭐라도 대답해야 할 테니까요.”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