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
최용욱 회장이 장승일 실장을 힐끗 쳐다보았으나, 그는 아예 시선을 외면했다.
뿐만 아니라 한쪽으로 조용히 물러나 아예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는 무안해서 슬쩍 한 걸음 물러났다.
“설마 지금 그 일 때문에 분노해서 여기 나타난 건가?”
“그거야 아냐. 하도 하는 행동이 얄미워서 하는 말이야. 이놈에게 뜨거운 맛을 좀 보여줘야겠어.”
자기 지분 행사권에 관한 이야기를 듣자 고개를 내저었다.
“난 손주라서가 아니라 지금까지 무난하게 기업을 이끌어온 점을 감안해서 자네 편을 들어줄 수는 없네.”
“그런 것까지는 안 바라. 최소한 내가 하려는 일을 알고나 있으라고 여기 온 것이니까.”
“자네 지분으로 민혁이 그 녀석을 실장 자리에서 끌어내리지 못할 텐데?”
“그럴지도 몰라. 그래도 그놈이 세상 무서운 줄 알았으면 하는 거야. 자네도 그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할 것 같아서.”
“…뭐, 내가 자네 지분에 대해서 이러쿵저러쿵할 권리는 없잖아. 더욱이 민혁이 그 녀석의 지나친 행동 때문에 문제가 된다면 그것 역시 마찬가지야.”
“알겠네.”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서 나가려던 그는 심각한 고민에 빠진 장승일 실장을 본 후에 다시 최용욱 실장을 쳐다보았다.
“자네 손자 진짜 물건이더라.”
“…칭찬으로 듣지.”
“흥!”
열받아서 휑하니 떠나 버리는 최두진 사장의 모습에 힐끗 장승일 실장을 쳐다보았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건가?”
“아무래도 실장님이 이번 기회를 이용해서 지분을 인수하려고 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총알이 부족하니, 좀 무리수를 둔 것 같고요.”
“그런가? 필요한 정보는 줄 수는 있지만 직접적으로 도와줄 생각은 말고, 옆에서 한번 잘 지켜봐.”
“알겠습니다.”
최용욱 회장은 이전에도 불간섭 원칙을 고수했지만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장 실장은 지금까지 잘해왔어. 앞으로도 기대하네. 하지만 명심해야 할 일은 불필요하게 끼어들어서 간섭하지 마. 정 안 된다 싶으면 그때 가서 나에게 따로 보고해.”
“명심하겠습니다.”
그는 새삼 최민혁과 관련된 자료를 다시 살피면서 놀람보다는 의혹을 느꼈다. 장승일 실장이 보고한 보고서로는 이해하기 힘든 점이 꽤 많았던 것이다.
그 자신이 기억하는 최민혁은 우유부단하면서도 소심했다. 결코 최두진을 상대로 이런 일을 마구잡이로 벌일 이는 아니었다.
‘…250억이라니.’
* * *
최두진 사장은 자존심이 상해서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서 일단 최용욱 회장을 만나서 담판을 지었다. 그다음 순서로 고민한 것은 역시 주주총회다.
한국은 주주총회에 참석하는 주주의 숫자가 생각보다 적다. 대부분이 기관 투자자나 수탁은행의 의결권 행사가 주를 이룬다.
그러나 KM 전자는 이들 투자자보다는 대주주의 지분이 더 많았다.
따라서 비록 일부 지분만 가진 최두진 사장이라고 해도 기관 투자자나 은행 쪽을 통해서 주주총회 정족수를 충족시키는 것은 그다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단단히 준비해.”
“특히 이번 주가 폭락에 관한 책임 소재를 물어서, 필요하다면 최민혁 실장의 영향력을 대폭 줄일 수 있도록 손을 쓰겠습니다.”
“그래. 당장은 최 회장 지분과 그놈 지분 때문에 끌어내릴 수는 없어. 그래도 지금 문제를 부각해서 다음 분기 실적 발표 명분으로 손을 쓸 수가 있어.”
“알겠습니다.”
“뜨거운 맛을 단단히 보여줘. 그래야 그런 개소리를 안 할 테고, 상식적인 협상안을 내놓을 테니까.”
“문제없도록 하겠습니다.”
애초에 최두진 사장도 최민혁 실장을 끌어내리기보다는 자기 지분의 영향력을 좀 더 느끼려는 목적으로 일을 꾸몄다.
덕분에 임시 주주총회는 별다른 문제가 없이 날짜가 잡혔다.
* * *
한국 기업의 주주총회는 저조한 출석률 때문에 몇몇 대주주에 의해서 돌아간다.
따라서 대주주가 나서서 얼마든지 경영권 간섭을 할 수도 있고, 전권을 마음대로 행사할 수도 있다.
갑자기 잡힌 임시 주주총회는 그런 면에서 본다면 특이한 일은 아니다.
다만 내막을 잘 모르는 기획 팀은 갑작스러운 주주총회에 당황해서 이리저리 알아보았다.
그들은 뒤늦게야 최두진 사장이 이번 임시 주주총회를 열었다는 것을 알았고, 최민혁 실장에게 바로 보고했다.
최민혁 역시 예상 밖의 전개에 당혹스럽기는 했지만, 장승일 실장에게서 회장님 지분은 여전히 최민혁 편이라는 것을 듣고 안도했다.
‘아슬아슬했어.’
최훈열 전무와 김현우 상무에 대한 작업에서 얻은 점수 덕분이었다.
그 때문에 혼란은 있었지만, 그의 예상을 벗어나지는 않았다.
뒤늦게 최민혁에게 보고를 받은 오영근 사장이나 문형섭 부사장도 갑작스러운 사태에 크게 당황했다. 그들이 뒤늦게 최두진 사장에게 연락해 보았지만 제대로 만나지도 못했다.
결국 임시 주주총회가 열린 날에야 비로소 최두진 사장을 마주했다.
하지만 최두진 사장은 두 사람과는 마치 타인처럼 아예 대화하지 않으려고 했고, 오직 최민혁 실장을 잡아먹을 듯이 쳐다보았다.
두 사람은 분노한 최두진 사장의 모습을 본 후에야 비로소 일이 어찌 돌아가는지 파악했다. 그들은 김현우 상무를 바로 떠올렸다.
“자네, 설마 최 사장과 틀어진 건가?”
“그런 거 아닙니다.”
“도대체 어쩌려고 그러는 건가?”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오영근 사장이 최민혁에 대한 걱정 때문에 버럭 소리쳤다.
“지금 걱정 안 하게 생겼나? 자칫하면 자네 회사에서 잘릴 수도 있어!”
“그렇게는 안 될 겁니다. 저 빼고, 당장 이 자리에 앉을 사람이 없으니까요.”
당당한 최민혁.
그런데 최훈열 전무는 감방에 가 있고, 다른 두 사람의 후계자는 자기 일에 정신이 나가서 KM 전자에 관심을 둘 수가 없었다.
그나마 재벌 3세에 속하는 이들은 대리 아니면 고작 과장 직급에서 헉헉거린다.
실장 자리에 당장 앉을 사람은 별로 없었다. 최용욱 회장이 직접 나서서 끌어내리지 않고서는 최민혁이 쫓겨날 상황은 거의 없었다.
‘이제까지 깔아놓은 것이 있으니까.’
이성적으로 이해하는 오영근 사장조차 불안을 떨칠 수가 없었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이런 식으로 일을 크게 벌이면 어떻게 하나? 내가 그렇게 최두진 사장 자극하지 말라고 주의하라고 경고하였지 않나!”
“제가 일을 벌이지 않았습니다만?”
“최두진 사장이 저렇게 자네를 쳐다보는데도 그런 소리가 나와?”
“정기 주주총회가 잡혀 있는 내년 3월보다는 지금이 차라리 훨씬 났습니다. 주가 폭락과 관련해서 해줄 말도 있습니다.”
“도대체 뭘 어떻게 한다는 말인가.”
“외부에서는 최훈열 전무 재판 때문에 안 좋은 소리가 큽니다. 최소한 그 불만을 잠재울 필요가 있으니까요. 너무 몰라도 문제가 있다고 봅니다.”
“아니, 어떻게 말인가?”
“최선을 다해서 설득해야죠. 힘든 시기를 같이 갈 만한 이들은 결국 그만한 보상을 받는다는 것을 보여줄 필요가 있습니다.”
“…정말 자신하는 건가?”
“모든 일이 잘될 겁니다. 다만 그 내막을 잘 모르는 주주에게 호소할 필요는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이 딱 적기입니다.”
“허.”
오영근 사장은 이미 장승일 실장을 통해서 들은 바가 있기에 여기까지 할 수밖에 없었고, 문형섭 부사장은 자신감이 철철 넘쳐흐르는 최민혁의 모습에 두 손을 들고 말았다.
하지만 두 사람은 한 가지 사실은 분명히 해두었다.
“이번 일이 잘못되면 자네가 모든 것을 책임져야 할 거야.”
“책임은 제가 다 안고 가겠습니다.”
“…그래.”
한마디도 지지 않는 최민혁의 행동에 두 사람은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아니, 한동안 멍하니 최민혁 실장을 쳐다보았다.
이사회에서는 그렇다고 쳐도 주주총회에서도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에 감탄한 것이었다.
‘자신감은 하늘을 찌르는데…….’
* * *
한국의 전형적인 주주총회 모습처럼 임시 주주총회에 참여한 숫자는 그렇게 많지 않았다.
최소한 10만 주 이상 정도 소유한 주주들이 이 자리에 참석했다.
특히 몇몇 주주는 아예 최두진 사장 편에 몰려가 있었다.
최두진 사장이 발 빠르게 다른 주주에게 손을 써서 그들을 끌어들일 것이다.
그들 중에는 숨김없이 그대로 주주총회가 진행되는 모습을 보면서 불만을 토로했다.
[도대체 이놈의 주가는 어디까지 떨어지는 겁니까. KM 전자란 회사는 주가 관리는 합니까. 최소한 주가 방어를 위한 어떤 행동을 보여야 하는 것 아닙니까?]
조성돈 팀장이 사회자로 나서서 대답을 해주었지만, 오히려 더 크게 반발했다.
[그 요식적인 대답 따위 하지도 마세요. 그런 이야기는 초등학생도 할 겁니다. 구체적으로 뭘 어떻게 하겠다는 대안을 마련해 주세요!]
최두진 사장 쪽에 몰려 있는 이들은 오른손을 번쩍 들면서 적극 옹호했다.
[옳소!]
자연스럽게 KM 전자 경영진의 무능함에 대한 이야기로 흘러갔다.
[이놈의 회사는 범죄 집단으로 이루어진 집단입니까? 어떻게 검찰에서 조사만 하면 불법 행위로 다 체포가 됩니까?]
[진짜 주주인 게 창피해서 얼굴을 못 들겠습니다.]
그들은 오영근 사장을 잘라야 한다든지, 아니면 이사회 임원을 물갈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가자 기관 투자자나 은행 쪽 담당자도 불안을 느꼈다.
그들 역시 최근 KM 전자 주가 폭락 때문에 큰 손실을 보았기 때문이다.
기존 우호 지분을 가진 이들조차 여전히 KM 전자 경영진을 믿는다는 자세를 고수하다가 바뀐 주주총회 분위기에 당황했다.
결국 참다못한 최민혁이 주주총회 단상에 올라가서 마이크를 잡았다.
[전 최민혁 기획실장이라고 합니다. 주주 여러분의 불만에 대해서 잘 들었습니다.]
하지만 분위기는 시작부터 좋지 않았다.
[아니, 저 어린놈은 또 뭐야?]
[허, 말도 안 돼.]
[아, 재가 재벌 3세란 그 친구구나. 기사로 보기는 했지만 정말이네. 도대체 나이가 몇 살이야? 최용욱 회장은 치매가 온 것 아냐? 도대체 저런 애송이를 어떻게 실장에 앉혀?]
최민혁의 얼굴을 본 주주의 반응은 생각보다 더욱더 나빠졌다.
최민혁은 묵묵히 지켜보다가 결국 마이크 소리를 최대한 울려서 소리쳤다.
[조용히 해!]
귀가 찢어질 정도로 끔찍한 소리에 다들 귀를 잡은 채 인상을 찡그렸다.
최민혁은 그런 분위기에도 슬쩍 김명준 과장에게 손짓했다.
[지금부터 주주총회를 방해하는 분은 강제로 내쫓겠습니다. 일단 제가 하는 말을 끝까지 듣고 나서 질문을 하세요!]
김명준 과장이 손짓하자 검은 양복을 입은 이들이 주주총회 사방에 몸을 드러냈다. 그들은 정말 필요하다면 강제로 내쫓을 듯 행동했다.
불만을 토로하려고 했던 이들도 일단 규정 때문에 참았다.
[좋습니다. 거기 불만을 토로한 분 한번 일어나서 손실을 말해보세요.]
갑자기 지적을 당한 이는 최두진 사장을 힐끗 쳐다보면서 결국 자리에서 일어나서 당당하게 소리쳤다.
[이번 주식 폭락 때문에 벌써 20% 넘게 손실을 본 사람입니다.]
[성함이 뭡니까?]
[김홍수입니다.]
[몇 주 가지고 있습니까?]
[30만 주입니다.]
[평균 매입가는?]
예상을 벗어난 구체적인 질문에 크게 당황했다.
[갑자기 그건 왜… 아 좋습니다. 2,000원 정도에 사들였습니다.]
[제가 그거 2,100원에 전부 다 매입하죠. 그러면 그쪽은 만족하시겠습니까?]
[네?]
[주가 폭락 때문에 손실을 봤다면서요. 그러니 그 증거자료와 주식을 가지고 오세요. 제가 일괄 다 사들이겠습니다.]
[하, 하지만 회삿돈으로…….]
[제 자비로 할 테니 걱정 마세요. 그러면 더 불만이 없는 겁니까?]
[그게… 음, 아, 저…….]
김홍수는 상상도 못한 전개에 당황했다. 그는 원래 부동산 업자로, 대림 전자의 아는 지인이 KM 전자가 언론 보도와는 달리 내실이 괜찮다고 하여 매입한 것이다.
다른 개미 투자자처럼 단기로 이 종목에 들어온 것이 아니었다.
즉 애초에 주식을 팔 생각이 없었다.
다만 명동 사채 시장에서 명성이 자자한 최두한 사장의 제안에 어쩔 수 없이 이번 임시 주주총회에 나선 것이다.
그리고 그건 오늘 임시 주주총회에 나온 다른 주주 역시 다르지 않았다.
최민혁은 그제야 목소리를 좀 낮추었다.
[자, 제가 분명히 이 자리에서 밝혀둡니다. 제가 몰라서 주식 매입을 안 하는 게 아닙니다. 여러 가지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어쩔 수가 없는 겁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정말 주식을 팔겠다면, 이야기가 다릅니다. 제가 그 지분 다 매입하겠습니다. 그러니 이 자리에서 당당하게 밝히세요!]
그는 심지어 김명준 과장에게 말해서 아예 한쪽에 테이블을 만들었다.
[저기 리스트 작성하고, 가지고 있는 주식에 대해서 기록하세요. 지분을 다 받고 나서 바로 그 자리에서 현금을 쏠 테니까.]
조용했다.
그렇게 시끌시끌하던 임시 주주총회는 침묵만이 감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