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70화 (70/1,021)

#70

두 사람은 잠깐 앞으로 있을 STB 사업부 매각과 관련해서 몇 가지 이야기를 나누었다.

최용욱 회장은 장승일 실장에게 보고를 들으면 들을수록 자신이 귀신에게 홀린 것처럼 느껴졌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다.

이미 돌이키기에는 너무 늦은 상황이었다.

‘후유, 정말 영문을 모르겠어. 최두진 그 친구 행동도 이상하고, 내가 맞장구까지 쳐야 하는 것도 이해할 수가 없어.’

* * *

오영근 사장은 집사의 안내를 받아서 최용욱 회장 서재 안으로 들어가다가 한쪽에 앉아 있는 장승일 실장을 보고 흠칫했지만, 차라리 잘되었다고 생각했다.

“회장님, 오랜만에 뵙습니다.”

“그러게 말일세. 자네나 나 같이 늙어가는 처지에 이제 물러날 때가 되었다. 그런데 이게 무슨 꼴인지 모르겠어.”

“최 전무 일은 죄송합니다.”

“이봐, 오 사장, 내가 늘 말했지만 죄송할 일은 만들지 좀 마.”

“나름 최선을 다했는데, 일이 생각처럼 풀리지 않았습니다.”

이미 자세한 내막을 파악한 최용욱 회장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런데 최훈열 전무 이야기가 나오자 오영근 사장도 STB 사업부 매각 안건에 앞서서 KM 전자 문제에 대해서 질문했다.

“앞으로 KM 전자는 어떻게 하실 생각입니까?”

“훈열이는… 어렵겠지.”

그렇다고 첫째나 셋째에 KM 전자까지 맡길 수는 없었다. 둘은 지금 자기가 맡은 계열사 관리도 제대로 못 하고 있었다.

“설마 최 실장을 염두에 두고 계신 겁니까? 하지만 당장에 최영란 과장 같은 경우에 반발이 심할 겁니다.”

최영란은 최문경 부회장의 장녀로, 지금 KM 산업 기획 팀 과장으로 일하고 있다. 사원부터 시작해서 대리를 거쳐서 올해 과장으로 진급했다.

최영란만이 아니라 대부분은 다 밑에서부터 경영 수업을 받았다.

유독 최민혁만이 특혜를 받아서 기획실장으로 경영 수업을 받은 것이다.

이 문제는 KM 그룹 사장단 회의에서도 늘 나오는 이야기다.

최용욱 회장도 인상을 잔뜩 찌푸리다가 한 가지를 말했다.

“그 녀석들은 이제까지 다 누릴 것은 누리고 자랐어. 하지만 민혁이는 그렇지가 못해. 더욱이 자기 아비마저 없는 것도 고려해야지.”

“하지만 후일 반드시 분란의 소지가 될 겁니다.”

최용욱 회장도 모르지 않았다. 다행히 지금은 이전과는 또 사뭇 달랐다.

“민혁이가 한 성과가 있잖아. 그것을 무시할 수는 없어. 그것은 오 사장 자네가 가장 잘 알잖아.

더욱이 뒤늦게 최민혁의 놀라운 경영 수완을 확인했다.

“…지금으로서는 민혁이 그 녀석밖에 없어.”

오영근 사장도 이미 짐작한 일이지만 이야기를 쉽게 풀어가기 위해서 최민혁 실장을 부정했다.

“아직 대학 졸업도 안 한 최 실장에게 과연 KM 전자 경영을 맡길 수 있겠습니까?”

그도 이 부분만큼은 확신할 수가 없었다.

“자네 같은 친구가 민혁이를 돕는다면 문제가 없어. 왜 자네도 경영권에 욕심이 나?”

“솔직히 회사가 안정을 찾을 때까지는 사장 자리에 계속 있고 싶습니다.”

“그런가?”

“그래서 제가 직접 와서 말씀드리는 겁니다. 김현우 상무가 문제가 많다고 해도 그까지 포함해서 지금 이사회 인원은 고작 여섯 사람에 불과합니다.”

김현우 상무가 빠지면, 이제 고작 다섯 명만 남는다.

최용욱 회장도 어이가 없었다.

“아니, 빠진 임원을 채우면 되지 않아?”

“최 전무나 김 상무 일 때문에 지금은 함부로 사람을 뽑기도 어렵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STB 사업부를 매각해 버리면, 회사에 남는 거라고는 TV 사업부와 오디오 사업부만 남습니다.”

그러나 TV 사업부 상황도 오성 전자 때문에 좋지가 않았다.

“매각하는 것, 좋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때가 아닙니다. 일단 회사가 안정을 찾고 난 다음에 뭔가 해도 해야 합니다.”

“알아. 나도 그러고 싶어. 그런데 상황이 또 그렇지가 못해.”

“네? 아니, 또 무슨 일이라도 있는 겁니까?”

“검찰에서 비자금 배후로 김현우 상무가 아니라 최두진 사장을 의심하고 있어.”

“네?”

예상 밖의 이야기에 오영근 사장은 입을 딱 벌린 채 경악하고 말았다.

“최두진 그 친구가 비록 사채업을 하지만 조폭을 동원해서 서민 등골을 빨지는 않았어. 나름 어느 정도 선을 지키니까. 그런데 외부 시선이 그렇지가 못해. 최두진이 이런 문제 때문에 김현우 상무를 이용해서 정관계 로비를 했다고 의심해.”

“하, 하지만 회장님이 나서서…….”

“아니, 이번 일은 나도 방법이 없어. 우리 KM 그룹을 희생양으로 삼으려고 한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으니까. 괜히 긁어서 부스럼을 냈다가는 문제가 복잡해.”

“하, 하면 그것 때문에 최두진 사장이 지분을 다 매각하려 한다는 말입니까?”

“김현우 상무가 STB 사업부를 정리하기 전에 마무리하고 싶은 거야. 뭐, 자네도 잘 알겠지만 최두진이 이제까지 해준 것이 있어서 이 일을 덮어둘 수밖에 없어. 훈열이 문제도 같이 덮는 거지.”

“하, 하지만 회장님 STB 사업부 미래가 그렇게 부정적인 것은…….”

그는 가짜 X 리포트를 토대로 다시 보정한 X 리포트를 오영근 사장 앞에 던졌다.

“자네도 그거 한번 읽어봐. 나도 STB 사업부 장래가 밝았다면 이런 이야기는 하지 않았을 거야. 그런데 지금 상황이 그렇지가 못해.”

오영근 사장은 허겁지겁 X 리포트를 다시 읽더니 한숨을 내쉬고 말았다.

“…맙소사, 이게 정말입니까?”

“자네도 이미 기사 보고 어느 정도 눈치를 챘을 텐데, 그런 소리가 나와?”

“하,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언론에서 과장한 것입니다. 이 정도는 아니었습니다.”

“불행히도 그게 진실이야. 그러니 자네도 각오를 단단히 하는 것이 좋을 거야.”

오영근 사장 표정이 좋지 않았다. 자신이 사장 자리에 있는 동안에 구조조정이 진행된다. 즉 결과적으로 이 일이 끝나고 나서 회사 사정이 나빠지면 그 자신이 책임져야 했다.

“회, 회장님…….”

최용욱 회장도 이제는 최훈열 전무나 김현우 상무와 관련된 일을 생각하는 것만으로 피곤한지 손을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런 말 하기는 그렇지만 지금 내 몸이 아직 좋지는 않아. 그러니 꼭 필요한 일이 아니면 당분간은 찾지 말게. 이번 일은 장 실장이나… 아니면 민혁이 그 녀석과 상의해.”

“알겠습니다.”

오영근 사장도 이미 최용욱 회장이 최민혁의 능력을 알았다는 것을 느꼈다. 다만 설사 그렇다고 해도 최용욱 회장 처지에서는 관여하고 싶지 않을 거라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다.

‘도대체가…….’

* * *

아무리 KM 전자가 어렵다고 해도 경영권과 관련이 있는 지분 매입이 쉬울 리가 없다. 다만 기업 오너가 그것을 반쯤 묵인했다면 이야기는 다르다.

몇 번에 걸쳐서 지분 매입 때문에 연락을 취했던 우영민 과장은 최민혁을 보자 마치 슈퍼스타를 본 것처럼 호들갑을 떨었다.

“오, 실장님, 드디어 뵙게 되는군요. 제가 정말 만나보고 싶었습니다.”

“저도 반가워요.”

최민혁도 끝까지 회사에 남은 우영민 과장을 즐겁게 맞이했다.

이번 지분 매입과 관련해서 변호사를 비롯한 몇 사람도 같이 갔다.

그는 이번 지분 매입 협상에 어떻게 임해야 할지 지시하기 위해 직접 우영민 과장을 만나 김현우 상무와 관련된 자료를 내놓았다.

“특히 강조해야 할 부분은 김현우 상무가 저지른 불법입니다. 벨린 투자는 저의 우호 세력이 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해야 해요. 그러면 지분 가격도 낮추고, 협상도 쉽게 될 겁니다.”

“알겠습니다.”

우영민 과장은 최민혁이 이제까지 짜놓은 계획을 하나씩 살피면서 혀를 내둘렀다.

‘진짜 대단하네.’

***

지분 매입 협상 자리에 최민혁이 같이 나타나자 최두진 사장은 처음에는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과거 최용욱 회장 저택을 오가면서 본 적이 있었지만, 성장기를 거쳐서 크게 변해 있었기 때문이다.

협상은 시작부터 좋지가 않았다.

“오늘 KM 전자 종가 가격이 1,630원임을 감안하면, 1,700원 기준으로 250억이면 충분하리라 생각합니다.”

자산가치 기준으로 보면 대략 800억 가까운 지분을 250억으로 후려친 것이었다.

최두진 사장은 처음에 잘못 들었나 싶어서 민기식 변호사를 쳐다보았다.

하지만 민기식 변호사 역시 황당하기는 매한가지였다.

“하지만 그쪽에서 이야기한 최초 금액은 350억이었지 않습니까. 이게 도대체 무슨 말입니까?”

사실 350억에 지분을 팔겠다는 의미가 아니라 상대 제안을 확인하고 싶은 의미로 한 말이었다.

우영민 과장은 당당하게 말했다.

“그때랑 또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최두진 사장의 황당한 얼굴을 본 민기식 변호사는 버럭 소리쳤다.

“지금 저희랑 장난하자는 겁니까?”

하지만 우영민 과장은 최민혁에게 이미 지시받은 시나리오를 슬쩍 비틀었다.

“검찰에서 지금 그쪽을 내사한다는 이야기가 있어요. 국세청 역시 특별 세무조사를 준비 중인데, 이건 제가 직접 국세청 인맥 통해서 확인한 겁니다. 그래서 이 자리에 나온 것 아닙니까.”

“…….”

창백하게 굳은 민기식 변호사는 최두진 사장을 힐끗 쳐다보았다.

화가 잔뜩 난 최두진 사장이 결국 끼어들었다.

“지분 사들일 생각이 없으면 여기서 끝내지.”

벌떡 몸을 일으키는 최두진 사장을 본 최민혁이 어쩔 수 없이 끼어들었다.

“STB 사업부를 매각하게 되면 주가가 다시 폭락하게 될 겁니다.”

깜짝 놀란 최두진 사장은 처음에 그저 일반 평사원이라고 생각했던 최민혁을 다시 쳐다보았다.

최민혁은 어차피 지분 매입을 위해서 굳이 자신을 숨기지 않았다.

“제가 최민혁 실장입니다.”

“뭐? 네, 네놈이 최민혁이라고?”

화들짝 놀란 최두진 사장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최민혁을 쳐다보다가 동행한 벨린 투자 임직원을 다시 쳐다보았다.

“저쪽은 제 투자 대행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정말이야?”

“네. 어르신을 이런 자리에서 뵙게 되어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저는 이제까지 KM 전자 지분을 계속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마침 KM 주가도 바닥을 친 상황이라서 벨린 투자 통해서 지분을 사들이려고 이 자리에 나온 것입니다.”

“…….”

최두진 사장은 다시 풀썩 자리에 앉아서 물끄러미 최민혁의 얼굴을 살폈다. 그는 새삼 김현우가 했던 말이 하나둘씩 떠올랐다.

‘허풍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런데 지금 상황이 마치 최민혁이 지신의 지분을 노린 것처럼 흘러갔다. 김현우 상무의 추측이 마냥 틀리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절대로 250억, 아니 350억이란 가격에 내놓을 수는 없다.”

“마음대로 하셔도 됩니다. 다만 STB 사업부를 매각하고 나면 KM 전자 주가는 1,200원대까지 떨어지게 될 겁니다. 그때 가서는 저 가격에도 매각하기 힘들 겁니다.”

“주가는 내려갈 때가 있으면, 오를 때도 있기 마련이다. 내가 급한 것도 아닌데, 그 정도 시간을 못 기다릴 것 같으냐.”

의외로 분노하기보다는 차분한 음성에 최민혁은 혀를 내둘렀다. 만만한 인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지만, 생각보다 더했다.

자신도 계획이 있듯이 최두진 사장 역시 나름 큰 그림을 그렸던 것이다.

분노한 최두진 사장은 단순히 비자금 문제 때문이 아니라 터무니없는 가격 때문에 더 협상을 이어갈 생각이 들지 않았다.

“여기까지 하자. 다른 것을 다 떠나서 KM 전자 가치를 누구보다 잘 알 만한 친구가 그런 소리를 하다니. 차라리 다른 놈에게 팔겠다!”

최민혁은 자신이 말리기도 전에 떠나 버린 최두진 사장의 모습에 입맛을 다시고 말았다.

‘역시 250억은 무리였나.’

* * *

최두진 사장 역시 STB 사업부 분리 후에 KM 전자의 가치는 주주가 그 권리를 나누어 가지는 인적 분할이나 물적 분할과는 달리 희석된다는 것을 잘 알았다.

특히 이런 구조조정 방식으로 인한 회사 가치 하락에 따른 주가 하락은 단기 아니라 장기에 걸쳐서 나타난다는 점도 보고 말았다.

“250억이라니,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얼마나 분한지, 참다못한 최두진 사장은 결국 다시 최용욱 회장의 별장을 찾아갔다.

“내 살면서 별의별 일을 다 경험해 봤지만 이런 경험은 또 처음이야. 자네 손주 정말 칼도 안 든 날강도라니까. 세상에 뭐 그런 놈이 다 있어?”

“250억이라…….”

최용욱 회장도 왜 그 액수가 나왔는지 대충 짐작은 갔다. 대출받은 돈으로 벌어들인 수익이 430억이라는 것을 보고받았기 때문이다.

다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고작 250억 가지고 최용욱 회장 지분을 먹으려고 할지는 상상도 못 했다.

“자네도 STB 사업부 매각에 대해서는 알 것 아니냐. 다 그런 점을 고려해서 주식을 팔려고 한 거잖아. 그러면 그런 점을 참작해 줘야지.”

“그래서. 자네가 가진 지분을 250억, 아니, 자네 지분 고려해서 450억에 내놓을 건가?”

“…아니.”

“내가 지금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잖아. 구조조정도 다 좋고, 경영권도 다 좋아. 최소한 제값을 줘야 할 것 아냐!”

“흠흠.”

민망해진 최용욱 회장도 차마 뭐라고 더 할 말이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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