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
하지만 한편으로 이번 기회에 김현우 상무를 정리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봤다.
‘최 실장이 가만히 있는 것을 봐서는 이번 일과도 관련이 있어.’
물론 이번 일도 증거는 없었다.
최용욱 회장이 그런 점을 모를 수가 없었다.
“설마 이번 일도 민혁이와 관련이 있는 것은 아니겠지? 아니, 그럴 수는 없어. 현우 그놈이 직접 자발적으로 나섰다고 하니까. 가만 자네는 이번 기회에 김현우 상무를 정리하고 싶은가 보군.”
“솔직히 개인적으로 김현우 상무가 KM 그룹에 전혀 도움이 안 됩니다. 회장님이 입장에서는 최두진 사장의 제안을 무시할 수가 없지만, 이제는 끝낼 때가 되지 않았습니까? 더욱이 이번 경우는 최두진 사장도 마음 상할 일이 아닙니다.”
“허.”
어지간해서는 평가를 하지 않는 장승일 실장이 저렇게 말한다는 것은 그만큼 김현우 상무 문제가 심각하다는 것을 의미했다.
“…내가 두진이 그 친구에게 이야기해 보겠네. 하지만 내 마음대로 할 수는 없어. 이 KM 그룹 1/3은 그 친구 소유니까.”
“알고 있습니다.”
장승일 실장은 자신이 대답하고 나서야 긴가민가한 이 일에도 최민혁 실장이 관여했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확신했다.
‘도대체 어떻게 이런 상황을 만든 것일까?’
* * *
최두진 사장은 최용욱 회장의 방문을 받고 나서는 한동안 침묵했다. 도대체 김현우 이놈이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특히 오성 전자와 관련이 있다는 말에 어금니를 깨물었다.
하지만 굳이 김현우 상무를 부를 필요가 없었다.
김현우 상무는 알아서 자발적으로 나타나서 한 가지를 부탁했다.
“아버지, STB 사업부 매각을 좀 도와주십시오.”
“이 새끼가 진짜 오냐오냐하니, 정신아 완전히 나갔구나!”
하지만 김현우 상무는 불과 일주일 전의 그 모습이 아니었다. 그는 당당하게 웃으면서 오히려 큰 목소리로 말했다.
“혹시 다른 경로로 무슨 이야기를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그건 사실이 아닙니다. 저도 나이가 있는데, 이제는 독립하고 싶습니다.”
“그게 오성 전자야?”
“…너무 오성 전자를 부정적으로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이제는 너무 많은 고민 탓에 두통마저 느낀 최두진 사장은 한숨을 내쉬었다.
“대관절 왜 그러는 거야?”
“솔직히 제 뜻을 펴기 위해서는 KM 전자는 너무 울타리가 협소합니다. 제 꿈을 펼치기 위해서는 최소한 오성 전자와 같이 자본과 인력이 풍부한 곳이어야 합니다. 그랬다면 벌써 전 세상의 주목을 받았을 겁니다!”
“야!!”
쩌렁쩌렁한 소리에 김현우 상무는 움찔 놀라긴 했으나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아버지가 이제까지 저에 대해서 크게 실망한 것을 압니다. 그래서 이번만큼은 한 번 더 기회를 달라는 것입니다.”
“이놈아, 세상이 그렇게 호락호락한 곳인 줄 알아? 도대체 오성 전자에게서 무슨 사탕발림을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그놈들은 승냥이야. 네놈의 뼈까지 다 뜯어 먹고 말 거다.”
하지만 이번 일을 자신이 주도한 김현우 상무는 오히려 반박했다.
“과연 그럴까요?”
대화가 되지 않았다.
최두진은 호적에도 올리지 못한 김현우 상무가 안타까워서 이제까지 뒤에서 많이 돌봐줬지만, 이제는 정말 지쳤다.
그는 이전과는 달리 검찰의 압박과 세무조사 내용마저 떠올리자 이놈의 KM 전자에 대해서는 만정이 다 떨어지고 말았다.
그렇다면 차라리 STB 사업부 매각 이전에 KM 전자 지분을 정리하기로 마음먹었다.
“후회 안 할 자신은 있냐?”
“자신합니다.”
“알았다.”
“감사합니다.”
그는 김현우 상무가 희희낙락해서 떠나자 민기식 변호사에게 말했다.
“KM 전자는 앞으로 어떨 것 같아?”
“STB 사업부를 매각하고 난 다음 말입니까?”
“그래.”
일중독에 가까운 민기식 변호사는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다른 컨설팅을 통해서 얻은 보고서를 살피면서 말했다.
“오디오 사업부는 몇 년 동안 괜찮습니다. 하지만 TV 사업부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VCR 사건에서 볼 수 있듯이 오성 전자를 비롯한 가전 3사의 압박이 더 심해질 거고, 결국에는 버티기 어려울 겁니다. 더욱이 다른 사업부에서 이익이 나지만 크지 않습니다. 그런데 미래 성장 엔진인 STB 사업부를 정리한다면…….”
굳이 더 안 들어도 뒷말을 모를 수가 없었다.
지금 당장은 문제가 없더라도 미래가치가 불투명한 회사.
그것이 바로 KM 전자였다.
“최 회장도 그걸 알 것 아냐. 그런데 왜 이번 일을 이렇게 쉽게 생각하는 걸까?”
“아무래도 김현우 상무님 때문이 아닐까요? 본인 스스로 저렇게 나가겠다고 하니, 차라리 이번 기회에 정리해버리는 것이 났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저 돼지가 그렇게 문제가 많아?”
“잘 아시지 않습니까?”
“그래. 나도 알아. 그러면 앞으로 KM 주가 회복은 어려운 거야?”
“당분간은 그렇게 봅니다. 특히 최훈열 재판이 대법원까지 갈 텐데, 계속 중간마다 말이 나올 겁니다. 특히 STB 사업부 매각 결정 나면 KM 전자 주가는 또 폭락할 겁니다.”
“여기서 더 떨어진다고?”
“주식은 현재 가치도 중요하지만 그보다는 미래 가치를 기준으로 그 방향이 정해집니다. 늘 제자리걸음만 하는 KM 전자 주가는 글로벌시장의 주도권을 잡고 있는 KM 산업과는 달리 내려갈 수밖에 없습니다.”
최두진 사장도 한숨을 내쉬었다.
“KM 지분 말인데, 정리할 수는 있겠어?”
“마침 연락을 해온 곳이 있습니다.”
“그쪽하고 한번 만나서 진지하게 협상을 시작해 봐.”
“그런데 코스피 하락세가 다시 이어져서 손실이 불가피합니다.”
“어쩔 수 없잖아. 지금은 빨리 정리하는 것이 최선이야!”
“알겠습니다.”
* * *
최두한 사장은 다시 최용욱 회장을 찾아가서 자기 뜻을 밝혔다.
아마 보통 때라면 최용욱 회장도 펄쩍 뛰었겠지만 최훈열 전무 재판 때문에 최두한 사장에게 별다른 이야기를 할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은 각자 서로 혈육이 걸려 있어서 제대로 대화도 하지 못했다.
특히 최용욱 회장은 이미 장승일 실장에게서도 앞으로 KM 그룹 계열사 업무 조정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서 차라리 잘되었다고 생각했다.
두 사람의 합의를 뒤늦게 들은 장승일 실장도 너무 빠르게 상황이 변해가는 것에 당황했다. 김현우 상무의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로 어떻게 해야 할지 종잡을 수가 없었다.
결국 앞으로 일이 어떻게 전개될지 몰라서 최민혁을 다시 찾아갔는데, 평소와는 다른 KM 전자 직원의 따가운 시선을 받았지만 모른 척했다.
물론 최민혁의 반응은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오, 장 실장님 오셨군요. 너무 자주 오시는 것 아닙니까? 요즘 기획 팀에서도 장 실장님 때문에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닙니다.”
천하태평인 최민혁의 표정을 보자 절로 한숨이 나왔다.
“저 때문이 아니겠죠.”
“혹시 김현우 상무 건 때문입니까? 참, 사람 일은 알다 가도 모르겠어요. 그렇게 사업부 매각을 반대하던 이가 갑자기 찬성으로 돌아섰으니까요.”
“…최 실장님은 그 일에 아무런 관련이 없는 겁니까?”
“저요? 아니 제가 뭐라고 했습니까? 이사회에서 단 한마디도 안 했습니다. 그런데 이쪽저쪽에서 계속 이상한 말이 나오지 않습니까. 전 정말 억울합니다.”
한쪽에 조용히 서 있던 김명준 과장은 아카데미 남우주연상이 울고 갈 최민혁의 연기에 무안해서 실장실 밖으로 나가 버렸다.
장승일 실장은 잠깐 입을 다문 채 물끄러미 최민혁 눈을 응시했다. 당당하기만 한 최민혁의 눈빛은 자신의 죄 없다고 항변하는 모양새였다.
“뭐, 좋습니다. STB 사업부 매각 안건은 제가 먼저 주장했습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기획 팀의 주장이지, 실제로 매각한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최악의 상황에 구조조정을 하는 정도로 전 생각했고요. 그런데 김현우 상무가 갑자기 사업부를 매각해야 한다고 주장하지 뭡니까. 저도 참 당황스럽습니다.”
“그렇습니까?”
“정말 억울합니다. 전 기획실장으로 소임을 다하는 것뿐입니다. 막말로 사업부 매각 최종 결정은 어차피 그룹 기조실에서 하는 것 아닙니까? 할아버지가 승인하실 거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미 암묵적으로 매각 허락하셨습니다.”
최민혁은 정말 영문을 몰라서 장승민 실장을 멍하니 쳐다보았다.
“네? 정말요?”
“네. 이미 회장님도 이미 상황이 이렇게 된 마당에 어쩔 수 없다고 했습니다.”
“맙소사. 가만 그러면 저희 사장님과 부사장님은 아세요? 그분들은 결사반대할 텐데요?”
“이제는 그 두 분이 반대해도 소용없어졌습니다. 최두진 사장님도 매각을 찬성했으니까요. 지분 역시 정리하려고 하시더군요.”
“오, 그러면 그 지분은 앞으로 어떻게 되는 겁니까?”
의미심장한 눈으로 최민혁을 쳐다보면서 한 가지를 말했다.
“벨린 투자 측에서 협상 요청이 들어왔다고 합니다만.”
“…벨린 투자라면 설마 제 아버님이랑 관계가 있는 그 회사 말입니까?”
“과거 그룹 자급을 담당했던 비공식적인 투자회사였죠. 지금은 이름만 남았는데, 다시 운영된다고 하더군요. 혹시 짐작하는 것은 없습니까?”
사실 벨린 투자는 전적으로 최병문이 비밀리에 관리해서 KM 기조실에서도 제대로 모른다. 혹시라도 법적인 문제를 없애려는 방법이었다.
최병문이 죽고 나서 그 자금 대부분은 다시 그룹 기조실로 넘어갔다.
장승일 실장도 곧 정리 순서를 밟을 예상인 벨린 투자가 어떻게 운영되는지 몰랐다. 아니, 굳이 알려고 하지 않았다.
혹시라도 그 비자금이 KM 그룹 쪽으로 연결되면, 말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최민혁은 어깨를 으쓱했다.
“저도 자세한 것은 모릅니다. 그저 아버지랑 과거 인연이 있다고 해서 제 대출금을 맡겼을 뿐이니까요.”
“좋습니다. 그렇다고 하죠. 하면 실장님 생각하기에는 벨린 투자에서 최두진 사장님의 지분을 인수하는 것이 좋다는 말씀이군요.”
“그게 좋지 않을까요? 아니면 할아버지가 그 지분을 인수하는 것이 맞겠죠.”
“그게 지금은 좀 어렵습니다. 이쪽저쪽에 들어갈 돈은 많은데, 대출이 다 막혀서 회사 자금 사정이 좋지가 않습니다.”
얼핏 생각하면 이해하기 힘들지만, KM 그룹은 지금 당장 쓸 수 있는 현금이 넉넉하지 않았다.
지금까지 워낙에 빌린 대출금이 많아서 추가 대출도 어려웠던 것이었다.
“가장 심각한 문제는 정부가 노골적으로 은행에 압력을 넣은 점입니다. 현재로써는 현금 자산을 다 매각해서 겨우 버티는 중입니다.”
“큰일이네요.”
“아뇨. 그렇게 심각하지 않습니다. 다만 최두진 사장님도 KM 전자 지분만큼은 여러 가지 일로 부담스러워서 당장 정리할 생각인 것 같습니다.”
“STB 사업부 매각하면 주가가 또 폭락할 것을 염려해서겠죠.”
“네.”
내심 환호성을 터뜨린 최민혁은 표정 관리를 한다고 심호흡까지 했다. 괜히 자기 내심을 드러내고 싶지는 않았다.
“실장님 우려 잘 알겠습니다. 제가 문제없도록 처리할 테니, 최두진 사장님 쪽에 이야기나 잘 좀 해주세요.”
“…알겠습니다.”
장승일 실장도 묻고 싶은 질문은 많았지만, 최민혁의 얼굴을 봐서는 대답해 줄 것 같지 않아서 결국 입을 다물고 말았다.
‘역시 이번 일도 최 실장님이 관련되어 있구나. 도대체 어떻게 일을 꾸몄기에 김현우 상무가 그런 행동을 할까?’
* * *
최민혁도 뒤늦게야 돌아가는 판세를 다시 파악하면서 자신이 계획한 것보다 더 일이 잘 풀려간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 사채업자 대주주도 손해 보는 것이 싫어서 지분을 빨리 팔고 싶어 하는구나.’
사실 지금까지 참은 자신도 인내의 한계에 도달한 상황이다.
영문을 잘 모르는 최두진 사장이 버티기에는 한계가 있을 것이다.
이제 남은 것은 마무리였다.
그는 슬쩍 오영근 사장에게 장승일 실장이 방문해서 한 이야기를 넌지시 말해주었다.
경영자로서 STB 사업부가 가지는 가치를 누구보다 잘 아는 오영근 사장은 펄쩍 뛰었다.
“말도 안 돼!”
“이미 회장님도 어느 정도 이 안건에 대해서는 승인한 내용입니다.”
“아무리 그래도 STB 사업부 매각은 말도 안 되네. 내가 직접 회장님을 뵙고 말씀드리겠네.”
“제가 무슨 힘이 있습니까. 전 그냥 돌아가는 이야기를 말씀드린 겁니다.”
다시 뒤로 물러난 최민혁은 딱히 오영근 사장에게 별다른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조용히 있던 오영근 사장도 도저히 그냥 이대로 두고 볼 수만은 없었는지 직접 최용욱 회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STB 사업부 매각에 대해서 직접 뵙고 말씀드리겠습니다.”
* * *
최용욱 회장은 한창 시절에 자신 옆에서 도왔던 공신을 잊지 않았다. 그들에게 나름의 대우도 해줬고, 지금도 다르지 않았다.
그들 역시 자리를 지키면서 꽤 많은 것을 챙겼기에 크게 나서지는 않았다. 그런데 그들이 직접 몸으로 움직인다는 것은 가볍게 생각할 일이 아니다.
그는 기조실의 장승일 실장을 먼저 불러 돌아가는 상황을 확인했다.
“오 사장이 STB 사업부 매각 반대 때문에 곧 있으면 방문할 거야.”
“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