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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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작스럽게 열린 이사회는 이전과는 사뭇 분위기가 달랐다.
이런저런 유언비어가 사내에 돌고난 후라서 다들 잔뜩 긴장했다.
그중에 한 사람인 위성사업부의 이일태 이사는 김현우 상무와 같은 꼴을 당하기 싫어서 위성 산업에 관한 결과를 늘어놓았다.
[최소한 수조 원 이상의 파생시장을 예상할 수가 있습니다. 본격 위성 주권 시대가 열리면 치열한 경쟁이 불가피합니다. 위성방송 수신기는 다른 가전 3사와 공동으로 개발 착수해서 암호 장치를 제외하고는 이미 개발이 완료되었습니다.]
6년 후쯤엔 수조 단위 이상의 시장의 장밋빛 미래도 기대해 볼 수 있다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쟁쟁한 회사와 같이 기술 개발을 해서 특별한 문제가 없다는 점을 피력했다.
군기가 바짝 선 이일태 이사의 태도는 이전과는 사뭇 달랐다.
오영근 사장은 갑자기 이일태 이사가 미쳤나 싶어서 쳐다보았고, 문형섭 부사장은 대충 그 내심을 짐작해서 웃을 뿐이었다.
두 사람은 이보다 늘 큰 파란을 일으킨 최민혁 실장을 유심히 쳐다보았다.
하지만 오늘은 그저 구경꾼 역할만 충실히 하려는 최민혁은 그저 불구경하듯이 지켜만 봤다.
김현우 상무는 그런 최민혁의 모습에 마치 자신이 승자라도 되는 양 폭탄선언을 해버리고 말았다.
“STB 사업부 매각은 불가피할 것 같습니다.”
“……?”
폭탄 테러범이 설치한 건물이 아니라 옆 건물에서 폭발이 일어나자 영문을 모르는 이사회 임원은 다들 멍하니 김현우 상무를 쳐다보았다.
특히 오영근 사장은 침중하게 질문했다.
“김 상무, 지금 자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나 알고 하는 건가?”
“이미 기획 팀에서는 STB 사업부 미래에 대해서 우려를 많이 해왔습니다.”
이미 STB의 불안한 미래에 관련된 이야기는 하나씩 다 나왔다.
이미 최민혁에게 충분히 들은 이야기인 터라 오영근 사장이 냉정하게 말했다.
“그렇다고 해도 김 상무 자네가 직접 나서서 왈가왈부할 문제는 아냐.”
“이미 기조실에서도 검토되는 것으로 압니다.”
그는 슬쩍 최민혁 실장에게 배턴을 넘겼다.
최민혁은 이미 오영근 사장을 만나서 몇 번이나 했던 이야기를 하면서 실제로 장승일 실장이 뭘 하고 있는지 지적했다.
“최근 기조실에서 계열사 업무 분장을 새로 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중에는 우리 KM 전자 역시 빠지지 않습니다. 특히 STB 사업부가 그 첫 대상입니다.”
“최 실장, 정말 말을 너무 함부로 하는군. 그 이야기는 내가 따로 사장단 회의를 통해서 결론을 낼 거야. 여기서 할 말은 아냐!”
확실히 사업부 매각 안건에 대해서 오영근 사장은 냉정하게 반박했다.
하지만 김현우 상무는 아예 노골적으로 반박했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처럼 회사 자산을 빼먹는 기생충 역할을 할 수는 없습니다. 그건 STB 사업부 임직원도 힘들지만, 기존 KM 전자 직원에게도 고통스러운 일입니다.”
오영근 사장이 어이가 없다는 듯 한마디 했다.
“허, 김 상무, 자네 자리도 위태로운 것까지 고려해서 하는 소리야?”
“회사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제 희생을 감수하겠습니다.”
“…….”
오영근 사장은 자신이 잘못 들었나 싶어서 문형섭 부사장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하지만 황당한 이사회 분위기에, 멍하니 지켜만 보던 문형섭 부사장 역시 매우 놀랐다.
지켜보는 다른 이사회 임원 역시 제정신이 아닌 듯한 김현우 상무를 쳐다보았다.
최민혁은 물끄러미 이 광경을 지켜보면서 혀를 차고 말았다.
‘정말 내가 만든 시나리오지만 어이가 없네. 비디오 특허에 아주 푹 빠졌구먼.’
하지만 사업부 매각은 오영근 사장이라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는 이사회에서 나온 이야기를 한번 두고 보자는 식으로 말하고 회의를 끝내고 말았다.
김현우 상무는 최선을 다하겠다는 말을 하며, 이번 일에서 쉽게 물러날 생각이 없는 것처럼 행동했다.
“…….”
최민혁은 어깨만 으쓱한 채 뒤로 한 걸음 물러나서 방관자 입장만 취했다.
* * *
최민혁의 지시로 STB 사업부 매각에 대한 안건은 자연스럽게 이사회에서 기획 팀에도 넘어갔다.
이제까지는 그저 소문만 무성하던 안건이 진짜 이사회에서 다루어졌지만 예상을 벗어난 회의 분위기에 다들 황당했다.
늘 자신만만한 배종대 과장조차 혀를 내둘렀다.
“아니, 이게 도대체 뭔 일입니까? 김현우 상무가 오히려 사업부 매각을 밀어붙였다니, 도대체 그 양반은 자기 밑에 있는 사람들 생각을 하는 겁니까?”
아무리 적자투성인 사업부라고 해도 매각 소식이 전해지면 그 조직에 큰 충격을 준다.
이제까지 몇 년에 걸쳐서 STB 사업부에 몸담은 임직원은 다들 착잡하고, 서운한 것이다.
심지어 억울함마저 느낀다.
정성근 대리도 표정이 좋지는 않았다.
“이미 KM 그룹에서 돈이 안 되는 자산을 정리할 때부터 구조조정 이야기는 현실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막상 그 일이 본격적으로 이사회에서 다루어지니까, 그러네요.”
정이 많은 이정원 과장이 뒤늦게 푸념을 털어놓았다.
“아직 경쟁력이 있다 없다 결정할 일도 아니고, 실적은 나아질 수도 있을 텐데, 너무 성급한 결정이 아닌가 싶습니다.”
하지만 현실적인 박상기 차장 생각은 달랐다.
“두 사람 말도 일리가 있어. 하지만 김현우 상무가 한 실책이 커. 전문성도 없는 분야에 욕심을 내서 성과를 낼 리가 없잖아. 잿밥에 관심이 많아서 회삿돈을 탕진한 것도 컸어.”
김현우 상무 이야기가 나오자 기획 팀은 다들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그들 역시 2년 동안 죽어라고 STB 사업부를 지원하기 위해 열심히 뛰어다녀서 누구보다 김현우 상무가 무슨 짓을 했는지 잘 알았다.
황당한 사실은 정작 사업부 부실에 관한 책임은 김현우 상무에게 있는데, 엉뚱한 임직원이 피해를 본다는 점이다.
묵묵히 듣기만 하던 조성돈 팀장이 그제야 슬쩍 나섰다.
“자, 다들 마음은 알아. 하지만 우리 기획 팀이 해야 할 일을 해야지. 일단 본격적으로 매각에 관한 이야기가 나왔으니, 다시 검토해야 해. 이전까지와는 분위기가 달라. 그러니 다들 진지하게 확인해 봐.”
그는 한 사람씩 지시를 내린 후에 이전과는 다르다는 것을 분명히 해두었다.
“이번 일은 기조실과도 미팅을 해야 하니, 당분간은 입조심해. 회사 내에 이 소문이 돌면 난리가 날 테니까.”
“알겠습니다.”
아마 이전이라면 반박하고 다른 의견을 냈겠지만, 지금은 사정이 달랐다.
이미 KM 전자 구조조정 이야기는 계속 나오고 있었고, 그 대상이 된 것이 STB일 뿐이었다. 특히 기획 팀은 STB 사업부의 문제점을 잘 알기에 더 말할 수가 없었다.
그저 안타까울 뿐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 이 문제에 대해서 계속 주장한 한 사람을 떠올렸다.
‘이게 모두 실장님의 계획일까. 하지만 이번 일은 김현우 상무가 적극적으로 나섰다고 했잖아. 도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일까?’
* * *
장승일 실장은 겨우 최민혁 실장 문제에 대한 고비를 넘긴 후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 역시 최용욱 회장이 크게 질책하지 않을 것으로 생각했지만 내심 걱정이 되었다.
최훈열 전무가 실형을 받을 확률이 높기 때문이었다.
이 부분은 최용욱 회장에게서 따로 아쉽다는 소리를 들었다.
[자네가 사전에 제동을 좀 걸었으면 얼마나 좋았겠나. 그건 역시 힘들었겠나?]
무리다.
최훈열 전무가 자신의 말을 들을 사람은 절대로 아니었다.
그런데 구길모 차장이 황당한 얼굴을 한 채 한 가지 보고서를 들고 나타났다. 바로 김현우 상무가 제안한 STB 사업부 매각 건이었다.
“이거 진짜야?”
“네. 저도 얼떨떨합니다.”
“오영근 사장님은 뭐래?”
“말로는 결사반대하지만 오 사장님이 딱히 이사회에서 힘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어차피 회장님 뜻이 중요하니까요. 그런데 김현우 상무 하는 것을 봐서는 최두진 사장 통해서 압력을 행사할 겁니다. 그건 상황이 전혀 다르지 않습니까?”
“다르지. 최두진 사장은 회장님께 따로 이야기할 텐데, 두 사람 지분이 반수를 넘어서 STB 사업부 매각도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냐.”
더 큰 문제는 요즘 KM 그룹을 둘러싸고 있는 구조조정안이다. 유동성 확보를 위해서 불필요한 현금성 자산을 다 매각했다.
따라서 돈이 안 되는 사업부를 매각하는 것이 그다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설사 STB 사업부라고 해도 다르지 않은데, 주주총회 통과도 어렵지가 않았다.
말로만 나오던 일주일 전과는 또 상황이 달라졌다.
장승일 실장도 한 가지 점을 다시 지적했다.
“도대체 김 상무는 왜 자기 사업부를 매각하자는 이야기를 꺼낸 거야?”
“그게 아직도 잘 모르겠습니다. KM 전자 기획 팀에서도 당황하기는 매한가지입니다.”
그는 마침 한 사람의 얼굴을 떠올렸다.
“최 실장님은 어때?”
“조용합니다.”
“전혀 아무런 행동도 안 해?”
“네. 혹시나 싶어서 제 동기 통해서 확인했는데, 요즘처럼 조용한 일도 없다고 합니다. 더욱이 이번 안건은 김현우 상무가 주도적으로 나섰습니다.”
“정말 실장님은 옆에서 지켜만 봤다는 소리야?”
“네.”
이들이 알 수 없는 것은 비디오 특허 관련된 문제를 비밀리에 처리한 최민혁도 한 원인이지만, 그 정보를 차단한 김현우 상무도 또 다른 이유였다.
두 사람이 본의 아니게 같이 정보 보안을 철저하게 지킨 덕분에 기조실에서도 알 수가 없었다.
“흠.”
장승일 실장이라고 해도 신이 아닌 마당에 KM 전자 내부에서 일어나는 미묘한 일까지 다 파악할 수는 없었다. 다만 다른 때는 그래도 어느 정도 추론이라도 했는데, 이번 경우는 전혀 알 수가 없었다.
‘이번에는 아무래도 회장님께 바로 보고를 해야겠어.’
* * *
최민혁과 관련해서 일어난 일이 정리된 보고서를 살피던 최용욱 회장은 아직도 잘 이해를 할 수가 없어서 눈을 껌뻑였다.
아무리 봐도 자신의 경험으로도 최민혁의 행동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가 특히 놀란 점은 데이콤 지분 21만 주를 팔아치워서 무려 430억이라는 수익을 번 부분이다.
‘집 대출금과 김기범에게서 빌린 돈으로 430억을 마련했다고? 이게 가능한 소리야?’
KM 전자의 공장 하나를 사들이는 데 들어가는 비용이 대략 60억 정도 되는 것을 고려하면 430억은 결코 적은 돈이 아니었다.
왜 장승일 실장이 증거가 없다고 한 것인지 뒤늦게 이해한 최용욱 회장은 갑자기 별장을 찾아온 장승일 실장을 보자 몇 가지 질문을 하려고 했다가 표정을 보고서 눈살을 찌푸렸다.
“어지간한 일이 아니면 찾지 말라고 했을 텐데?”
“KM 전자의 김현우 상무가 STB 사업부 매각안을 제시했습니다. 아무래도 최두진 사장과 관련된 일이니, 회장님이 아셔야 할 일 같아서입니다.”
“그 돼지가 또 사고 친 거야?”
“그건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STB 사업부에 관해서는 이미 제가 몇 차례 보고를 드렸습니다.”
그는 슬쩍 자체 조사해서 수정한 X 리포트에 첨부된 STB 사업부에 대한 보고서를 내밀었다.
“사실 기조실에서는 앞으로 계속 손실이 불가피한 이 사업에 대해서 부정적이었습니다. 다만 김현우 상무와 관련이 있어서 내버려 뒀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본인이 나서서 매각하자고 해서 상황이 달라졌다는 건가?”
“…….”
장승일 실장은 대답하지 않았다.
안 그래도 최민혁의 움직임에 대해서 의아해하던 최용욱 회장은 다시 보고서를 살피다가 테이블에 그냥 내려놓았다.
“그 친구는 뭐래?”
“아직 확인하지 않았습니다. 회장님의 뜻이 중요하니까요.”
자기 자식 일도 아닌 일에 고민하고 싶지 않았던 최용욱 회장은 한숨을 내쉬었다.
“장 실장, 도대체 회사 내에 무슨 일이 생긴 건가?”
“네?”
“아니, 이상하잖아. 느닷없이 돼지가 자기 사업을 정리하고 싶다고 하잖아. 그게 말이 되는 거야?”
장승일 실장이 하고 싶은 말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제가 김 상무를 직접 만나서 이야기를 해봤지만, 본인이 극구 사업부 매각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다만 그 사업부가 오성 전자인 것이 좀 찜찜합니다.”
“뭐야?”
버럭 화를 낸 최용욱 회장은 충격에 몸을 비틀거리고 말았다. 옆에서 지켜보던 간병인이 후다닥 뛰어가서 살폈다.
다행히 일시적인 현상이었다.
장승일 실장도 아차 싶었지만 그렇다고 중요한 이야기를 안 할 수가 없었다.
“서, 설마 오성 전자 그놈들이 배후에서 작업한 거야?”
“그럴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도 이해하기 힘든 일입니다. 오성 전자가 STB 사업부에서 얻은 것이 별로 없기 때문입니다.”
“정말 자세히 확인한 건가?”
“네.”
하지만 장승일 실장도 선뜻 장담하지 못했다. 김현우 상무가 STB 사업부 매각 안건을 꺼낸 후에 STB 사업부 내부 보안을 강화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간간이 나오는 이야기가 있지만, 도저히 믿을 수가 없는 내용이었다.
새로운 특허만 해도 그런 것이 이제까지도 별 내용이 없었다. 그런데 갑자기 대학 연구 팀과 합작한다고 해서 금덩이가 떨어질 리 없었다.
‘시간이 조금만 더 있으면 좋겠는데…….’
그러나 불행히도 김현우 상무가 파고들 시간을 더 주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