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67화 (67/1,021)

#67

결국 이권을 노린 정치권이 다시 끼어들면서 오성 전자의 데이콤 지분 인수도 주춤했다.

악재가 계속 터지면서 데이콤의 주가는 하염없이 떨어졌다.

바로 최민혁이 데이콤에 손을 떼면서 원래 아는 미래의 흐름을 그대로 따라간 것이었다.

하지만 천선구 과장은 죽기 살기로 황광수 차장 손을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그런데 마침 권태성 실장이 그 모습을 보고 끼어들었다.

“무슨 일인가?”

“김현우 상무가 보낸 친구인데, 별일 아닙니다.”

“김현우 상무?”

이번 일 때문에 단단히 당한 황광수 차장도 두 손을 들었다.

“실장님, 더 이상은 KM 전자와 엮이지 않는 것이 상책입니다. 이미 우영민 과장과도 약속을 한 것 아닙니까. 아니, 이제는 제가 더 못하겠습니다.”

하지만 권태성 실장은 지난 일은 전혀 없었던 사람처럼 천선구 과장의 이야기를 들었다. 심지어 그가 내놓은 자료도 확인했다.

그는 대수롭지 않게 비디오와 관련된 열 가지 특허의 의미를 확인하다가 눈을 크게 치켜떴다.

“일단 사무실에 가서 이야기하지.”

“권 실장님, 정말 이번 일에서 전 빠지고 싶습니다. 도대체 이게 무슨 일입니까? 아니, 제가 책임질 일도 아니지 않습니까?”

“허, 그 친구도 참. 쓸데없는 소리 말고, 안에 들어가서 이야기하자니까. 아, 그리고 특허 담당자는 다 불러 모아서 한 번 이야기나 해봐.”

입술을 깨물은 황광수 차장은 어쩔 수 없이 눈동자만 굴리고 있는 천선구 과장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 * *

오성 전자는 냉장고, 세탁기를 비롯해서 거의 모든 가전제품을 다 만든다. 심지어 VCR, DVD 플레이어, 캠코더, 셋톱박스와 같은 제품도 포함한다.

따라서 각 영역에 할당된 인원만 해도 많아서 기획 팀은 여러 개의 팀으로 나누어진다.

각 팀에는 다시 이 제품과 관련된 특허를 전담하는 이도 있다.

이 원천특허 팀은 갑작스러운 호출 때문에 기획실로 우르르 몰려갔다.

그들은 아침부터 예정에도 없던 미팅이라서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그때 나타난 이는 인상을 잔뜩 찌푸린 황광수 차장이었다.

그는 복사한 비디오 특허 개요를 정리해서 그들에게 나누어주었다.

하지만 이 멀티미디어 분야를 담당한 특허 담당자는 딱 보는 것만으로 자기 담당 제품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금방 파악했다.

심지어 그 기술적인 가치를 알아보자 분위기는 얼어붙고 말았다.

비록 특허 현황을 알지만 그 밑바닥 원천기술의 가치까지 명확하게 알지 못하는 황광수 차장도 분위기가 달라진 것을 금방 깨달았다.

“이, 이게 뭡니까?”

“한 업체에서 가져온 특허인데, 의미가 있는 것인지 확인하기 위해서 여러분을 부른 겁니다.”

“그, 그러면 우리 오성 전자나 다른 계열사에서 연구하는 특허는 아니란 말입니까?”

“아닙니다.”

“맙소사.”

그들 역시 다른 계열사에서 꾸준하게 올라오는 원천특허를 계속 분석하고, 출원하면서 그 가치를 하나씩 챙겼다.

지금 자신이 받은 것은 바로 S급 특허였다.

황광수 차장은 대수롭지 않을 것이라는 예상과는 다른 반응에 인상을 잔뜩 찡그렸다. 이 정도 일은 자신의 손을 이미 벗어났기 때문이다.

‘흘러가는 스토리가 딱 데이콤 지분 인수할 때나 다른 것이 없잖아.’

[다시 한번 잘 봐주시기 바랍니다. 원천기술이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불필요한 특허를 매입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복잡한 비디오 코딩 관련 특허에는 특히 예민한 담당자는 그런 자신의 의문을 아예 용납조차 하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쓰레기 같은 특허 수천 건을 등록하는 것도 로열티 때문 아닙니까. 설마 이렇게 귀중한 특허를 매입할 수 없다니,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그렇습니까?]

[황 차장님은 이 비디오 특허가 뭔지 모르니, 그런 소리를 하는 겁니다. 이 정도 특허라면 특허 이해 관계자와 제조업체 당사자 간의 이해관계 때문에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어요. 거기에 들어가는 돈이 천문학적이라는 것을 모릅니까?]

[압니다.]

[그런데도 그런 말씀을 하는 겁니까?!]

[흠.]

오히려 일방적으로 실무진에게 깨진 황광수 차장은 한 숨을 내쉬고 말았다. KM 전자와 얽혀서 늘 좋은 꼴을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잘되기를 빌어야지.’

* * *

김현우 상무는 오성 전자에서 긍정적인 답변을 듣자 즉시 임기석 부장을 호출해서 비디오 특허와 관련된 이야기를 시작했다.

“임 부장, 많이 섭섭했지?”

“네?”

“내가 얼마 전까지 임 부장을 독하게 대우한 것은 자네를 정말 아끼기 때문이었어. 그래야 뭔가 결과가 나오지 않겠나?”

영문을 모를 말에 임기석 부장은 눈만 동그랗게 떴다.

그런데 곧 비디오 특허 이야기가 나오자 혀를 차고 말았다.

“아, 그건 확실치가 않아서 제 나름대로 알아보았습니다.”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사실 연구 팀과 협업에 대한 보고를 하지 않은 것은 엄연히 문제의 소지가 있었다.

김현우 상무는 그런 점을 슬쩍 언급도 하지 않은 채 넘어갔다.

“하하하, 정말 중요한 일을 하다보면, 보고를 빼먹을 수도 있잖아.”

“감사합니다.”

“어차피 그 연구 결과는 STB 사업부 재산이야. 딱히 그런 말을 할 필요는 없지. 오히려 공과를 세운 장수에게 상을 줘야 하지 않겠나?”

호탕하게 웃는 김현우 상무는 자신이 마치 삼국지의 장비라도 된 사람인 양 임기석 부장의 문제를 따지지 않았다.

대신에 그는 한 가지 문제를 꼭 지적했다.

“다만 이번 연구는 아직 회사 내의 다른 팀에서 알아서는 곤란해. 심지어 기획 팀도 예외는 아니고. 일단 임원 회의에서 다루고 난 다음이어야 해.”

“당연한 말씀입니다.”

“으하하하, 역시 우리 임 부장다워. 이렇게 호탕하다니. 남자라면 그래야지. 자네도 이제 곧 이사도 달고 그래야 하지 않겠나? 나만 믿어.”

“…네.”

임기석 부장은 최민혁 실장에게 듣기는 했지만 설마 이렇게 일이 흘러가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다만 김현우 상무는 워낙에 욕심이 많으니 그렇다고 하자.

도대체 최민혁 실장이 왜 비디오 관련 특허를 탐욕이 가득한 김현우 상무 손에 쥐어 주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비디오 특허를 다시 분석해 보았지만 아무것도 발견하지 못했다.

‘도대체 최 실장님은 무슨 꿍꿍인지 모르겠네. 설마 특허에 무슨 다른 함정이라도 있다는 말인가?’

* * *

김현우 상무는 임기석 부장과 입까지 맞춘 후에 연락을 기다렸는데, 오성 전자 측에서 다시 연락을 받자 번개처럼 달려갔다.

입에 침까지 튀겨가면서 비디오 특허 열 가지와 관련된 자료와 연구 결과를 보여주었다.

실제로 써먹고도 남을 정도로 완벽한 자료에 황광수 차장은 더 불안했다.

“권 실장님, 이번에는 천천히 확인하는 것이 좋지 않을까요?”

“이봐, 황 실장은 지금 이 자료를 보면서도 그런 이야기가 나와?”

자료만이 아니라 특허 팀장의 특강까지 받아서 이제는 그 의미를 명확하게 파악했다.

어디까지나 돈이 되고, 어느 정도 가치가 있는지 말이다.

지금 MPEG 표준화 관련해서 오성 전자와 계열사 연구소에 돈을 퍼붓고 있지만 정작 이 비디오 특허 중에 한 가지만 못했다.

수천 억을 퍼부어도 나온 결과가 고작 이 특허 하나만 못했다는 거다.

황광수 차장은 마치 떠밀려 가는 자신의 처지가 불안했다.

“이미 데이콤 지분 일도 있지 않습니까.”

“시간이 없잖아. 우리 김 이사님은 지금 당장은 STB 사업부 상황을 외부에서 몰라서 쉽게 매각할 수 있지만 시간이 흐르면 상황이 달라진다고 하잖아!”

김현우 상무는 슬쩍 한 가지를 더 말해주었다.

“오영근 사장은 최용욱 회장 라인입니다. 만약 이 특허에 대한 것이 본사 기조실에도 알려진다면 STB 사업부 매각은 어려울 겁니다. 아니, 설사 매각이 가능하다고 해도 이 특허까지 넘기는 것은 어렵죠.”

황광수 차장이 반박했다.

“하지만 그쪽 연구원이 바보도 아닌데, 기획 팀에 이미 알렸을 것 아닙니까.”

“아직은 아닙니다. 제가 아직까지 그 사실을 외부에 알리지 않았으니까요.”

“그게 가능합니까?”

이미 이 자리에 오기 전에 임기석 부장을 만나서 따로 지시를 내린 김현우 상무는 당당하게 소리쳤다.

“저만 믿으세요. 제가 원하는 것은 잘 아시지 않습니까. 전 제가 꾸는 꿈을 완성하고 싶을 뿐입니다. 그런데 KM 전자에 웬 20살짜리 낙하산이 내려와서 물을 흐르지 뭡니까. 이게 정말 가당키나 한 소리입니까?”

“최민혁 실장 말인가요?”

“네. 어휴, 제가 정말 미치고 환장하겠습니다. 자기 할아버지 믿고, 온갖 깽판을 다 치는데, 아주 돌아버리겠습니다.”

“그렇습니까.”

두 사람은 이어지는 김현우 상무 말을 일방적으로 들을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20살짜리 기획실장 이야기는 이미 알고 있었다.

너무 황당해서 아예 논외의 대상으로 여겨서 김현우 상무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김현우 상무 말은 꽤 설득력이 있었다. KM 전자 같은 제조업에서 STB 원천기술을 연구하는 이가 김현우 상무가 유일했기 때문이다.

안 좋은 소문이 있다고 하지만 눈앞에 있는 결과는 진짜였다.

황광수 차장도 더 이상 부정적인 태도를 보일 수가 없었다.

“다 좋습니다. 정말 이 특허를 포함해서 STB 사업부를 매각할 수 있겠습니까?”

“단, 이 특허만 따로 처리하면 안 됩니다. 만약 기획 팀에 이야기가 들어가면 사업부 매각은 없던 것으로 될 테니까요.”

“결국 STB 사업부 전체를 매각하면서 묻어가는 형태로 가야 한다는 말이군요.”

“그 정도면 됩니다. 오성 전자 측에서 그 방향으로 접근한다면 제가 KM 전자 안에서 여러분과 손발을 맞추겠습니다.”

“흠.”

두 사람은 서로 시선을 마주한 후에 다시 자료를 살폈다.

특히 황광수 차장은 여전히 마음 한구석에 이는 불안을 떨치지 못했다.

‘뭐가 아닌 것 같은데, 정말 괜찮을지 모르겠어.’

* * *

최민혁은 느긋하게 임기석 부장이 진행하는 일을 지켜봤다.

질긴 김현우 상무 쪽의 움직임도 바뀌어서 바쁘게 돌아간다는 보고를 받았다.

심지어 오성 전자 쪽과 다시 만났다는 첩보까지 확인했다.

김명준 과장은 인상은 잔뜩 찌푸렸다.

“실장님, 이대로 두고 보실 겁니까?”

“두고 봐야죠. 제가 원한 그림대로 흘러가니까요.”

“네?”

예상치 못한 대답에 김명준 과장도 화들짝 놀라서 최민혁을 쳐다보았다.

“김현우 상무 성격을 겪어봤으니, 잘 알 것 아닙니까. 그 양반은 절대로 그 자리에서 물러나지 않을 겁니다. 그러니 방법을 바꾸어야죠.”

“하지만 전문가에게 자문을 구한 우영민 과장 이야기로 비디오 관련 특허는 그 가치가 가볍지 않다고 들었습니다.”

“가치가 있죠. 그래야 오성 전자가 노릴 게 아닙니까.”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과연 무슨 의미일까요?”

“실장님.”

“너무 쉽게 알면 재미없습니다. 그리고 스스로 노력해서 문제를 풀어야 그게 다 뼈가 되고, 살이 되는 겁니다.”

“알겠습니다.”

“너무 그렇게 고민하지 마세요. 답은 스스로 곧 알게 될 테니까.”

딱 이 말이 끝나기 무섭게 오혜정 비서가 곤혹스러운 얼굴로 김현우 상무가 찾아왔다는 것을 말해주었다.

최민혁은 히죽 웃으면서 당당한 걸음으로 나타난 김현우 상무를 마주했다.

“안색을 보니 요즘 컨디션이 안 좋은가 봅니다.”

“하하하, 걱정 말게. 난 최 실장 자네 덕분에 잘 지내고 있으니까.”

불과 얼마 전에는 쥐새끼처럼 도망가던 김현우 상무는 그 자리에 없었다.

“그렇습니까.”

“아, 물론. 솔직히 최 실장이 잘해준 덕분에 나 요즘 그 어느 때보다 좋아.”

“그거 다행입니다. 그런데 무슨 일로 이렇게 온 겁니까?”

“이거 커피 한 잔 안 줄 건가?”

그는 오혜정에게 지시를 내려서 커피 한 잔을 가져오게 시키고는, 도대체 김현우 상무가 무슨 말을 할지 지켜보았다.

“다름이 아니라, 나도 다시 생각해 보니 STB 사업부 구조조정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었어. 우리 KM 전자 규모에서 감당할 수가 없으니, 차라리 자본이 큰 회사라면 오히려 더 나을 수도 있으니까.”

최민혁은 마치 자신이 짠 시나리오대로 나오는 대사에 실소를 금치 못했다. 특히 김현우 상무를 벼랑 끝으로 몰아서 어쩔 수 없이 잘못된 선택을 하도록 만든 것에 크게 만족했다.

“제가 하고 싶은 말이 그거입니다.”

“그래서 말인데, 차라리 이번 기회에 STB 사업부를 매각하는 것이 어떨까?”

“정말 괜찮겠습니까?”

“날 걱정하는 건가? 걱정 말게. 난 내가 한 일에 대해서 책임을 질 테니까.”

“그렇다면 김 상무님이 이사회에서 한번 제안을 해보는 것이 어떨까요?”

“좋네. 다만 한 가지 조건이라면 STB 사업부 매출이 거의 없으니, 원천기술을 다 넘겨야 할 거야. 그래야 제 값을 받을 수 있으니까.”

“안 그래도 그럴 생각입니다.”

“고맙네.”

“천만에요.”

두 사람은 처음으로 악수까지 한 채 서로 상대를 보면서 씩 웃고 말았다.

최민혁은 유독 의미심장한 눈으로 쳐다보았다.

‘드디어 이 돼지를 정리할 수 있겠구나. 지 발로 걸어 나가는데, 최두진 사장도 어쩔 수 없겠지. 오성 이 새끼들이 그 사이에 마음을 바꾼 건가? 하긴 너희들이 원천기술이 뭔지 알고나 있겠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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