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재벌 3세는 조용히 살고 싶다-66화 (66/1,021)

#66

잔소리는 끝도 없이 이어졌다. 민기식 변호사 역시 김현우 상무에 대해서 부정적이었고, 늘 틈이 날 때면 선을 분명히 그을 것을 조언했다.

“차라리 이번 기회에 KM 전자의 지분을 정리하는 것이 어떨까요? 비자금 문제가 계속 남아 있는 이상 검찰에서도 계속 주시할 겁니다.”

“설마 세무조사라도 나와?”

“그자들은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민기식 변호사가 사람을 시켜서 조사한 자료를 내놓았다.

그중에는 고작 이십대 초반밖에 되지 않은 여자와 바람피운 장면이 나와 있었다.

최두진 사장은 자신이 너무 김현우 상무를 애지중지 키웠다는 것을 깨달았다. 서자라는 서러움을 떨쳐 버리라고 신경 쓴 것이 오히려 독이 된 것이다.

결국 다시 찾아온 김현우 상무를 냉담하게 대할 수밖에 없었다.

“이건 뭐냐?”

“아, 아니 어떻게…….”

“내가 아는 홍신소 통해서 일을 맡긴 지 고작 3일 만에 나온 결과다. 네 처가 이걸 알면 가만히 있을 것이라 생각 하냐?”

“이, 이건 분명히 음모입니다!”

“네놈 때문에 지금 내가 얼굴을 들고 다니지 못하겠다. 오죽하면 최 회장이 네놈 이름만 대도 딱 기억하겠냐?”

“그, 그건, 맞, 맞습니다, 장 실장님 그 인간이 회장님에게 거짓말을 한 겁니다. 틀림없습니다. 그자는 틈만 나면 절 쳐내려고 했습니다.”

“최 실장이 그랬다면서?”

“최, 최 실장도 있습니다. 하지만 장 실장은 오래 전부터 절 노렸습니다.”

“네놈이 회삿돈을 마음대로 탕진해서 써 먹고, 회사에 분란을 일으키니 그렇겠지. 너 같으면 그런 놈을 그냥 놔두겠어?”

“아, 아버지…….”

“나는 이미 할 만큼 했다. 더 이상은 널 도와줄 수 없어. 네가 저지른 일이니, 네가 알아서 다 정리해야 할 거다!”

“하, 하지만 KM 전자 지분은 저에게 상속한다고 했지 않습니까. 차라리 지금이라도 저에게 그 지분을 넘겨주세요. 그러면 절대로 아버지를 원망하지 않겠습니다.”

“닥쳐!”

“아, 아버지.”

김현우 상무는 그제야 최두진 사장의 얼굴이 많이 달라진 것을 깨달았다.

실제로 최두진 사장은 이 사태를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최용욱 회장과는 달리 아직 사채시장에 손을 담그고 있기에 권력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만약 그놈들이 자신을 길들이기 위해서 국세청을 동원한다면 타격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최악의 경우에 최두진 사장 집안도 그 사태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김현우 한 사람을 구하자고 불길 속에 몸을 던질 수는 없었다.

“현우야, 이제 네 나이가 몇 이냐. 이제는 너도 알아서 제 갈 길을 가야 할 거다. 차라리 적당한 선에서 물러나는 것이 훨씬 나아. 그렇게 하겠다면 내가 알아서 도와줄 수도 있다.”

“…생각해 보겠습니다.”

그는 새삼 분노로 미칠 것 같았지만 이 순간만큼은 최민혁 실장이 너무 무서워서 또 다른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

‘도대체 이 새끼가 무슨 짓을 했기에 아버지가 저런다는 말인가.’

* * *

임기석 부장의 일의 의뢰는 생각보다는 오히려 더 순탄하게 풀려갔다.

이동호 교수는 의아한 점이 많았지만 워낙에 해볼 만한 연구라서 굳이 자세한 것을 묻지 않았고, 최민혁 특허 마무리에 집중했다.

일차적인 결과를 받아본 최민혁은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웠다.

“이렇게 빨리 결과가 나오다니, 정말 대단합니다.”

보통 새로운 연구는 방향을 제대로 잡지 못하면 그 삽질만으로 6개월 날리는 것도 일도 아닌 점을 감안하면 분명한 칭찬이다.

불과 이 주 남짓한 시간에 벌써 이론과 증명까지 결과가 다 나왔으니, 당연한 평가였다.

하지만 이미 연구 방향과 이론 정립이 다 된 연구를 한 임기석 부장은 어깨를 으쓱했다.

“최 실장님이 중요한 부분을 전부 다 한 거죠. 저랑 이동호 교수 연구 팀이 한 것은 단순 노가다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정도로만 하죠.”

그는 새삼 큰 눈을 껌뻑거리는 임기석 부장을 이리저리 살폈다. 순수한 공돌이 타입으로 누구를 배신하고 말고 할 타입은 아니었다.

특히 지시한 일을 묵묵히 수행한 점을 높이 평가해야 했다.

“나머지 특허도 동일하게 진행하세요. 필요하다면 외부 연구소와 계약을 맺어서 진행하시고요. 돈은 신경 쓰지 말고, 일정만 당겨주세요.”

“하지만 비용이 꽤 적지 않게 들어갈 텐데, 괜찮을까요?”

“회사는 걱정 말아요. 아마 이번 분기에 흑자 달성도 가능할 것 같으니까.”

“저, 정말입니까?”

“그럼요.”

그리고 최민혁은 목소리를 낮추었다.

“혹시 김 상무하고 관련이 있는 연구원도 있죠?”

“네? 그, 그것은…….”

“응용 프로그램 담당인 천선구 과장이 김현우 상무를 통해서 들어온 것으로 압니다. 매사에 문제가 많은 친구죠?”

“…네.”

눈엣가시같이 성가신 천선구 과장을 모를 수가 없는 임기석 부장은 눈만 끔뻑거렸다.

“그러면 그 친구에게 출원한 특허에 관해서 슬쩍 한번 흘려 보세요. 이왕이면 일도 같이했으면 좋겠습니다.”

“네? 하, 하지만 만약 그랬다가 김 상무가 알기라도 한다면…….”

“이런, 절 완전히 바보로 아는군요. 제가 설마 그런 것까지 모르겠습니까. 다 의도한 것이 있으니, 그냥 지시에 따라주세요.”

“실장님, 정말 그 일만큼은 재고해 주십시오. 이 특허 가치를 실장님이 안다면 절대로 그런 일을 용납하지 않을 겁니다.”

‘알지. 내가 모를 수가 있나. 다 일을 쉽게 풀어가기 위한 미끼라니까. 안 그러면 거머리 같은 김현우 상무는 스스로 물러날 생각은커녕 계속 KM 전자에 달라붙으려고 할 거고, 의심 많은 오성 전자 애들이 쉽게 달려들지 않습니다.’란 말까지 최민혁이 다 할 수는 없었다.

“임 부장님!”

“네?”

“걱정하는 거 잘 압니다. 하지만 전장에서는 사령관의 지시를 받으면 무조건 따라야 하는 겁니다. 그 속에서 한번 잘 지켜보세요.”

“…알겠습니다.”

몇 번이나 말을 꺼낼까 하던 임기석 부장도 냉랭한 최민혁의 눈빛을 보자 슬그머니 입을 다물었다. 뒤늦게야 이 일도 최민혁이 지시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도대체 어쩌려고 저러는 것일까?’

* * *

천선구 과장도 김현우 상무를 옆에서 지켜보면서 크게 당황했다. 이제까지 어려운 상황이 많았지만 저렇게 패닉에 빠진 김현우 상무의 모습은 처음이었다.

그는 결국 자신이 생존하기 위해서라도 이쪽저쪽에서 정보를 얻었다.

최근 이상할 정도로 조용하던 임기석 부장이 갑자기 40명에 이른 STB 연구 팀 전원을 불러 모아서 새롭게 준비하고 있는 특허 열 가지를 소개했다.

이 특허는 단순히 그냥 특허가 아니라 이미 다른 대학 연구 팀과 같이 계약까지 체결해서 공동으로 진행하는 것이었다.

이동호 교수팀이 직접 연구소를 방문해서 구체적으로 진행되는 결과를 설명했다.

“……!”

다들 처음에는 늘 있는 일이라서 피곤한 얼굴로 설명을 들었지만 나중에 가서는 그 의미를 파악하자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아는 만큼 본다고 그들은 일반인과는 달리 STB 원천기술에 대해서 꽤 많이 연구했는데, 특히 MPEG 역시 그 하나였다.

비록 주로 아날로그 STB 분야에 대해서 연구한다고 해도 디지널 STB을 마냥 무시할 수가 없어서 따로 연구를 해왔기 때문이다.

즉 STB의 미래 성장 엔진에 대한 이 소개는 단순히 그냥 소개 수준이 아니었다.

오히려 기존 연구보다 더 발전된 형태였고, 더 완성도도 높았으며, 실제로 구현 가능성도 더 높았다.

회의실 분위기는 시장바닥처럼 시끌시끌했다.

[아니, 언제 저런 연구를 한 거야?]

[임 팀장님이 원천기술에 대한 연구를 계속해 왔던데, 그것인가 보네.]

[나도 그건 알아. 그런데 디지털 관련 MPEG 표준화에 참여한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저렇게 규모가 컸어? 연구 용역비만 해도 만만치 않잖아.]

연구 용역은 이용호 교수 외에 다른 몇 개 팀이 더 존재했다. 나머지 프로젝트 진행은 보고서만으로 올라왔지만 그 결과 역시 꽤 나왔다.

[하, 자고 일어나니, 특허가 출원했다는 소리잖아. 아니 도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불만이 많은 것은 대부분의 연구원이 저 프로젝트에 참여하지 못해서 이름을 올리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마른침을 삼킨 천선구 과장은 회의가 끝나기 무섭게 임기석 부장을 찾아가서 질문했다.

“팀장님, 도대체 어떻게 된 겁니까? 저런 연구를 한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없는데, 언제 저만큼 연구가 된 겁니까?”

이동호 교수도 지시를 받아서 정확히 얼마나 개발 기간이 걸렸는지 말하지 않았다.

임기석 부장은 그 점을 강조했다.

“중요한 원천기술이라서 별도로 관리했어. 그리고 팀장이 천 과장 자네에게 일일이 그런 것까지 다 보고를 해야 해?”

“죄송합니다.”

“나도 쓸데없는 소리를 하고 싶지 않아. 이미 연구는 막바지 단계이니, 그렇게 알아.”

“저기 그런데 상무님도 아는 겁니까?”

“이제 보고를 해야지.”

“아, 네.”

* * *

천선구 과장도 처음에는 KM 전자 주가가 바닥을 기는 것을 보자 다른 회사를 알아보면서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일단 그는 안면이 있는 기획 팀의 이정원 과장 통해서 알아보았다.

[아마 다음 달부터 흑자로 돌아설 겁니다. 회사 미래에 대해서 너무 걱정 안 해도 됩니다.]

물론 이런 언급도 잠시.

이정원 과장은 자신이 실수라도 한 것처럼 말을 숨기기에 급급했다.

이미 이상한 점을 느낀 천선구 과장은 임기석 부장의 이해하기 힘든 모습에 크게 놀랐다. 그가 아는 임기석 부장은 소심하고, 그저 위에서 시키는 일만 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천선구 과장은 즉시 김현우 상무를 찾아가서 회의 내용을 말해주었다.

어떻게 해서라도 KM 전자에 붙어 있기 위해서 몸을 사릴 구실만 찾던 김현우 상무는 결국 분노를 터뜨리고 말았다.

“뭐야? 아니, 임 부장 그 새끼가 도대체 언제 그런 연구를 한 거야?”

아마 평소였다면 임기석 부장을 불러서 열나게 갈구겠지만 지금은 최민혁 실장의 눈이 무서워서 그럴 수가 없었다.

“이놈이 설마 이런 꿍꿍이가 있다니.”

“의도적으로 상무님에게 숨긴 것이 분명합니다.”

“그렇겠지.”

김현우 상무 역시 어떻게 해서라도 임기석 부장을 쫓아내려고 고문에 가까운 폭언을 퍼부었기에 이 괴이한 상황을 나름 추측했다.

‘설마 날 쫓아내려고 수작을 부리는 건가?’

천선구 과장이 눈알을 굴리면서 자신의 추론을 말해주었다.

“최 실장하고 갈등하는 것을 뻔히 아는 상황에서 의도적으로 실적을 숨겨서 자신이 상무님을 밀어내려고 했던 것이 분명합니다. 아마 최 실장하고 사전에 결탁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 맞아. 틀림없어.”

하지만 김현우 상무는 쉽게 이 문제를 처리할 수가 없었다. 이미 임기석 부장이 최민혁 실장하고 손을 잡았다면 그 일이 충분히 진행되었을 테니까.

확인이 필요했다.

“일단 이 열 가지 특허와 같이 협업한 연구소를 찾아가서 돌아가는 상황을 확인해 봐. 출원되었다고 해도 STB 사업부 재산일 테니까.”

“알겠습니다.”

천선구 과장이 실제로 이동호 교수 연구실을 비롯해서 몇몇 다른 관련 연구소를 찾아가서 확인했지만 보안 계약 때문에 많은 것을 알지는 못했다.

다만 이 특허 소유자는 임기석 부장도 일부 있지만 대부분은 STB 사업부 소유였다.

즉 STB 사업부 명의로 해서 진행된 연구였던 것이었다.

뒤늦게 상황 파악을 한 김현우 상무는 탐욕을 쉽게 떨치지 못했다.

‘이거야. 최 실장은 몰라. 이거라면 오성 전자도 쉽게 포기하지 않을 거야!’

* * *

황광수 차장은 진행한 스카우트 실패에 연이어서 최근 데이콤 주가 폭락 때문에 오성 전자 기획실에서도 입지가 좋지 않았다.

권태성 실장이 이번 실패를 모두 황광수 차장에게 돌린 것이었다.

그나마 DL 전자에게서 데이콤 지분을 강탈해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 KM 전자랑 얽히고 나서 엉망이야.’

그런데 김현우 상무에게서 집요할 정도로 계속 전화가 왔다.

무조건 출장 핑계로 아예 외면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아예 천선구 과장이 오성 전자 본사 앞에까지 와서 자신을 기다렸다.

“제발 한 번만 만나주십시오. 정말 중요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쪽이랑 얽히기 싫습니다.”

단호하게 천선구 과장과도 선을 그었다. 또 무슨 일인지 모르겠지만 데이콤 지분과 얽혀서 입은 피해만 해도 머리가 아팠다.

DL 그룹에 압력을 넣어서 데이콤 지분을 얻기는 했지만 13만 원대까지 떨어진 데이콤 주가 때문에 하루하루가 피곤했다.

사실 누구도 데이콤 주가가 저렇게 떨어질 거라고 예상을 못 했다.

자신들이 증권가 지라시를 이용해서 헐값에 사들이고 나면, 다시 주가가 회복될 것이라 예상했다.

그런데 시장 반응은 달랐다.

데이콤의 미래를 다들 어둡게 봤다.

더 심각한 문제는, 후발 주자로 나선 LC 전자가 노골적으로 오성 전자를 지적하면서부터였다. 이들은 언론을 통해 오성 전자가 PCS 사업권에도 눈독을 들이고 있는 점을 지적하면서 대기업 독점의 폐해를 부각했다.

0